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자 루마니아 공산당 「모스크바파」의 수장, 1952년 게오르기우데지의 숙청으로 몰락하다
1952년 5월 26일과 27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게오르기우데지는 파우케르·루카·제오르제스쿠를 「반당 분파」로 규탄하고 파우케르를 정치국에서 제거했다. 데지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 온 뒤였고, 슬란스키 재판으로 동유럽 전역에 유대인 공산주의자 숙청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바슬루이 지방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하나 라빈손으로 태어나 히브리어 교사로 일하다 191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1년 루마니아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5년 체포되어 이듬해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을 받았으며, 1941년 소련과의 죄수 교환으로 모스크바에 건너가 코민테른 밑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1947년 11월 외무장관에 올라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 되었다. 바실레 루카·테오하리 제오르제스쿠와 함께 이른바 「모스크바파」를 이루어 감옥파의 게오르기우데지와 당권을 다투었으나, 1952년 5월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데지에 의해 「우편향」과 「좌편향」을 동시에 범했다는 죄목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나고 7월 외무장관에서도 해임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었지만 스탈린 사후 풀려나 재판 없이 당적을 잃었고, 정치 출판사에서 번역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미국 『타임』이 1948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성」으로 표지에 올린 인물이지만, 로버트 레비의 연구는 그가 강제 집단화에 제동을 걸고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를 허용해 데지보다 온건한 노선을 걸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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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사회민주당 입당
- 1921루마니아 공산당 창당 참여
- 1935–1936체포,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
- 1941죄수 교환으로 소련행, 코민테른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 지도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외무장관
- 1952정치국 제거, 외무장관 해임
- 1953–1954체포, 스탈린 사후 석방, 당적 박탈
「모스크바파」의 재무장관, 1952년 화폐개혁을 빌미로 숙청되어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은 세케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화폐개혁의 「과오」는 루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를 변호하려 한 파우케르와 제오르제스쿠는 석 달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밟았다.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지방의 헝가리인 가정에서 루커 라슬로로 태어나 철도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혁명 뒤 루마니아 노동운동에 들어가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0년 체르너우치 감옥에 있다가 소련군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으로 풀려나 소련 시민이 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전쟁 중 모스크바에서 아나 파우케르와 함께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고,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부터 재무장관으로서 화폐 안정화와 국유화 재정을 맡았으나, 1952년 1월 화폐개혁의 실행 오류가 빌미가 되어 3월 초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으로 규탄되고 8월 체포되었다. 1954년 10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63년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의 당 전원회의가 그를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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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루마니아 노동운동 참여
- 1920년대–1940공산당 입당, 여러 차례 투옥
- 1940체르너우치 감옥 석방, 소련 시민·우크라이나 최고회의 대의원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재무장관
- 1952「우편향」 규탄, 해임·체포
- 1954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963아이우드 감옥에서 사망
- 1968사후 복권
소련의 위성에서 반자율적 공산주의 국가로 루마니아를 전환시킨 초대 공산당 지도자
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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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 1933그리비차 철도 파업 주도, 체포·투옥
- 1936당 중앙위원회 위원, 감옥파 수장
- 1944탈옥, 루마니아 공산당 총서기
- 1947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인민공화국 선포
- 1952–1955루마니아 총리
- 1955–1965루마니아 노동자당 제1서기
- 1961–1965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독자 외교와 개인숭배를 결합한 루마니아 지도자
1968년 침공 비판은 동유럽 사회주의권 내부의 균열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 지도자가 되어 국가주의적 독자 노선과 강한 개인숭배 체제를 구축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판했으나, 1989년 혁명 속에서 정권과 함께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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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1989루마니아 공산당 서기장·국가 지도자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비판
- 1989루마니아 혁명으로 실각
권력과 과학의 권위를 함께 세운 독재정권의 2인자
“함께 싸웠으니, 함께 죽는다!”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권에서 남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권력을 행사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당과 국가의 핵심 직책에 오르며 여성 해방과 과학 발전의 상징으로 선전됐지만, 실제로는 가족 중심의 권력 집중과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 봉기가 확산되던 시기 정권의 대응에 관여했고, 22일 남편과 함께 달아났다가 체포됐다. 두 사람은 25일 약식 재판 뒤 함께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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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947루마니아 공산당 활동가·섬유공장 노동자
- 1957–1967화학 연구자, 화학공학 학위와 박사학위 취득
- 1972루마니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73–1974정치집행위원회 위원, 상임국 위원
- 1975–1989대국민의회 의원, 당·국가 지도부 인사
- 1980–1989루마니아 각료회의 제1부총리
- 1989.12혁명으로 체포되어 남편과 함께 처형
차우셰스쿠의 후계자에서 그의 처형을 명한 혁명 지도자
'부끄러운 일이지만 필요했다': 즉결재판과 처형에 대해 훗날 일리에스쿠가 내린 평가.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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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 1965–1971공산당 중앙위원·선전부장·청년장관
- 1971차우셰스쿠와 대립하며 지방으로 좌천
- 1984–1989중앙위에서 제명, 기술출판사 국장
- 1989.12민족구국전선(FSN) 창설·지도, 임시 대통령
- 1990–1996루마니아 대통령 (제1·2기)
- 2000–2004루마니아 대통령 (제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