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운동(히라크)
Southern Movement (al-Hirak)
2007년부터 남예멘 지역에서 활동한 남부 출신 중심의 정치 운동이자 무장 조직이다. 처음에는 남부의 경제적·정치적 주변화와 퇴역·해고 인원에 대한 차별에 반대했고, 이후 예멘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와 옛 남예멘 독립국가의 회복을 요구했다.
상세
통일과 1994년 내전: 운동의 배경
남예멘(예멘인민민주공화국)과 북예멘(예멘아랍공화국)은 1990년 5월 22일 통일해 예멘공화국을 구성했다. 1994년 내전은 5월 4일부터 7월 7일까지 통일 지지 북부 세력과 사회주의 분리주의 남부 세력 사이에 벌어졌다. 옛 남예멘 지도부가 권력 장악 시도 속에 통일 합의를 종료하면서 시작된 전쟁에서 남부 세력은 패배했고, 예멘민주공화국은 5월 21일 선포됐으나 알리 살림 알비드를 유일한 대통령으로 삼은 채 7월 7일 소멸했다. 예멘사회당 지도자 대부분은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남부는 사나 기반 집권 세력의 부패·인사 편중·선거 부정과 통일 후 권력분점 합의 파기의 대상이 됐다. 예멘 석유의 상당 부분이 있는 남부의 사유지는 압수돼 사나 정부와 연결된 인물들에게 분배됐고, 수십만 명의 남부 군인·공무원이 생계 이하의 연금으로 조기 퇴직한 뒤 북부 출신 관리로 대체됐다. 아덴은 투자가 사나로 몰리면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소외됐다. 자말스타운 분석은 내전 뒤 살레 정부가 남부에서 징벌적 정책을 폈다고 본다. 남부 군대의 장교·부사관 대부분이 강제 퇴역했고, 많은 남부 관료가 밀려났으며, 부족·정치적 동맹 세력이 남부의 재산과 토지를 차지하도록 허용됐다는 것이다. 글로벌시큐리티는 예멘사회당 계열 남부 군 지휘부가 해체되고 살레 측근 출신 북부 인사가 요직을 채웠으며, 패배 뒤 사면과 복귀 약속에도 남부 장병 재통합이 더디게 진행돼 불만과 소요가 커졌다고 기록한다.
2007년의 발단과 요구의 변화
2007년 5월 수년간 연금을 받지 못한 퇴역자들이 권리 개선과 남부의 경제적·정치적 주변화 중단을 요구하는 소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가 아덴을 비롯한 곳으로 번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요구는 분리와 남예멘의 독립국 재건으로 확대됐다. 정부는 시위자를 '국가의 배교자'로 규정하고 실탄으로 해산하는 강경 대응으로 맞섰고, 여기서 분리주의 단체들의 느슨한 연합체인 남부 운동이 생겨났다.
아랍어 위키백과는 2007년 7월 남예멘의 퇴역 군인들이 아덴과 알달레에서 항통일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고 기록한다. 9월에는 퇴역 군인 협회가 주최한 알달레 농성에서 보안군과 시위대의 충돌로 3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11월에는 남부 독립 기념일인 11월 30일을 앞두고 아덴의 퇴역자 축제로 향하던 대규모 인파를 보안군이 해산하는 과정에서 1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알자지라는 운동이 초기에는 평등과 해고된 군인·공무원의 복직, 통일 경로 개혁을 요구했으나 2007년 7월 7일 남예멘 독립 요구로 확대됐고, 2007년 초반 여러 단체·세력·인물을 묶는 구심점으로 결성됐다고 전한다.
조직 구조와 내부 분화
제임스타운 분석은 2008년 중반 남부 행동 단체들이 영향력 있는 남부 퇴역 장교 협회를 이끌던 나세르 알누바 장군의 명목상 지도 아래 모여 남부 이동 운동(Southern Mobility Movement)이라는 이름의 우산 조직을 구성했다고 본다. 지도부와 조직 구조는 이후에도 모호했고,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다수 단체의 우산이었다. 래드판 지역의 SMM 간부 나세르 알카브지는 이 운동을 민간사회단체·정당·결사·셰이크·유지·학자·정치인·무소속이 모두 참여하는 대중운동이며 정당한 권리 회복을 위한 평화적 투쟁을 믿는다고 설명했다(예멘포스트 2010년 4월 10일). 구성원들은 처음에 북예멘 주민과의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시민권'을 요구했고, 2008년부터는 분리와 독립 남예멘 국가 재건 요구가 이를 대체했다. 2009년 하반기와 2010년 내내 분리 쪽으로 뚜렷이 기울었는데, 시위자와 보안군 사망자를 낸 살레 정부의 강경하고 군사화된 대응이 큰 요인이었다.
알자지라는 운동이 이데올로기보다 부족·정치·사회·경제적 고려로 형성됐다고 보고, 그 주류 분파로 남부 해방을 위한 평화적 남부 운동 최고위원회를 들면서 남부 독립을 위한 국가 최고기구, 남부 국가 해방·회복을 위한 최고국가위원회, 남부민주연합, 남부 청년·학생 연합 등의 분파를 함께 언급한다.
