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고 국제연맹에서 트리아농 국경 수정을 호소한 귀족 정치인
빈에서 태어난 백작으로, 1877년 의회에 들어가 반세기 동안 활동한 웅변가였다. 1906~1910년 교육장관으로 비헝가리계 학교에 헝가리어 교육을 강제한 1907년의 「어포니법」을 만들었다. 1920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어 1월 16일 연설했으나 조건은 바뀌지 않았고, 3월 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졌다. 이후 합스부르크 정통주의 야당 의원이자 국제연맹 대표로 트리아농 국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933년 군축회의 참석차 머물던 제네바에서 죽었다.
하우칭거라는 성으로 태어나 루도비카 사관학교와 빈 군사대학을 나왔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1924년 비테즈 기사단에 들어가며 어머니의 성 야니를 택했고, 1931~1936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이끌었다. 1940년 3월 제2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2년 군을 이끌고 돈강으로 갔다. 1943년 1월 소련 공세 때 후퇴 금지 명령을 고수하다 군이 무너지자 병사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군령을 내렸다. 전후 스스로 귀국해 1947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고, 1993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복권되었다.
노비사드 학살로 번진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하고, 뒤에 병력 보존과 서방 접촉을 꾀한 참모총장
모손에서 크나우스(크나우즈) 페렌츠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1934년 어머니의 성인 솜버테이이로 바꾸었다. 1941년 카르파티아 집단을 이끌고 소련 침공에 참가했다. 그해 9월 베르트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에게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해 이것이 세르비아인 마을들에 대한 징벌 작전과 노비사드 학살로 번졌다. 1943년 학살 책임자들에 대한 조사와 군사재판을 열었고, 칼러이와 함께 서방 연합국과의 접촉을 이끌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해임되었고,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은 뒤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페트로바라딘에서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