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 노동법 (1847)
Ten Hours Act (1847)
1847년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공장법(10 & 11 Vict. c. 29). 섬유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과 13~18세 청소년의 노동 시간을 1847년 7월 1일부터 주 63시간, 1848년 5월 1일부터 주 58시간, 곧 하루 10시간으로 제한했다. 15년 가까이 이어진 「10시간 운동」의 결실이며, 마르크스는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선언에서 이를 중간계급의 정치경제학이 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에 처음으로 굴복한 원칙의 승리라고 불렀다.
상세
1833년 공장법은 9~13세 아동의 노동을 하루 8시간, 14~18세 청소년의 노동을 하루 12시간으로 묶었지만 집행이 어려웠다. 랭커셔와 요크셔의 공장 노동자들은 1833년 법 이전부터 「단축 시간 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공장 노동자의 10시간 노동일을 요구했다. 청소년의 노동 시간을 줄이면 공장 운영의 사정상 성인 남성의 노동 시간도 사실상 함께 줄어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의회 안에서는 토리 의원 애슐리 경(뒤의 제7대 섀프츠베리 백작)이, 의회 밖에서는 리처드 오슬러가 운동을 이끌었다.
1844년 하원은 12시간안과 10시간안을 모두 부결했고, 1846년 애슐리의 10시간 법안도 2독회에서 193대 203으로 졌다. 곡물법 폐지 뒤 필 내각이 무너지고 러셀의 휘그 내각이 들어서자, 1847년 1월 토드모던의 면방적 공장주이자 올덤 선출 의원인 존 필든이 같은 법안을 다시 냈다. 법안은 2독회를 195대 87로, 3독회를 151대 88로 통과했다. 가장 거세게 반대한 것은 관세 장벽에 반대하던 같은 경제 이론으로 노동 조건의 법적 제한에도 반대한 존 브라이트 같은 자유무역파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공장주들은 법의 허점을 이용해 규정을 피했고 법원도 개입을 꺼려, 애슐리는 1850년 「10시간 법은 무효가 되었다」고 적었다. 1850년과 1853년의 보완 법이 나온 뒤에야 섬유 산업에서 10시간 한도가 자리 잡았고, 반대자들이 예언한 경제적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법 전체는 1874년 공장법으로 폐지되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이 법을 노동자들이 거둔 성과로 들었다. 1864년 창립 선언에서는 영국 노동계급이 지주와 금융가 사이의 일시적 분열을 이용해 30년 투쟁 끝에 이 법을 얻어 냈다고 썼다. 그는 노동 시간의 법적 제한을 둘러싼 싸움이 중간계급의 정치경제학인 수요·공급 법칙의 맹목적 지배와 노동계급의 정치경제학인 사회적 예견이 통제하는 사회적 생산 사이의 큰 대결이었다고 보고, 10시간 노동법은 실천적 성공일 뿐 아니라 원칙의 승리였다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