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리치니나
Oprichnina
이반 4세(뇌제)가 1565년부터 1572년까지 시행한 통치 체제. 나라를 차르 직할령과 나머지 땅(젬시나)으로 갈라, 직할령에서 차르에게만 복종하는 친위대를 길러 세습 대귀족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폈다. 제도와 직할령 자체를 오프리치니나, 그 집행자 한 사람을 오프리치니크(러시아어 복수형은 오프리치니키)라고 부른다. 폐지 뒤 러시아어에서 오프리치니크는 권력의 폭력적 앞잡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남았고, 1940년대 소련 공식 역사학은 오프리치니나를 중앙집권 국가를 세운 진보적 군대로 재평가했다.
상세
무슨 뜻의 말인가?
러시아어 오프리치(опричь)는 '~을 제외하고', '따로'라는 뜻의 옛말이다. 오프리치니나는 본래 죽은 공(公)의 재산에서 과부 몫으로 따로 떼어 주던 별급 영지를 가리키는 낡은 법률 용어였는데, 이반 4세가 1565년 나라에서 자기 몫으로 떼어 낸 직할령의 이름으로 이 말을 되살렸다. 그래서 한 낱말이 세 가지를 겹쳐 가리킨다. 차르가 따로 떼어 낸 직할 영토, 그 영토를 기반으로 한 통치 체제, 그리고 그 체제가 시행된 시기다.
직할령에 복무한 친위대원 한 사람은 오프리치니크, 여럿은 오프리치니키다. 한국어 문헌은 복수를 대개 '오프리치니크들'로 옮긴다. 직할령 밖의 나머지 땅은 젬시나(земщина)라 불렀고, 형식상 종래의 보야르 두마(세습 대귀족의 회의)가 다스렸다.
왜 만들어졌는가?
16세기 모스크바 국가에서 보야르와 공 가문들은 세습 영지와 관직 서열을 쥔 세력이었고, 차르는 이들과 권력을 나눠야 했다. 발트해 진출을 노린 리보니아 전쟁(1558년 개전)이 길어지며 패전과 이반의 의심이 쌓이던 1564년 4월, 측근이던 안드레이 쿠릅스키 공이 리투아니아로 망명해 적군의 지휘관이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해 12월 이반은 예고 없이 모스크바를 떠나 알렉산드로바 슬로보다에 머물며, 귀족과 관리의 반역 때문에 퇴위하겠다는 편지와 일반 백성에게는 노여움이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차르 없는 국가를 상상할 수 없던 모스크바가 복귀를 청원하자, 이반은 1565년 2월 두 가지 조건을 받아 내고 돌아왔다. 반역자를 재량껏 처벌할 권리, 그리고 나라 안에 자기만의 직할령을 세울 권리였다. 오프리치니나는 이렇게 합법적 절차의 외형을 갖추고 출발했다.
무엇을 했는가?
북부의 상업로와 부유한 도시, 모스크바의 일부 구역이 직할령으로 편입되었고, 그 땅의 세습 귀족들은 영지를 몰수당한 채 변경으로 재배치되었다. 친위대는 처음 1천 명으로 출발해 6천 명 규모까지 늘었다. 오프리치니크는 검은 옷을 입고 말안장에 개 머리와 빗자루를 달았는데, 차르의 반역자를 개처럼 물어뜯고 나라 밖으로 쓸어 낸다는 표시였다.
숙청은 단계적으로 넓어졌다. 1568년 오프리치니나를 공개 비판한 모스크바 수좌대주교 필립이 폐위되었고, 1569년 트베리의 오트로치 수도원에서 오프리치니크 말류타 스쿠라토프에게 살해되었다. 같은 해 이반의 사촌으로 대안 후보로 거론되던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 공이 독살을 강요당했다. 1570년 초에는 노브고로드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도시 전체가 원정 학살의 대상이 되었고, 사망자는 연구에 따라 수천 명에서 그 몇 배까지 추산된다. 이어 그해 여름 모스크바에서 외교 문서를 총괄하던 이반 비스코바티를 비롯한 고관 수십 명이 공개 처형되었다. 오프리치니나 내부도 안전하지 않아서, 초기 지도부 다수가 뒤이은 숙청에서 처형되었다.
어떻게 끝났는가?
1571년 5월 크림 칸 데블레트 기레이가 모스크바까지 진격해 도시를 불태웠다. 방어를 맡았던 오프리치니나 군대는 제 몫을 하지 못했고, 이듬해 몰로디 전투에서 크림군을 격파한 것은 젬시나와 오프리치니나 부대를 통합해 젬시나 출신 보로틴스키 공이 지휘한 연합군이었다. 1572년 가을 이반은 오프리치니나를 폐지하고 몰수 영지의 일부를 되돌렸으며, 오프리치니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반이 죽을 때까지 '궁정'(двор)이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직할 기구를 유지했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후대는 어떻게 평가했는가?
19세기 초 카람진은 오프리치니나를 폭군의 광기가 낳은 무의미한 학살로 그렸다. 반대로 솔로비요프의 국가학파와 20세기 초의 역사가 세르게이 플라토노프는 세습 대귀족의 영지 권력을 깨뜨리고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기 위한 목적의식적 정책으로 읽었다.
1940년대 소련 공식 역사학과 예술은 이 두 번째 해석을 극단까지 밀고 갔다. 이반 뇌제는 국가 통일의 선구자로, 오프리치니나는 언제든 깃발을 말아 쥐고 전장을 떠날 수 있던 봉건 군대와 달리 차르에게 복무하는 진보적 정규군으로 재평가되었다. 이 노선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문서가 1947년 2월 26일 스탈린이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과 니콜라이 체르카소프를 불러 나눈 《이반 뇌제》에 관한 크렘린 대담이다. 스탈린은 "오프리치니나는 왕의 군대"라며 영화 2편이 오프리치니크를 쿠클럭스클랜처럼 그렸다고 비판했고, 2편은 개봉이 금지된 채 1958년에야 공개되었다. 특정 시기의 국가 폭력을 통치자 개인의 이름을 딴 말로 부르는 러시아어 조어법은 뒤의 예조프시나 같은 낱말에서도 이어진다.
전후 학계는 이 재평가를 사료로 되짚었다. 스크린니코프의 희생자 집계와 코브린의 연구는 오프리치니나가 보야르 계급을 겨눈 일관된 정책이었다는 통설 자체를 흔들었다. 처형된 사람의 다수는 귀족이 아니었고, 영지 구조는 폐지 뒤 대체로 복원되었으며, 남은 것은 제도라기보다 파괴의 흔적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어에서 오프리치니크는 특정 시대와 무관하게 권력의 폭력적 앞잡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관련 용어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어원(опричь·별급 영지), 1565년 성립 경위와 알렉산드로바 슬로보다 퇴거, 젬시나, 친위대 규모, 노브고로드 원정, 1571년 모스크바 소각과 1572년 폐지·낱말 금지
- 위키백과 (영문) 검은 옷·개 머리·빗자루, 필립 대주교·스타리츠키·비스코바티, 카람진부터 플라토노프·소련 재평가·코브린까지의 사학사
- grachev62.narod.ru 1947-02-26 스탈린·예이젠시테인·체르카소프 대담 원문: Опричнина — это королевское войско, 쿠클럭스클랜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