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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라피크 니쇼노비치 니쇼노프

Rafiq Nishonovich Nishonov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6–2023 ↓ 퇴임 1991

소련 말기의 마지막 민족소비에트 의장

그의 이름 '라피크'는 아랍어로 '동지'를 뜻한다. 고르바초프가 그를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발탁하자, 우크라이나 콤소몰 서기 발레리 치부흐는 '고르바초프의 개인 라피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즈베크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타슈켄트 시당과 공화국 외무장관을 거쳐 1988년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라시도프 목화 스캔들 이후 공화국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듬해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에 발탁되었다. 연방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도 다민족 국가의 마지막 의회를 이끈 우즈베크 출신의 최고위 연방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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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1970s우즈베크 공화국 외교·당 행정에서 성장
  • 1986–1988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라시도프 이후 공화국 정리 국면 담당
  • 1989–1991민족소비에트 의장, 연방 해체기의 마지막 대표 라인
  • 19918월 쿠데타와 연방 붕괴 속에서 직위가 소멸
  • 1991 이후러시아에서 생활하며 소련 말기 공화국 엘리트로 남음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코마로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ома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7–1967 ✕ 추락사

보스호트 1호 사령관이자 인류 최초 우주비행 희생자

「나는 태양을 향해 우주선을 지향시킬 수 없다」 — 소유즈 1호의 잇단 고장 속에서도 코마로프는 끝까지 수동 조작을 시도하며 지상에 상황을 보고했다.

소련 공군의 시험비행사이자 항공우주공학자로, 1964년 보스호트 1호 사령관으로서 세계 최초의 다인승 우주비행을 지휘했다.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몇 안 되는 우주비행사 중 한 명으로,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선 설계와 우주비행사 훈련 평가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 1967년 소유즈 1호의 첫 유인 시험비행에서 단독 조종사로 나섰으나, 재진입 후 주낙하산 미전개로 귀환선이 추락하여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 사망자가 되었다. 그의 희생은 소련 유인우주계획의 설계 검증과 안전 절차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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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소련 공군 전투기 조종사 (그로즈니·무카체보)
  • 1954–1959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항공무장학부 생도
  • 1959–1960공군비행시험연구소(GK NII VVS) 시험비행사 겸 기술장교
  • 1960–1967우주비행사 — 제1차 공군 그룹, 훈련센터(TsPK)
  • 1964.10보스호트 1호 사령관 — 세계 최초 다인승 우주비행
  • 1966–1967TsPK 제3부장 · 선임교관 우주비행사
  • 1967.04소유즈 1호 사령관 — 첫 유인 시험비행 (귀환 중 사망)

겐나디 바실리예비치 콜빈

Геннад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лб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7–1998 ○ 심장마비

낯선 러시아인 당간부로 임명되어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인물

1986년 12월 16일, 알마아타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차 총회는 단 18분 만에 끝났다. 모스크바에서 급파된 라주몹스키쿠나예프의 해임과 콜빈의 임명을 통보하자,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겐나디 콜빈은 소련의 당 기구에서 평생을 보낸 전형적인 브레즈네프식 간부였으나,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면서 예기치 않게 역사의 분수령에 서게 되었다. 니즈니타길 출신의 러시아인으로 카자흐스탄과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그의 임명은 알마아타에서 수천 명의 카자흐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는 젤톡산(12월) 봉기를 촉발했고, 이는 소련 민족문제의 폭발을 예고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다 1990년 은퇴했고, 1998년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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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2니즈니타길 레닌구 당위원회 제2서기·제1서기
  • 1962–1970니즈니타길 시당위원회 제2서기·제1서기
  • 1970–1975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서기·제2서기
  • 1975–198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83–1986울리야놉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89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바딤 발렌티노비치 자글라딘

Вадим Валентинович Загладин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유로코뮤니즘 대화의 얼굴

"브레즈네프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포노마료프의 제1부부장 바딤 자글라딘이었다. 사냥 트로피를 선물받고, 공식 사진에서 항상 총비서 바로 뒤에 자리했다." —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시코프

중앙위 국제부에서 24년, 그중 13년을 보리스 포노마료프 아래 제1부부장으로 지내며 서유럽 공산당을 상대한 소련의 핵심 창구였다. 유로코뮤니즘 시대에 미테랑, 브란트, 나폴리타노와 교류하며 사회민주주의에 수렴하는 개혁된 공산주의를 주창했고, 고르바초프 '신사고' 외교의 이론적 토대를 이반 프롤로프와 함께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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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후 동 대학에서 교편
  • 1954–1964《노보예 브레먀》 및 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저널리스트
  • 1964–1967중앙위 국제부 고문(콘술탄트)
  • 1967–1975중앙위 국제부 부부장
  • 1975–1988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포노마료프 아래 서유럽 공산당 관계 총괄
  • 1988–1991미하일 고르바초프 고문
  • 1992–2006고르바초프 재단 고문, 유럽대서양협력협회 부회장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코나레프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Конарев

