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키어 하디

Keir Hardie

광부 출신으로 영국 노동당을 세우고, 반전 총파업을 주장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끝까지 반대한 사회주의자

1892년 광부 출신으로 하원에 진출한 뒤, 하디는 독립노동당과 노동당의 초기 지도자로 노동자 정치 조직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반전 운동에 나섰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부터 탄광에서 일했고, 광부 노조 조직가를 거쳐 1892년 노동자 출신 첫 하원 의원이 되었다. 1893년 독립노동당을 세우고 1906년 노동당의 첫 의회 지도자가 되었으며, 여성 참정권과 인도 자치를 지지했다. 1910년 코펜하겐 대회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군수 산업 총파업안을 제안했다. 1914년 7월 브뤼셀 사무국 회의에 참석했고, 전쟁 내내 반대하다 1915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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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1라나크셔 광부들의 첫 파업을 이끌었다.
  • 1892독립노동당 후보로 웨스트햄에서 당선되어 하원에 입성했다.
  • 1893독립노동당 창당에 참여하고 초대 의장 겸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 1906하원에서 노동당 지도자로 선출되었고 1908년 사임했다.
  • 1914–1915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운동을 벌였다.

아서 헨더슨

Arthur Henderson

영국 노동당 조직가이자 국제 군축 운동을 이끈 정치인이다.

헨더슨은 주물공으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 창립에 참여했다. 1906년 노동당을 세운 회의를 주재하고 1911년부터 1934년까지 당 서기를 맡아 당의 조직과 기반 확대를 이끌었다. 1915~1916년 교육위원회 의장, 1924년 내무장관, 1929~1931년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32년 국제연맹 군축회의 의장에 선출됐다. 군축회의가 끝내 실패했지만, 국제 협상과 군축을 위한 활동으로 193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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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노동대표위원회 창립에 참여하다
  • 1906노동당 창립 회의를 주재하다
  • 1911–1934노동당 서기로 재직하다
  • 1915–1916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재직하다
  • 1924내무장관으로 재직하다
  • 1929–1931외무장관으로 재직하다
  • 1932국제연맹 군축회의 의장에 선출되다
  • 1934노벨 평화상을 받다

램지 맥도널드

Ramsay MacDonald

1914년 전쟁공채 지지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내놓고, 뒤에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된 정치가

1914년 영국의 참전과 전쟁 지출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사임했으며, 1931년 거국 내각을 이끌어 노동당 지지를 잃었다.

스코틀랜드 로시머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노동당과 노동당의 조직가가 되었고, 1911년 노동당 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노동당이 정부의 전쟁공채를 지지하자 의장직을 사임했고, 전쟁 반대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1924년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되어 소련을 승인했고, 1929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1931년 경제 위기 속에 보수당과 거국 내각을 꾸려 노동당에서 제명되었다. 1937년 항해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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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독립노동당에 가입하고 런던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 1906레스터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1911노동당 의회그룹 의장이 되었다.
  • 1924영국 최초의 노동당 총리로 취임했다.
  • 1929두 번째 소수 노동당 정부를 이끌었으며, 실업 증가 속에 야당 지도자들을 거국 내각에 포함했다.
  • 1935거국 내각에서 사임했다.

어니스트 베빈

Ernest Bevin

노동조합에서 전후 외교로 나아간 현실주의자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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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브리스틀 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브리스틀 지부 서기
  • 1914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전국 조직가
  • 1922–1940운수·일반노동자노조 초대 전국서기장
  • 1940–1945전시 연립정부 노동·국민역무부 장관
  • 1945–1951애틀리 내각 외무장관
  • 1947조르주 비도와 유럽경제협력위원회 조직, 마셜 원조 대응 주도
  • 1949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에 기여

클레멘트 애틀리

Clement Attlee

포츠담 회담 도중에 처칠을 대체해 등장한, 말수 적은 전후 개혁의 설계자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NATO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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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55노동당 당수
  • 1940–1942국새상서 (전시 연립내각)
  • 1942–1945부총리 (전시 연립내각)
  • 1945–1951영국 총리
  • 1951–1955야당 당수

E. H. 카

E. H. Carr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영국 영국 1892–1982 ○ 자연사

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저자, 네프의 "시장과 계획의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을 진단한 역사가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 『계획경제의 기초』(1969)에서.

