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대회에서 SFIO 다수를 코민테른으로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을 세운 『뤼마니테』 지도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해 다수파의 분열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루르 점령 반대로 체포됐으나 상원 고등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브르타뉴 팽폴 출신으로 1891년 게드의 프랑스 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에 참여했다. 1918년부터 평생 『뤼마니테』를 이끌었다. 전쟁 뒤 지지자들이 10월 혁명 쪽으로 기울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자가 되었다. 1923년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비난했다가 투옥되었다.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지내며 공산당의 원로로 남았고, 1958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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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2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가 세운 프랑스 노동자당의 지롱드 지부에 가입했다.
- 1905통합 사회당(SFIO) 창당 대회에 참여하고 당 선전 담당자로 활동했다.
- 1918『뤼마니테』의 책임자로 선출되어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신문을 이끌었다.
- 1920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하고 분열 뒤 프랑스 공산당의 전신인 프랑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부(SFIC) 창립에 참여했다.
- 1923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한 뒤 체포되어 상원 고등법원에 회부됐으나, 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 1936센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프랑스 공산당 계열 첫 상원의원이 됐다.
생디칼리슴에서 코민테른·제4인터내셔널까지: 혁명의 한 세기를 관통한 프랑스 국제주의자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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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 1940–1947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체류 — 1947년 프랑스 귀환
- 1953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 출간 — 알베르 카뮈 서문
- 1960알제리 전쟁 반대 '121인 선언' 서명
흑해 함대 반란을 이끈 해군 기관사, 코민테른 서기국에 오르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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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 1923국제적 석방 캠페인으로 사면, 프랑스 공산당 입당
- 1924–1955프랑스 하원의원 (센에우아즈) 및 PCF 중앙위원
- 1931–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활동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
- 1936–1938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정치위원 — 알바세테에서 여단 조직·지휘
- 1939–1943소련 체류하며 코민테른 업무, 1943년 알제에서 드골 측과 연락
- 1944파리 해방 후 귀국, 혁명 기도 — 스탈린의 거부권으로 무산
- 1952마르티-티용 사건: 경찰 간첩 혐의로 PCF에서 제명
37년간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 의회와 지하를 오간 스탈린주의자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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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71차 대전 참전, 베르됭에서 부상 후 포로
- 1920–1926PCF 창립 당원 → 중앙위원회, 국회의원 당선
- 1928–1936레옹 블룸을 꺾고 재선, 정치국 입성, 국회 부의장
- 1940–1944지하 PCF 책임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제헌의회·국민의회 의원 및 부의장, 3당 연정 참여
- 1947–1953코민포름에서 자기비판 → 마셜 플랜 반대 투쟁, 토레즈 병중 당 대행
- 1959–1975상원 의원 및 공산당 원내대표, 1969년 대선 21.3% 득표
- 1975몽트뢰유에서 사망, 페르 라셰즈에 안장
광부의 아들에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인민전선의 설계자
「프랑스 국민은 결코 소련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 NATO 가입을 앞둔 1949년 2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뉴욕 타임스』 1949년 2월 23일 보도)
탄광 소년 노동자 출신으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정치인(1930–1964). 1936년 인민전선을 설계했고 전후 '프랑스식 사회주의로의 길'로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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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12세에 탄광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
- 1919–1920사회당(SFIO) 입당 → 투르 대회에서 공산당 창립 참여
- 1930–1964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 34년간 당을 이끎
- 1936인민전선 결성 주도, 블룸 정부의 사회개혁 뒷받침
- 1939–1944프랑스군 탈영 후 소련 망명, PCF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드골 정부 국무장관 → 부총리(1946–1947)
- 1950–1953뇌졸중으로 소련에서 치료, 자크 뒤클로가 당 대행
- 1964서기장 사임 후 명예 의장, 흑해 유람선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