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심작전
Deep Operation
1920~30년대 붉은군대 군사이론가들이 정립한 속전 군사행동 이론으로, 적 방어의 종심 전체를 타격하여 여러 지점에서 방어를 깨고 기동성 높은 기계화 부대를 돌파구에 투입해 전술적 돌파를 작전적 성공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종심작전은 전술적 제대의 종심전투와 그 성과를 발전시키는 작전 수행의 두 단계로 구성되며, 적 후방 구조에 결정적 전략적 타격을 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블리츠크리크와 달리 여러 돌파 지점과 돌파구를 활용할 예비대를 중시하고 모든 제대에서 제병협동을 강조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1936년 붉은군대 야전교범(PU-36)에 반영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반의 대규모 공세에서 실전 적용되었으며, 이후 여러 나라의 군사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상세
형성
종심작전 이론은 1920년대 말에 형성되었다. 내전기에 붉은군대가 제1기병군 등에서 기동 대편성을 집중 운용한 부됸니의 착상을 재작업한 것이며, 내전 후 대규모 재무장이 이 이론의 주요 전제였다. 첫 근사적 정식화는 트리안다필로프가 1926년 저서 《현대 군대의 작전 범위》에서 제시했고, 1929년 《현대 군대의 작전 성격》에서 작업을 이어 갔으며 1931년에는 붉은군대 참모부에 종심전투와 종심작전의 성격에 관한 보고를 제출했다. 1932년 혁명군사평의회 보고에 기초해 마련된 종심전투 조직에 관한 잠정 지침은 1933년 2월 부대에 하달되었다.
전략과 편성
채택된 형태에서 주 타격 병력은 기계화 군단에 배속되었다. 핵심 착상은 포병·항공·기갑·공수부대를 동원해 적 방어의 종심 전체를 타격하여 작전 집단 전체를 격파하는 것으로, 방어 정면을 전술적 종심 전체에 걸친 동시 타격으로 깨는 것과 기동 부대 집단을 즉시 투입해 전술적 돌파를 작전적 성공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 돌격 집단의 부대는 일곱 제대로 운용될 예정이었다. 1제대 폭격 항공, 2제대 중전차, 3제대 중형·경형 전차 편성, 4제대 차량화·오토바이 보병, 5제대 대구경 동행 포병, 6제대 지원 전차를 동반한 소총병이며, 공수부대는 별도 제대를 이루었다. 1933년 3월에는 전차 소부대·부대·편성을 위한 조직 편제 구조가 마련되어 기계화 군단, 최고사령부 예비 전차 여단, 기병 군단 내 기계화 연대, 소총병 사단 내 전차 대대가 등장했고, 이는 붉은군대의 전투 대형을 크게 바꾸었다. 사단 방어 전투 대형의 종심은 10km, 정면은 6~12km에 이르렀다.
적응은 1936년 잠정 야전교범(PU-36)과 1939년 야전교범 초안으로 이어졌으며, 항공·기갑·보병의 협동 행동과 작전적 종심에서의 기동 부대 운용이 그 노선이었다.
탄압과 그 결과
1937년까지 소련은 세계 최대의 기계화 군대와 이를 운용할 정교한 작전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트리안다필로프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1937~1939년 대숙청은 스베친, 바르폴로메예프,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지도적 장교들을 제거했다. 숙청은 종심작전을 만들어 낸 세대를 말살했고, 그 결과 이 개념은 창안자들과 함께 비판받은 인물들의 것이라는 이유로 소련 군사전략에서 밀려났다.
문서로 남은 인원 규모는 다음과 같다. 약 3만 5천 명, 장교단의 약 50퍼센트, 원수 5명 중 3명, 군집단 사령관 15명 중 13명, 군단장 85명 중 57명, 사단장 195명 중 110명, 여단장 406명 중 220명이 처형·수감·제적되었다. 다른 출처는 군단장 67명 중 60명, 여단장 397명 중 221명을 제시하며, 연대장의 79퍼센트, 연대 참모장의 88퍼센트, 대대장의 87퍼센트가 여러 방식으로 제거되었다고 기록한다. 소련 측은 1988년에 이르러 1937~1938년에 군대의 모든 사령관, 군사평의회 위원과 군관구 정치부장, 국방인민위원부 중앙부서장의 대부분, 모든 군단장, 거의 모든 사단장·여단장, 연대 정치위원의 약 3분의 1, 다수의 고등·중등 군사학교 및 군사정치학교 교원이 심판되고 파괴되었다고 인정했다. 1939년에는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우보레비치, 야키르 등 주요 주창자들이 탄압된 뒤 이론 자체를 폐기하고 '파괴활동'으로 낙인찍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구세대 군부의 보수적 일부에서는 미래의 전쟁이 진지전이 될 것이라는 후진적 견해가 우세했다.