영국 외교관 출신 역사가로, 14권의 『소비에트 러시아사』(1950–1978)를 집필해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정치·경제·사회를 총체적으로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20년의 위기』(1939)로 현실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역사란 무엇인가』(1961)에서 역사 서술을 사실 축적이 아닌 해석의 과정으로 재정의했다. 네프에 관해 '신경제정책의 원리와 계획의 원리 사이에는 잠재적 양립불가능성이 있었다'고 진단했으며, 이는 네프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4대 역사학적 입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말년까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소비에트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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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36영국 외무부 외교관, 파리 강화회의(1919) 및 리가 대사관(1925~1929) 근무
  • 1936–1947애버리스트위스 우드로 윌슨 국제정치학 교수
  • 1941–1946『타임스』 부편집장
  • 1950–197814권 『소비에트 러시아사』 간행
  • 1953–1955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 정치학 펠로
  • 1955–1982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펠로

허버트 에바트

Herbert Vere Evatt

샌프란시스코에서 강대국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연대를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한 에바트는 '화해적 태도'로 초안을 제시했고, 6월 20일 총회 토론권 교착이 해소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치인이자 법률가로, 36세에 고등법원 최연소 판사가 되었고 이후 커틴·치플리 정부에서 검찰총장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5대 강국의 안보리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대표로 38건의 수정안을 제출했고,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해 총회 토론권을 둘러싼 교착을 해소했다. 1948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주도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심의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의장도 맡았다. 1951년 노동당 대표가 되었으나 반공 이슈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세 차례 연속 총선 패배 끝에 196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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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0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원
  • 1930–1940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 판사
  • 1941–1949검찰총장 겸 외무장관
  • 1948–1949유엔 총회 의장
  • 1951–1960노동당 대표·야당 지도자
  • 1960–1962뉴사우스웨일스 대법원장

조지 오웰

George Orwell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영국 영국 1903–1950 ○ 결핵

POUM 민병대에서 총상을 안고 돌아와 전체주의의 언어를 해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카탈루냐 찬가』,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인상: 「내가 노동계급이 안장에 올라앉은 도시에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버마 제국경찰 5년과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의 르포로 작가가 되었고, 1936년 12월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국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에 들어가 아라곤 전선에서 넉 달을 보내다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을 입었다. 요양 중 겪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뒤이은 POUM 불법화는 그를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갈라서게 했고, 그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 경험을 적은 『카탈루냐 찬가』는 출간 반년 동안 683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으며, 『동물농장』과 『1984』는 혁명이 새로운 지배로 굳는 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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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영국령 인도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아편국 관리의 아들 에릭 아서 블레어로 출생
  • 1917–1921이튼 칼리지 장학생
  • 1922–1927인도 제국경찰로 버마 근무, 제국 통치에 대한 환멸 끝에 사직
  • 1928–1932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교사·서점 점원
  • 193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출간,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36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대 취재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집필, 에일린 오쇼너시와 결혼
  • 1936.12바르셀로나 도착,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 입대
  • 1937.01–05아라곤 전선 알쿠비에레·우에스카 복무, 5월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
  • 1937.05휴가 중 바르셀로나 5월 사태를 겪으며 POUM 건물을 경비
  • 1937.06POUM 불법화 후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탈출
  • 1938『카탈루냐 찬가』 출간, 반년간 683부 판매
  • 1941–1943BBC 동방부에서 인도 대상 방송 제작
  • 1945『동물농장』 출간
  • 1949『1984』 출간
  • 1950.01.21런던의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

로더릭 맥파쿼

Roderick MacFarquhar

『문화대혁명의 기원』 3부작과 『마오의 마지막 혁명』으로 엘리트 정치를 해부한 하버드의 중국학자

1961년까지 런던에서 중국 관련 보도를 담당한 언론인이었고 중국 본토는 1972년에야 처음 방문했으며, 이후 인민공화국 건국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중국 엘리트 정치를 연구했다.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 언론인과 노동당 하원의원을 거쳐 학자가 되었고 『차이나 쿼털리』를 창간해 편집했다. 1974년부터 1997년까지 낸 『문화대혁명의 기원』 3부작은 1956년 백화제방부터 1966년까지 최고 지도부 안의 노선 대립을 추적해 문화대혁명이 마오 개인의 변덕이 아니라 대약진 운동 실패 이후 누적된 정치적 갈등의 귀결임을 보였다. 2006년 마이클 쇤할스와 쓴 『마오의 마지막 혁명』은 1966~1976년 전체를 다룬 표준적 서술이다. 하버드대학 교수와 페어뱅크센터 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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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1979영국 노동당 하원의원 (벨퍼)
  • 1984–2019하버드대학 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