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레오니트 로마노비치 크바스니코프

Леонид Романович Квасников

원자폭탄을 훔친 과학자-첩보원

"전쟁 전 정보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내가 과학기술정보과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엔 세 명뿐이었다. 모두 초짜였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 세계에 우리 요원은 고작 5~6명이었다."

화학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정보장교로, 과학기술 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940년 서방 과학저널에서 핵물리학 논문이 사라진 것을 감지해 소련 외국정보부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기안했고, 뉴욕에서 클라우스 푹스·줄리어스 로젠버그 등 맨해튼 계획 침투 공작망을 지휘해 쿠르차토프의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단축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NKVD 5부(외국) 10과(미국) 선임작전장교
  • 1939NKVD 5부 16과(과학기술정보) 부과장
  • 1940NKVD/NKGB 과학기술정보과장
  • 1943뉴욕 NKVD/NKGB 부주재관 (과학기술정보)
  • 1945NKGB 1총국 11부 부부장
  • 1947정보위원회(KI) 5총국 4부장
  • 1954KGB 1총국 10부장
  • 1963KGB 1총국장 자문그룹 선임고문
  • 1966은퇴

알렉세이 마트베예비치 루먄체프

Алексей Матвеевич Румянцев
학술·연구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5–1993 ○ 자연사

흐루쇼프의 경제 토론을 연 정치경제학자, 소련 사회학의 제도적 창립자

「모든 사회구성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사회주의 구성체만은 조직화된 대중행동으로 생겨났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연구소 간부 회의에서 (V.A. 야도프 회고)

흐루쇼프 해빙기의 경제학자. 1962년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실어 경제개혁 논쟁을 촉발했고, 소련 최초 사회학 연구소를 창립했다. 코무니스트·프라우다 주필을 지냈으나 자유주의 성향으로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하리코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5–1943우크라이나 SSR 농업·법무인민위원부 근무 후 하리코프대학·기계제조연구소 정치경제학 교수
  • 1940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지도교수 오스트로비탸노프, 심사 셰필로프
  • 1943–1949하리코프 주 당위원회 서기 — 흐루쇼프의 우크라이나 당 조직에서 활동
  • 1950–1952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사회과학부 책임자
  • 1952–1955중앙위 경제·역사과학부장, 과학·문화부장
  • 1955–1958『콤무니스트』 주필 — 흐루쇼프 해빙기의 당 이론지
  • 1958–1964『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프라하) 주필 — 유럽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중심지
  • 1962흐루쇼프 후원으로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게재 — 경제개혁 논의 촉발
  • 1964–1965『프라우다』 주필 — 솔제니친 게재 시도 후 해임
  • 1965–1967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학술서기
  • 1967–1971과학아카데미 부원장 겸 ИКСИ 소장 — 소련 사회학의 제도화
  • 1972ИКСИ의 '지나친 자유주의'로 부원장·소장직 사임, 연구소 재편
  • 1971–1993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집

드미트리 트로피모비치 셰필로프

Дмитрий Трофимович Шепилов

흐루쇼프의 이론가에서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가 된 사람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모스크바대 법학부 졸업, 야쿠츠크 검찰 업무
  • 1931–1933적색교수학원, 농업경제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연구
  • 1937–1941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학술서기, 경제학 교육·연구
  • 1941–1946전쟁기 정치장교, 소장 계급으로 종전
  • 1946–1949군 선전부와 당 선전선동부 실무
  • 1949–1952중앙위 선전부장, 스탈린 말기 이념 장치 운영
  • 1952–1956『프라우다』 주필,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기의 이론가
  • 1955–1956중앙위 서기, 흐루쇼프 노선의 이론적 지원
  • 1956–1957외무장관, 수에즈 위기와 제3세계 외교
  • 1957반당그룹 가담으로 실각
  • 1957–1960키르기스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로 좌천
  • 1960–1982모스크바 국가문서보관소 하급직, 정치적 주변화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포노마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ономарёв

