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문자화
Latinization
1920~1930년대에 소련 여러 민족의 문자를 라틴 문자로 바꾸거나 새로 만든 정책이다. 1922년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해 1926년 3월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대회가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했고, 그 지휘를 위해 신투르크알파벳 전연방중앙위원회가 세워졌다. 1927년 34자로 통일된 신투르크알파벳(야날리프)이 채택되었으며, 1923년부터 1939년 사이 문자를 가진 소련 언어 72개 가운데 50개가 라틴 문자를 얻었다. 그러나 1936년부터 방향이 뒤집혀 1940년 무렵에는 대부분이 키릴 문자로 다시 옮겨졌다.
상세
왜 라틴 문자였나
라틴 문자화는 세 가지 목적이 겹친 정책이었다. 첫째는 문해력이다. 아랍 문자는 모음 표기가 불완전해 배우기 어렵다고 판단되었고, 짧은 기간에 성인 문맹을 없애려면 표기 체계 자체를 바꾸는 편이 빠르다고 보았다. 둘째는 세속화다. 아랍 문자는 이슬람 학교와 성직자 교육의 매체였으므로, 문자를 바꾸는 것은 그 교육 체계의 기반을 끊는 일이기도 했다.
셋째는 국제주의다. 당시 지도부 일부는 라틴 문자를 세계 혁명의 문자로 여겼다. 루나차르스키가 대표적 지지자였고, 그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도 라틴 문자화에 찬성했으나 러시아어까지 서둘러 바꾸는 데는 반대했다. 러시아어의 라틴화도 1929년에 실제로 검토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어떻게 진행되었나
1921년 아제르바이잔과 북캅카스에서 시작되었고, 1925년 북캅카스 산악 민족 교육 회의가 잉구시·카바르다·카라차이·아디게·체첸 문자의 라틴화를 결정했다. 1926년 3월 바쿠 대회가 이를 전국 사업으로 확대했고, 1929년 「아랍 문자를 쓰는 소련 여러 인민의 신라틴알파벳에 관하여」 결정으로 공식 지위를 얻었다. 1930년부터는 투르크계를 넘어 다른 어족으로도 번졌다.
문자가 없던 언어에는 새 문자가 만들어졌다. 이 작업은 코레니자치야의 언어 부문과 같은 흐름이었고, 교과서·사전·신문이 함께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단순한 표기 변경이 아니라 문해 인프라의 구축이었다.
왜 다시 키릴로 돌아갔나
1936년부터 반대 방향의 캠페인이 시작되어 1940년 무렵 대부분의 언어가 키릴 문자로 옮겨졌다. 공식 논리는 러시아어 의무 교육과 같았다. 러시아어를 배우는 학생이 두 벌의 문자를 익혀야 하는 부담을 없앤다는 것이었다.
독일어·그루지야어·아르메니아어·이디시는 키릴화되지 않았고, 뒤의 셋은 라틴화도 겪지 않았다. 폴란드어·핀란드어·라트비아어·에스토니아어·리투아니아어도 그대로 남았다. 즉 전환의 대상은 대체로 자기 문자 전통이 없거나 아랍 문자를 쓰던 언어였다.
결과의 평가는 갈린다. 20년 사이에 두 번 문자가 바뀐 민족에게 이는 그 이전에 인쇄된 자기 언어의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는 단절이었다. 반면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법서와 사전, 교사 양성 체계는 남아 이후 민족어 교육의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도 함께 있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хронология: Азербайджан 1922, I Всесоюзный тюркологический съезд в Баку (март 1926), ВЦК НТА, яналиф (1927), 50 алфавитов между 1923 и 1939 гг., свёртывание с 1936 г. и кириллизация к 1940 г.
- 위키백과 (러시아어) соотношение латинизации с ликбезом и последующей кириллизацией; языки, не затронутые переводом.
- В. М. Алпатов. 150 языков и политика: 1917-2000 (М.: Крафт+, 2000) — стандартный обзор советской языковой политики, мотивы латинизации и её сворачивани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