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Bukharan People’s Soviet Republic
1920년 9월 붉은 군대와 청년부하라인이 에미르 사이드 알림 칸을 몰아낸 옛 부하라 에미르국 땅에 10월 8일 선포된 소비에트 공화국. 파이줄라 호자예프가 이끈 인민나지르(장관)회의가 정부를 맡았고, 사유재산과 이슬람 원칙을 인정한 과도기의 「인민」 공화국이었다. 1924년 9월 19일 부하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꾼 뒤, 10월 27일 민족 경계 획정으로 해체되어 대부분 우즈베크 SSR에 들어갔다.
상세
부하라의 개혁은 범튀르크주의와 자디드 개혁 사상, 볼셰비키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년부하라인이 이끌었다. 1918년 3월 이들의 요청으로 표도르 콜레소프가 부하라로 진격했으나, 러시아 측 출처에 따르면 에미르는 볼셰비키 대표단을 죽이고 성전을 부추겨 수천 명의 러시아인이 죽고 많은 청년부하라인이 처형되었다. 1920년 8월 3일 볼셰비키와 청년부하라인은 공동 행동에 합의했고, 16일 차르주이에서 열린 부하라 공산당 제4차 대회가 에미르 타도를 결의했으며, 25일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이 이를 승인했다. 28일 밤 차르주이 봉기와 함께 미하일 프룬제의 붉은 군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152mm 요새포를 포함한 중포가 성벽 가까이 놓여 1만 2천 발의 포탄이 쏟아졌고, 에미르는 31일 1,000명의 병력과 함께 동부 부하라의 두샨베로 달아났다. 9월 2일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에미르의 성채 아르크는 포격과 공습으로 폐허가 되었고 민간인 수백 명이 죽었다. 9월 14일 무히트디노프가 이끄는 전부하라 혁명위원회가 세워졌고, 10월 8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소비에트 용어로 이 공화국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가는 과도기인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였다. 1921년 9월 25일의 헌법은 1918년 러시아 헌법과 달리 토지와 생산 수단의 사유를 허용하고 비프롤레타리아에게도 선거권을 주었으며(에미르의 친족과 옛 관리, 대지주는 제외), 제26조는 어떤 법도 이슬람의 기본 원칙에 어긋날 수 없다고 정했다. 마을이 스스로 대표를 뽑는 아크사칼 제도도 유지되었다. 엘리트의 언어인 페르시아어 대신 우즈베크어가 국어가 되었고, 교육 나지르 압두라우프 피트라트는 많은 학생을 독일 등 유럽 대학에 보냈다. 국기는 망치와 낫에 초승달을 더했다. 공산당원은 선포 두 주 만에 1만 4천 명으로 불었다가 거듭된 제명으로 1922년 1,000명으로 줄었다. 1922년 동부 부하라 대부분이 바스마치의 손에 있었고, 1923년부터 모스크바는 스탈린 등을 앞세워 부하라 정부를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몰아 정부와 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면적 18만 2천㎢, 인구 220만여 명의 공화국은 1924년 서부가 우즈베크 SSR(아무다리야 남안은 투르크멘 SSR)로, 동부가 타지크 자치 공화국으로 나뉘었다. 자디드 출신의 호자예프는 우즈베크 SSR의 첫 지도자가 되었으나 1930년대에 숙청되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