2007~2009년 탄압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09년 12월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보고서에서 2007년 이후 남부 주민들이 중앙정부의 부당 대우, 특히 남부 출신의 공직·보안직 해고에 반대해 농성·행진·시위를 조직했다고 기록했다. 2008년까지 많은 남부 주민이 분리와 독립 남예멘 국가 회복을 요구했다. 보안군, 특히 중앙보안군은 불법 살인, 임의 구금, 구타, 집회·표현의 자유 탄압, 언론인 체포 등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저질렀고, 이러한 공격에 대한 면책은 분리 여론을 키웠다.
HRW는 보안군이 대부분의 경우 평화적 시위자에게 명백한 이유나 사전 경고 없이 치명적 무력을 사용해 국제 기준을 위반했다고 봤고, 시위대도 경찰 폭력에 대응해 차량 방화·돌 투척 등 폭력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한다. HRW가 심층 조사한 6건의 시위에서 예멘 보안군은 이 기준을 거의 모두 위반했다. 2009년 4월 15일 알하빌라인 시위에서는 진압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자동화기를 직접 발사했고, 5월 21일 아덴 시위에서 보안군은 경고나 도발 없이 발포해 시위자 23명이 다쳤다(전직 군 장교이자 알히라크 활동가인 나스르 하무자이바 등). 5월 30일 알시흐르에서 아와드 바람이, 5월 31일 알달레에서 타우피크 알자디가 숨졌으나 정부 조사는 없었다.
HRW는 2007년 시위 시작 이후 수천 명의 참가자와 구경꾼, 어린이까지 단기 예방 구금, 평화적 참가자에 대한 장기 구금, 시위 지도자로 의심되는 인물의 재판 없는 장기 구금 형태로 임의 구금됐다고 기록한다. 2008년 4월 보안군은 알히라크 지도자 12명(아흐메드 빈 파리드, 알리 알가리브, 야흐야 갈리브 알슈아이비, 하산 바움, 알리 무나사르 등)을 체포해 약 6개월간 정치보안 감옥의 지하 독방에 구금한 뒤 '통일 훼손'과 '분리 선동'이라는 모호한 정치적 혐의로 재판했고, 9월 살레 대통령이 이들을 사면했다. 이후 알히라크 지도자 대부분은 임의 구금과 정치적 기소를 피해 산악 지역에 은신했다.
HRW는 언론·표현 탄압도 기록한다. 2009년 5월 4일 정보부는 남부 사건 보도와 관련해 독립 일간·주간지 8개(알아얌, 알마스다르, 알와타니, 알디야르, 알무스타킬라, 알니다, 알샤리으, 알아할리)를 정간했다. 예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읽힌 독립 신문 알아얌은 5월 1~2일 압수됐고, 5월 4일 정체불명의 무장 인물이 본사를 향해 총을 쏴 발행이 중단됐으며, 5월 12일 보안군이 한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며 본사를 포위해 구경꾼 1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보안군은 블로거(살라 알사칼디, 푸아드 라시드)와 학자도 구금했고, 망명한 남부 정치인이나 알히라크 지도자 인터뷰와 보안군 폭력 사진의 게재를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불문의 '레드라인'을 적용했다.
요구와 무장 충돌
HRW에 따르면 탄압에도 남부의 요구, 즉 해고된 인원의 군·공직 복직, 연금 인상, 부패 척결, 예멘 부(특히 석유 수입)의 공정한 분배는 계속됐다. 운동은 평화적 노선을 선언했지만 무장 충돌도 있었다. 2009년 4월 말에서 5월 초 아덴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알하빌라인 인근 알아흐마라인 산악에서 무장 충돌이 벌어져 군인 여러 명이 숨지고 민간인이 다쳤으며, 2009년 7월 아비안 주 진지바르에서 타리크 알파들리 추종 세력과 보안군이 충돌해 최소 12명이 숨졌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알히라크에 무장 조직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충돌은 운동이 선언한 평화적 노선과 다수 구성원의 행동에 비춰 예외적 사건이었고 남부 전역으로 무장 충돌이 번질 위험을 드러냈다.
알히라크와 알카에다의 관계는 논쟁적이었다. 예멘 정부는 알히라크와 알카에다의 연계를 부각하려 했고(타리크 알파들리의 공모 주장), 알히라크 지도자이자 전 의원인 살레 알샨파라는 어떤 연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알카에다의 예멘 지도자 나시르 알우하이시는 2009년 5월 14일 음성 성명에서 알히라크를 공개 지지했으나, 한 달 뒤 알카에다 국제 지도부의 무스타파 아부 알야지드는 2009년 6월 22일 남부 분리에 대한 지지를 부인하며 단일 이슬람 국가를 위한 투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HRW와 면담한 일부 예멘 분석가와 외국 외교관 2명은 알히라크와 알카에다의 직접 연계 주장을 축소했고, 한 유럽 대사는 이를 정부 관리들이 쓰는 '주의를 돌리기 위한 수단'이라고 불렀다. 2009년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무자헤딘으로 싸운 남부의 이슬람주의 지도자 타리크 알파들리가 살레와의 동맹 종료를 선언하고 알히라크에 합류해 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주었고, 같은 해 주요 도시 대부분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다. 2009년 4월에는 옛 남예멘의 모리타니 대사 카심 아스카르 자브란이 '통일 위협과 당국에 대한 싸움 선동' 혐의로 체포돼 사나의 정치보안 감옥으로 이송됐다.