소련 철도의 마지막 대장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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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 졸업, 유즈나야 철도 오스노바 역에서 기술자로 시작
  • 1953–1960유즈나야 철도에서 부역장·운수과장·운행부장 등 역임
  • 1962유즈나야 철도 제1부국장
  • 1972–1976유즈나야 철도 국장
  • 1976–1977소련 교통부 차관
  • 1977–1982소련 교통부 제1차관 겸 열차운행총국장
  • 1982–1991소련 교통부 장관, 1988년 사상 최대 화물 적재량 달성
  • 1991–2007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 회장, 50편 이상의 과학 논문 발표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카투셰프

Константин Фёдорович Катушев

대외경제관계를 맡은 말기 경제 관료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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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고리키 지역과 당 경제관리 라인에서 성장
  • 1968–1977중앙위 서기, 산업·경제 조정 업무 담당
  • 1977–1982각료회의 부의장, 경제 행정 실무에 관여
  • 1982–1985코메콘 관련 대외경제 협력 업무 수행
  • 1988–1991대외경제관계 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무역·합작 개방 관리

미하일 이바노비치 샤도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Щадов

소련의 마지막 석탄공업장관, 노천 채탄과 체르노빌 터널의 광부

1986년 체르노빌에서 샤도프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뚫을 광부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너희 중 누구라도 가지 않겠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가야 한다."

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체렘호보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와 톰스크 공대를 거쳐 광산기사로 성장했고, 보스티부골(Vostsibugol) 생산합체의 총책임자를 거쳐 1985년 12월 소련 석탄공업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임 중 네륜그리·베료좁스코예 등 신규 탄광 개발과 노천 채탄 기술의 대규모 도입을 주도했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에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굴착하는 광부들을 직접 지휘했다. 1989년 쿠즈바스와 도네츠크를 휩쓴 대규모 광부 파업에 직면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지지로 해임되면서 소련 석탄공업장관직은 그와 함께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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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 '안가르스트로이' 콜호스에서 농업 노동
  • 1944–1948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 전기기계과 수학, 졸업
  • 1948–1950체렘호보우골 트러스트 5-비스 탄광에서 구역 정비사, 구역장, 수석정비사 보좌
  • 1950–1953톰스크 공과대학 부설 고등기술자 과정 수료, 광산기사 자격
  • 1953–1960사할린 및 체렘호보 탄광들에서 수석기사, 탄광장 역임
  • 1960–1963맘슬류다(Mamslyuda) 트러스트 관리자, 이르쿠츠크주 마마
  • 1965–1966이르쿠츠크주당위원회 지도원
  • 1966–1974보스티부골 콤비나트 부소장, 소장
  • 1974–1977보스티부골 생산합체 총책임자
  • 1977–1981소련 석탄공업 차관
  • 1981–1985소련 석탄공업 제1차관
  • 1985–1991소련 석탄공업장관
  • 1992모스크바 신용은행 이사회 의장

유리 페트로비치 바탈린

Юрий Петрович Баталин

서시베리아 석유단지와 체르노빌 석관을 건설한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건설 총책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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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5바시키르 석탄·석유 건설 트러스트에서 작업반장에서 트러스트 관리자로 승진
  • 1965–1970튜멘석유가스건설총국 주임기사 겸 제1부국장
  • 1970–1983석유·가스산업건설 차관, 후에 제1차관
  • 1983–1985소련 국가노동·사회문제위원회 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겸임)

타티야나 이바노브나 자슬랍스카야

Татьяна Ивановна Заславская
학술·연구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7–2013 ○ 자연사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뇌관

「소비에트 경제학자로서 국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는 11명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인민 앞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 — 1983년

물리학도에서 경제학으로 전향한 키이우 출신 학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농촌사회를 연구하며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을 개척했고, 1983년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KGB가 압수했으나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토양이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VTsIOM 초대 소장, 인민대의원으로 사하로프·옐친과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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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50모스크바대 물리학과 3년 수료 후 경제학부 우등 졸업
  • 1950–63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농업 부문 연구, 1956년 кандидат 학위
  • 1963–87노보시비르스크 IEiOPP, 1967년 사회문제 부서장, 경제사회학 학파 창립
  • 1968 / 1981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당시 여성 학자 5명 중 한 명)
  • 1983「노보시비르스크 선언」: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사회적 경직을 진단
  • 1986–91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 1988–92VTsIOM(전연방 여론연구센터) 창립 소장
  • 1989–91인민대의원, 사하로프·옐친과 지역간 대의원 그룹에서 활동

