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유색인 (생도맹그)
Free people of color (Saint-Domingue)
생도맹그 등 프랑스 카리브 식민지에서 노예 인구와 백인 식민자 계급 사이에 놓였던 법적·사회적 범주. 흑인법 아래 법적으로는 자유민이었으나 프랑스인과 같은 권리를 갖지 못했고, 1789년 왕립 인구 조사에서 약 25,000명이었다. 영어로 free people of color, 프랑스어로 gens de couleur libres라 불렸다.
상세
범주의 형성
1685년 루이 14세가 공포한 흑인법(Code Noir)의 질서와 1697년 프랑스령 생도맹그 성립 속에서 자유 유색인 계급이 형성되었다. 생도맹그의 법적 구분은 자유 백인, 해방민(affranchis), 노예였으며 해방민의 절반 이상이 자유 유색인이었다. 이들은 흑인과 뮬라토를 모두 포함했고 대부분 프랑스 식민자 남성과 흑인 노예 여성 사이의 자손이었다. 커피 플랜테이션이 성장하면서 자유 유색인은 1789년까지 커피 농장의 3분의 1, 흑인 노예의 4분의 1을 소유한 경제 세력이 되었다.
단일하지 않은 계급
계급과 인종의 관계는 지역마다 달랐다. 남부에서는 높은 사망률과 적은 노예 수 때문에 노예주들이 노예의 자기 해방(self-purchase)을 금지하여 자유 유색인 인구가 북부보다 현저히 적었다. 부유한 gens de couleur는 토지를 사들이고 노예를 소유했으며, 일부는 노예 봉기 진압 체제와 연계되기도 했다. 동시에 이들은 공직에 오르거나 의학 등 여러 전문직을 행할 수 없었다.
권리 투쟁과 혁명
흑인법의 명목상 평등 조항에도 불구하고 자유 유색인은 프랑스인과 동일한 권리를 갖지 못했고, 특히 투표권에서 배제되었다. 1790년 10월 350명의 뮬라토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프랑스 정규군과 지역 농장주 민병대에 의해 해산되었고, 1791년 2월 지도자 제임스 오제 등이 공개 처형되었다.
1791년 5월 15일 제헌의회는 부모가 모두 자유인인 자유 유색인에게 완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으나, 이는 참정권을 몇백 명의 자유 흑인에게만 한정했고 백인 식민자들은 법 적용에 저항하겠다고 맹세했다. 노예 봉기 뒤인 1791년 9월 24일 국민의회가 이 권리를 철회하자 자유 유색인은 다시 백인에 대항해 무장했다. 1792년 4월 4일 의회는 피부색과 부모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자유민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주는 더 관대한 법령으로 이를 대체했다. 같은 해 프랑스 정부는 봉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절 레제 펠리시테 송토나를 파견했고, 송토나 측은 더 많은 자유를 원하는 유색 자유민과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백인 식민자들은 노예 해방에 반발하며 자유 유색인과 함께 영국의 지원을 받아 혁명 정부군과 싸웠다.
해방 이후
1793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종식시켰을 때 생도맹그에는 약 28,000명의 anciens libres('이전부터 자유로웠던 자')가 있었고, 이 용어는 일반 해방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쓰였다. 1794년 2월 4일 국민공회의 전 식민지 노예제 폐지에 많은 뮬라토가 반대했는데, 이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 유색인과 노예의 관계는 복잡했다. 이들은 노예 봉기에 대한 백인의 방어선으로 자처하기도 했으나 봉기가 장기화되면서 해방 노예와의 연합을 강화했다. 자유 흑인과 해방민 사이의 갈등은 1799년 리고가 이끄는 반과 투생이 이끄는 흑인 세력 간의 칼의 전쟁으로 폭발했고, 패배한 부유한 gens de couleur는 프랑스·쿠바·푸에르토리코·미국 등지로 피난했다. 자유 유색인 중 상당수는 1793년 이후에도 남아 독립 아이티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이 범주의 법적 질서가 1794년에 끝났다고 해서 집단의 정치적 역할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용어 구분
gens de couleur libres는 흔히 아프리카계와 유럽계 혼혈 자유민을 가리키는 데 쓰였으나 자유민 중에는 혼혈이 아닌 흑인 출신도 있었다. 따라서 미국 등 다른 지역의 포괄적 'free people of color' 개념과 구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