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교육운동
Socialist Education Movement
대약진 조정기 이후 농촌 간부의 부패와 「자본주의 부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1963년 시작된 운동으로, 장부·창고·재산·노동점수를 조사하는 「사청(四淸)」 운동으로도 불린다. 류사오치는 공작대를 파견해 기층 간부를 대규모로 처벌하는 방식을 택했고, 마오는 1965년 「23조」에서 표적을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옮겼다. 이 대립이 문화대혁명에서 류사오치 타도로 이어졌다.
상세
운동의 출발점은 1962년 9월 8기 10중전회에서 마오가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고 한 데 있다. 대기근 뒤 농촌에서 청부 생산과 시장이 되살아나고 간부들이 이를 묵인하자 마오는 이를 계급투쟁의 부활로 보았다. 1963년 5월 「전10조」는 빈농·하중농에 의지해 간부를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류사오치와 아내 왕광메이가 허베이 타오위안에서 실험한 방식은 공작대가 마을에 상주하며 간부를 격리 심사하는 것이었고, 1964년 「후10조 수정안」으로 전국화되었다. 수백만 명의 기층 간부가 조사받았고 자살이 잇따랐다. 마오는 1964년 말 이 방식이 「대중을 믿지 않는다」며 비판했고 1965년 1월 「23조」는 운동의 성격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재규정했다.
「23조」에 등장한 「당권파」라는 표현은 이후 문화대혁명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농촌에서 문화대혁명에 흡수되었고, 류사오치가 운동 방식을 놓고 마오와 정면으로 충돌한 일은 그가 「중국의 흐루쇼프」로 지목되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