국제공산주의 노선을 관리한 당 국제부장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s–1943코민테른 기관에서 활동, 국제공산주의 네트워크 실무를 익힘
  • 1943–1955코민테른 해산 뒤 중앙위 국제 라인에서 각국 공산당 관계 관리
  • 1955–1986중앙위 국제부장, 세계 공산당과 민족해방운동 지원 노선 관리
  • 1960s–1970s중소분쟁과 유로코뮤니즘 속에서 모스크바의 정통 노선을 방어
  • 1986 이후고르바초프의 외교·당 개혁 속에서 퇴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티호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хон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5–1997 ↓ 퇴임 1985

브레즈네프 말기의 보수적 총리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0–1985각료회의 의장

요한네스 구스타보비치 캐빈

Иван Густавович Кэб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에스토니아 1905–1999 ○ 자연사

모스크바와 에스토니아 사이를 28년간 조종한 실용적 민족공산주의자

1978년 7월,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캐빈은 중앙위원회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후임으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에스토니아어조차 서툰 카를 바이노가 임명되었다 — 민족 간부에 대한 브레즈네프 중앙의 신뢰 상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련 에스토니아를 실질적으로 이끈 정치인으로, 이후 1983년까지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스탈린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온건·실용 노선으로 전환하여 '라비림(laveerimine)'이라 불리는 균형 정책(모스크바의 요구와 에스토니아 민족 이익 사이의 절충)을 구사했다. 28년간 재임하며 공화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고, CPSU 중앙위원(1952–1986)으로서 전연방 차원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197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시기 러시아화 정책이 강화되자 중앙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8년 카를 바이노에게 자리를 내주며 교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45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출판부문장, 이후 선전선동부문 제1부부장
  • 1946–194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당역사연구소 소장
  • 1948–1950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0–1978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2–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8–1983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국가원수)

아마야크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Амаяк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나치의 역정보를 모스크바로 흘려보낸 베를린 레지덴트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38가그라 시 NKVD 부장, 이어 압하지야 자치공화국 NKVD
  • 1938–1939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 1939–1941베를린 주재 대사관 참사관, NKVD 합법 레지덴트
  • 1941–1945우즈베크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내무인민위원
  • 1945–1951포로·억류자 관리총국 부국장, 이어 제1부국장
  • 1951–1953포로관리국장 겸 굴라크 제1부수장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사모일로비치 하잔

Александр Самойлович Хазан

1938년 풀려나 1955년 총살된 수사관

1937년, 하잔은 17세기 그루지야의 민족 영웅 기오르기 사아카제에 대해 '연계를 파악하고 체포하라'는 지령과 함께 수사 파일을 개설했다. 수감자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오데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33년 OGPU 고등학교에서 퇴교당한 뒤 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SPO) 수사관이 되어 베리야-고글리제 체제 아래 사건 조작과 고문을 일삼았다. 대숙청기에는 동료까지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었고, 1938년 체포됐다가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돼 전역 처리에 그쳤다. 전쟁기 NKVD 중앙기구에서 복무했으며, 1948년에는 역설적이게도 『소비에트 인간의 도덕적 모습』을 출간했다. 1955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트빌리시에서 재판받고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1933오데사 GPU 관구부 요원, OGPU 고등학교 수학
  • 1933–1937그루지야 NKVD 요원, 이어 과장
  • 1937–1938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 제1과장 겸 부부장
  • 1938체포되었다가 두 달 뒤 석방, 전역
  • 1942–1945NKVD 중앙기구 장교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골롭코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Голов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6–1962 ○ 자연사

