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의 자력갱생과 계획경제
Albanian autarky and planning
자력갱생(autarky)은 국가와 그 경제체제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을 이루는 성질을 가리킨다. 알바니아에서는 이를 ‘자력갱생 원칙에 기초한 사회주의 건설’로 공식 규정했고, 1972년 중국 원조가 줄어든 뒤 엄격한 자력갱생 노선을 채택했다. 1976년 인민의회는 자본주의 진영으로부터 차관이나 신용을 받거나 합작회사를 세우는 것을 헌법으로 금지했다.
상세
자력갱생 노선의 형성
알바니아의 자력갱생 계획경제는 처음부터 순수한 자급이 아니라 원조 통로를 바꾸는 과정에 기초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신용이 1947~48년 국가예산의 상당 부분을 댔고, 1948년 결렬 뒤에는 소련이 주된 원조원이 되었다. 알바니아는 1949년 코메콘에 가입하고 1951년 첫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1961년 소련과 결렬한 뒤에는 중국이 들어와 소련이 약속했던 부품·식료품 등의 약 90퍼센트를 공급했다.
1972년 중국 원조가 줄면서 엄격한 자력갱생 노선이 채택됐고, 1976년 헌법은 자본주의적 차관·신용 수용과 합작회사 설립을 금지해 자력갱생을 법으로 굳혔다.
1978년 이후의 고립과 대응
1978년 7월 중국은 알바니아에 대한 경제원조를 전면 중단했다. 이로써 알바니아 수입의 절반을 대던 원천이 사라졌고, 정부는 수출을 늘려 경화를 벌어들이는 길을 택했다. 결렬 직전 계획당국은 경화 획득의 네 축인 석유·크롬철광·구리·전력의 생산과 수출을 급속히 늘리도록 지시했고, 1976~1980년 수출은 이전 5개년 기간보다 33퍼센트 늘었다. 1977~1981년에는 순물질생산의 약 2퍼센트를 투자해 수천 개의 조립식 시멘트 벙커를 세웠다.
식량 수입 의존을 끊기 위해 각 구는 식량 자급을 요구받았고, 농촌 임금을 상대적으로 높였으며, 농촌 인구의 이동 제한을 강화하고 집단농장원의 개인 경작지를 줄였다. 농민이 도시에서 농산물을 파는 것도 단속했다. 1981년 말 저지대의 사적 축산을, 고지대의 모든 염소와 양을 집단화하자 농민들이 가축을 대거 도살했고 곧 도시에 육류·유제품 부족이 닥쳤다. 지도부 자신의 사후 검토도 농업의 전면 사회화 시도가 실패했고 축산 집단화가 큰 실책이었다고 인정했다.
계획경제의 한계
자력갱생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제7차 5개년 계획(1981~85) 기간에 생산성 증가가 계속 떨어졌고, 1981~88년 연평균 순물질생산 증가율은 1.7퍼센트로 인구 증가율 2퍼센트를 밑돌았다. 순물질생산은 1984·1985·1987·1988년에 줄었고 1986~1990년에는 1.4퍼센트 감소했다. 1983~88년 5년간의 가뭄은 농업과 수력 발전을 후퇴시켰고, 임금 고정과 상품 부족은 억압적 인플레이션과 강제 저축을 낳았다. 적자 기업은 국가에 구제를 요청했다.
호자는 1983년부터 반퇴하고 1985년 4월 사망했다. 1982년 11월 인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이 된 라미즈 알리아가 점차 의사결정을 넘겨받았다. 1986년에도 알바니아 노동당은 중앙계획을 전면 지지했고, 제8차 5개년 계획(1986~90)은 국민소득 35퍼센트, 공업생산 30퍼센트, 농업생산 35퍼센트, 수출 44퍼센트 증대를 목표로 삼았다. 헌법상 대외 차관 금지 때문에 1980년대 후반 티라나는 이를 우회하는 ‘위장된 형태의 개발원조’를 추구했다.
1990~1991년 개혁과 붕괴
1989년 9월 알리아는 사회주의 공동소유 약화나 사유재산·자본주의적 착취로의 회귀는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고용 보장이 사라질 수 있다는 신호도 보냈다. 1990년 1월 제9차 전원회의 강령은 기업을 재정적으로 독립시키고 장기 은행신용으로 보조금을 대체하며, 노동자가 관리자를 선출·해임하고, 임금을 계획 달성과 이윤에 연동하고, 사치품 가격을 수급에 맡기고, 농업협동조합이 도시에서 자기 가격으로 식품을 팔도록 했다. 개인 경작지는 약 0.2헥타르로 늘리고 가축은 농민에게 돌려주었다. 개혁은 너무 늦었다. 1991년 중반에는 생산능력의 4분의 1만 가동됐고 3분기 공업생산은 1990년 동기보다 60퍼센트 낮았다. 대외채무는 1989년 말 9,600만 달러, 1990년 말 2억 5,400만 달러에서 약 3억 5,400만 달러로 늘었고, 정부는 유휴 노동자 임금의 80퍼센트를 무담보 화폐로 지급해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구별점
자력갱생을 이념·전략으로서와 결과로서 구별해야 한다. 1978년 이후의 자력갱생 노선이 무역의 자급을 뜻한 것은 아니었다. 경화 획득이 제한적이고 동유럽이 알바니아의 품질 낮은 상품과 물물교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소련권으로부터의 수입은 서방으로부터의 수입보다 빠르게 늘었다. 1985년 이후 알바니아는 수출을 13퍼센트 늘렸는데 소련권과 선진 서방에 거의 같은 비중으로 늘렸고 서방으로부터의 구매는 약 15퍼센트 줄었다. 1976년 헌법의 차관 금지 때문에 티라나는 후반에 우회적 개발원조를 모색했으며, 유럽에서 유일하게 CSCE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로 남았다. 선언된 자력갱생은 서방의 설비·훈련·기술을 실용적으로 찾는 것과 공존했다. 목표 자체가 외부 차단의 조건에서 국가가 자본 조직 기능을 흡수한 형태였고, 선언과 실제 수입 의존은 다르게 읽어야 한다.
사례
1976년 헌법의 자본주의적 차관·신용 금지는 자력갱생을 법으로 굳힌 대표적 조치다. 1977~1981년 벙커 건설은 순물질생산의 약 2퍼센트를 군사적 목적에 묶은 사업이다. 1981년 말 저지대 사적 축산 집단화는 가축 대량 도살과 도시의 육류·유제품 부족으로 이어져 정책이 재난으로 끝난 사례가 됐다. 임금 고정과 상품 부족 속의 억압적 인플레이션과 강제 저축, 적자 기업의 국가 구제 요청은 자력갱생 경제의 모순을 보여준다. 1990년 개혁 뒤에는 일부 기업이 보너스를 올리려 생산목표를 낮추고, 다른 기업은 벌칙을 피하려 손실을 미리 계획하는 역효과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