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공화국
sister republic
프랑스 혁명 전쟁 중 프랑스 제1공화국이 점령지에 세운 위성 공화정들을 가리킨다. 프랑스를 본떠 혁명적 공화정을 세운 나라들이라는 뜻이며, 명목상 독립국을 표방했으나 프랑스의 군사적 보호에 강하게 의존했다. 프랑스어로는 '레퓌블리크 쇠르(république sœur)'라 한다.
상세
기원
자매공화국 현상의 출발점은 1792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의 이념적 팽창이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인권선언의 원칙에 따라 기존 지배자를 전복하려는 모든 민족을 무력으로 지원하겠다고 선언했고, 파리에 망명한 외국 급진 인사들(아나카르시스 클루츠, 토머스 페인, 페터 오크스 등)이 이를 부추겼다. 로베스피에르는 '무장한 선교사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며 회의적이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이 더 정확했다.
연혁
첫 자매공화국은 1795년 1월 19일 선포된 바타비아 공화국이었다. 이어 1796년 치스파다나, 1797년 치살피나·리구리아·헬베티아, 1798년 로마, 1799년 파르테노페아가 세워졌다. 1799년 이후 프랑스가 신중론으로 돌아서면서 자매공화국은 프랑스 혁명의 특정 시기의 현상으로 규정되었다.
제도
제도적으로 자매공화국은 선출 의회, 법전, 미터법, 프랑스식 행정 재조직 등 프랑스 혁명 체제를 모방했으나, 많은 애국파는 이 제도를 자기 나라 전통에 맞게 변형하려 했다. 치살피나 공화국의 첫 헌법(1797년 7월 8일 채택)은 프랑스 1795년 헌법에 기초해 5인 디렉투아르를 두었으나, 최고 권위는 프랑스 군대 사령관에게 있었다.
모순
자매공화국에는 세 가지 주요 결함이 있었다. 전쟁의 결과로만 탄생했고, 대다수 '시민'에게 낯선 외래적 성격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자원이 프랑스군이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전략의 기반으로 신속히 수탈되었다. 일반 민중에게 자매공화국의 창설은 침략·약탈·강간의 결과였고, 제도화는 중과세와 징병('피의 세금')을 가져왔다. 정부들은 프랑스 군정 아래에서 프랑스군을 먹여 살리는 '젖소' 역할에 머물렀다.
바타비아 공화국에서는 프랑스가 '해방자'를 자처했지만, 1795년 5월 16일 헤이그 조약으로 영토 할양과 막대한 배상금, 25,000명의 프랑스 점령군 유지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대외·군사 정책을 프랑스가 지시하는 클라이언트 국가가 되었다. 헬베티아 공화국은 1798~1803년 존재했고, 프랑스가 '스위스 민중의 해방'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점령군의 숙식 비용을 현지 주민이 부담하도록 강요해 경제를 고갈시켰으며, 1802년까지 1,200만 프랑 부채를 지고 스테클리크리크 내전 등으로 붕괴했다. 치살피나/이탈리아 공화국은 나폴레옹 유럽에서 세금과 징병 부담이 가장 무거운 지역 중 하나였고, 프랑스 자체의 전쟁 비용을 덜기 위해 늘 대규모 프랑스군이 주둔했다.
간섭과 지역 자치·전통적 자유의 침해는 강한 반발을 샀다. 헬베티아 공화국에서 저항은 전통적 가톨릭 주에서 가장 강렬했고, 1798년 봄 반란이 일어났으며 프랑스·헬베티아군이 이를 진압했으나 새 세금·중앙집권·종교 적대에 대한 반감으로 반대 여론이 커졌다. 1799년 스위스는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군 사이의 전장이 되었고, 주민들은 후자 두 편을 주로 지지했다.
종말과 유산
자매공화국은 대개 실질적 대중 지지를 얻지 못하고 프랑스 군력으로만 유지된 인위적 창조물이었다. 다만 일부(헬베티아·바타비아·치살피나/이탈리아)는 내부적 뿌리를 지녔고 오래 존속하며 이들 나라의 19세기 성격 형성에 토대를 놓았으며, 바타비아의 헌법 제정 과정도 나폴레옹이 루이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강요할 때까지는 주로 내부 정치 요인에 의해 추진되었다. 다른 많은 공화국은 단명했다.
자매공화국은 프랑스의 클라이언트 정권으로서 프랑스와 현지 권력의 혼합을 통해 점령지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Paul D. Van Wie). 1804년 프랑스 제1제국 성립 이후 대부분 해체되었고, 프랑스는 여러 자매공화국을 병합하고 나머지는 보나파르트가 구성원이 다스리는 군주제로 전환했다. 다만 개별 공화국의 종말은 다양하다. 바타비아는 1806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즉위로 끝났고, 헬베티아는 1803년 나폴레옹의 중재법으로 폐지되었으며, 일부는 1805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남이탈리아와 아일랜드의 더 단명한 공화국들은 이후 세대의 자유·급진 활동가들에게 '고향 땅에서의 진정한 자유·의회 정치'의 상징이 되었고, 1945년 이후에는 부역 협력이 아니라 진보의 등불로 재조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