북극 호송대를 지킨 북방함대 사령관, 소련 해군 대서양 작전역량의 설계자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가 북방함대 기지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자 골롭코는 상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2호로 격상시켰다. 나흘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북방함대는 이미 전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내내 소련 북방함대를 지휘한 해군 제독. 테레크 코사크 출신으로 1925년 콤소몰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으로 참전했다. 1940년 34세로 북방함대 사령관에 취임해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 출현 증가를 포착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상향 조치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무르만스크 방어와 북극 호송대 호위를 지휘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사수했다. 종전 후 해군 주력참모부장과 해군 제1부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원양 작전역량을 구축했고, 1955년 전후 최초로 소련 함대의 영국 공식 방문을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콤소몰 동원으로 해군 입대
  • 1928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37–1938스페인 내전: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
  • 1938–1939카스피 소함대 사령관, 이후 아무르 소함대 사령관
  • 1940–1946북방함대 사령관
  • 1947–1950해군 주력참모부장·해군총사령관 부사령관
  • 1952–1956제4함대 사령관, 이후 발트함대 사령관
  • 1956–1962해군 제1부총사령관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Георгий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전후 모스크바 재건을 이끌었으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당 보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s탐보프현·타타르 자치공화국에서 콤소몰 활동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28–1938모스크바 중앙노동연구소 근무
  • 1938전연방 산업아카데미 기계공학부 졸업, 중앙위 간부부 인스트럭터
  • 1938–1945모스크바 시당 제2서기
  • 1941예비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7~10월)
  • 1944–1950모스크바 시 집행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5–1949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 1946–1949중앙위 서기 · 조직국 위원
  • 1949–1951도시건설장관 → 농업기계제조장관
  • 1951–1953쿠이비셰프 프룬제 항공공장장
  • 1953–1954주폴란드 소련 대사 (간섭 문제로 소환)
  • 1954–1965항공산업 공장장, 블라디미르 공장장(1959~), 1965년 연금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마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маровский

원자력 프로젝트를 지은 소련 군사 건설자

1942년 첼랴빈스크 외곽 페르신스카야 부지에 들판의 말뚝 하나에서 시작한 제철소 건설을 이끌어, 1943년 4월 19일 첫 쇳물을 뽑아냈다.

모스크바 운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핵심 시설들을 건설한 군사 기술자이자 국가 행정가이다. 1944년부터 NKVD/MVD 산업건설수용소총국(글라프프롬스트로이) 국장으로서 수용소 노동력으로 특수 시설을 지었고, 체랴빈스크-40(마야크)과 콤비나트 817호를 비롯한 원자력 시설 건설을 지휘해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을 거쳐 1963년부터 국방부 차관으로 군사 건설 체계를 맡았으며, 1972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49), 스탈린상(1951), 레닌상(1968)을 수상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1931Свирьстрой 설계국 기술자
  • 1931–1937모스크바 운하: 기술부문장 → 중앙지구 책임자
  • 1937–1938모스크바 운하 운영국장 겸 수석기술자
  • 1939–1940건설인민위원부 차관
  • 1941–1942제5공병군 사령관
  • 1942–1944첼랴프메탈루르크스트로이 국장
  • 1944–1951글라프프롬스트로이(산업건설수용소총국) 국장
  • 1955–1963중형기계공업부 차관(건설)
  • 1963–1973국방부 차관(건설·주둔)

이오시프 바실리예비치 시킨

Иосиф Васильевич Шик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6–1973 ○ 자연사

즈다노프의 글라프푸르 수장, 레닌그라드 사건을 살아남은 군 정치위원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라도가 호수 얼음길 '생명의 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그는 직접 호송대를 검열하며 빙판 위를 오갔다.

즈다노프의 측근 정치일꾼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를 책임졌으며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을 맡아 전후 소련군 정치·이념 체계의 수장이었다. 셰르바코프 사후 그 자리를 이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실각했고, 체포는 면했지만 군 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당 중앙기관에서 복무했으며, 1960년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했으나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1년 만에 소환되어 당-국가 통제 기구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19391927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가입, 크룹스카야 공산대학 졸업(1931), 고리키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 이후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 서기
  • 1939–1941붉은 군대 정치일꾼으로 전환, 군 전기기술 아카데미 정치부장(1939), 레닌그라드 군관구 정치선전국 부국장(1940~1941)
  • 1941–1942북부전선 군사회의 위원, 레닌그라드 및 볼호프 전선 정치국장 —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 책임
  • 1942–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선전선동국장 겸 부국장, 셰르바코프 아래에서 전시 군 정치사업 지휘
  • 1945–1949붉은 군대·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 1945년 9월 대장군 진급, 극동 소련군 최고사령부 군사회의 위원 겸임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으로 해임, 레닌 군사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
  • 1950–1960중앙위 당기관부 감찰원·부장·제1부장, 1956년부터 중앙검열위원회 위원
  • 1960–1973소련 주알바니아 대사(1960~1961),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소환; 당-국가 통제위원회 제1부의장(1962~1965), 인민통제위원회 제1부의장(1965~1973)