이 폐기는 소련의 군사 능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소련군은 이 개념을 다시 익히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전쟁 제1기에 전략적 방어에 주로 머물렀다(1941년 6월 22일~1942년 11월 19일). 1942년 말에 이르러 개념을 실행에 옮길 만큼 회복했으며, 제2기는 스탈린그라드 반격과 함께 시작되었다.
일부 사학자는 전방에 창고를 배치하고 방어 준비를 게을리 한 것을 이 이론에 따른 예방적 공세 전쟁 준비의 증거로 본다. 이는 사학자 일부의 견해로서 확립된 사실이 아니며, 소련 이론가들이 방어 작전에 충분히 주의하지 않은 점이 1941~1942년 전쟁 초기의 일련의 참패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함께 제기된다.
구분
종심전투는 여러 전선 규모 편성이 동시에 기동하는 것을 포괄하며, 단일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병행하거나 연속적으로 수행되는 여러 작전이 적 방어 체계에 파국적 실패를 유발하도록 했고, 각 작전은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강력한 기동 예비대의 파견을 막는 역할을 했다.
종심작전은 군 및 전선 수준의 작전을 겨냥해 종심전투의 전술적 요소보다 투입 병력이 컸으며, 전술적 요소는 군단급 이하의 부대를 사용했다. 종심작전의 중심 편성은 돌격군이었고, 여러 돌격군이 전략 전선에 예속되었다. 또한 이것은 체계 전체의 작업이었다. 포병·항공·기갑·공수부대의 결합이 적의 작전 집단 전체를 타격했고, 즉각적 타격 뒤에는 작전적 수준에서 종심전투를 계속 수행해 돌파구를 활용하고 적 정면의 방어를 더 어렵게, 불가능하게, 또는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블리츠크리크가 소련 종심작전과 유사했다는 것은 흔한 오해다. 블리츠크리크는 하나의 일관된 군사 교리로 인정되지 않으며, 양자의 유사점은 기동전과 공세적 입장에 대한 강조뿐이었다. 블리츠크리크는 단일 중점(Schwerpunkt) 타격을 강조한 반면, 종심전투는 여러 돌파 지점과 돌파구를 신속히 활용할 예비대를 강조했다. 전략 논리의 차이도 있었다. 독일은 인구가 적지만 훈련이 잘 된 군대를, 소련은 인구가 많지만 훈련이 덜 된 군대를 가졌으므로, 블리츠크리크는 질이 결정적일 수 있는 좁은 정면 공격을, 종심전투는 양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넓은 정면 공격을 강조했다.
목표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이 이론은 적 야전 병력을 파괴·섬멸한다는 클라우제비츠적 원리에서 벗어나, 적이 작전적 방어 의지를 잃는 조건을 중시했다. 즉각적 물리적 포위보다 질식이 원리가 될 수 있었고, 결과는 작전적 충격이나 체계 마비를 유발하는 연속 기동을 통해 추구되었다.
사례
1942년 천왕성 작전은 이 이론이 실전에 적용된 예다. 스탈린그라드의 붉은군대는 독일 제6군을 도시에 붙잡아 둘 충분한 병력을 배당받아 소모를 강요했고, 그 결과 독일군은 중앙을 지키기 위해 측면을 약화시켜야 했다. 소련군은 약한 측면을 예비대로 타격해 돌파하고 작전적 종심으로 진출해 칼라치나도누에서 포위망을 닫았으며, 독일군의 전술 지역은 대부분 온전한 채 작전적 종심을 점령해 그 병력을 고립시켰다. 천왕성의 전술적 종심전투 계획은 성공했으나, 총참모부의 종심작전 계획은 스탈린의 조급함으로 훼손되었다. 스타프카는 준비되기 전 공세에 나섰고, 성급한 행동과 전용 작전의 부재로 독일군은 돌출부를 잘라내 1943년 제3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많은 소련 편성을 격파했다. 이는 전용 또는 마스키로프카 작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1939년 할힌골에서 주코프가 일본군을 격파한 작전에서 이 이론의 개별 요소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서술이 있다. 다만 러시아어 출처는 전쟁 전 시기 할힌골 전투에서 종심작전 이론이 적용되었다는 견해를 함께 전하며, 영어 출처는 할힌골을 이 이론의 적용 사례로 인정하지 않는다. 영어 출처가 제시하는 실전 적용 기록은 1941년 12월 모스크바 반격, 르제프-뱌지마, 하리코프, 천왕성, 제3차 하리코프, 쿠르스크다.
