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베리아 원정군
American Expeditionary Force, Siberia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극동에 파견된 미국 육군 부대. 윌리엄 S. 그레이브스 소장이 지휘했고 병력은 7,950명(다른 집계로 8,763명)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과 미국이 보낸 군수물자·철도 차량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부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일부 구간을 지키다가 1920년 4월 1일 마지막 병력이 떠났다.
상세
윌슨이 파병을 결정한 이유는 군사적인 것만큼 외교적인 것이기도 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발이 묶인 4만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구출하고, 미국이 러시아에 보낸 대량의 군수물자와 철도 차량을 지키며, 러시아인 스스로의 자치와 자위 노력을 「안정시킨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카자크 약탈자나 일본군이 철도와 자원 지대의 혼란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원정군은 미 육군 제27·제31 보병연대와 제8사단 출신 지원병으로 이루어졌다. 첫 3천 명이 1918년 8월 15~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렸고, 그레이브스는 9월 4일에야 도착했다. 연합국 철도 협정에 따라 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까지, 그리고 베르흐네우딘스크 부근 구간을 지켰고, 철도 운영을 위해 미국인으로 러시아 철도 봉사단을 꾸렸다.
그레이브스는 임무가 미국 물자를 보호하고 군단의 철수를 돕는 데 그치며 볼셰비키와 싸우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러시아 내정 불간섭」과 「완전 중립」을 선언했고, 더 적극적인 개입을 바라는 영국·프랑스·일본 지휘관들과 자주 부딪혔다. 미군 구역에서는 붉은 파르티잔을 막지 않았고 수찬 탄광 노동자들의 집회도 허용했다. 러시아어 문헌은 그 결과 연해주에 수천 명 규모의 붉은 세력이 자랐고, 일본 쪽에 기운 아타만 세묘노프가 그레이브스를 붉은 쪽 지원자로 비난했다고 쓴다. 병사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연료와 탄약, 식량이 모자랐고, 수랭식 기관총은 얼어붙었다. 19개월 동안 189명이 죽었다. 미국 문헌은 이 개입이 모든 기준에서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동부 전선은 되살아나지 않았고 물자도 지키지 못했으며 비공산주의 정부도 세워지지 않았고, 군단의 철수조차 원정군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미 육군 참모총장 페이턴 마치는 러시아 원정을 「군사적 범죄」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