야니스 볼데마로비치 페이베

Ян Вольдемарович Пейве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906–1976 ○ 자연사

미량원소에서 연방 정치까지: 라트비아 농화학자가 민족소비에트 의장이 되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9티미랴제프 농업대학 졸업, 전연합 아마연구소에서 연구 경력 시작
  • 1940농업학 박사 학위 취득, 볼셰비키당 입당
  • 1944–1950라트비아 농업대학 초대 총장
  • 1951–1959라트비아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58–1966소련 최고소비에트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2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66–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간사장, 이후 일반생물학부 학술서기
  • 1969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레닌상(1964) 등 다수 훈장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두도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Дудоров

흐루쇼프의 민간인 내무장관, 정보원 제도를 폐지하려다 좌초되다

1959년, 두도로프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제도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경찰 역사상 거의 유일한 이 시도는 곧바로 저지되었고, 이듬해 그가 해임되면서 묻혔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 NKVD 출신들을 몰아내고 임명한 민간인 내무장관(MVD, 1956–1960). 화학기술자 출신으로 건설·공업 관료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4년 당 중앙위 건설부장을 거쳐 내무장관이 되었다. 굴라그 체제를 소규모 교정식민지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고, 1959년에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활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임기는 정치경찰(KGB)과 분리된 내무기관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고, 1960년 MVD 자체가 해체되면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1929모스크바 칼리닌 크리스탈 공장 견습공·기능공
  • 1929–1934모스크바 화학기술연구소(멘델레예프 대학) 학생
  • 1934–1937모스크바 아브토스테클로 공장 '트리플렉스' 작업장장
  • 1937–1949중공업·건설자재 인민위원부에서 생산·당위원회·관리직 역임
  • 1950–1952모스크바 시당 건설부장, 이후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부의장
  • 1954–1956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56–1960소련 내무장관(MVD): 굴라그 개편, 밀리치야 정보원제 폐지 시도
  • 1960–19721967년 세계박람회 총감독, 이후 모스크바 건설자재 총국장

알렉세이 그리고리예비치 스타하노프

Алек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Стаханов

석탄 102톤, 기준치 14배: 스탈린 시대 최대 노동생산성 운동을 촉발한 광부

「노동을 분업화하면 한 교대에 9톤이 아니라 70~80톤을 캘 수 있습니다.」 — 동료 채탄공들과의 대화에서, 기록 수립 며칠 전 (1935년 8월)

돈바스 광부로 1935년 8월 31일 단 한 교대 만에 석탄 102톤을 캐내 기준치 14배를 기록했다. 채탄과 지주 분리라는 노동 혁신으로 소비에트 생산문화의 원형인 스타하노프 운동을 촉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1933돈바스 첸트랄나야-이르미노 갱에서 제동공·마부·채탄보조공으로 노동
  • 1933–1935착암기 채탄공 전직, 갱내 강습 수료 후 기록 도전 준비
  • 1935.8.315시간 45분간 석탄 102톤 채굴, 기준치 14배 — 스타하노프 운동 발단
  • 1935–1941레닌 훈장·타임지 표지(1935.12)·당 입당(1936), 산업아카데미 수학, 최고회의 대의원(1937)
  • 1941–1957카라간다 제31갱 관리소장(1941~42), 석탄공업인민위원부 사회주의경쟁 부문장(1943~57)
  • 1957–1974도네츠크 귀환, 신탁 부소장 → 광산관리국 수석기사 보좌, 1974년 퇴직
  • 1970사회주의 노동영웅 및 두 번째 레닌 훈장 수훈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코제브니코프

Евгений Фёдорович Кожевников

소련 운송건설부를 창설해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이끈 초대 장관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코제브니코프는 “국가 자금은 아껴야 한다”며 관리 기구를 팽창시키는 대신 기존 간부들의 적재적소 배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열 개 건설부처 중 분기 계획까지 유일하게 완수하는 부처를 만들었다.

