Пензенское соглашение · 1918년 3월 25일

펜자 협정

Penza Agreement

1918년 3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와 볼셰비키 정부가 펜자에서 체결한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개인호신용 무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장을 넘기는 대가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철도 통행을 보장받기로 한 내용이다. 군단은 편대당 168명의 무장 중대와 기관총 1정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포병 무기는 적군에 인도되었다. 이 협정은 불과 두 달도 안 되어 첼랴빈스크 역 충돌 사건과 트로츠키의 전면적 무장해제 명령으로 사실상 파기되었고, 군단의 봉기로 이어져 러시아 내전의 시베리아 전선을 열었다.

상세

철도 통행과 무장해제의 교환

1918년 3월 펜자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 대표와 볼셰비키 정부 대표가 협정을 맺었다. 서명 날짜는 사료마다 다르게 전한다. 영문 위키백과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사 계열 서술은 3월 25일,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3월 26일로 적는다. 어느 쪽이든 협정의 내용은 같다.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철도 통행을 보장받는 대신 개인 호신용 무기를 빼고 대부분의 무장을 넘기기로 했다. 협정문은 군단이 「전투 단위가 아니라 반혁명 분자들의 습격에 대비해 얼마간의 무기를 지닌 자유 시민의 집단」으로 이동한다고 규정했고, 인민위원회는 군단이 성실하고 진실하게 충성할 것을 조건으로 러시아 영토 안에서 온갖 협력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회의에는 스탈린을 비롯한 인민위원회 대표들이 참석했다.

무기의 구체적 상한은 3월 27일자 군단 명령 제35호에서 정해졌다. 각 열차에는 부사관을 포함해 168명으로 구성된 무장 중대 하나와 기관총 한 정만 남기고, 소총 한 정당 300발, 기관총 한 정당 1200발의 탄약을 지니게 했다. 나머지 소총과 기관총, 모든 포는 펜자의 특별 위원회에 넘기게 했는데, 이 위원회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대표 3명과 소비에트 권력 대표 3명으로 구성되었다. 포병 장비는 이미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대부분 붉은 군대에 인도된 상태였다.

왜 무장해제가 파국이 되었나

양측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군단 지도부는 볼셰비키가 중앙 열강과의 화친을 위해 자기들을 희생시키려 한다고 의심했고, 볼셰비키는 군단을 연합국의 반혁명 개입 도구가 될 위협으로 보았다. 동시에 볼셰비키는 전문 병력이 절실해 군단을 붉은 군대에 편입시키려 했다. 군단 내부에서는 부분 무장해제 자체가 큰 불만을 낳았고, 이것이 볼셰비키에 대한 적대적 불신의 빌미가 되었다. 철도 수송 능력의 부족도 문제였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볼셰비키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포로의 서쪽 송환을 우선했고, 군단의 동진은 그만큼 늦어졌다.

군단은 63개 편성, 편성당 40량의 열차로 동쪽으로 향했다. 첫 열차는 3월 27일에 출발해 한 달 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5월이 되자 군단의 열차는 펜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늘어서 여섯 집단으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 첼랴빈스크 집단은 8천 명이 넘었고 보이체호프스키 중령이 지휘했다.

5월 14일 첼랴빈스크에서 충돌이 터졌다. 동쪽으로 가던 군단 열차와, 중앙 열강 편에 서서 서쪽으로 가던 헝가리인 포로 열차가 맞닥뜨렸고, 두 민족주의가 맞부딪치며 근거리 교전이 벌어졌다. 군단이 헝가리인들을 이기자 지역 볼셰비키가 개입해 군단 병사들을 체포했고, 군단은 철도역을 습격해 자기 병사들을 풀어낸 뒤 첼랴빈스크 시를 사실상 장악하고 시베리아로 통하는 볼셰비키의 철도 연결을 끊었다. 이 사건은 결국 평화적으로 수습되었지만, 예카테린부르크를 위협하고 시베리아 전역에서 적대 행위를 촉발했다는 이유로 볼셰비키가 군단의 무장해제를 명령하는 근거가 되었다.

협정의 파기와 군단의 봉기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는 열차들의 부분적 무장해제에 동의했지만 현장의 병사들은 이를 무장해제와 외국 송환으로 받아들였다. 4월 21일 치체린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에 군단 열차의 동진을 중지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독일 대사의 압력에 따른 조치였다. 레닌 정부는 연합국의 일본 개입 음모를 알게 된 뒤 철수 방향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로 바꾸자고 요구하기도 했다. 군단 병사들은 이 명령을 소비에트 정부가 자기들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넘기려는 의도로 읽었다.

5월 첼랴빈스크 충돌 뒤 트로츠키는 군단의 무장해제를 명령하며 병사들이 무기를 넘기든지 아니면 총살되든지 둘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민족회의의 반대에도 군단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통행을 요구했다. 6월 초까지 약 4만 명의 군단은 펜자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철도 연선의 소비에트 권력을 무너뜨렸고, 이것이 러시아 내전의 시베리아 전선을 열었다. 6월 8일 사마라에 사회혁명당 계열의 코무치 정부가 세워졌다.

평가

펜자 협정은 무장해제 조항이 이행되기 전에 무너진 문서다. 볼셰비키는 동쪽으로 나가는 군단을 통제 가능한 위협으로 관리하려 했고, 군단은 프랑스로 가기 위한 통로를 확보하려 했다. 양쪽 모두 상대의 의도를 오판했다. 볼셰비키는 무장해제 요구가 군단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점을, 군단과 민족회의는 소비에트 정부의 불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늦게 깨달았다. 협정이 파기된 자리에서 러시아 내전은 볼가와 우랄, 시베리아로 확대되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vers the Penza Agreement of 25 March 1918: Legion surrenders all but personal guard weapons for rail passage to Vladivostok; breakdown after Chelyabinsk incident
  2. 위키백과 (러시아어) details the 26 March 1918 Penza Agreement text (Сталин present), the precise arms limits per echelon (168 men, one machine gun, 300 rounds per rifle), and Trotsky's 25 May disarmament telegram
  3. storymaps.arcgis.com non-Wikipedia source describing the Penza Agreement as ensuring safe passage to Vladivostok in exchange for surrendering most weapons, and the Chelyabinsk dispute that led to its collapse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러시아어)
  6. storymaps.arcg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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