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러시아 민주회의
All-Russian Democratic Conference
1917년 9월 14일–22일(구력)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회의.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와 농민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의 전국적 위기를 수습하고 임시정부를 강화할 목적으로 소집했으나, 새 정부 구성을 둘러싼 표결이 서로 모순되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회의는 카데트 참여 연립을 허용하는 결의를 통과시켰고, 볼셰비키는 항의하며 퇴장했다. 실질적 산물은 임시정부 자문기관 예비의회였으며, 레닌은 회의 참가 자체를 과오로 규정하고 보이콧을 요구했다.
상세
배경
1917년 8월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란 진압 이후, 생도당(카데트)을 포함한 기존 연립정부는 붕괴되었다. 9월 1일(구력)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5인 디렉토리아(집정부)가 임시로 구성되었으나 정통성은 취약했다. 이에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장 니콜라이 치헤이제)와 전러시아 농민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장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는 9월 3일 연석회의에서 '전 조직화된 러시아 민주주의의 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8월 모스크바 국사회의에 맞서는 성격을 띠었다. 초청장은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뭉친 혁명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협동조합, 젬스트보, 군대 위원회, 시 두마 등에도 발송되어 권력 문제를 결정하고 위기의 출구를 모색하는 것이 목표로 제시되었다.
목적을 두고 주도 세력 내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멘셰비키 표도르 단은 부르주아지를 배제한 동질적 민주정부 수립을, 같은 당의 이라클리 체레텔리는 동질적 민주정부는 존속하기 어렵다며 제헌의회까지 임시정부가 책임질 대표기관 창설을 각각 강조했다. 카데트 지도자 파벨 밀류코프는 이 회의가 정부보다 상위에 서게 되었고 체레텔리의 구상이 본질적으로 레닌과 트로츠키의 계획에 대한 완전한 항복이라고 논평했고, 트로츠키는 반대로 그 구상이 소비에트 권력을 향한 볼셰비키의 투쟁을 무력화하고 타협주의자들이 인위적 표 배분으로 확실한 다수를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구성과 진행
러시아어판에 따르면 회의는 9월 12일(25일) 개막 예정이었으나 대의원 1,000명 이상이 도착한 뒤인 9월 14일(27일)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늦게 개막했다. 영어판은 예정일을 9월 25일, 개막일을 9월 27일로 적어 개막 예정일을 달리 전한다. 의장에는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가 선출되었다. 이즈베스티야에 따르면 총 1,582명의 대의원이 참가했으며,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230명, 농민 소비에트 230명, 노동조합 100명, 시 자치 300명, 젬스트보 200명, 군·해군 조직 125명, 일반 협동조합 120명, 노동 협동조합 38명, 민족 조직 60명, 카자크 조직 35명 등이었다. 정파별로는 사회혁명당(에스에르) 532명, 멘셰비키 172명, 볼셰비키 136명, 노동인민사회당 55명, 기타 민족 사회주의 정당 28명, 우크라이나 에스에르 23명, 번트 15명이었고 400명은 무소속으로 등록되었다. 초청 인사로는 임시정부 장관들(니키틴, 베르호프스키, 베르데레프스키, 그보즈데프)과 연합국 외교단이 참석했다.
핵심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새 정부가 동질적 민주정부여야 하는가, 아니면 코르닐로프와의 연루를 의심받던 카데트를 포함한 연립이어야 하는가였다. 표결은 서로 상쇄되어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부르주아지와의 연립에 다수가 찬성하는 동시에 유일한 실질적 부르주아 정당인 카데트를 배제한 연립에도 다수가 찬성했다. 결국 체레텔리와 케렌스키의 연설에 영향받아 카데트 참여 연립을 허용하는 결의가 채택되었고, 볼셰비키는 항의하며 퇴장했다.