철도기사 출신으로 소련 운송건설부(민트란스스트로이)의 초대 장관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역임하며, 철도·항만·고속도로·지하철·공항 등 소련 산업팽창의 물적 기반을 총괄 건설한 행정가다. 그가 이끈 운송건설부는 카자흐스탄 처녀지 개간 철도망, 볼가-발트 수로, 바니노-홀름스크 해상철도 연락선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착공을 주도했다. 몽골·시리아·이라크·베트남 등 해외 운송 인프라 건설에서도 소련의 기술적 진출을 진두지휘했다. 예하 트러스트로 직결되는 2단계 관리 체계를 도입해 열 개 연방 건설부처 중 가장 안정적인 계획 달성률을 기록했으며, 1975년 퇴임과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중앙아시아철도 관리국 궤도부 기사 (아시가바트)
  • 1928–1930투르크시브 철도 구간장·공사구역 부책임자 (알마아타)
  • 1930–1936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신선건설 기술지도자 → 젬젤도르스트로이 책임자 → 쿠즈네츠크 기관차·차량 공장 건설 총책임자
  • 1936–1940니켈스트로이·오르메디스트로이·유주랄탸시스트로이 주임기사 (남우랄)
  • 1941–1943유주랄탸시스트로이 트러스트 주임기사 → 관리자 — 방산공장 건설
  • 1943–1944주미 소련 정부구매위원회 전문위원
  • 1944–1945소련 건설인민위원부 특수건설총국장
  • 1945–1949국가계획위원회 건설산업 계획국장 → 국가계획위 부의장
  • 1949–1953소련 각료회의 연료·운수 담당 부의장 보좌관 → 각료회의 건설부장
  • 1954소련 건설부 제1차관
  • 1954–1963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초대)
  • 1963–1965소련 국가운송건설생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75소련 운송건설부 장관 (재임)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그리슈마노프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ришманов

소련 건축자재 산업을 14년간 이끈 공사판 출신 장관

1924년, 열여덟 살의 이반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보로프스키 시멘트 공장에서 목수로 일을 시작했다. 반세기 뒤, 그가 장관으로 이끄는 소련의 시멘트 산업은 연간 1억 2,700만 톤을 생산하며 세계 1위에 올랐다.

트베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망치를 잡은 그리슈마노프는, 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목수·십장·기사장을 거쳐 전후 도시재건을 지휘한 실무형 관료였다. 흐루쇼프의 대규모 주택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던 1956년부터 당 중앙위 건설부장으로 소련 전역의 건설정책을 조율했고, 이어 고스스트로이 의장으로 국가 건설 기준을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건설자재공업 장관(1965–1979)으로 재임하며 시멘트 생산량을 5,440만 톤 끌어올려 소련을 세계 1위 시멘트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구축한 대규모 시멘트 공장망은 흐루쇼프카에서 브레즈네프카까지 소련의 도시 풍경을 물리적으로 떠받친 산업 토대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36–1949레닌그라드 건설현장의 공사감독·기사장·트러스트 관리자
  • 1944–1949프스코프스트로이 등 전후 복구 트러스트 책임자
  • 1949–1955레닌그라드 키로프 구집행위원장 → 시집행위 제1부위원장
  • 1956–1961CPSU 중앙위원회 건설부장
  • 1961–1962고스스트로이 소련 의장
  • 1963–1965고스플란 산하 건설자재공업 국가위원회 의장
  • 1965–1979소련 건설자재공업 장관

야코프 알렉산드로비치 말리크

Яко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ик

안보리 보이콧으로 한국전 개입을 허용하고 휴전을 제안한 소련 유엔 외교관

1951년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말리크는 말했다. "교전국들이 38도선에서 상호 철군하는 휴전과 정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두 차례 유엔 상임대표(1948~1952, 1967~1976)를 지낸 소련의 대표적 외교관이다. 하리코프 주 농민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고 당 간부를 거쳐 1937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했다. 1951년 6월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전쟁 휴전과 38도선 상호 철군을 제안해 정전 협상의 물꼬를 텄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안보리에서 정당화했다. 일본·영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두루 거친 말리크의 유엔 외교는 스탈린 말기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관철하는 핵심 통로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35하리코프에서 경제학자로 일하며 당 간부 활동
  • 1937–1939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42–1945주일 소련대사
  • 1946–1953외무차관
  • 1948–1952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53–1960주영 소련대사
  • 1960–1967외무차관
  • 1967–1976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레오니트 게오르기예비치 멜니코프

Леонид Георгиевич Мельни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6–1981 ○ 자연사

스탈린 말기 최대 공화당을 4년간 통치한 우크라이나 제1서기

스탈린이 카라간다 탄광 증산을 명하자 멜니코프는 현지어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 「시장에 가서 노래하는 늙은 아킨을 찾아라. 그가 도와줄 것이다.」 아킨은 노래했고, 광부들은 일했다.

