Акмеизм · 1910년대–1920년대 초

아크메이즘

Acmeism

1910년대 러시아 시의 사조로, 상징주의의 모호함에 반발해 언어의 정확성과 구체적 사물성, 시적 장인정신을 내세웠다. 명칭은 그리스어 아크메(ἀκμή, 절정)에서 왔고,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세르게이 고로데츠키가 1912년 무렵 내세웠으며 안나 아흐마토바와 오시프 만델슈탐이 핵심이었다. 운동의 해체는 1914–1922년 시인 길드의 해산과 세대 교체로 설명되고, 활동가 개인에 대한 탄압은 별개다.

상세

정의

아크메이즘(Акмеизм)은 러시아 시의 1910년대 사조다. 아크메이스트들은 물질성, 주제와 이미지의 대상성, 단어의 정확성을 내세웠고, 스스로를 '구체성의 숭배', '정확히 측정되고 저울질된 단어들의 예술'로 규정했다.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 ἀκμή('무엇인가의 꽃/절정')에서 유래한다. 영어권 자료는 운동의 등장을 1911년 무렵 또는 1912년으로 잡으며, 형식의 압축성과 표현의 명료성을 이상으로 삼았다고 정리한다. 중심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그라드)였다.

역사

조직적 기원

형성은 '시인 길드(Цех поэтов)'와 밀접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같은 이름 모임이 3차례 있었다. 제1차 시인 길드는 1911년 구밀료프와 고로데츠키가 창설해 1914년까지 존속했고 첫 회합은 1911년 10월 20일 고로데츠키의 집에서 열렸다. 명칭은 중세 유럽 직인 조합을 본떠 시를 직업·장인 기술로 보는 태도를 강조했고, 우두머리는 '신디크(синдик)'라 불렸으며 공식 신디크는 구밀료프·고로데츠키·드미트리 쿠즈민-카라바예프 3인이었다. 길드는 참여자 시집을 냈고 기관지 『히페르보레이』와 『아폴론』에 회원들의 시와 글이 실렸다.

길드 참여자들은 처음에는 특정 문학 유파와 자신들을 동일시하지 않았고 공통 미학 강령도 추구하지 않았으나 1912년 스스로를 아크메이스트라 선언했다. 구성원에는 아흐마토바(길드 비서), 만델슈탐, 젠케비치, 나르부트, 쿠즈미나-카라바예바, 로진스키, 바실리 기피우스, 마리야 모라프스카야, 베라 게드로이츠가 있었고 초기에는 쿠즈민·퍄스트·알렉세이 톨스토이도 있었다. 동시대인들은 길드 창설을 조롱하기도 했다.

강령 공표

아크메이즘의 강령은 1912년 12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바레 '브로댜차야 소바카(Бродячая собака)'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 '아크메이즘'이라는 용어는 1912년 구밀료프와 고로데츠키가 내세웠으며, 그들에 따르면 위기를 겪는 상징주의를 대신해 선배들의 경험을 종합하고 시인을 새로운 창조적 정점으로 이끄는 사조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명칭과 어원의 불확정성

안드레이 벨리에 따르면 이 명칭은 논쟁 도중 선택되어 충분히 근거 있는 것이 아니었고, 뱌체슬라프 이바노프가 '아크메이즘'과 '아다미즘(адамизм)'을 농담조로 언급하자 구밀료프가 우연히 던져진 말을 받아 자신과 가까운 시인들을 '아크메이스트'라 불렀다. 동시대인들은 다른 해석도 내놓았다. 블라디미르 퍄스트는 아크메이즘의 기원을 안나 아흐마토바의 필명(라틴어 akmatus처럼 들림)에서 찾았고, 일부는 그리스어 ἀκμή('날카로움')와의 연관을 지적했다. 어원사전(Шанский)은 1912년 구밀료프가 만든 신조어로 본다.

