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파예프 (영화)
Chapaev (film)
내전의 붉은 군대 지휘관 바실리 차파예프를 다룬 바실리예프 형제의 1934년 소련 유성영화. 드미트리 푸르마노프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으며 개봉 첫해 3000만 명이 보았고 스탈린은 38번을 보았다고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대표작이 되었고, 주인공은 지금까지도 러시아 농담의 단골이다.
상세
무슨 이야기인가?
내전의 우랄 전선. 사단장 차파예프는 글도 제대로 모르고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농민 출신 영웅이다. 그의 사단에 모스크바에서 콤미사르 푸르마노프가 온다. 둘은 처음부터 부딪친다. 수의사에게 “의사” 자격 시험을 보게 하라고 고집하는 차파예프를 푸르마노프가 말리고, 농민을 약탈한 소대장을 푸르마노프가 체포하면서 누가 사단의 주인인지 언쟁이 벌어진다. 약탈품이 돌아오자 농민 대표단이 고맙다며 찾아오고, 차파예프는 앞으로 약탈하면 직접 쏘겠다고 선언한다. 농민이 묻는다. “볼셰비키 편이오, 공산당 편이오?” 차파예프는 “나는 인터내셔널 편”이라고 둘러댄다.
감자와 담뱃대를 전장 삼아 지휘관의 자리를 가르치는 장면, 부관 페트카가 안카에게 기관총 분해를 시험하며 사랑이 싹트는 장면이 이어진다. 절정은 “심리 공격”이다. 검은 제복의 백군 장교들이 북소리에 맞춰 쓰러지는 동료를 돌아보지 않고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겁먹은 병사들을 콤미사르가 되돌린다. 안카가 기관총으로 막지만 탄약이 떨어지고 카자크 기병대가 덮치는 순간, 칼을 뺀 차파예프의 기병이 달려든다.
푸르마노프가 모스크바로 소환되고, 백군 대령 보로즈딘이 사단 본부가 있는 르비셴스크 기습을 제안한다. 한밤에 카자크가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고, 차파예프는 다락에서 기관총으로 맞서다 부상한다. 페트카는 강가에서 그를 엄호하다 죽고, 차파예프는 우랄강을 헤엄치다 기관총탄에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안카가 불러온 사단이 들이닥쳐 백군을 물리치는 데서 영화가 끝난다.
왜 그토록 인기를 끌었나?
게오르기 바실리예프와 세르게이 바실리예프는 “바실리예프 형제”로 불렸지만 친척이 아니며, 그 오해를 그대로 크레딧에 썼다. 1932년 여름 두 사람이 받은 것은 푸르마노프의 미망인이 쓴 포스터 같은 대본이었다. 그들은 문서고와 차파예프 사단 출신 수백 명을 찾아다녔고, 건너편에서 싸운 우랄 카자크까지 만났다. 최종 57개 장면 가운데 원래 대본에서 온 것은 넷뿐이었다. 전투에서는 전설의 영웅이지만 전투가 끝나면 어수룩한 사람이라는 대비가 이 영화의 비결이었다. 차파예프 역에 처음 뽑힌 배우 대신 페트카 역 후보였던 보리스 바보치킨이 그 역을 따냈다.
1934년 11월 레닌그라드 티탄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는 포스터도 없이 손글씨 안내문뿐이었고 아침 상영은 한산했다. 저녁에는 줄이 늘어섰고 《프라우다》는 사설에서 “온 나라가 《차파예프》를 볼 것”이라고 썼다. 첫해 관객이 3000만 명이었고 레닌그라드의 한 극장은 2년 동안 날마다 틀었다. 보리스 슈먀츠키의 기록으로는 스탈린이 1934~1937년 크렘린 극장에서 38번을 보았다. 그는 결말을 두고도 입장을 내놓았다. 형제는 지나치게 어두울까 걱정해 페트카와 안카가 행진하거나 꽃핀 사과밭에서 차파예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결말을 따로 찍었지만, 스탈린은 차파예프가 죽은 뒤에는 어떤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며 원래 결말을 골랐다.
영어권 연구는 이 영화의 구도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으로 본다. 차파예프는 교육받지 못한 민중의 힘을, 푸르마노프는 당의 규율을 대표하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푸르마노프가 화면 위쪽에 놓인다.
진짜 차파예프와는 어떻게 다른가?
영화는 시기가 다른 실제 일화들을 우랄 전투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가장 유명한 심리 공격은 역사와 거리가 있다. 차파예프 부대와 카펠 부대는 전투에서 만난 적이 없고, 1919년 6월 카펠 군단의 상대는 제24사단이었다. 검은 제복과 해골 깃발도 선전이 만든 모습에 가깝다. 소설에 몇 줄 있는 장교 대대 공격에서는 백군이 조용히 접근했으나, 영화는 북소리를 입혔다. 실제 차파예프는 그날 머리를 다쳐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안카에게도 가능한 모델로 마리야 포포바가 거론될 뿐이다.
죽음의 큰 틀은 사실이다. 차파예프는 1919년 9월 5일 우랄 카자크의 르비셴스크 기습에서 죽었다. 다만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시신이 나오지 않아 카자크는 포상을 약속했으나 누구도 그의 죽음을 증명하지 못했다. 배에 부상을 입고 헝가리인 병사 두 명이 문짝 뗏목으로 강을 건넸지만 건너편에서 출혈로 죽었고 모래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강물에 가라앉는 그 장면이 사실로 굳어진 것은 영화 덕분이다.
왜 농담의 주인공이 되었나?
전쟁 중에 찍은 선전 단편 《차파예프는 우리와 함께》에서 그는 끝내 강 건너편까지 헤엄쳐 가서 독일군을 치라고 연설한다. 아이들은 붉은 군대와 백군 놀이를 하며 차파예프와 페트카를 흉내 냈다. 차파예프, 페트카, 안카, 푸르마노프는 곧 수많은 러시아 농담의 주인공이 되었고, 컴퓨터 게임까지 나왔다. 푸틴 대통령은 이 영화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