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얼헤이의 결혼
The Marriage of Young Blacky
자오수리가 1943년에 쓴 단편소설. 항일 근거지의 시골 청년 샤오얼헤이와 샤오친이 미신에 빠진 부모와 불량한 마을 간부들을 이기고 자유 결혼을 이룬다. 해방구 문예의 대표작으로 꼽혔고 영화와 가극으로 거듭 만들어졌다.
상세
무슨 이야기인가?
샤오얼헤이와 샤오친은 서로 사랑하지만 온 마을이 방해한다. 샤오친을 탐내는 불량배 형제 진왕과 싱왕은 마을 간부 자리를 꿰차고 있다. 샤오얼헤이의 아버지 얼주거는 점괘에 매달려 아들 짝이 안 맞는다며 어린 민며느리를 억지로 들인다. 샤오친의 어머니 싼셴구는 무당 노릇을 하며 젊은 남자들을 곁에 두기 좋아하는 터라, 딸이 거추장스러워 늙은 군관의 후처로 팔아넘기려 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몰래 앞날을 의논하다가 진왕 일당에게 ‘간통’ 현행범으로 묶여 구청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항일 민주 정부의 구장은 속셈을 꿰뚫어 보고 두 사람 편에 선다. 얼주거와 싼셴구는 혼인 자유의 새 풍속을 설교받고, 마을 사람들의 고발로 깡패 형제는 벌을 받는다. 소설은 두 사람의 결혼으로 웃으며 끝난다.
실제 사건은 어떻게 끝났나?
소설은 비극을 희극으로 뒤집은 것이다. 1943년 공산당 북방국의 선전 일꾼이던 자오수리는 랴오현(지금의 산시(山西)성 쭤취안현)에 조사하러 갔다가, 자유 연애를 하던 청년 웨둥즈가 마을 간부들의 박해로 죽은 사건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부모를 포함해 온 마을에 그를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때려죽인 것은 지나쳤지만 부모 말을 안 들었으니 혼이 나야 했다는 것이었다. 자오수리는 농민의 의식이 깨지 않으면 봉건과의 싸움이 어렵다고 느꼈고, 이 사건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왜 그렇게 중요했나?
농민이 실제로 읽고 들을 수 있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자오수리는 농민의 입말과 옛 이야기꾼의 수법을 썼다. 그는 5·4식 신소설을 써 보았다가 마을 사람들이 옛 형식을 더 좋아하는 것을 알고 방향을 바꾼 작가였다. 저우양은 1946년 그의 창작을 “마오쩌둥 문예 사상의 창작 실천에서의 승리”라고 불렀고, 1947년에는 그를 본받자는 ‘자오수리 방향’이 제창되었다. 그 자신은 문단의 문학가가 아니라 “문탄(文攤)”, 곧 시장 좌판의 문학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환영받지는 않았다. 신화서점은 출판을 막았고, 펑더화이가 “대중 조사에서 나온 이런 통속 이야기는 드물다”고 제사를 써 준 뒤에야 9월에 책이 나왔다. 나온 뒤의 호평은 대단했고, 저우양은 해방구 문예의 대표작이라 칭찬했다. 영화로는 1950년과 1964년 두 번 만들어졌고, 1952년에는 민족 가극이 되었다.
작가는 어떻게 되었나?
자오수리는 1959년 대약진의 부풀리기를 경계하는 장문의 글을 《홍기》에 보냈다가 ‘우경’으로 몰렸고, 1962년 잠시 복권되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산시성 전체의 비판 대상이 되었고, 1967년 1월 《해방군보》가 처음으로 바로 이 소설을 공격했다. 그는 비판 투쟁에서 갈비뼈와 엉덩뼈가 부러졌고, 1970년 9월 18일 투쟁 대회에서 쓰러져 23일에 숨졌다. 1978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