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 사건
Xinyang incident
1959년 10월부터 1960년 4월까지 허난성 신양 지구에서 과장된 생산 보고에 맞춘 강제 징수와 폭력으로 대규모 아사가 일어난 사건. 지구의 마지막 보고는 1959년 11월부터 1년 동안 총인구 808만 명 가운데 107만 명이 죽었다고 했다. 대기근의 가장 악명 높은 지방 사례로, 1960년 말 중앙의 조사로 드러났다.
상세
신양 지구 수이핑현의 차야산은 1958년 4월 첫 인민공사가 선 곳이었고, 지구는 「위성」 수확 보도로 이름을 떨쳤다. 1959년 3월 중앙이 전국 징수량을 1958년 기준으로 정했고, 루산 회의 뒤 허난 성위원회 제1서기 우즈푸는 「작은 펑더화이」를 잡아내라고 지시했다. 1959년 신양의 실제 생산은 20억 근 남짓이었으나 지구는 50억 근으로 보고했고, 이를 근거로 성이 9억 근, 아래로 내려가며 10억 근의 징수가 매겨졌다. 지구 상무위원 가운데 전원 장수판만이 30억~40억 근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가 비판받았다. 민병이 집집을 뒤져 「감춘 곡식」을 찾았고 농민을 묶고 매달고 때렸다.
굶주림이 퍼지자 지구는 길목에 초소를 세워 피란민을 막고 수용소에 가두었으며, 우체국은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압수했다. 구스현에서만 관방 기록에 남은 식인 사례가 200건이었고, 지구 서기 루셴원은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90%는 사상 문제”라고 말했다. 1960년 2월 내무부 시찰과 구스현의 전보가 국무원 비서장 시중쉰, 중앙감찰위원회 서기 둥비우에게 전해졌고, 10월 리푸춘이 조사 보고를 마오에게 올렸다.
사망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지구가 성에 보고한 수는 38만 명, 지방지는 48만 3천 명, 중앙 조사관은 105만 명이었고, 1961년 1월 지구의 마지막 보고는 107만 321명(13.2%)이었다. 2012년 난징대학 연구자들은 태어나지 못한 인구와 유출 인구를 더해 약 125만 명의 인구 손실을 추산했다. 마오는 사건을 「공산당 간판을 단 국민당의 계급 보복」이라 규정했고, 당은 「민주혁명 보충 수업」으로 간부를 대거 교체해 983명을 해임하고 275명을 체포했다. 루셴원은 징역 3년, 광산현 서기 마룽산은 사형 집행 유예를 받았고, 우즈푸는 세 차례 자기비판에 그쳤다. 사건은 1960년 11월 「12조」 긴급 지시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