님부르크에서 태어난 기계 조립공으로, 189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06년부터 노동자 언론인이자 노동단체 간부로 일했다. 1918년부터 부다페스트에 살며 클라드노의 신문 『스보보다』의 통신원으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체코·슬로바키아 분과를 이끌었다. 헝가리 붉은군대가 슬로바키아로 진격한 뒤 프레쇼우에서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하고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이 국가는 7월 7일 체코슬로바키아군이 헝가리군을 밀어내면서 사라졌다.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헝가리에서 투옥되었다가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 넘겨졌다. 1922년 소련 시민권을 받고 소련으로 가서 국제노동자구호회 일을 맡았다. 1941년 자연사했다.
노동조합 중앙평의회를 이끌고 1948년 2월 사건 뒤 총리, 1953년 대통령이 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공산당 조직과 노동조합을 구축하고, 1948년 정권 장악 뒤 총리, 고트발트 사후 1953년 대통령이 되어 1957년까지 재임했다.
보헤미아 자콜라니 출신의 석공으로 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기에 체포되어 판크라츠 감옥과 드레스덴을 거쳐 1940년부터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해방 뒤 귀국해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의장과 공산당 간부회 위원이 되었고,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을 잠시 지냈다. 1948년 6월 대통령이 된 고트발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1953년 고트발트가 죽자 대통령이 되었다. 보다 온건한 통치를 원했으나 노보트니에게 밀렸다.
해방 뒤 첫 총리를 지내고 1948년 2월 공산당 편에 서서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친 친소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그해 말 두 당의 합병으로 당을 일당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올로모우츠 출신의 외교관으로 네덜란드·루마니아·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대사를 거쳐 전쟁 중 모스크바 주재 망명정부 대사를 지내며 소련과 가까워졌다. 1945년 4월 코시체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46년 6월까지 민족전선 정부를 이끌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로서 공산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했고, 1948년 2월 비공산당 장관들이 사임할 때 자리를 지키며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쳤고 공산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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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6코시체 정부와 해방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
1946–1947체코 사회민주당 의장을 지냈다. 1947년 11월 공산당에 지나치게 복종한다는 당내 비판으로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둡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둡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둡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1946년 1월 쿠르차토프가 그를 처음 만나 "최단기간 내에 산업용 우라늄 '보일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레잘은 이 한마디에 평생을 반응로 설계에 바쳤다.
체코계 소련 기술자로, 핵무기·원자력발전·함정추진 원자로를 모두 설계한 원자로 총설계사였다. 1946년 쿠르차토프와의 만남 이후 플루토늄 생산로 'A'를 설계해 1949년 소련 첫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고, 1954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오브닌스크 AM-1 원자로를 완성했다. NIKIET을 34년간 이끌며 VVER, RBMK, 함정용 원자로 등 소련의 모든 주요 원자로 계통의 원형을 개발했으나, 체르노빌 참사 이후 RBMK 설계 결함에 대한 책임 논란 속에 1986년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1948년 2월 쿠데타를 조직하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실무 책임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회의에서 슬란스키는 모스크바의 권력 장악 지령을 받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국제 무대에서처럼 국내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했다' — 1948년 2월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1929년 KSČ 중앙위원·정치국원이 된 후 고트발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을 이끌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 참가했다. 1945~1951년 서기장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해 1948년 2월 쿠데타의 실무를 지휘,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반국가 음모·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오니즘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이 재판은 동구권 숙청 중 가장 뚜렷한 반유대주의 성격을 띠었다. 1963년 사법 복권, 196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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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입당
1924KSČ 기관지 《루데 프라보》 편집자
1927–1928KSČ 오스트라바 지역당 서기
1928–1929KSČ 클라드노 지역당 서기
1929KSČ 중앙위원·정치국원 선출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
1939–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방송 주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둡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1968년 초, 아우에르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