보리스 이바노비치 고스테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Гостев

시장개혁을 거부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마지막 정통파 재무장관

협동조합원이 월 천 루블을 버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사회에 부자 계층이 생기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스크바 경공업기술대학을 졸업한 기술자 출신 경제 관료로, 신발 공장 기사에서 출발해 국가계획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서를 거쳐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으로 1985년 12월 소련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재임 4년간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재정 악화, 급증하는 예산 적자, 협동조합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으며, 시장개혁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협동조합원의 고소득에 누진과세를 부과하며 '노동자가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한 인물로, 사회주의적 평등을 훼손하는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다. 재임 중 오늘날의 예산·재무 아카데미인 재정실무자 연수원을 설립했고, 1989년 해임 후에는 그곳에서 교수로 13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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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59신발 공장 기사, 경공업부, 칼리닌 소브나르호스 노동임금 부장
  • 1959–1966국가계획위원회, 국가과학경제위원회 부문 부장
  • 1966–1975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 제1부장
  • 1975–1982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장
  • 1982–1985당 중앙위원회 경제부 제1부장 → 경제부장
  • 1985.12–1989.6소련 재무장관
  • 1989–2002재정실무자 연수원 교수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27–2016 ○ 자연사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오른 유일한 리투아니아인, 1월 사태로 수감된 마지막 모스크바파 서기장

2000년 아담쿠스 대통령이 사면을 제안하자 그는 거절했다: 「나는 조국 앞에 아무 죄도 없다.」

리투아니아 알리투스 출신으로 1942년부터 노동자로 일하며 공산당 기구에서 성장했고, 1989년 리투아니아공산당 분열 이후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에 맞서 연방 유지를 주장했으며, 1991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군대 투입을 요청하고 「국가구원위원회」를 이끌어 소련군의 빌뉴스 텔레비전 탑 진압 작전에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작전에서 민간인 14명이 사망했고, 1994년 민스크에서 체포되어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살인 방조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담쿠스 대통령의 사면 제안을 거부하며 '조국 앞에 죄가 없다'고 답했고, 2006년 1월 13일 만기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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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우드무르티야에서 목수·선반공
  • 1944–1955콤소몰·공산당 기구 활동, 빌뉴스 사범대학 졸업
  • 1963–1976당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빌뉴스 공과대학 교수
  • 1976–1990빌뉴스 사범대학 과학공산주의 교수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1–1994벨라루스로 도피
  • 1994–2006체포 후 12년형, 2006년 1월 만기 출소

니콜라이 예피모비치 크루치나

Николай Ефимович Кручина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금고를 지킨 마지막 재무관

1990년 7월 9일 제28차 당대회 연단에서 크루치나는 당 중앙위가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처음 공개했다. 소련 공산당 역사상 당 재정의 실체가 대의원들 앞에 드러난 유일한 순간이었다.

알타이 농촌 출신의 농학도로 콤소몰과 당 농업 부문에서 경력을 쌓아, 1965년부터 13년간 첼리노그라드 주당 제1서기로 카자흐 초원의 처녀지 개간을 지휘하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83년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당 중앙위 업무관리국장에 올라 당의 방대한 재산과 해외 원조 자금, 이른바 '당의 금'을 총괄했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 예산을 공개해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밝혔으나, 쿠데타 실패 며칠 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의 죽음과 전임자 파블로프·국제부 간부 리소볼리크의 연이은 추락사는 당 자금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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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노보체르카스크·카멘스크·스몰렌스크 시·주 위원회 제1서기
  • 1959–1962콤소몰 중앙위 농촌청년부장
  • 1962–1963중앙위 농업부 지도원
  • 1963–1965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니 크라이 위원회 서기
  • 1965–1978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노그라드 주 위원회 제1서기
  • 1978–1983중앙위 농업부 제1부장
  • 1983–1991중앙위 업무관리국장 (당 재무·재산 총괄)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

Дмитрий Антонович Волкого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8–1995 ○ 위암

군 선전 장성에서 소련 기록을 파헤친 역사가로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레닌이 1918년 펜자에 보낸 '쿨라크 100명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전문을 발견했을 때, 볼코고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내 마음속에서 무너진 마지막 성채였다."