둘째, 대표기관인 예비의회(전러시아 민주평의회)의 창설이었다. 초안은 예비의회 창설과 카데트 참여를 지지하며 임시정부의 예비의회 책임을 명시했으나, 최종 결의에서 그 책임 조항은 사라졌다. 9월 20일(10월 3일) 회의 간부회의에서 전러시아 민주평의회(예비의회)가 구성되었고, 임시정부가 '유자격 기관'(카데트, 상공업 단체 등) 대표를 추가하면서 볼셰비키는 555석 중 58석만 받았다. 예비의회는 정부 구성을 추인하고 이후 자문기관 역할을 하는 기구로 바뀌었다.
레닌의 대응과 역사적 의미
예비의회 참가 문제는 회의 자체에서 볼셰비키를 '우파'와 '좌파'로 갈랐다. 레프 카메네프가 이끄는 우파는 의회에서 혁명의 평화적 발전 가능성을 찾으려 했고,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파는 이 대표기관이 상층에서 조립되어 실제 역량 관계를 반영하지 않으며 민중의 의지를 대체하고 개혁도 전쟁 종결도 할 수 없는 정부를 떠받치기 위한 것이라며 참여가 곧 임시정부 지지라고 보았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표결은 팽팽했고, 9월 20일(10월 3일) 당 분파와 페트로그라드 위원회가 함께한 회의에서 보이콧 지지자는 소수(50 대 77)였다. 은신 중이던 레닌은 9월 22일–24일 작성한 「정론가의 수기에서 — 우리 당의 오류」에서 당이 회의에 참가한 것을 과오라 하고 보이콧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 뷸리긴 두마 보이콧의 성공과 1907년 제3두마 보이콧의 실패를 비교 사례로 들면서, 예비의회는 대중을 속여 혁명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보나파르트적 사기극이라 규정하고 '케렌스키와 그의 가짜 예비의회라는 보나파르트 패거리를 해산하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레닌이 보이콧 논의를 알게 된 9월 23일(10월 6일) 이후 트로츠키는 레닌의 지지를 받았고, 레닌은 9월 29일(10월 12일) 참가 결정을 '수치스러운' '명백한 실수'라고 불렀다. 영어판은 보이콧 표결과 레닌의 비판 시점을 각각 1917년 10월 3일과 10월 12일로 적는다.
10월 7일(20일) 예비의회 개원일에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분파를 대표해, 공개적·비밀스러운 코르닐로프 분자들이 주도하는 권력이 만들어졌고 '유자격 요소'들이 정당한 몫을 넘겨 받았으며 '국민을 배반한 이 정부와 우리는 아무 공통점도 없다'는 선언을 낭독한 뒤 퇴장했다. 최종 결과는 한쪽으로는 새로운 중도 연립정부의 수립, 다른 쪽으로는 볼셰비키가 보이콧한 예비의회의 창설이었다. 회의와 예비의회의 권한은 우파(카데트 및 그보다 오른쪽)와 좌파(볼셰비키, 좌파 에스에르, 좌파 멘셰비키) 양쪽에서 의심받았고, 소집을 주도한 우파 사회주의자들도 만족하지 못했다. 표도르 단은 민주회의에서 민주정부가 나오지 않았고 '연립정부조차 아닌 어떤 연립 놈'만 나왔다고 회고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full article on the Conference, its background, composition, proceedings, and outcomes.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parallel article with delegate breakdown, voting conflicts, and the Pre-Parliament creation.
- prlib.ru Presidential Library of Russia: detailed account of the Conference's convocation, delegate composition, voting contradictions on coalition question, and the walkout by Bolsheviks.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Lenin, 'From a Publicist's Diary — The Mistakes of Our Party' (September 22-24, 1917): direct source for Lenin's denunciation of the Conference and Pre-Parliament as a trap, calling Bolshevik participation a 'shameful' and 'blatant mistake.'
- megabook.ru Megabook / Kirill & Mefody Encyclopedia: concise entry confirming the Conference's deadlock and its delegation of functions to the Pre-Parliament.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megabook.ru
- prlib.ru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