спор графит–тяжёлая вода · 1945–1946년

흑연-중수 논쟁

Graphite vs Heavy Water Dispute

소련 원자폭탄 계획 초기, 첫 실험용 원자로의 감속재로 흑연을 쓸지 중수를 쓸지를 두고 이고리 쿠르차토프아브람 알리하노프 사이에 벌어진 과학적·정치적 논쟁. 쿠르차토프는 미국 맨해튼 계획의 선례를 따라 흑연 쪽이 더 빠르고 값싸다고 주장했고, 알리하노프는 중성자 흡수가 적은 중수를 고집했다. 논쟁이 교착되자 쿠르차토프는 1946년 초 한 회의에서 '흑연로가 아니면 프로젝트 지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고, 국가 지도부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소련 최초의 원자로 F-1은 흑연 감속로가 되었다.

상세

배경

1943년 4월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제2실험소(Лаборатория № 2)가 설립되면서 소련의 원자폭탄 계획이 본격화되었다.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려면 먼저 연쇄반응을 유지할 '원자 보일러'(당시 용어)가 필요했고, 그 감속재로 무엇을 쓸 것인지가 첫 번째 중대한 기술적 결정이었다.

양측의 입장

  • 쿠르차토프(흑연파): 미국의 시카고 파일 CP-1과 핸포드 생산로가 흑연 감속로였으며, 맨해튼 계획의 성과는 흑연 경로가 실현 가능하고 신속함을 입증했다. 흑연은 소련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대량 확보가 가능했고, 중수 생산 기반은 전무했다.
  • 알리하노프(중수파): 중성자 흡수 단면적이 극히 작은 중수가 물리적으로 더 우수한 감속재이며, 더 작은 노심으로도 임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쟁 전 소련 물리학계는 일반적으로 흑연 속 불순물이 중성자를 과도하게 흡수할 것이라 보아 중수 경로를 선호해왔다.

결정적 국면

논쟁은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사이에 절정에 달했다. 소련 중형기계부 장관을 지낸 예핌 슬랍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쿠르차토프는 어느 회의에서 "제2실험소가 우라늄-흑연 보일러를 개발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프로젝트 지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최고 지도부는 쿠르차토프의 입장을 수용했다.

결과

1946년 12월 25일, 쿠르차토프의 우라늄-흑연 원자로 F-1(첫 번째 물리 원자로)이 모스크바에서 임계에 도달하며 유럽 최초의 원자로가 되었다. 알리하노프는 제3실험소(훗날 ITEP)로 옮겨 1949년 4월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로를 가동시켰고, 이 원자로는 이후 수소폭탄용 삼중수소 생산에 기여했다. 두 갈래 모두 소련 핵무기 개발에 기여했지만, 최초의 원자로와 첫 산업용 생산로가 흑연로였다는 사실은 이 논쟁에서 쿠르차토프의 승리가 소련 원자력의 진로를 결정지었음을 보여준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elementy.ru И. Ларин, «Реактор Ф-1 был и остается первым», Наука и жизнь №8, 2007: describes the dispute, Slavsky's memoir of Kurchatov's ultimatum, and Alikhanov's subsequent heavy-water reactor in 1949.
  2. nsrus.ru Ядерное общество России: same article by I. Larin confirming the Kurchatov-Alikhanov dispute and Kurchatov's threat to resign.
  3. 위키백과 (영문) Alikhanov 'remained a renowned head and a strong advocate' of heavy-water reactors; graphite-moderated reactors were given preference for their price.
  4. dokumen.pub Per F. Dahl, Heavy Water and the Wartime Race for Nuclear Energy (1999): Kurchatov took charge of the graphite-pile project; heavy-water pile entrusted to Alikhanov as a more distant back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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