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마치 운동
Basmachi movement
1918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투르키스탄·부하라·히바 등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소비에트 지배에 맞선 무슬림 무장 저항을 아우르는 이름. 「바스마치」는 우즈베크어로 「습격자, 도적」을 뜻하며, 소비에트 역사학은 이를 반혁명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으로 규정했다. 1916년 징발 반대 봉기에 뿌리를 두고 1918년 코칸트 학살 뒤 페르가나에서 본격화했으며, 영어 출처는 1934년에 끝났다고 본다.
상세
러시아 지배 아래 페르가나 분지는 대규모 면화 산지로 바뀌어 빚진 농민과 땅 없는 농촌 무산자가 늘었고, 1916년 무슬림 징발이 중앙아시아 봉기를 불렀다. 1918년 2월 붉은 군대가 코칸트 자치국을 무너뜨리고 최대 2만 5천 명을 학살하자, 코칸트 민병대장 에르가시가 「이슬람군 최고 지도자」를 자처하며 들고일어났다. 국유화와 곡물 수입 단절로 기근이 닥치자 사람들이 대거 합류했고, 마다민 벡 같은 쿠르바시(무장대 지휘관)가 이끈 바스마치는 페르가나 분지의 넓은 지역과 투르키스탄 곳곳을 장악했다. 1920년 부하라 에미르가 쫓겨난 뒤에는 동부 부하라가 새 중심이 되어, 로카이 부족의 이브라힘 벡이 에미르 사이드 알림 칸의 이름으로 부족들을 이끌었고, 1922년에는 히소르에서 서부 파미르에 이르는 동부 부하라 대부분이 바스마치의 손에 있었다. 1921년 11월 소비에트 측이 보낸 전 오스만 장관 엔베르 파샤가 바스마치로 넘어가 범튀르크·범이슬람 국가를 꿈꾸며 지휘권을 쥐려 했으나, 지도자들은 그를 적대했고 그는 1922년 8월 전사했다. 히바와 투르크멘 땅에서는 주나이드 칸이 따로 싸웠다.
소비에트 당국은 압도적 군사력과 양보를 함께 썼다. 샤리아(이슬람법)를 다시 인정하고 코란 학교와 와크프(종교 기부 재산) 토지를 되살렸으며, 무슬림 농민 의용 민병대 「붉은 막대」를 만들었으며, 이 지역 소비에트 군대의 15~25%가 무슬림이었다고 추산된다. 1923년 초 페르가나의 주요 무장대가 격파되었고, 1926년 가을까지 바스마치는 중앙아시아 대부분에서 무너졌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물러난 이브라힘 벡은 집단화에 대한 반발을 업고 다시 침입했으나 1931년 사로잡혀 총살되었다. 소비에트 공식 설명은 1931~1932년에 조직된 세력이 사라졌다고 하며, 마지막 대규모 집단은 1933년 카라쿰 사막에서 격파되었다.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소련 붕괴 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이를 민족해방 운동으로 다시 썼고 우즈베크 역사가 라자보프는 코칸트 자치국·자디드와 한 흐름으로 보았지만, 옥스퍼드의 알렉산더 모리슨은 페르가나의 바스마치에게 뚜렷한 정치 목표가 없었다고 반박한다. 영어 출처는 이 운동이 민족해방 운동도 민족주의 운동도 아닌, 러시아 지배를 몰아내려는 일시적 부족 연합이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