모스크바 반격에서 소련 소총병 부대는 독일군의 전술 방어를 뚫고 느린 속도로 도보로 작전 종심까지 밀고 들어갔으나 지구력이 부족했고, 보병 손실이 늘어날 때마다 모든 진격이 끝났다. 기병 군단은 독일군의 작전 후방으로 침투했으나 더 기동성 있는 독일군을 주요 통신로에서 몰아내지 못했고, 최악의 경우 스스로 포위되기도 했다. 이 야심찬 작전은 궁극적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 원인은 대체로 소련 작전 기동 병력의 취약함에 있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는 종심전투의 방어적 측면과 공세적 측면을 결합해 세 수준을 융합한 사례다. 돌출부는 강력한 종심 방어를 가능하게 했다. 제1제대에 소총병 사단 2개, 제2제대에 1개가 배치되었고, 제1제대 사단은 8~15km의 정면과 5~6km의 종심을 방어했다. 연속된 제대는 독일군을 느린 소모전으로 끌어들였고, 정보력은 소련의 공세인 쿠투조프 작전과 폴코보데츠 루먄체프 작전 이전에 예비 편성을 배치할 수 있게 했다. 독일군은 예측된 대로 1943년 7월 5일 시타델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느린 속도로 제한했고, 북쪽에서는 제9군이 제3제대에서 멈추어 쿠투조프 작전이 가능해졌다. 남쪽에서는 독일 편성이 세 제대를 모두 관통해 비상 계획에 따라 프로호로프카 전투가 벌어졌으나, 전략적 주도권은 소련군이 여전히 획득했다.
물질적 수단과 전술적 역량이 개선되어 복잡한 대편성 기동이 가능해지면서, 이후의 드네프르-카르파티 공세, 바그라티온 작전, 제2차 이아시-키시뇨프 공세, 비스와-오데르 공세는 발전된 종심작전 교리 적용을 보여주었다.
계보와 영향
종심작전은 스베친이 소모전 전략을, 투하쳅스키가 결정적 격멸 전략을 주장한 논쟁에서 발전했으며, 그 동기에는 소련 경제가 아직 산업화되지 않았다는 조건도 있었다. 스베친은 전술과 전략 사이의 작전술이라는 이론적 구분을 인식했고, 그의 구상은 소련 종심전투의 청사진이 되었다. 발전을 주장한 인물로는 알렉산드르 스베친(1878~1938), 미하일 프룬제(1885~1925), 미하일 투하쳅스키(1893~1937)가 있고, 니콜라이 바르폴로메예프(1890~1939)와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1894~1931)는 종심 공세 작전에서 기술을 활용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영어 출처가 꼽는 주요 주창자는 투하쳅스키, 트리안다필로프, 게오르기 이세르손, 니콜라이 예피모비치 바르폴로메예프, 게오르기 주코프다. 바르폴로메예프는 트리안다필로프의 후계자로서 돌격군 임무의 역학을 연구했고, 이를 "끊임없는, 종심의, 분쇄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게오르기 사모일로비치 이세르손(1898~1976)은 군사 전술과 작전에 관해 다작한 저술가였다. 작전술에 관한 주요 저작으로 《작전술의 진화》(1932년, 1937년)와 《종심작전의 기초》(1933년)가 있으며, 후자는 지금도 기밀에 부쳐져 있다. 그는 전선에 열린 측면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며 군사술이 깊게 제대된 방어를 돌파하는 과제에 직면했다고 보았다.
전후 이 이론은 블리츠크리크 전략과 마찬가지로 현대적 전투 수단에 적응한 여러 외국 군사 개념의 발전에 규정적 영향을 주었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공수 작전을 바탕으로 미 육군 전문가들이 발전시킨 '공지 작전' 개념과 나토의 '제2제대와의 전투' 개념이 그렇다. 냉전기에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은 수적 우위와 종심전투 개념을 이용해 나토를 압박했고, 서방 관측자들은 바르샤바 조약군이 서유럽을 약 48시간 만에 제압할 것으로 예측했다. 아시아에서는 1960년대부터 소련 최고사령부가 종심전투 공세 작전으로 중국 침공을 검토했다. 1999년 코소보 공중 작전에는 지상전도 전선도 없었고, 로버트 H. 스케일스 소장은 미국에 '전략적 선제'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군사에 관한 전술·전략·작전이라는 세 가지 표준 교리는 미 육군과 미 해병대가 채택한 종심전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미 육군 매크패든 대령에 따르면 투하쳅스키의 가장 귀중한 유산은 '작전술'을 포함한 작전 이론에 관한 개념이며, 그는 '작전적'을 체계적 개념으로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
소련 작전 군수, 즉 군과 전선 집단이 군사 작전을 지속하도록 뒷받침하는 후방 근무의 역할·임무·절차·자원의 복합체 발전은 새로운 조건에 전투 방식을 정식화하거나 적응시키려는 노력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소련 이론은 전략·작전술·전술에 부합하는 군수 이론과 실천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comprehensive account of the theory's development, key figures (Triandafillov, Tukhachevsky), adoption in PU-36, and the seven-echelon attack structure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detailed treatment of doctrinal principles, Isserson's concept of depth, Varfolomeev's composition of deep operations, and the doctrine's legacy including influence on U.S. AirLand Battle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