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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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 당 최고 지도자 인물 12명

조건 모두 해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870–1924 ○ 병사

갈림길마다 방향을 바꾼 조타수

1917년 4월 16일(구력 4월 3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유럽 전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구했으며, 이후 며칠에 걸쳐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로 태어난 혁명가·정치가·이론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분열에서 볼셰비키를 이끌었고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했다. 그의 정부는 토지를 분배하고 은행과 대공업을 국유화했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고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혁명을 추진했다. 동시에 국가보안기구가 집행한 적색테러로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수용되었고, 내전에서 반볼셰비키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 폐허와 기근, 민중 봉기에 대응해 1921년 신경제정책을 제안했다. 1924년 1월 21일 고르키에서 사망했고 스탈린이 후계 구도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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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0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00–05이스크라, 『무엇을 할 것인가』, 볼셰비키 분파 형성
  • 1902《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 1909《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간
  • 1914–17치머발트 좌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 1916《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집필·출간
  • 1917.4귀국, 4월 테제
  • 1917.10봉기 관철,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8–21브레스트 강화, 내전, 전시공산주의
  • 1918《국가와 혁명》 출간(1917년 집필)
  • 1921네프로의 후퇴
  • 1922–24뇌졸중,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그루지야 1878–1953 ○ 자연사

그루지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당과 국가를 장악한 지도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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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894–1971 ↓ 실각 1964

관 뚜껑을 연 사람,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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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아크말 이크라모비치 이크라모프

Акмаль Икрамович Икрам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우즈베키스탄 1898–1938 ✕ 처형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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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나만간 교육국 교사·시찰관, 페르가나 농촌사업부장
  • 1920–1921나만간 혁명위 부위원장, 무슬림국 의장, 페르가나·시르다리야 지역위 책임서기
  • 1921–1922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조직부장 겸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학
  • 1924–1929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 타슈켄트 주당위 서기, 중앙위 제2서기, 『콤무니스트』 편집자
  • 1929–1937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집단화·목화 단작 주도
  • 1934–193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소수민족 출신 유일)
  • 1937–1938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총살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906–1982 ○ 자연사

흔들지 않는 것을 통치로 삼은 사람

1979년 10월 7일 동베를린, 동독 건국 30주년 기념식에서 사진작가 레지스 보수가 브레즈네프와 에리히 호네커의 '사회주의 형제의 키스'를 촬영했다. 이 사진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1990년 베를린 장벽 벽화의 바탕이 되었다.

흐루쇼프 해임에 참여해 그를 대신해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대 말까지 권력을 독점했다. 1964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서기장으로, 1960~1964년과 1977~1982년에는 국가원수를 겸했다. 해빙 뒤에는 검열과 탄압이 강화되어 1970년대 중반 정치·종교 사범이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정치·경제 개혁에 적대적이어서 '정체의 시대'의 부패와 소비재 부족을 낳았고, 1975년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통치에서 물러났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결정했으며, 데탕트와 함께 SALT I·헬싱키 협정으로 미국과 핵 균형을 이루었다. 소련영웅 칭호를 네 번 받았고 1978년의 승리훈장은 1989년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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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2몰다비아 당 제1서기
  • 1954–56카자흐스탄에서 처녀지 개간 지휘
  • 1964.10흐루쇼프 해임을 주도하고 제1서기로
  • 1968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브레즈네프 독트린
  • 1972–79데탕트: SALT I·II, 헬싱키 협정
  • 1977신헌법 제정, 국가원수 겸임
  • 1979아프가니스탄 침공 승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체스노코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Чесноко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1910–1973 ○ 실각 1953