특징과 계보

러시아어 출처는 아크메이즘의 특징을 개별 사물과 모든 생활 현상의 자기목적적 가치, 인간 본성을 고양하는 예술의 사명, 불완전한 생활 현상의 예술적 변환 추구로 정리한다. 분위기는 미하일 쿠즈민이 1910년 발표한 에세이 '아름다운 명료성에 관하여'에서 처음 표명되었다. 아크메이스트들은 『아폴론』지 이름이 시사하듯 '아폴론적 명료함'의 이상을 상징주의자들이 설파한 '디오니소스적 열광'에 대립시켰고, '상징을 통한 암시' 대신 '이미지를 통한 직접 표현'을 선호했다. 만델슈탐은 이 운동을 '세계 문화에 대한 갈망'으로 규정했고, '신고전주의적 모더니즘'으로서 포프·고티에·키플링·안넨스키·파르나스파 시인들을 선구자로 놓았다.

운동은 구밀료프(「상징주의의 유산과 아크메이즘」, 1913), 고로데츠키(「현대 러시아 시의 몇몇 조류」, 1913), 만델슈탐(「아크메이즘의 아침」, 1919년 출간)의 이론 작업과 아흐마토바·젠케비치·게오르기 이바노프·쿠즈미나-카라바예바의 창작 관행 속에서 확립되었다.

기관

『히페르보레이』는 시인 길드의 '월간 시와 비평(Ежемесячник стихов и критики)'지로 1912–1913년 총 10호(마지막 호는 합본)가 발행되었다. 창간은 고로데츠키와 구밀료프가 주도했고 발행인·편집인은 시인이자 번역가인 미하일 로진스키였다. 제호는 그리스 신화의 '히페르보레이인'에서 왔고, 따라서 제호 자체가 아크메이즘 강령의 선언이었다. 1914년 출판사 '히페르보레이'로 전환되어 1918년까지 존속했다.

해체와 분화

제1차 길드는 1914년 4월 해체되었고, 제2차는 1916–17년 이바노프와 아다모비치 주도로 아크메이즘에 집중하지 않았으며, 제3차는 1920년 시작되어 구밀료프, 이후 아다모비치가 이끌며 2년간 존속했다(알마나크 3권 발행, 첫 권 『Дракон』, 1921). 참여자들의 이주 후 베를린(1923년 페트로그라드 알마낙 3권 재판·제4권 출간)·파리에서 같은 이름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티플리스에서는 1918년 4월 11일 고로데츠키가 창설해 약 4년간 존속했으며(약 30명, 1919년 알마나크 『АКМЭ』), 바쿠에서는 1920년 1년 미만 존속했다. 모스크바 모임은 1924–25년이었고 1925년 시집 『Стык』을 냈다.

탄압과 상이한 운명

소비에트 정권은 아크메이스트들을 형식에 대한 집착과 '상아탑적 초연함' 때문에 의심했다. 니콜라이 구밀료프는 1921년 8월 3일 '타간체프 페트로그라드 전투조직' 음모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페트로그라드 구치카는 8월 24일 음모 참가자 61명에 대한 총살 결정을 내렸고 9월 1일 이미 집행되었다고 발표했으며, 2014년 기록연구자들이 구밀료프와 나머지 56명이 8월 26일 밤에 총살된 것으로 확정했다(정보상자에는 8월 25일설도 병기). 처형지와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어 출처는 음모에의 적극 가담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1991년 9월 30일 소련 최고법원 결정으로 사후 복권되었다고 밝힌다.

아흐마토바는 생애의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함구를 강요당했고, 만델슈탐은 시베리아 노동수용소에서 또는 그곳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고 브리태니커는 서술한다. 반면 고로데츠키는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걸었다.

구분

상징주의와의 관계

아크메이즘은 상징주의의 신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으나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다. 구밀료프·아흐마토바·만델슈탐은 상징주의의 모호함을 거부하면서도 신화·성서적 인물을 시에 통합하는 상징주의 전통은 이어갔다. 시간에 대한 인식도 특징적이어서, 아크메이스트들에게 시간은 투명하여 과거·현재·미래가 그들의 시행에서 만났고 헬레니즘 시대가 20세기 러시아로 침투해 들어왔다.

