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Kolokol (The Bell)
알렉산드르 게르첸과 니콜라이 오가료프가 국외에서 발행한 러시아 최초의 검열 없는 혁명적 신문. 1857년 7월 1일 연감 《북극성》의 증보판 형식으로 런던에서 창간되어 1858년부터 월 2회, 이후 주간에서 월간으로 나왔고, 1865년 제네바로 옮겨 1867년 7월 1일자로 러시아어판을 끝냈다(통권 245호).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Vivos voco)를 제사(題詞)로 내걸고 밀반입망을 통해 러시아 전역에서 읽혔으며, 농노제와 검열, 관료의 전횡을 폭로하는 공개 고발장 구실을 해 한때 궁정에서까지 읽히는 신문이 되었다. 1861년 농노해방 이후 개혁의 평가를 둘러싸고 젊은 급진 세대와 멀어지면서 발행부수가 줄었고, 1867년 러시아어판 종간 뒤 1868년 프랑스어판 시도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상세
성립
자유 러시아 인쇄소는 처음에는 러시아 측 집필자를 거의 얻지 못했다. 1855년 여름부터 게르첸의 연감 《북극성》이 국내 독자와의 왕복 서신을 만들어 냈고, 1857년에는 이 연감에 실을 자료가 넘쳐 오가료프의 발의로 세 번째 권의 부록 형식으로 신문을 창간했다. 제1호에는 《북극성》에 실었던 강령을 다시 실었으며, 창간 예고 전단은 1857년 4월 13일자로 작성되어 《북극성》 제3권과 함께 돌았다. 발행인들은 스스로를 《북극성》의 '증보판'(прибавочные листы)으로 규정했지만, 곧 검열 없는 러시아 언론의 선두에 섰다.
내용과 방식
정기 지면에는 비판적 서신과 '혼합'(Смесь), '사실인가?'(Правда ли?) 같은 난, 차르와 차리차 앞으로 보내는 공개 서한, 비밀 문서가 실렸다. 내무부와 외무부, 종무원 관리들이 문서를 보내왔고, 신문은 1859년과 1860년의 전액 국가 예산을 입수해 공개했다. 알렉산드르 2세도 이를 읽었으며, 각료들에게는 돌리지 말고 개인 열람용으로 보관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게르첸은 전 2천 쪽 가운데 약 1,200쪽을 직접 썼다. 문예물은 선전과 고발에 종속되어 레르몬토프·네크라소프의 시, 오가료프·미하일로프 등의 고발시, 게르첸의 《과거와 사색》 초고가 실렸다.
밀반입과 탄압
신문은 러시아에서 즉시 금지되었고, 1858년 상반기에 차르 정부는 프로이센, 작센, 로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공식 금지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게르첸은 로트실트, 서적상 트루브너와 프랑크, 마리야 라이헬 등을 통해 비교적 안전한 반입로를 세웠고 전달 비용이 때로 열 배로 올랐다. 이 방식들은 이후 불법·혁명 출판의 모델이 되었다. 10년 동안 재판분을 포함해 약 50만 부가 인쇄되었고, 최성기 한 호는 2,500~3,000부, 재판을 합치면 4,500~5,000부로 당시 최대 합법 신문(1만~1만 2천 부)에 견줄 만했다. 최소 52개 호가 다시 조판되어 인쇄되었다.
노선의 변화
정치적으로 신문은 게르첸의 러시아 농민사회주의 이론에 기대어 토지와 함께 하는 농민 해방, 검열과 체벌 폐지를 요구했다. 1861년 농노해방 이후에는 혁명적 민주주의 쪽으로 기울어 선언문과 개혁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논설을 실었고, 비밀 혁명조직 '토지와 자유'의 결성을 지지했다.
쇠퇴와 종간
1862년부터 국내에 더 급진적인 조류가 나타나면서 《종》은 '지나치게 헌정주의적'으로 보였고, 1862년 페테르부르크 화재 같은 사건의 여론이 게르첸에게 쏠렸다. 1863년 폴란드 봉기를 지지한 뒤 자유주의 독자가 등을 돌려 1863년 말 발행부수는 500부로 떨어졌다. 1865년 봄 런던 196호(4월 1일)와 제네바 197호(5월 25일)를 경계로 인쇄소가 스위스로 옮겨 갔다. 1866년 카라코조프의 저격 뒤 게르첸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당신이 《종》을 읽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읽지 않는다'고 인정했고, 테러리즘을 비판하면서도 독자와 국내 서신은 거의 끊겼다. 1867년에는 다시 월 1회가 되었고, 7월 1일 오가료프의 시 '안녕!'과 함께 종은 '한동안' 침묵한다고 고했다.
계승과 모방
1868년 게르첸과 오가료프는 러시아어 부록을 딸린 프랑스어판 '콜로콜'(La Cloche)로 재기했으나 같은 해 12월까지 15호를 내고 실패했다. 1870년 3월 21일(4월 2일)부터 4월 27일(5월 9일)까지 오가료프가 네차예프와 함께 여섯 호를 더 낸 《종》은 1857~1867년의 《종》과 크게 달랐고, 네차예프가 주필이었다. 1862~1865년 브뤼셀에서는 L. 퐁텐이 게르첸의 《종》 논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실은 신문 '라 클로슈'를 냈다. 1920년 1월 21일 게르첸 서거 50주기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하루짜리 기념 《종》이 발행되었고, 1962~1964년과 1978~1979년에 해설을 붙인 영인판이 나왔다.
서지
별책 부록 '법정에!'(Под суд!, 1859년 10월 1일~1862년 4월 22일, 13호)와 민중용 '일반 의회'(Общее вече, 1862년 7월 15일~1864년 7월 15일, 29호)는 자체 쪽수를 가졌고, 21·29·44·49·61·84·102·119~120·122~123호 등에 별도의 부정기 부록이 딸렸다. 1868년 프랑스어판에는 롤로코프의 문서고 자료를 실은 'Supplement du Kolokol'(1869년 2월 15일)이 덧붙었다. 바쿠닌이 옮긴 《공산당 선언》 최초의 러시아어판이 1868년 《종》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사료의 불일치
《공산당 선언》 최초 러시아어판을 '1860년대 초'로 두는 서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82년 서문에서 밝힌 데서 나왔다.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제2판 제19권 304쪽의 편집자 주는 이 연대가 부정확하며 문제의 판본은 1869년에 나왔다고 적고, 다른 연구는 최초의 러시아어(바쿠닌) 번역을 1869년 제네바로 본다.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창간·제네바 이전·종간, Vivos voco 제사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overview, circulation and court readership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revarchiv.narod.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