도네츠크 탄광 지대에서 성장한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한 뒤 카라간다 탄전 증산 임무를 완수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전후 복구와 서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척결 운동을 지휘했으며, 반유대주의 캠페인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흐루쇼프와 결별했다. 1952년 10월 확대된 당 중앙위 간부회의 정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6월 '민족정책 왜곡'을 이유로 해임되고 루마니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건설부 장관, 카자흐스탄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1966년부터 사망까지 15년간 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으로 일하며 산업 안전 체계를 정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39스탈리노(도네츠크) 시당 · 주당 간부
  • 1939–41스탈리노 주당 제2서기
  • 1941–42제66군 군사위원, 스탈린그라드 전투
  • 1942–44카라간다 주당 제1서기 — 코크스용 석탄 증산
  • 1944–47스탈리노 주당 제1서기
  • 1947–49우크라이나 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49–53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간부회 정위원(1952–53)
  • 1953–55주 루마니아 소련 대사
  • 1955–57소련 석탄산업 기업건설부 장관
  • 1957–61카자흐스탄 각료회의 제1부의장 →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장
  • 1961–66카자흐 · 러시아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
  • 1966–81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미하일로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хайл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6–1982 ○ 자연사

스탈린의 청년 동원가에서 해빙기 문화장관까지, 당 기구를 오가며 생존한 기구인

시인 미하일 스베틀로프는 그를 두고 "나는 문화부 장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장관의 문화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콤소몰 기관지 편집장을 거쳐 32세에 소비에트 청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전시 세대 청년들에게 스탈린을 위한 자기희생을 주입한 '영웅 개척자' 서사의 설계자였으며, 스탈린 말기에는 당 선전부장·상임위원까지 올랐다. 해빙기 문화장관(1955~1960)으로서는 검열을 유지하면서도 제한된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섰고, 말년에는 폴란드·인도네시아 대사와 국가출판위원장을 지내며 조용히 퇴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38『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
  • 1938–1952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원
  • 1952–1953공산당 중앙위 상임위원 겸 서기, 선전선동부장
  • 1953–1954모스크바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54–1955소련 주폴란드 대사
  • 1955–1960소련 문화부 장관
  • 1960–1965소련 주인도네시아 대사
  • 1965–1970국가출판위원회 의장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흔들지 않는 것을 통치로 삼은 사람

1979년 10월 7일 동베를린, 동독 건국 30주년 기념식에서 사진작가 레지스 보수가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를 촬영했다. 이 사진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1990년 베를린 장벽 벽화의 바탕이 되었다.

흐루쇼프 해임에 참여해 그를 대신해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대 말까지 권력을 독점했다. 1964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서기장으로, 1960~1964년과 1977~1982년에는 국가원수를 겸했다. 해빙 뒤에는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어 1970년대 중반 정치·종교 사범이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정치·경제 개혁에 적대적이어서 '정체의 시대'의 부패와 소비재 부족을 낳았고, 1975년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통치에서 물러났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결정했으며, 데탕트와 함께 SALT I·헬싱키 협정으로 미국과 핵 균형을 이루었다. 소련영웅 칭호를 네 번 받았고 1978년의 승리훈장은 1989년 취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52몰다비아 당 제1서기
  • 1954–56카자흐스탄에서 처녀지 개간 지휘
  • 1964.10흐루쇼프 해임을 주도하고 제1서기로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 독트린
  • 1972–79데탕트: SALT I·II, 헬싱키 협정
  • 1977신헌법 제정, 국가원수 겸임
  • 1979아프가니스탄 침공 승인