내부 스타일 차이

아크메이스트 시인들 사이에서도 스타일 해석이 달랐다. 아흐마토바는 사랑과 관계를 다룬 친밀한 서정시를, 구밀료프는 서사시를 썼다. 즉 아크메이즘은 '스타일의 다양성'으로도 이해된다. 주요 시인으로는 만델슈탐, 구밀료프, 쿠즈민, 아흐마토바, 게오르기 이바노프가 꼽힌다.

인접 유파

아크메이즘은 후대·인접 유파와 구분되어야 한다. 영어 위키백과 '같이 보기'는 타간체프 음모, 이마지니즘(Imaginism), 이미지즘(Imagism), 상징주의를 함께 제시한다. 이마지니즘은 1918–1925년의 러시아 시 문학 결사로, 1918년 모스크바에서 마리엔호프·셰르셰네비치·예세닌 등이 결성하고(명칭은 이미지즘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음) 1919년 1월 강령을 발표했으며 1925년 해체, 1927년 공식 청산되었다. 이는 영미권 이미지즘과도 별개다.

예시

만델슈탐의 『돌(Камень)』

『돌』은 만델슈탐의 첫 시집으로 1913년 출간되었고 1916·1923년에 재판되었다(재판본들은 사실상 각기 다른 시집). 1913년 초판은 페테르부르크 출판사 'Акмэ'에서 자비로 소량(300부) 발행되었고 원래 제목은 『라코비나(Раковина)』였으며 1909–1913년 작품 23편을 실었고, 동료 아크메이스트 고로데츠키·나르부트·구밀료프가 서평을 썼다. 2판은 1915년 12월(표지에는 이듬해) 『히페르보레이』에서 1,000부, 67편으로, 3판은 1923년 7월 고시즈다트에서 3,000부, 76편으로 나왔다. 브리태니커와 Poetry Foundation도 첫 시집 『돌』을 1913년으로 기록하므로, 영어 위키백과의 『돌』(1912) '운동의 최고 성취' 표기는 단독 주장이며 오류 가능성이 있다. 만델슈탐은 1911년 11월부터 시인 길드 회합에 정규 참여했고 1914년 10월 21일 임시 신디크로 선출되었으며 1912년 말 아크메이스트 그룹에 합류했다.

아흐마토바

아흐마토바(1889년 6월 11일(23일) 오데사 출생 – 1966년 3월 5일 모스크바주 도모데도보 사망)는 러시아·소비에트 시인이자 러시아 시의 고전이 되었다. 1911년부터 '안나 아흐마토바'之名으로 발표했고 1912년 3월 시집 『저녁(Вечер)』(시인 길드 출판, 300부), 1914년 봄 『묵주(Чётки)』(히페르보레이 출판, 1,000부)를 내며 아크메이즘의 대표 시인이 되었다. 1922년부터 그녀의 책에는 검열 교정이 가해졌고, 1925–1939년 및 1946–1955년에는 시가 인쇄되지 않았으나 1950년 연작 「세계에 영광을!(Слава миру!)」 수록시는 예외였으며 1955년에야 시가 다시 인쇄되기 시작했다. 1946년 8월 14일자 볼셰비키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결정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에 관하여」는 그녀를 '우리 인민에게 이질적인 공허하고 무사상적인 시의 전형적 대표자'로 비판했고, 이 결정은 1988년 10월 20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오류로 철회되었다. 대표작 『레퀴엠』(1935–1940)은 '인민의 적'의 아내와 어머니들의 슬픔을 담았고 오랫동안 출판되지 못하고 사미즈다트로 유통되다 1963년 뮌헨에서, 1987년 소련에서 출간되었다.