스탈린이 마지막으로 정치국에 올린 철학자

1964년 자신의 저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의 테제를 정면으로 논박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사회주의 전 기간으로 확장하는 독단주의자와 분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 격화에 관한 스탈린의 잘못된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당 이데올로그. 역사적 유물론과 게르첸의 세계관을 전공했으며, 1948년 출간된 《게르첸의 세계관》으로 1951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9년부터 《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1952년에는 중앙위 철학·역사부장과 이론지 《꼼무니스트》 편집장을 겸하며 스탈린 말기 이념 기구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상임위원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다음 날인 1953년 3월 6일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고리키 주당 간부와 국가방송위원장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에서 역사적 유물론 강좌를 이끌었고, 1964년 자신의 저작에서 스탈린의 계급투쟁 격화 테제를 공개적으로 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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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43스베르들롭스크 대학 교수·학과장
  • 1943–1947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선전 담당 부장·비서
  • 1947–1948중앙위 선전선동국 과학부 부장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부소장
  • 1949–1952《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철학역사부장·《꼼무니스트》 편집장
  • 1953–1957고리키 주당위 부장·비서
  • 1957–1959국가방송·텔레비전 위원회 의장
  • 1959–1967모스크바 대학 역사적 유물론 강좌 주임
  • 1967–1970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부총장

콘스탄틴 우스티노비치 체르넨코

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러시아 1912–1985 ○ 자연사

브레즈네프 체제의 마지막 서기장

1985년 2월, 병상에서 투표용지를 받아든 최초의 서기장 — 선거운동도, 연설도 없는 승리

브레즈네프의 비서 출신으로 안드로포프 사후 서기장이 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통치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의 짧은 집권은 고르바초프 등장의 막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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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1985서기장
  • 1984–1985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예프렘 예브세예비치 소콜로프

Яфрэм Евсеевич Сакалоў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벨로루시아인 1926–2022 ○ 자연사

농업 개발과 말기 개혁을 조율한 벨로루시아 당 지도자

그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혁신을 위한 혁신에는 제동을 걸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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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50붉은군대 제5독립예비공병연대 복무
  • 1956–1958브레스트주 농업 전문가와 농업감사관
  • 1958–1961이바노보 지구당 제2서기
  • 1961–1965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를류튜프 지구당 제1서기 등
  • 1969–1977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부장
  • 1977–1987브레스트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1991년 이후 러시아 시민권 보유) 러시아 (우크라이나계 어머니) 1931–2022 ○ 자연사

체제를 고치려다 체제를 끝낸 사람

1985년 3월 11일 서기장 선출을 앞둔 새벽, 정치국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포로스 별장에 사흘간 연금되었다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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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78스타브로폴 지방 당 제1서기
  • 1978–85농업 담당 서기, 49세에 정치국원
  • 1985.3서기장 선출
  • 1986–88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체르노빌 대응
  • 1987–89중거리핵조약, 아프간 철군, 동유럽 불개입
  • 1990초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 1991.12.25사임 연설, 소련 국기 하강

스타니슬라프 이바노비치 구렌코

Станислав Иванович Гуренко
정치·당 지도 소련 소련 → 우크라이나 러시아 1936–2013 ○ 암

소련 해체 직전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마지막 제1서기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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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76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 기술자 → 공장장 (1970–1976)
  • 1976–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 1980–1987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6체르노빌 사고 국가위원회 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제2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98–2006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 (제3·4대), 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유리 아나톨리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Ю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소련 말기의 모스크바 당 조직자

그의 삶은 공산당 금지 전후로 갈라졌다고 회고되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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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모스크바 학교 선구자단 지도원
  • 1960소련 공산당 입당
  • 1968모스크바 시당 조직·당무 부문 간부
  • 1977–1985모스크바 쿠이비셰프 구당위 서기·제1서기
  • 1986–1988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서기
  • 1988–1989모스크바 시당 서기·제2서기
  • 1989–1991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정치국원

기비 그리고리예비치 굼바리제

Гиви Григорьевич Гумбаридзе

위기의 공산당을 이끈 그루지야 관료

“법은 집행되어야 하지만, 희생자 없이 집행되어야 한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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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 1977–198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행정기관 부문 간부
  • 1983–1985제스타포니 지구당 제1서기
  • 1988트빌리시 시당 제1서기
  • 1988–1989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보안위원회 위원장
  • 1989–199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89–1990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상무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