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기의 비기독교화 운동
Dechristianization during the French Revolution
1792년 8월 왕정 붕괴 무렵 시작되어 공포정치기인 2년차(1793년 9월–1794년 9월)에 절정에 이른 반가톨릭·반기독교 캠페인이다. 교회 토지와 재산의 국유화에서 예배 자체의 폐지까지 목표가 걸쳐 있었고, 대중적 동기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소수 급진파가 주도한 것인지를 두고 오랜 학술 논쟁이 있다. 나폴레옹의 1801년 정교조약으로 관례적으로 막을 내렸다.
상세
배경
1790년 7월 12일 제정된 성직자 기본법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를 정부에 예속시키고 주교와 사제를 선거로 뽑게 했으며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 이는 서약파(헌법파) 성직자와 거부파(비서약파) 성직자의 분열을 낳았고, 이후의 비기독교화 운동은 이 균열 위에서 전개되었다.
전개
운동은 1792년 8월 10일 왕정 붕괴 직후 파리 코뮌이 처음 손을 대면서 시작되었다. 8월 12일 사제 직무 외의 성직 복장 착용 금지, 8월 16일 행렬과 공적 종교 의식 금지, 8월 17일 군대를 위한 교회 청동 비품 징발이 그 첫 조치였다. 이 코뮌의 명령 가운데 일부는 공회(공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모든 구역에서 지켜지지도 않았다.
운동을 주도한 것은 중앙 기구가 아니었다. 공안위원회와 국민공회는 비기독교화를 무질서나 과잉으로 보아 오히려 적대적이거나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실제 작업은 파리 코뮌과 각지의 감시위원회가 맡았다.
상징적 파괴와 새로운 숭배
예배 장소의 성상·제단 판·성화 등 도상 파괴, 십자가·종 등 외부 종교 표지의 철거, 혁명적·시민적 숭배 의식의 창설이 뒤따랐다. 1793년 10월 그리스도교력을 대체하는 혁명력이 도입되고 자유·이성·지고 존재의 축제가 예정되었다. 1793년 11월 10일(2년차 브뤼메르 20일) 에베르와 모모로가 주관한 전국적 '이성 축제'는 각지 교회를 이성의 신전으로 바꾸었고,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기독교 제단이 해체되는 등 가장 큰 의식이 열렸다.
혁명 지도부 내부의 갈등
비기독교화는 에베르파 같은 급진 파벌이 추진했고, 이성 숭배 실천은 에베르파를 규정하는 특징이 되었다. 자크 에베르, 피에르 가스파르 쇼메트, 앙투안프랑수아 모모로, 아나카르시스 클로츠, 조제프 푸셰 등이 이 숭배를 선전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등은 이성 숭배와 비기독교화에 단호히 반대하며 그런 축제를 '우스꽝스러운 희극'이라 불렀고, 1793년 12월 6일 국민공회는 그의 제안으로 신앙의 자유를 유지·보장한다고 법령으로 선포했다. 그는 비기독교화 세력을 혁명의 외부 적으로 규정하고 무신론을 '귀족적'이라 물리치며 지고 존재 신앙으로 맞섰다. 1794년 봄 로베스피에르는 경쟁적인 이신론적 '지고 존재 숭배'를 도입했고, 1794년 3월 24일 에베르·모모로·롱상·뱅상 등이 단두대에 처형되고 며칠 뒤 쇼메트가 뒤따르면서 이성 숭배는 사실상 소멸했다. 조르주 당통도 이전에 비기독교화 세력의 '수사적 과잉'을 경고한 바 있다.
지역차와 강제
강도는 지역별로 크게 달랐고, 반란 지역에서는 강제로 시행되었다. 방데 전쟁과 연방파 반란에서 에베르파에 가까운 임무 파견 의원들이 이를 억압의 한 형태로 사용했다. 니에브르와 코트도르, 이어 리옹에서 콜로 데르부아와 함께 활동한 푸셰, 낭트의 장바티스트 카리에르가 대표적이며, 카리에르는 1793년 11월부터 1794년 2월 사이 남녀, 거부파 사제, 방데 포로, 반혁명 세력을 대량 익사시키는 '낭트 익사 처형'을 자행했다.
가톨릭 예배를 포기한 코뮌들의 분포는 1791년 서약 사제의 분포와 유사하며, 혁명 이전에 이미 가톨릭 신앙에서 이탈한 지역과 대체로 겹친다. 1793년 11월 6일 국민공회는 모든 코뮌에 가톨릭 예배를 포기할 권리를 부여했고, 일부 코뮌은 이름을 바꾸고 예배 시설을 폐쇄·훼손·파괴했다. 한편 수도원은 광범위하게 해체·파괴되었고 베네딕투스회·시토회·프란치스코회·카르멜회 등이 특히 영향을 받았다. 1794년 부활절 무렵 프랑스의 4만 개 교회 중 남아 열린 곳은 거의 없었다.
저항과 종료
주민들은 흔히 비기독교화에 저항했고 사직한 성직자에게 다시 미사를 강요하기도 했다. 1795년 초에는 종교적 신앙으로의 일정한 복귀가 나타났고, 1795년 2월 21일 법은 공적 예배를 엄격한 제한 아래 합법화했다. 다만 종소리, 종교 행렬, 십자가 전시는 계속 금지되었다. 1795년 5월 31일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1801년 정교조약이 이 시기를 관례적으로 종결지었다. 이 조약은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국가의 관계 규칙을 세웠으며, 이후 덜 급진적인 라이시테 정착의 토대로 여겨진다.
역사 서술
'비기독교화'(déchristianisation)라는 말은 1840년대 오를레앙 주교가 될 펠릭스 뒤팡루가 처음 사용했다. 1890년대–1900년대에 알베르 마티에즈 등 역사가들이 이를 1793–1794년의 반성직자 폭력에 적용해 '2년차의 비기독교화'라 불렀고, 이후 모리스 도망제, 근래에는 세르주 비앙키와 미셸 보벨, 그리고 가톨릭 역사 서술이 이 용어를 받아들였다.
혁명 내부의 보존 노력
종교 유산의 파괴에 맞선 움직임도 혁명 내부에서 나왔다. 1794년 혁명파 사제 그레구아르는 '반달리즘' 개념을 만들어 파괴에 관한 보고서를 냈고, 화가 알렉상드르 르누아르는 1791년부터 구제된 종교 조각을 보관하도록 임무를 맡아 1795년 프랑스 기념물 최초의 박물관을 이루었다.
1922년 소비에트 캠페인과의 구별
이 운동은 1922년 소비에트 정권이 볼가 기근 구호를 명분으로 정교회 등의 전례 용품을 몰수한 '1922년 교회 귀중품 몰수'와 구별된다. 후자는 소비에트 국가가 기근이라는 구실 아래 성직자에 대한 탄압을 지시한 사건으로, 시기·주체·맥락이 모두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