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브레스트 출신인 르멜은 파리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865년 제본공 노동자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했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 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여성 연합의 지도적 활동가로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체포된 뒤 루이즈 미셸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유형되었으며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코뮌의 노동·교환위원회 대표로 노동 법령을 추진하고, 뒤에 헝가리 노동자당을 세운 금세공인
1871년 5월 1일 공안위원회 창설에 찬성했으나, 15일에는 공안위원회를 비판하는 소수파 선언에 서명했다.
부다 근교 오부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금세공인이 되었고, 독일을 거쳐 1867년 파리에 와 국제노동자협회 독일어권 지부에서 활동했다. 1870년 인터내셔널 재판에서 유죄를 받았다. 1871년 코뮌 의원으로 뽑힌 유일한 외국인으로 노동·교환위원회를 이끌며 제빵 야간 노동 금지와 버려진 작업장 법령을 추진했고, 공안위원회에 반대한 소수파에 섰다. 피의 주간에 부상을 입고 런던으로 탈출해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이 되었다. 1876년 헝가리로 돌아가 1880년 헝가리 전국노동자당을 세웠으며, 말년을 파리에서 보냈다.
상세 이력 보기
1870국제노동자협회 활동으로 체포·수감되었다가 제정 붕괴 뒤 석방되어 파리 연방평의회 활동을 재개했다.
1871파리 코뮌 제13구 의원으로 선출되고 노동·교환 대표를 맡아 제빵공 야간노동 금지령과 버려진 작업장 조사·협동조합 운영안을 추진했다. 5월 1일 공안위원회 설치에 찬성했으나, 15일 소수파 선언에 서명했다.
1871–1872피의 주간 바리케이드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고 탈출한 뒤 런던으로 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 선출되었다.
1878–1880헝가리 노동자당 창당대회에 참여했고, 1880년 헝가리 전국노동자당 창립에 관여했다.
옐리자베타 쿠셰레바로 태어나 결혼 뒤 토마노프스카야라는 이름을 썼다. 제1인터내셔널 제네바 지부에서 활동하고 1870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만났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대표로 파리에 가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을 조직했다. 코뮌 진압 때 바리케이드 전투에 참여해 부상당했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살았다. 사망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며 1916년 이후, 1918년 이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상세 이력 보기
1867미하일 토마노프스키와 결혼해 상속 재산을 얻고 혁명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했다.
1868–1869제네바에서 러시아어 잡지 《나로드노예 델로》를 재정 지원·공동 편집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 창설에 참여했다.
1870제네바 지부의 사절로 런던에 가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1871파리 코뮌기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과 노동권을 추진했다.
1871–1877코뮌 패배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반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하고 그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