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을 통한 발전 운동(제메차)
Development Through Cooperation Campaign (Zemecha)
에티오피아 데르그(임시군사행정위원회)가 농촌에 혁명을 확산시키려 1974년 말부터 추진한 대중 동원 사업이다. 약 6만 명의 학생·교사 등이 430여 개 농촌 지역에 파견되어 문맹 퇴치와 근대 교육·보건의 기반 마련, 봉건적 지배 구조를 농민협회·도시주민협회로 대체하는 활동을 했다. 토지개혁과 농업 생산·보건·지방행정 개선, 새 정치·사회 질서의 전파가 표방 목적이었다. 참가는 강제였고 1975년 법령으로 중등 10학년 이상 학생과 대학생·교사에게 의무화되었다.
상세
배경
1973년 에티오피아의 성인 문맹률은 약 93퍼센트였다. 1974년 혁명의 민족민주혁명 강령은 무상 교육과 문맹 퇴치 조치를 약속했다. 한편 데르그는 대학생과 중등학생의 정치적 도전에 직면해 있었는데, 이들은 데르그의 가장 목소리 큰 비판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을 먼 농촌으로 파견한 것을 두고, 참가자 다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도시 중심지에서 조직된 학생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데르그의 권력 장악을 공고히 하려는 조치로 보았다.
조직과 규모
1975년 법령은 중등 10학년 이상 학생, 대학생, 교사의 참가를 의무화했다. 약 6만 명이 징발되어 에리트레아를 제외한 430여 개 농촌 지역에 배치되었고, 제복을 착용하고 조직된 모습은 『에티오피아 대백과사전』이 "여러 면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닮았다"고 평한 바 있다. 1975년 초 정부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대학과 모든 상급 중등학교를 폐쇄하고 약 6만 명의 학생·교사를 농촌에 배치했다. 3월 4일 농촌 토지 국유화 이후에는 최대 6만 명의 학생이 농민을 동원하고 1975년 토지개혁 선언에 따라 농민협회를 조직하기 위해 제메차로 파견되었다.
군 장교와 학술 감독관이 이끄는 단위들은 문맹 퇴치반을 운영하고 농업·보건 지식을 전하며 농사일을 도왔고, 현지에서 토지개혁 선언을 집행했다. 기지 야영지 위원회는 식량·정치교육·병참을 맡았고, 학습 클럽에서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문헌과 에티오피아 좌파 팸플릿을 읽고 토론했다.
갈등과 통제
참가는 강제였고 거부는 처벌 대상이었으며, 복무를 마치지 않은 사람은 처음에는 법으로 학교나 정식 일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제메차 참가자(제마초흐)는 여러 지역에서 지방 당국과 충돌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지주들의 곡물 창고와 무기를 압수하며 권한을 넘어섰고, 이는 지방 경찰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선포에 그치지 않은 실제 토지개혁 이행을 요구하는 agitation은 시위와 파업, 참가자 투옥으로 이어졌다. MERIP는 농민 동원에 나선 학생들이 이미 그곳에 있던 경찰과 행정관들과 곧 충돌했고, 지주들이 일부 제메차 간부를 살해했으며, 임시군사행정위원회가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이 동원 세력을 경계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1975년 12월 농민협회령은 보다 영구적인 농촌 동원 구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문맹 퇴치 성과
사업의 문맹 퇴치 프로그램에 등록한 756,200명 가운데 158,065명이 전 과정을 수료했고, 1976년 여름까지 추가로 202,692명이 학습 중이었다. 나머지는 수료하지 못했다.
기간과 유산
사업 시기는 논쟁적이다. 한 출처는 데르그의 개시를 1974년 12월로 잡고, 다른 출처는 대학·상급학교 폐쇄와 6만 명 배치를 1975년 초로, 또 다른 출처는 1975년 3월 4일 토지 국유화 이후의 파견으로 잡는다. 의무 참가 법령도 1975년으로 기록된다. 종료는 1976년 7월의 공식 포기로 보는 것이 한 출처이며, MERIP는 1975년 말까지 정부가 대부분의 학생을 도시로 소환했다고 본다. 이는 부분 소환과 공식 종료의 차이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시점을 합쳐 단정하지 않는다. 계획된 4년에는 크게 못 미쳤다.
1974년 자메차는 1979년 7월부터 1991년까지 이어진 에티오피아 전국 문맹퇴치운동(ENLC)의 직접적 토대가 되었다. 이 운동은 15개 언어를 사용해 1,800만 명 이상의 등록 참가자를 냈고, 전국 문맹률을 1973년 7퍼센트에서 1986년 62.4퍼센트로 끌어올려 유네스코 국제독서협회 문맹퇴치상을 받았다.
기억은 엇갈린다. 참가자들은 제메차를 농촌 공동체에 봉사하려 한 진정한 시도이자 동시에 데르그의 정치적 강제 도구였다고 서술하며, 그 이데올로기적 틀이 에티오피아 청년의 비판적 사고를 키우기보다 제한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