Нион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 · 1937년 9월

니옹 회의

Nyon Conference

1937년 9월 스위스 니옹에서 열린 지중해 연안국 외교 회의. 에스파냐 내전 중 이탈리아 잠수함이 공화파에 보급품을 운반하는 중립국 선박들을 공격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소집하였다. 소련 선박 티미랴제프호와 블라고예프호의 격침이 직접적 계기였으며, 회의 결과 잠수함 공격을 해적 행위로 규정하고 영불 해군의 공동 순찰 체제를 수립하여 지중해에서의 잠수함 공격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상세

배경

니옹 회의는 에스파냐 내전 중 지중해 해상 교통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1937년 9월 스위스 니옹에서 열렸다. 1936년 런던에 설치된 24개국 불간섭위원회는 에스파냐 내전 당사자들에 대한 무기 유입을 제한하려 했으나, 그 통제 조치는 널리 회피되었다. 영국에게 이 위원회는 독일·이탈리아에 대한 유화정책의 일부였고, 남북 전쟁이 범유럽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는 장치이기도 했다.

실질적 위기의 원인은 이탈리아의 무제한 잠수함전이었다. 이탈리아는 공식적으로는 전쟁 상태가 아니었고 공격한 잠수함은 자신의 국적을 밝히지 않았다. 1937년 8월 31일에서 9월 1일 사이 발렌시아만과 발레아레스 제도 사이에서 이탈리아 잠수함 이리데가 영국 구축함 하보크를 어뢰로 공격했고, 이는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의 이탈리아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강화했다. 소련 정부는 자국 상선 티미랴제프호와 블라고예프호를 격침한 주체로 이탈리아를 공식 지목했고, 이탈리아는 이를 '공격적이고 모욕적'이라며 반발했다.

영국은 지중해 연안을 가진 모든 나라와 독일에 회의를 제안했고, 이탈리아가 국제연맹을 아비시니아 문제와 연관지었기 때문에 제네바 대신 니옹이 회의장으로 선택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요청으로 소련에 초청장을 보냈으나 에스파냐 공화파 대표의 초청은 막았다. 독일은 해적 행위 문제는 불간섭위원회에서 다루어야 한다며 초청을 거부했고, 이탈리아도 뒤따라 불참했다.

회의와 협정

1937년 9월 10일에 개막한 회의는 14일 '지중해 협정' 서명으로 끝났다. 서명국은 불가리아, 이집트, 프랑스, 그리스, 루마니아, 튀르키예, 영국, 소련, 유고슬라비아였다. 협정은 중립국 선박에 대한 잠수함 공격을 1930년 런던 해군조약과 1936년 제2차 런던 해군조약의 잠수함 의정서 위반으로 규정했다. 중립국 선박을 공격한 잠수함, 그리고 최근 공격 현장 부근에서 그 공격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 잠수함은 가능하면 격침하도록 했다.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몰타 서쪽 해역을 순찰하고 수상한 잠수함을 공격하기로 했으며, 순찰 분담은 양국 정부가 정했다. 필요한 구축함 60척 가운데 영국이 절반을 조금 넘게 제공하고 프랑스가 나머지와 대부분의 항공기를 담당했다. 이탈리아가 원할 경우 티레니아해 순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항도 반복해 제시되었다. 9월 17일 제네바에서 두 번째 협정이 서명되어 수상 선박에도 같은 규정이 적용되었다.

이후와 평가

이탈리아는 같은 해 9월 13일 초청을 받았으나 영국·프랑스와 '절대적 대등'을 요구하며 거부했고, 이후 대등이 보장되면 번복하겠다고 밝혔다. 9월 30일 타협이 서명되고 11월 10일 이탈리아의 순찰이 시작되었다. 순찰은 영국 해군에 부담이 되었고 1938년 1월부터 완화되었으며, 잠수함 활동이 다시 나타나 2월 초에 전면 순찰이 재개되었다. 5월에 다시 완화되었고 8월에 협정은 중단되었다.

불간섭위원회와 국제연맹의 무능과 뚜렷이 대비되게 이 회의는 잠수함 공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과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협정은 공격을 '정체불명의 해적' 소행으로 돌리는 허구를 그대로 두었고 지중해의 해군 현상 유지를 보존했다. 니옹은 '유화론자들의 낙원'으로 규정되기도 했는데, 프랑코파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고 공화파는 거의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국 사학자들은 대체로 니옹을 침략에 맞선 중요한 조치로 보되 유보를 달았으며, 크리스토퍼 시턴-왓슨은 '외교적 승리'로 평가한 반면 질 에드워즈는 이탈리아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탈리아 사학자들은 니옹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소련 대표 막심 리트비노프는 결과에 만족해 했고, 소련이 지중해에 해군력을 파견할 '논쟁의 여지 없는 권리'를 강조했다. 다만 에스파냐 상선이 보호 대상에서 빠진 것을 유감으로 여겼는데, 다른 나라들은 그것이 내전에 대한 공식 개입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다른 나라들이 소련 해군의 지중해 순찰 참여에 반대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에게해 순찰을 맡기로 했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였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article on the conference: context, proceedings, provisions, and aftermath
  2. hrono.ru Soviet-era encyclopedia entry (Советская военн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confirms sinkings of Timiryazev (31 Aug 1937) and Blagoev (1 Sept 1937) as direct trigger, lists signatories, characterizes attacks as piracy by fascist powers
  3. hrlibrary.umn.edu full text of the Nyon Agreement (14 September 1937, 181 L.N.T.S. 137): defines attacks as 'acts of piracy,' establishes Anglo-French patrol zones, restricts submarine movement
  4.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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