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힌골 전투
Battles of Khalkhin Gol
1939년 5월부터 9월까지 몽골인민공화국 동부 할하 강(할힌골) 유역,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약 900km 떨어진 만주국·몽골인민공화국 국경의 미획정 지대에서 소련·몽골 연합군과 일본 관동군·만주국군이 벌인 사단급 전투다.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자 1930년대 소련·일본 국경 분쟁의 결정적 전투였고, 9월 15일 정전 협정으로 지상전이 끝났지만 법적 분쟁은 1942년 5월에야 옛 지도 기준의 타협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성격 규정은 지금도 갈린다. 일본과 소련은 공식적으로 국경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몽골은 전쟁으로 불렀으며, 일부 일본 사학자는 진짜 국지전, 이른바 제2차 러일전쟁으로 다룬다.
상세
경과
전투는 1939년 5월 11일 몽골 기병 부대 70~90명이 분쟁 중인 목초지에 들어갔다가 만주국 기병에게 밀려나면서 시작되었다. 5월 13일 몽골군은 더 큰 병력으로 다시 들어왔고, 5월 28일 소련·몽골군은 아즈마 중령의 정찰 부대를 포위해 섬멸했다. 이후 여러 차례 소규모 충돌이 이어지다 7월에 일본군이 도하 공세를 시도했고, 8월 20일 소련·몽골군이 총공세에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이 분쟁에서 소련·몽골 측은 약 5만 7천 명, 야포와 박격포 542문, 전차 498대, 장갑차 385대, 전투기 515대를 투입했고, 일본군 제6군은 7만 5천 명 이상, 포 약 500문, 전차 182대, 항공기 700대를 보유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쪽은 오히려 일본군이었으므로 이 승리는 병력 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 제6군은 8월 24일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소련군의 8월 20일 공세가 이를 앞질렀다. 양익 기동부대는 8월 25일 노몬한에서 연결되어 제23보병사단을 포위했고, 8월 26일 구출을 위한 반격과 8월 27일의 탈출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 8월 31일까지 국경 몽골 측의 일본군은 파괴되었고, 9월 8일 이후 지상전은 사실상 끝났으며 공중전은 정전까지 이어졌다. 9월 15일 체결된 정전 협정은 다음 날 오후 1시 10분에 발효되었다.
9월의 정전은 전쟁의 법적 종결이 아니었다. 소련과 일본 사이의 정전과는 별도로 이 사건의 법적 해결은 1942년 5월 옛 지도에 기초한 타협으로 이루어졌다. 분쟁은 1945년 일본의 항복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남았다. 국경선 자체도 확정되지 않았다. 몽골 측은 1734년 청이 설정한, 할하 강에서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경계선을 주장했고, 만주국과 일본은 1906년 러시아 제국의 8만 4천 분의 1 지도를 1918년에 입수한 데 기초해 할하 강 자체를 경계로 주장했다.
손실 규모
손실 수치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소련·몽골군의 경우 9,703명의 전사·실종은 크리보셰예프의 2001년 판 수치와 일치하지만, 이는 회복 불가능한 손실로서 부상 15,251명과 질병 701명을 더하면 전역 손실은 25,655명에 이른다. 일본군 손실은 서로 맞지 않는 수치들이 병존한다. 관동군 내부 기록은 전사 8,629명과 부상 9,087명(병자 제외)을, 제6군 의무 자료는 전사 7,696명과 총 19,714명의 인원 손실을 제시하며, 소련 측 공식 발표는 29,085명에서 5만 2천~5만 5천 명, 나아가 6만 1천 명까지 올라갔고, 독립적 추정은 일본·만주국 측 4만 5천 명까지 제기한다. 따라서 일본군 손실은 단일 숫자가 아니라 논쟁적인 범위로 제시해야 한다.
구별되는 사건
이 전투는 1938년의 장가봉 사건과도, 1945년의 소련·일본 전쟁과도 다른 사건이다. 장가봉 전투는 1938년 7월 29일부터 8월 11일까지 벌어졌고, 만주국·일본군이 소련이 주장하고 통제하던 영역에 침입하려 한 사건으로서 일본군이 분쟁 지역을 점령했다가 철수한 뒤 외교적 합의로 처리되었다. 1945년의 소련·일본 전쟁은 8월 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뒤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시작되어 만주국과 몽강국을 무너뜨리고 일본의 항복으로 이어졌으며, 1939년 5~9월의 국경 분쟁, 특히 할힌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소련·일본 중립조약은 이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인 1941년 4월 13일에 체결되었으므로, 1945년의 전쟁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전투의 책임 문제는 전후 법정에서 다루어졌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소련의 제기에 따라 일본인 14명을 몽골인민공화국에 대한 침략 전쟁 개시 및 소련에 대한 국제법 위반 전쟁 수행 혐의로 기소했고, 도이하라 겐지, 히라누마 기이치로,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한 관동군은 도쿄의 승인 없이 상당 부분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전투 규모를 키웠고, 도쿄는 거듭 확전을 금지했다.
승리와 탄압
할힌골은 주코프의 첫 승리였고 그에게 첫 소련 영웅 칭호를 안겼다. 그러나 함께 공을 세운 지휘관들의 운명은 달랐다. 그리고리 시테른과 야코프 스무시케비치는 1941년 여름 내무인민위원부 기관에 체포되어 그해 가을 법정 심문 없이 총살되었고, 뒤에 복권되었다. 이 처형을 적법한 사형 집행으로 서술해서는 안 된다.
예시로서의 의미
이 전투는 주코프가 처음으로 실행한 이중 포위 기동의 원형으로 자주 언급된다. 중앙에서 적을 붙들어 두고 예비대로 은밀히 병력을 집결시킨 뒤 양익에서 협공하는 방식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가둔 우라누스 작전과 매우 유사했다. 항공 전력의 운용에서도 노몬한은 특정 군사 목표를 위해 대규모 항공력을 처음으로 고강도 전투에 사용한 사례이며, 소련 공군 역사상 첫 전투폭격기 공세였다. 소련 지휘부는 야간에만 부대를 이동하고 주간에는 집결지 진입을 금지했으며, 트럭과 병사 복장의 정찰, 음향 설비를 이용한 전차·항공기 소음 모의, 허위 무선·전화 기만 프로그램으로 재편성을 숨겨 일본군의 역습 준비를 대체로 무력화했다. 기갑 전력의 불균형도 두드러졌다. 7월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차와 장갑차 92대를 투입한 반면 소련·몽골군은 452대를 투입했고, 큰 손실을 입은 일본군 전차연대는 7월 중순 관동군 명령으로 전장에서 철수했다. 승리의 대가에 대한 평가도 있었다. 표트르 그리고렌코는 붉은군대가 기술과 수, 화력에서 매우 큰 우위를 안고 들어갔는데도 막대한 손실을 냈다고 보았고 그 원인을 지휘의 부실로 돌렸는데, 이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한 평가로 제시되어야 한다.
전략적 결과
이 패배는 일본이 북진론에 따라 소련과 계속 대결하는 길을 포기하게 만들고 남진론으로 방향을 돌리게 했다. 그 방향 전환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향하는 진로와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그리고 미국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Alvin D. Coox, Nomonhan: Japan Against Russia, 1939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 Stuart D. Goldman,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 (Naval Institute Press, 2012)
- Grigoriy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1997)
- ja.wikipedia.org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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