2011년 이후: 제도 정치와 남부과도위원회
제임스타운 분석은 2011년 2월 전국적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면서 SMM이 활동을 강화해 남부 전역의 시위와 파업을 조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고, 나세르 알누바 장군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사나 등 북부의 반정부 시위자들과 연대한다고 밝혔다고 기록한다. 알누바가 이끄는 남부 독립 최고국가위원회(SNC)는 SMM 산하에서 분리와 독립 남부 재건을 계속 추구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2011년 봉기가 확산되면서 운동은 서기장을 통해 분리 요구를 일시 중단하고 전국 시위에 합류했으나 일부 분파는 이를 거부하고 분리 요구를 계속했다. 살레가 물러나고 후티가 사나에 들어온 뒤 운동은 안사르 알라의 남부 확장을 우려했고, 2014년 11월 14일에는 아덴의 농성 광장에 수천 명의 지지자가 모여 남부 분리를 다시 요구했으며, 그 전에 예멘 정부에 11월 말까지 남부에서 군인과 공무원을 철수하라고 요구하며 확전을 경고했다.
알자지라는 2015~2017년 제도적 국면도 기록한다. 후티가 권력을 잡고 남부로 확장하자 남부 세력은 이에 저항했고, 2015년 7월 17일 예멘 정부에 충성하는 세력과 남부 운동에 충성하는 세력 등이 아덴 주를 후티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며, 이후 아덴은 예멘 국가의 임시 수도이자 여러 부처와 정부 기구의 임시 소재지가 됐다. 2017년 4월 27일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은 알주바이디를 해임하고 외교부 대사로 임명하는 공화국령을 발표했으며, 압둘 아지즈 압둘 하미드 알마플라히를 아덴 주지사로 임명하고 빈 브레이크를 국가장관직에서 해임해 조사에 회부했다. 운동은 5월 5일 아덴에서 이 결정들을 거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같은 해 5월 11일 알주바이디는 남부 운동이 남부를 관리·대표할 정치 지도부 구성을 맡긴 지 일주일 만에 '남부과도위원회 수반부' 구성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26명으로 알주바이디가 수반, 하니 빈 브레이크가 부수반을 맡았고, 아비안 주를 제외한 남부 주지사들과 운동의 여러 분파 인사가 참여했다. 그러나 결성은 알히라크 모든 구성 요소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일부 인사는 위원회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예멘 대통령실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고 걸프협력회의도 분열·분리 요구를 거부하라고 촉구했다.
아랍어 위키백과는 2013년 국가대화회의와 이후의 탄압도 기록한다. 2013년 3월 18일 시작 예정이던 예멘 국가대화회의 565석 가운데 85석이 남부 운동에 배정됐고 남부 주 주민에게 회의 의석의 50%가 배정됐다. 운동의 두 분파가 참여하기로 했지만 망명 중인 전 부통령 알리 살림 알비드가 이끄는 분파를 비롯한 대부분은 여전히 참여를 거부했다. 2013년 3월 초 아덴에서 유혈 충돌이 있은 뒤 하디 대통령이 아덴을 방문해 약 19년 만에 오만에서 귀국한 아흐메드 빈 파리드 알수라이미 등 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 참여를 설득하려 했다. 2013년 11월 30일에는 1967년 11월 30일 마지막 영국군 철수 기념 시위를 열려던 무장 운동 구성원의 아덴 진입을 보안군이 막으면서 시가 입구에서 충돌이 벌어져 구성원 1명이 다쳤다. 2013년 2월 21일 아덴 기념 시위 뒤에는 통일 지지자 수천 명이 모인 광장에 접근하려던 무리에게 경찰이 발포해 활동가 3명이 숨졌고(운동 대변인 파티 빈 라즈라크 주장), 양측에서 수십 명이 다치고 운동 구성원 6명이 체포됐다. 국제앰네스티는 보안군이 분리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4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밝히며 이를 정부의 열악한 인권 기록에 새로 더해진 오점이라고 규정했다.
운동은 남부의 독립 국가 시기와 1994년 예멘민주공화국 사건, 예멘사회당의 통치 경험과 구분해 서술해야 한다. 운동 자체가 하나의 통일된 조직이 아니라 이질적 분파의 연합체였다는 점, 정부의 탄압 기록과 운동 내부의 노선 갈등을 함께 봐야 한다. 영어 위키백과는 남부에서 운동의 존재가 제약되고 옛 남예멘 국기 게양이 아덴에서 범죄로 취급됐다고 전하며, 2007~2009년 시위로 100명이 숨졌다는 서술은 출처 요구가 붙어 있어 사실로 단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