블라디미르 니키포로비치 말린

Владимир Никифорович Малин

당 중앙 문서 흐름을 11년간 통제한 총무부장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직후 브레즈네프 보좌관들이 총무부를 우회해 문서를 유통시키자 말린은 일기에 썼다: "이중 지휘계통이 생겨서 어느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CPSU 중앙위 총무부장으로 정치국과 중앙위를 오가는 모든 문서를 통제한 당 기구의 핵심 관리자였다. 전쟁 시기에는 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으로 점령지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했고, 벨라루스 공산당 제3서기를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흐루쇼프 실각 직후 정치국 회의에서 직접 속기록을 작성한 그의 노트는 소련 지도부 의사결정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료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측근 체르넨코를 후임에 앉히며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으로 전출된 것은 브레즈네프식 후원 인사의 전형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3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
  • 1938–1939벨라루스 공산당 모길료프 주당위 제1서기
  • 1939–1941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서기
  • 1942–1944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3–194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3서기
  • 1949–1952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 서기
  • 1952–1954CPSU 중앙위원회 인스펙터
  • 1954–1965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65–1970CPSU 중앙위 부설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

올레크 콘스탄티노비치 안토노프

Олег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Антонов

An-2에서 An-225까지: 소련 수송항공의 아버지

안토노프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공으로 거대 수송기가 아닌 An-2 복엽기를 꼽았다. "An-2는 나의 가장 위대한 성공작입니다. 세계 항공 기술에 아날로그가 없는, 오직 우리의 조건을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입니다."

소련의 수송항공을 한 세대 앞서 이끈 항공기 설계자.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OKB-153(후일 안토노프 설계국)을 창설하고, 50년 이상 양산된 유일한 항공기 An-2 복엽기로 출발해 An-12 군용수송기, An-22 안테이, An-124 루슬란, An-225 므리야에 이르는 중량물 수송기 계보를 완성했다.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운용 가능한 실용적 설계로 소련 전역과 수십 개국에서 민군 겸용으로 채택되었다. 글라이더 설계로 출발해 야코블레프의 제1부설계사를 거친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했으며,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공학과 미학의 일치를 추구했다. 영국 타임스는 An-22를 두고 "소련이 항공기 제작에서 모든 나라를 앞서게 했다"고 썼다.

상세 이력 보기
  • 1924–30글라이더 설계 시작, OKA-1 「골루비」로 전연방 글라이더 경연대회 1등상
  • 1931–38모스크바 글라이더 공장 수석설계사, 30종 글라이더 개발
  • 1938–43야코블레프 설계국 수석 엔지니어, A-7 군용 글라이더 개발
  • 1943–46야코블레프 설계국 제1부설계사, Yak-3 전투기 개량
  • 1946–52OKB-153 설계국장(노보시비르스크), An-2 첫 비행(1947), 스탈린상(1952)
  • 1952–84안토노프 설계국 총설계사(키예프), An-12·An-22·An-124 계열 개발
  • 1958–84소련 최고회의 대의원(5~11대 소집), 우크라이나·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2–66레닌상(An-12, 1962), 사회주의노동영웅(1966)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코스토우소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Костоусов

소련 공작기계 공업을 세계 1위로 이끈 최장수 공업장관

1972년, 12년 전 거래가 무산되었던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가 마침내 소련에 도착하자, 코스토우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2년 동안 이 기계들을 기다려왔다.'

아나톨리 코스토우소프는 소련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공업 장관 중 하나로, 1949년부터 1980년까지 공작기계·공구공업을 이끌며 소련을 세계 최대 공작기계 생산국으로 올려놓은 생산 행정가였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공작기계대학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크라스노다르·노보시비르스크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소련은 1962년부터 금속절삭 공작기계 생산량 세계 1위를 차지했고, 1970년대에는 CNC 공작기계의 독자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1972년 미국 브라이언트사의 정밀 연삭기를 12년 만에 수입하게 되자 '12년 동안 이 기계를 기다렸다'고 말한 일화는 기술 격차 속에서도 국산화를 밀어붙인 그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33–1939레닌그라드 스베르들로프 공작기계공장: 기사 → 부감독
  • 1939–1946크라스노다르 세딘 공장 → 노보시비르스크 중공작기계공장 주임기사
  • 1946–1949소련 공작기계공업 차관
  • 1949–1953소련 공작기계공업 장관
  • 1954–1957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57–1959모스크바주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59–1965국가 자동화·기계제조 위원회 의장 → 국가계획위 부속 기계제조위 의장
  • 1965–1980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