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nationale antiautoritaire · 1872–1881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

Anti-authoritarian International

1872년 9월 15~16일 생티미에 대회에서 출발한 국제 조직으로, 같은 해 헤이그 대회에서 바쿠닌과 기욤이 제명된 데 반발한 연합체들이 세웠다. 스스로를 국제노동자협회의 정통 계승자로 여겼고, 총평의회 같은 중앙 기구를 부정하며 각 연합체의 자율을 원칙으로 삼았다. 정당과 선거 대신 경제적 직접행동을 내세웠다. 조직은 대체로 1881년까지로 보며 1880년 마지막 대회와 1881년 런던 대회에서 가시적 조직이 해체되었다. 1877년 베르비에 대회를 사실상의 종점으로 보는 서술도 병존한다.

상세

왜 따로 모였나

1872년 9월 15~16일, 헤이그 대회(9월 2~7일)가 바쿠닌과 기욤을 제명한 지 얼마 뒤, 스위스 쥐라 연합의 주도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쥐라 연합에서 온 대의원 열다섯 명이 생티미에에 모였다. 이 대회가 역사 서술에서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의 출발점으로 불린다. 대의원들은 헤이그 대회의 결의, 곧 바쿠닌의 제명과 정치투쟁의 의무화를 무효로 선언하고, 자유로운 연합체들 사이의 우정·연대·상호방위 협정을 채택했다. 이들은 새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제노동자협회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다만 초기에는 순수한 아나키스트 조직이 아니었다. 대의원들은 세 가지 반정치주의 테제보다 연방 협정 자체에 관심이 있었고, 기욤이 바쿠닌을 설득해 순수 아나키스트 인터내셔널로는 다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사회주의자들에게 문을 열어 두었다. 코뮌 참가자였던 귀스타브 르프랑세가 미국 조직의 대의원으로 참여한 것이 그 예다.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사이의 논쟁은 적어도 1873~1874년까지 이어졌다.

무엇을 주장했나

가장 널리 인용되는 생티미에 정치 결의는 모든 정치권력의 파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의무라고 선언했다. 잠정적이고 혁명적인 정치권력이라는 명목의 어떤 조직도 또 하나의 기만이며 기존 정부만큼 위험하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모든 부르주아 정치의 밖에서 혁명적 행동의 연대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협회의 정당한 계승을 자처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인터내셔널(1872~1876)과의 차이는 조직과 강령 양쪽에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총평의회가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인터내셔널을 원한 반면, 반권위주의자들은 각국·지역 연합체의 강한 자율과 단순한 조정 기구로서의 총평의회라는 원래 규약을 고수했다. 이론적 분열은 국가 문제에서 결정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도기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 국가를 유지해야 한다고 본 반면, 바쿠닌은 그 과도기를 심각하게 문제 삼으며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대회와 진압

협회는 런던에서 1864년에 창설된 국제노동자협회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1873년 9월 1일 제네바에서 두 번째 대회를 열었다. 영국,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에서 대의원이 참석했고, 미국 연합이 가입을 통고했다. 제네바 대회는 총평의회 해산에 합의하고 혁명 수단으로서 총파업과 생디칼리슴적 행동을 논의했다. 이후 대회는 브뤼셀(1874년 9월 7~12일), 베른(1876년 9월 26~29일), 베르비에(1877년 9월 6~8일)로 이어졌다. 연도 표기에 관해서는 브뤼셀 1874년 9월 7~13일, 베른 1876년 10월 26~29일로 적는 자료도 있어 차이가 있다. 베른 대회에서는 다음 대회를 비아나키스트 조직에도 개방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인터내셔널이 민중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유일한 조직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이탈리아·스페인 대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대신 1877년 9월 헨트에서 포괄적 대회가 소집되었다.

진압이 조직을 옥죄었다. 프랑스에서는 1872년 뒤포르 법이 협회 내 직위를 가진 프랑스 시민에게 최대 5년 징역을 규정하며 가입을 금지했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가혹한 탄압이 이어졌다. 이러한 탄압이 테러리즘적 행동의 선전으로의 전환을 재촉했다.