만델슈탐

오시프 만델슈탐(출생명 Иосеф Хацкелевич)은 1891년 1월 2일(신력 14일)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38년 12월 27일 블라디보스토크 이송수용소 'Владперпункт'에서 사망했다. 1934년 5월 첫 체포 후 체르디니로 유형되었고, 1938년 5월 2일 재체포되어 8월 2일 특별회의에서 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아 9월 8일 극동으로 이송되었다. 스탈린 탄압의 희생자였고 1938년 사건은 1956년, 1934년 사건은 1987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무덤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5월 2일(야간) 사마티하 요양소에서 재체포되어 부티르카로 이송되었고, 7월 20일 기소 결론이 승인되었으며 8월 2일 특별회의가 형을 선고했다. 시신은 봄까지 미매장 상태로 있다가 공동묘지에 묻혔고, 잠정 매장지는 블라디보스토크 구시가지의 옛 크레포스트노이 로프(사프료르카 강변) 일대이며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로데츠키: 반도식적 사례

세르게이 고로데츠키(1884년 1월 5일(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 1967년 6월 7일 오브닌스크 사망; 원출처는 6월 8일설도 병기)는 러시아·소비에트 시인이자 번역가·교육자였다. 1910년대에 상징주의자들과 결별하고 1912년 구밀료프와 함께 시인 길드의 조직자가 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걸었고(사회주의 리얼리즘, 당 대회·우주비행사 예찬 시 등) 1967년 사망했다. 이는 '운동 구성원 다수가 탄압받았다'는 단순 도식을 반박하는 사례다.

쿠즈민

미하일 쿠즈민(1872년 10월 6일(18일) 야로슬라블 출생 – 1936년 3월 1일 레닌그라드 사망, 리테라토르스키에 모스키 묘지 안장)은 러시아 작가·시인·번역가·편집자·작곡가로 은세기 페테르부르크 문학계의 인물이었다. 1910년 에세이 '아름다운 명료성에 관하여'로 아크메이즘의 선행 강령을 제시했고 시인 길드와 『히페르보레이』에 참여했다.

관계

시인 길드는 1912년 아크메이즘 강령을 공표한 모체 조직으로, 중심 인물은 구밀료프, 아흐마토바(길드 비서), 고로데츠키였고, 길드의 『히페르보레이』(1912–1913)와 『아폴론』(1909–1917)에 회원들의 시와 글이 실렸다. 아크메이즘과 관련된 인물로는 구밀료프, 고로데츠키, 미하일 쿠즈민, 안나 아흐마토바, 오시프 만델슈탐, 게오르기 이바노프, 미하일 젠케비치, 엘리자베타 쿠즈미나-카라바예바, 블라디미르 나르부트, 미하일 로진스키 등이 있다.

시인 길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외에 모스크바(1924–1925), 티플리스(1918.4.11–약 1922), 바쿠(1920, 1년 미만), 그리고 이주 후 베를린·파리에 같은 이름의 모임을 남겼고, 이는 아크메이즘 조직망의 지리적 확장과 이주 후 분화를 보여준다. 티플리스 길드에는 약 30명의 시인이 있었고 후에 스스로를 아크메이스트적이라 선언해 일부가 탈퇴했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Acmeism emerged c. 1911–1912 under Gumilev and Gorodetsky, emphasizing compactness of form and clarity of expression; key poets included Mandelstam, Gumilev, Akhmatova, Kuzmin, Ivanov.
  2. 위키백과 (러시아어) The program was first publicly announced on 19 December 1912 at the Stray Dog cabaret in Petersburg; the term was advanced in 1912 by Gumilev and Gorodetsky as a direction succeeding Symbolism.
  3. sites.ualberta.ca University of Alberta Silver Age of Russian Poetry project: the Acmeists reacted against Symbolism to 'bring the art form back down to earth,' treating poets as skilled human beings rather than prophets; key poets were Gumilev, Akhmatova, and Mandelstam.
  4. 위키백과 (러시아어)
  5. 위키백과 (영문)
  6. britannica.com
  7. sites.ualbert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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