소련군 심리전 총국장과 군사정치총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상장군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당 중앙위원회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하며 스탈린 평전 《승리와 비극》을 1978년부터 집필했다. 1983년 완성된 원고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아래 1989년 공개되어 소련 역사학에 충격을 주었다. 군사사연구소 소장으로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적 전기를 출간했고, 《지도자들》 3부작으로 러시아 연방 국가상을 사후 수상했다. 만년에는 옐친의 국방 고문과 국가두마 의원으로 공산당·KGB 문서의 대대적 비밀해제를 주도했으며, 평생의 볼셰비키 신앙을 '유토피아적 포로 상태'라고 술회하고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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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 1963–1971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교수 · 학과 부책임자
  • 1971소련 육해군 총정치본부(GlavPU) 근무
  • 1979–1984GlavPU 특수선전(심리전) 총국장
  • 1984–1988GlavPU 부본부장 (상장군 진급, 1986)
  • 1988–1991소련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소장
  • 1991–1995러시아 대통령 국방·안보 고문, 국가두마 의원, 문서비밀해제위원회 의장

빅토르 파블로비치 카르포프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Карпов

SALT·INF·START를 관통한 소련 군축외교의 얼굴

'어느 일방의 우월을 배제하는 평등과 동등한 안보의 원칙 위에서' — 1985년 제네바 군축협상 개시 성명

소련 외무부의 대표적 군축 전문 외교관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SALT-I·SALT-II·INF·START-I에 이르기까지 소련-미국 간 전략무기 협상의 결정적 국면에서 소련 측 실무를 이끌었다. MGIMO 졸업 후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과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을 거쳐, 1985년 군축·군비제한문제국장으로서 제네바 협상에서 소련 대표단 단장을 맡았다. INF 전면폐기 조약(1987)과 START-I(1991)의 타결을 실무적으로 관철시켰고, 1990년 외무차관에 올라 소련 붕괴 직전까지 대미 전략무기 관계를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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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8–1962소련 외무부 대외정책정보국 제1서기
  • 1962–1966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66–1980소련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
  • 1980–1985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 1985–1990소련 외무부 군비제한·군축문제국장, 콜레기야 위원
  • 1990–1991소련 외무차관
  • 1991–1997러시아 외무부 군축문제국 수석고문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말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Мальцев

서시베리아 유전으로 소련 석유생산 정점을 이끈 장관

1971년 3월, '5개년 계획의 석유 채굴 과제 수행과 높은 기술·경제 지표 달성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마이코프 출신의 석유 기술자로, 타타르·페름 유전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석유공업 장관(1977~1985)까지 오른 인물. 발렌틴 샤신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장관직을 이어받아, 브레즈네프 후기 서시베리아 유전의 집중 개발을 지휘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로 이끌었다. 1981년부터 1986년까지 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을 지냈고, 고르바초프 집권 직전인 1985년 2월 퇴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71) 수훈자이며, 퇴임 후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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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그로즈니 석유연구소 졸업, 광산기사 자격 취득
  • 1951–1956타트네프티 계통 공장장·주임기사·부책임자
  • 1956–1960타트네프티 산하 아즈나카옙스크네프티 국장
  • 1960–1961타트네프티 산하 부굴마네프티 국장
  • 1961–1972페름 소브나르호스 석유공업국장 → 페름네프티 생산합체 총책임자
  • 1972–1977소련 석유공업 제1차관
  • 1977–1985소련 석유공업 장관

레프 페트로비치 페옥티스토프

Лев Петрович Феоктист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28–2002 ○ 자연사

핵무기 설계자에서 핵군축의 비판자로

그는 핵무기 경쟁을 두고 “폭탄 하나에도 쓸모를 찾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프 페옥티스토프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훗날 핵군축과 원자로 안전을 주장한 과학자였다. 아르자마스-16에서 슬로이카를 바탕으로 한 열핵무기 연구에 참여했고, ‘제3의 아이디어’로 불린 2단계 설계의 돌파를 목격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무기 개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핵실험과 군비경쟁의 무의미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고, 말년에는 레이저 핵융합과 본질적으로 안전한 원자로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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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5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에서 핵물리학 전공
  • 1951–1955KB-11 이론부, 아르자마스-16 연구원
  • 1955–1978VNIITF, 첼랴빈스크-70 이론물리학자
  • 1966사회주의 노동 영웅, 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78–1988쿠르чатов 원자력연구소 연구자, MEPhI 교수
  • 1988–200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레이저 핵융합 부서장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카멘체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аменцев