베르비에와 종점 문제

베르비에 대회는 아홉 번째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바쿠닌(전년에 사망)에 기초한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이 크로포트킨, 말라테스타, 레클뤼가 옹호한 아나르코공산주의와 처음으로 논쟁에 붙었다. 각 지역 연합체가 어느 원칙을 따를지 스스로 결정하기로 합의했고, 스페인 지역연합은 집산주의를 유지한 반면 아나르코공산주의는 안달루시아로 퍼졌다. 대회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암살 시도와 베네벤토의 이탈리아 봉기에 연대를 표명하며 러시아 인민주의와 니힐리즘의 영향 아래 테러리즘적 행동의 선전을 승인하는 쪽으로 급진화했다.

종점을 어디로 볼지는 서술에 따라 갈린다. 아나키스트 계열의 안셀모 로렌소는 인터내셔널이 '베르비에 대회에서 물질적으로 소멸했다'고 썼고, 1877년 베르비에를 마지막 대회로 보는 서술도 있다. 반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벨기에, 그리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멕시코에서 대의원이 참여해 확장세가 이어졌음을 보여 주듯 대회와 조직은 1880~1881년까지 존속했다. 1881년 런던 대회에서 말라테스타, 트룽크, 차이콥스키가 맡은 런던 서신사무국을 제외한 모든 가시적 조직 구조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이 항목은 대체로 1872~1881년으로 표기하며, 베르비에를 사실상의 종점으로 보는 견해도 함께 적는다.

흑색 인터내셔널과의 구별, 그리고 이후의 계보

국제노동자민중협회, 이른바 '흑색 인터내셔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조직은 1881년 런던 대회에서 창설 또는 재건된 별개의 아나키스트 국제 조직으로, 앞선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과는 구별된다. 1881년 런던 대회에서 요한 모스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반권위주의 인터내셔널의 아나키스트들 및 다른 사회주의 분파가 모여 테러리즘적 행동의 선전을 중심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강령으로 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로 결의했고, 런던 서신사무국을 제외한 공식 구조를 폐지했다. 이 조직은 1880년대 후반 내부 갈등, 가혹한 탄압, 프로보카퇴르의 활동 속에 소멸하여 아나키스트 동지적 결사로 이어졌다. 1881년 이후 다른 조직들이 그 유산을 자처했다. 국제노동자민중협회(1881~1887), 국제노동자협회(1922~현재), 아나키스트 연맹 인터내셔널(1968~현재), 블랙브리지 인터내셔널(2001) 등이다.

1922년 12월 베를린의 비합법 회의에서 창설된 아나르코생디칼리슴 국제노동자협회(IWA-AIT)는 중앙집권, 정당, 의회주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포함한 국가주의를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이 조직은 스스로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거쳐 재기한 노동자 운동 속에서 원래 인터내셔널의 '진정한 계승자'로 내세웠다. IWA-AIT는 아나키스트 생티미에 인터내셔널(1872~1881)과 흑색 인터내셔널(1881~1887)을 20세기 초 아나르코생디칼리슴적 국제 조직화가 본격화되기 전의 아나키즘적 인터내셔널 시도로 제시한다. 연속성의 예다. 당시 최대 아나르코생디칼리슴 노조였던 스페인 CNT(1910년 바르셀로나 창설)는 1923년 60만 명 규모로 IWA에 가입했으나, 대의원들은 1922년 창설 대회에 가는 길에 체포되어 참석하지 못했다. CNT의 전통은 1870년 스페인 IWA 지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8월에는 생티미에에서 국제 아나키즘 집회가 열려 1872년 대회를 기념했다.

관련 인물

출처

  1. René Berthier, Social Democracy and Anarchism in the International Workers' Association 1864–1877 (Merlin Press, 2015)
  2.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Resolutions of the St. Imier Congress
  3. Encyclopaedia Britannica: anarchism (the First International and its afterm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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