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ée du 13 juin 1849 · 1849.06.13

1849년 6월 13일 시위 (파리)

Demonstration of 13 June 1849 (Paris)

1849년 6월 13일 프랑스 의회의 민주사회파, 곧 산악파가 프랑스군의 로마 공화국 공격에 항의해 파리에서 벌인 시위. 다른 인민의 자유를 무력으로 치지 않는다는 헌법을 내세웠으나 샹가르니에의 군대에 곧바로 흩어졌다. 르드뤼롤랭 등 지도자들은 망명하거나 재판을 받았고, 제2공화국의 마지막 「혁명의 날」로 꼽힌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소부르주아 민주파의 패배로 보았다.

상세

1848년 헌법 전문은 프랑스 공화국이 “어떤 인민의 자유에 맞서서도 결코 무력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1849년 4월 우디노 장군이 이끌고 이탈리아로 간 원정군은 가톨릭 여론의 압력 속에 처음 내건 목적과 달리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교황의 통치를 되살리는 쪽으로 돌아섰다. 6월 3일 프랑스군이 로마를 다시 공격하자, 산악파 지도자 르드뤼롤랭은 6월 11일 대통령과 장관들을 탄핵하자고 했다. 탄핵안은 361 대 202로 부결되었고, 산악파는 이튿날 거리 시위를 결정했다.

6월 13일 정오쯤 약 6,000명이 샤토도에 모였다. 에티엔 아라고가 이끄는 국민방위군 600명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헌법 만세!”를 외치며 국민의회 쪽으로 걸어갔지만, 한 시간 뒤 파리군 사령관 샹가르니에가 이끄는 군대가 이들을 쉽게 흩어 버렸다. 르드뤼롤랭과 의원 30명가량은 국립공예원에 들어가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성명을 썼으나, 바리케이드 몇 개가 곧 무너지고 총소리가 나자 정원으로 달아났다. 르드뤼롤랭은 런던으로 가서 20년 넘게 망명했고, 펠릭스 피아와 빅토르 콩시데랑 등도 뒤따랐다. 리옹에서는 6월 15일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실패의 대가는 컸다. 보나파르트는 “선한 이들은 안심하고 악한 이들은 떨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신문 여섯 곳이 문을 닫았고, 6월 19일 법은 정부가 결사의 자유를 1년 동안 멈출 수 있게 했으며, 7월 27일 언론법과 8월 9일 계엄법이 뒤따랐다. 주모자들은 그해 10월 12일부터 11월 15일까지 베르사유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피고 67명 가운데 31명만 출석했고, 궐석 피고 36명과 출석 피고 17명이 유형을 선고받았다. 공화파는 지하로 들어갔고, 의원직을 잃은 산악파 의석은 1850년 3월 10일 보궐선거로 다시 채워졌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이 시기를 “1849년 5월 28일부터 1849년 6월 13일까지. 소부르주아가 부르주아지, 보나파르트와 싸운다. 소부르주아 민주파의 패배.”로 정리했다. 그는 “6월 13일의 시위는 무엇보다 민주파 국민방위군의 시위였다”고 쓰고, 1848년 6월에는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를 쳤지만 이번에는 부르주아지가 소부르주아 국민방위군을 군대가 흩어 버리게 내버려 두었다고 보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fr.wikipedia.org
  2. fr.wikipedia.org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