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괴 복권 (1850–1853)
Lottery of the Gold Ingots (1850–1853)
1850년 8월 3일 법령으로 세운 「금괴 협회」가 연 프랑스의 정치적 복권. 116kg짜리 금괴를 1등 상품으로 걸고, 그 수익으로 파리의 실업 노동자 5,000명을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보낸다고 했다. 실제로는 1848년 혁명가와 옛 기동대원처럼 당국이 꺼리던 이들과 빈민을 파리에서 내보내려는 것이었고, 1851~1853년 3,300명 넘는 프랑스인이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보나파르트 일당의 사기로 꼽았다.
상세
복권은 제2공화국 아래에서 파리 경찰청장 피에르 카를리에가 선주 쥘 랑글루아의 제안을 받아 꾸렸다. 1848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금 이야기가 온 유럽에 퍼져 있었다. 당국이 특히 경계한 것은 무기를 다룰 줄 아는 파리의 빈털터리들, 곧 옛 기동대와 공화국 근위대원, 1848년 혁명가와 폭동 가담자였다. 1등 상품은 40만 프랑이 넘는 116kg짜리 금괴로, 몽마르트르 대로 모퉁이의 주프루아 아케이드에 전시되었다.
이주를 바라는 이들은 경찰청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경찰청이 제멋대로 골라 보냈다. 거의 모두 파리 사람이었고 10분의 1쯤은 지방의 빈민이었다. 1851년 7월 수송은 르아브르 선주 마르지우가 어른 한 명에 795프랑에 맡았다. 1851년부터 1853년까지 3,300명 넘는 프랑스인이 샌프란시스코로 갔지만, 케이프혼을 돌고 황열병을 넘겨 도착한 이들은 이미 물가가 치솟은 도시에서 실망했다. 복권은 1853년 폐지되었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는 1851년 이 복권을 다룬 소책자를 냈고, 샌프란시스코 부댕 빵집을 세운 이지도르 부댕도 이 복권 덕에 캘리포니아로 건너갔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 5장에서 1850년 12월 20일 파스칼 뒤프라 의원이 이 복권을 두고 내무장관에게 질의한 일을 적었다. “이 복권은 ‘엘리시온의 딸’이었다. 보나파르트가 측근들과 함께 낳았고, 경찰청장 카를리에가 공식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프랑스 법은 자선 목적의 추첨 말고는 모든 복권을 금지하는데도 그랬다.” 복권은 한 장 1프랑에 700만 장이었고, 마르크스는 보나파르트 일당이 같은 번호로 10장, 15장, 많게는 20장까지 가짜 복권을 찍어 냈다고 썼다. “파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캘리포니아 금광을 열고 싶었던 부랑자들은 바로 보나파르트 자신과 빚에 찌든 그의 원탁의 동료들이었다.” 의회는 그가 헌법이 아니라 형법을 어긴 현장을 잡을 수 있었는데도 뒤프라의 질의를 넘기고 다음 의사일정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