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토지법대강 (1947)
Outline Land Law of China (1947)
1947년 7~9월 허베이성 시바이포의 전국 토지회의에서 채택되어 10월 10일 공포된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 강령. 봉건·반봉건적 착취의 토지 제도를 없애고 경작자가 땅을 갖게 한다고 선언하고, 지주의 토지와 공유지를 마을 농회가 접수해 마을 전체 인구에 따라 균등하게 나누게 했다. 부농의 토지 몰수를 법으로 정해 1946년 5·4 지시보다 급진적이었다.
상세
전국 토지회의는 1947년 7월 17일 중공 중앙공작위원회 서기 류사오치의 주재로 시바이포에서 열려 9월 13일 초안을 통과시켰다. 대강의 핵심인 제6조는 다음과 같다.
第六条 乡村中一切地主的土地及公地,由乡村农会接收,连同乡村中其他一切土地,按乡村全部人口,不分男女老幼,统一平均分配,在土地数量上抽多补少,质量上抽肥补瘦,使全乡村人民均获得同等的土地。
제6조 마을의 모든 지주 토지와 공유지는 마을 농회가 접수하여 마을의 다른 모든 토지와 합쳐, 마을 전체 인구에 따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통일적으로 균등하게 분배한다. 토지의 양에서는 많은 데서 떼어 모자란 데를 채우고, 질에서는 기름진 땅을 떼어 메마른 땅을 보충하여, 마을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토지를 얻게 한다.
대강은 군중을 대담하게 동원하지 못하고 지주·부농의 이익을 돌본 「우경」 오류를 비판했고, 「모든 권력은 빈농단 대표회의에」, 「빈농과 고농이 천하를 얻고 천하를 다스린다」 같은 구호가 나왔다. 이 과정을 목격한 윌리엄 힌턴은 대강이 미국 남북전쟁의 노예해방 선언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대강 아래의 운동은 많은 마을에서 지주로 몰린 사람들에 대한 구타와 살해로 번졌다. 1948년 1월 런비스와 시중쉰이 과잉을 비판하고 마오의 지시가 덜 급진적인 쪽으로 돌아서면서 중농 보호와 폭력 억제가 강조되었고, 6월 화베이 대부분에서 토지개혁이 마무리되었다. 공산당이 승리할 무렵 해방구 인구의 절반 이상이 토지개혁을 거쳤고 2,500만 헥타르가 넘는 땅이 재분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