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시오니즈무 (니티즈무)
Fractionism (Nitismo)
1975년 독립 전후 MPLA 내부에서 형성된 정통 공산주의 성향의 이탈파 운동이다. 니투 알베스의 이름을 따 '니티즈무'라 불렸고, 스스로를 'MPLA 행동위원회, FAPLA-인민 통일'이라 칭하며 아고스티뉴 네투 대통령에 반대했다. 1977년 5월 27일 루안다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약 2년간 이어진 대규모 숙청의 명분이 되었다.
상세
명칭과 유래
'프락시온'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계열 정당들에서 당내 이탈과 민주집중제 위반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인 말이었다. MPLA에서도 니티스타 이전에 최소 세 차례 내부 운동이 '프락시오니스트'로 불렸다(1963~1965년 비리아투 다 크루즈 계열, 1972~1974년 동부 반란과 활동적 반란). 따라서 '프락시오니즈무'는 1977년 니투 알베스 파벌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당내 분파 투쟁을 지칭하는 일반 개념어에서 나온 이름이다. 영어·포르투갈어 자료는 '니투의 그룹'(grupo de Nito), '니티즘'(nitismo)이라는 별칭도 쓴다.
배경과 형성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 이후의 개방과 독립 전후의 MPLA 내부 분열 속에서 운동이 형성되었다. 니투 알베스와 조제 자신투 반두넴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는 정부 내 백인·메스티소의 과도한 비중과 사회경제 정책을 비판했고, 1975년 11월~1976년 1월 국영 매체 연설을 통해 식민지기 특권의 잔재를 문제 삼았다. 그들의 담론은 제국주의 비판에서 점차 '흑인 대 백인-메스티소 엘리트'라는 인종화된 계급투쟁으로 이동했고, 1976년 2월 말~3월 초 소련공산당 제25차 대회 참석 뒤 더욱 급진화했다. 이들은 '민중권력'(poder popular)을 중심으로 청년위원회를 조직했고, 알베스는 뎀보스 제1군사지구 출신 노병 지도자들과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활동가들의 혼성 동맹을 이끌었다. 1976년 말에는 니투 계열과 네투 지도부의 분리가 뚜렷해졌다.
제3차 전원회의와 1977년 5월 쿠데타
1976년 10월 23~29일 MPLA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는 알베스와 반두넴을 '제2의 MPLA' 창설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6개월 정직 처분하고 '프락시오니즘' 혐의를 공식화했으며, 알베스가 이끌던 내무부를 폐지했다. 두 사람이 요구한 조사위원회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가 위원장을 맡았으나 보고가 지연되면서 분열이 확산되었다. 1977년 5월 21일 루안다의 당원 대회에서 조사위원회는 알베스를 '프락시오니즘'으로 고발했고, 알베스는 네투가 앙골라를 소련에 정렬시키지 않는다고 맞받았다. 12시간 논쟁 끝에 당은 26대 6으로 두 사람의 직위 해임을 의결했고, 이것이 무장 노선 전환의 분기점이 되었다.
5월 27일 알베스는 대통령궁을 향한 시위를 이끌었고, 프락시오니스트-니티스타 세력은 상파울루 감옥 습격, 국영 라디오 방송국 장악, 노동자·민중 봉기 선동을 시도했다. 반대파 지도부 인사들을 체포해 무세케 지역으로 끌고 가 살해하기도 했다. 쿠데타는 그날 오후 루안다에서 진압되었고, 네투는 국영 라디오에서 통제 회복을 선언하며 숙청의 기조를 예고했다. 실패 원인으로는 계획 부실, 대중 앞의 명확한 목표 결여, 그리고 1975년부터 '카를로타 작전'을 수행하던 쿠바 군대의 앙골라 국가기구 군사 지원이 지목된다.
숙청과 사상자
실패 직후 MPLA는 분파주의 제거를 명분으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루디 키사순다와 엔히케 오남브웨가 지휘한 DISA가 같은 날 밤부터 니티스타 지도자 수색에 나섰고, 임의 체포·고문·무재판 유죄판결·즉결 처형이 특별군사재판소나 혁명위원회를 통해 자행되었다. 총살형에 앞서 '배신자'로 앙골라 TV에 공개되는 관행이 있었고, 숙청은 경험 많은 전투원, 청년 당원, 지식인, 학생들을 희생시켰다.
사망자 수는 공식 집계가 없고 자료마다 크게 엇갈린다. 영어 위키백과는 쿠데타 시도 이후 최장 2년간 알베스의 추종자 또는 추종 혐의자 약 18,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포르투갈어 위키백과는 자료에 따라 10,000명에서 40,000명 사이라고 서술한다. 반수정주의 계열 정리(CasaMarx)는 수만 명 규모의 사망·실종이 수십 년간 공식 인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속 기간과 종결
운동은 조직된 세력으로서 1977년 5월 27일 쿠데타 시도와 그에 뒤이은 숙청으로 끝났다. 숙청은 쿠데타 이후 약 2년간 이어진 것으로 서술되며, CasaMarx는 탄압이 1979년까지 지속되었다고 본다. 포르투갈어 위키백과는 1979년 7월 아고스티뉴 네투가 DISA의 '월권'을 이유로 해산을 결정했다고 기록한다. 자료마다 종결 연도를 달리 잡아 합의된 단일 종료 연도는 없으며, 이 항목은 숙청이 1979년경까지 이어졌다는 범위로 제시한다.
이후
쿠데타 시도는 MPLA와 앙골라 국가에 구조적 변화를 낳았고, 역설적이게도 쿠데타 세력이 요구했던 것을 MPLA가 실행하게 했다. 1977년 12월 제1차 대회에서 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위당을 선언하고 당명을 MPLA-노동당(MPLA-PT)으로 바꾸었다. 1979년 네투가 사망하고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가 뒤를 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식 포기 시점은 영어 위키백과가 1991년, 포르투갈어 위키백과가 1992년으로 갈리며, 이 항목은 어느 한쪽을 채택하지 않는다. 1992년 4월 앙골라 정부는 '프락시오니스트 시도의 주요 주모자들이 재판받고 처형되었다'고 인정했다.
평가와 사료 해석
정치적 책임과 사료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있다. 반수정주의 계열 정리(CasaMarx)는 5월 27일을 앙골라 국가의 권위주의적·군사화 경로가 결정된 사건으로 규정하며, 아고스티뉴 네투와 루시우 라라가 앞장선 MPLA 지도부의 숙청·즉결처형이 혁명 과정과 계획경제 건설에 역행했다고 비판한다. 학술 연구(Vidal, 2024)는 니티즘을 탈식민 이후 통제를 벗어난 MPLA 계열 자율적 정치활동의 일부로 분석하고, 이 운동을 계급과 인종을 혼동한 담론으로 평가하며, MPLA 내 마르크스주의 경향 간 논쟁이 좌·우 국가 기획의 대립이라는 주요 모순을 가리는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소련 개입의 정도는 끝내 충분히 밝혀지지 않아 추측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