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적 부담 (프랑스)
Seigneurial dues (France)
프랑스 구체제에서 영주(seigneur)가 영지(seigneurie)에 대해 보유한 토지·인신상 권리에서 발생한 의무적 급부. 영주는 귀족·평민·여성이거나 수도원 등 법인일 수 있었고, 부담은 지대(cens)·현물·노역(코르베)의 형태를 취했으며 영주 재판권과 함께 작동했다. 1789년 8월 법령은 인신 예속에서 유래한 부담만 무상 폐지하고 나머지는 상환 대상으로 남겼고, 1793년 7월 17일 국민공회가 상환 없이 전면 폐지했다.
상세
내용과 범위
영주적 부담은 프랑스 구체제에서 영주가 영지에 대해 보유한 권리에서 나온 의무적 급부를 가리킨다. 프랑스어 원어는 droits seigneuriaux, redevances seigneuriales이며, 'seigneurialism'은 장원제(manorialism)의 동의어로도 쓰인다. 영주는 개인일 수도, 수도원·성당 참사회·군사수도회 같은 법인일 수도 있었다. 부담은 지대(cens)·현물·노역(코르베)의 형태를 취했고 영주 재판권(seigneur justicier)과 함께 작동했다.
세부 항목으로는 영주 재판소의 재판 수입과 관할, 방앗간·빵굽는 화덕·포도압착기 등 영주 시설 사용료(banalités), 토지 양도·상속 시 부과되는 단일금, 양도·판결·혼인 관련 수수료(lods et ventes, quint, requint, treizième)가 있었다. 토지 양도 수수료의 구체적 수준은 관습법에 따라 지역마다 달랐다. 1789년 7월 4일 이전 상태에서 영주적 부담은 프랑스 경지의 4분의 1 이상에 부과되어 있었고 대지주 소득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1789년 8월 법령: 무상 폐지와 상환의 구분
1789년 8월 4일 밤 의회는 영주적 권리와 성직자 십일조를 함께 폐지 대상으로 삼았고, 공포문은 '국민의회는 봉건 제도를 전적으로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대상은 제2신분(귀족)의 영주적 권리와 제1신분(가톨릭 성직자)이 징수하던 십일조였다.
그러나 8월 11일 법령 제1조는 봉건적·censuel 부담 가운데 '실제적 또는 인신적 예속에서 유래하거나 이를 대표하는' 것은 배상 없이 폐지하고, 그 밖의 부담은 모두 상환(redeemable) 대상으로 규정했으며 상환 조건과 방식은 의회가 정하도록 했다. 상환 전까지 해당 부담은 종전대로 징수되었다. 제4조는 영주 재판소를 폐지하고, 제5조는 모든 종류의 십일조를 폐지했으며, 제6조는 지대(ground rents)를 상환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후 비상환 부담의 신설을 금지했다.
따라서 1789년 8월의 '무상 폐지'는 인신 예속(serfdom)에 국한되었고, 지대(cens)를 비롯한 영주적 부담 대부분은 상환 대상으로 남았다. 1790년 3월 5일 봉건위원회 보고로 구체화된 상환 조건은 농민 대다수가 지불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위키백과 본문은 연간 지대의 30배로 서술한다(다른 연구는 최대 25배로 제시). 1790년 5월 3~9일 제헌의회의 라샤 법령이 상환 제도를 시행했다. 상환 조건이 농민에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다수 농민은 부담 납부를 중단했다.
1793년의 전면 폐지
프랑스에서 영주적 부담의 종국적 법적 폐지는 1793년 7월 17일 국민공회 결정으로, 상환 조건 없이 무상으로 폐지되었다. 이로써 1789년 이후 3년간의 상환 제도는 종료되었다. 크로포트킨은 1789년 8월의 상환 조항이 봉건적 권리의 폐지를 1793년 8월까지 5년간 지연시켰다고 평가했다.
동명 이역사 개념과의 구분
누벨프랑스의 영주제(régime seigneurial)는 세습적 라상티뉴(cens et rentes) 중심의 토지 보유제로, 프랑스 본국의 봉건적 부담과 동일하지 않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1789년에 폐지되었으나 누벨프랑스(퀘벡)의 영주제는 1854년에야 폐지되었다. 잉글랜드의 장원제(manorialism)에서는 마지막 봉건적 부담이 프랑스 혁명기에 폐지되었고, 동프로이센의 융커 리터구트 장원제는 2차 세계대전까지 잔존했다. 'seigneurial' 개념은 프랑스·영국·프로이센에서 제도적 내용이 각기 다르다. 조선(1392~1897)의 신분제·공납·군역은 이 항목의 범위가 아니며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노선상 함의
봉건적 부담의 최종 폐기는 1789년 8월의 선언이 아니라 1793년 혁명정부 하에서 완성되었다. 1789년 8월 11일 법령은 폐지와 상환을 동시에 규정한 타협이었고, 농민들은 상환을 사실상 거부했다. 사회 변혁에서 노동계급·농민 대중의 실천적 압력이 법제의 급진화를 추동한 사례로 서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