소련 수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기술관료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사상 처음으로 각료 인준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카멘체프는 거부된 극소수 부총리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강선박 화부로 노동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수산공업연구소를 졸업하고 무르만스크의 트롤어선 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하여, 1979년 소련 수산장관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소련 원양어업은 세계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고, 어획·가공·선단 건조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확립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했으나,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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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모스크바강 선박회사 화부·선반공·기관사
  • 1950–1957무르만스크 트롤어선단 기술자·국장·공장 수석기사
  • 1957–1962무르만스크 국민경제회의 수산공업 총국장·부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수산위원회 부위원장·제1부위원장
  • 1965–1979소련 수산부 제1차관
  • 1979–1986소련 수산장관
  • 1986–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 1993–2003전러시아 수산기업협회 회장·러시아 산업가연맹 부회장

제르멘 미하일로비치 그비시아니

Джермен Михайлович Гвишиани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그루지야 1928–2003 ○ 자연사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을 연결한 철학자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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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1–1955소련 해군 복무
  • 1955–1965국가신기술위원회(이후 GKNT) 근무
  • 1965–1985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
  • 1976–1992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 소장
  • 1985–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부의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이고리 세르게예비치 벨로우소프

Игорь Сергеевич Белоусов

소련 해군 전략균형을 건조한 조선장관

1974년 12월 4일, '비공개' 최고회의 간부회의 칙령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국가 최고 훈장조차 기밀로 처리될 만큼, 그가 지휘한 전략원잠 계획은 소련의 가장 은폐된 사업이었다.

이고리 벨로우소프는 발트 조선소의 현장 기술자에서 소련 조선공업 장관까지 오른 선박 엔지니어이자 국가 지도자다. 1970년대 소련 해군 전략미사일 잠수함 전력의 핵심을 설계·건조한 책임자로서, 프로젝트 667B/BD/BDR 계열 잠수함과 미국 트라이던트에 대응하는 타이푼급 전략원잠 체계를 기술적으로 총괄하며 미소 간 해양 전략균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88년부터는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군수복합체 전체를 조정했고, 이후 전환기 방산 컨설팅과 수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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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63발트 조선소에서 현장 기술자·콤소몰 서기·조립용접공장장·생산부장 역임
  • 1963–1967발트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7–1969아드미랄테이스키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9–1976소련 조선공업 차관
  • 1976–1984소련 조선공업 제1차관
  • 1984–1988소련 조선공업 장관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 2000–2005로소보론엑스포르트 수석고문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리지체프

Алексей Дмитриевич Лизич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8–2006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도 군 정치기관을 수호하려 했던 마지막 총정치국장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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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체레포베츠 보병학교 졸업, 콤소몰 정치업무 시작
  • 1957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통신)
  • 1960–1965총정치국장 보좌관 (콤소몰 담당, 대령)
  • 1965–1971제13근위군단 정치부장 → 모스크바 군관구 정치국 제1부국장 (소장)
  • 1971–1980주독소련군 정치국 제1부국장 → 자바이칼 군관구 정치국장 (중장)
  • 1980–1985총정치국 부국장 (상장) → 주독소련군 정치국장
  • 1985–1990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 (대장, 1986)
  • 1990–1992국방성 총감찰단, 퇴역

레프 알렉세예비치 보로닌

Лев Алексеевич Воронин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의 수호자

1990년 말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심장마비로 입원하자 보로닌이 각료회의 의장 대행을 맡았다. 발렌틴 파블로프가 새 총리로 선출된 1991년 1월 14일까지 소련 정부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다.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1985~1989)으로서 후기 계획경제의 물자 공급 체계를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 속에서도 국가 공급망을 지켜낸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내각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1989~1991)으로 승진하여 경제 운영 전반을 조정했고, 1990년 말 리시코프의 심장마비 시 의장 대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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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9스베르들롭스크 제356공장 작업반장 → 작업장장
  • 1959–1963카멘스크-우랄스키 및 스베르들롭스크 방산 기업 수석기사
  • 1963–1965중우랄 소브나르호스 무선전자공업 국장
  • 1965–1968국방공업부 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장
  • 1968–1979국방공업부 국장 → 계획생산총국장 → 차관
  • 1979–1980소련 국방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12 리시코프 입원 시 의장 대행
  • 1991유럽공동체 주재 소련 상임대표

칭기즈 토레쿨로비치 아이트마토프

Чингиз Торекулович Айтматов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새긴 소비에트 키르기스 작가이자 외교관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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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6수의사로 일하며 첫 작품 발표
  • 1956–1958모스크바 고리키 문학대학 수료
  • 1959–1967『프라우다』 키르기스 특파원
  • 1966–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7~11기)
  • 1985–1991고르바초프 문화 고문,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86–1991키르기스 작가동맹 제1서기
  • 1990–1993소련·러시아 룩셈부르크 대사
  • 2000–2008키르기스스탄 EU·NATO·유네스코 대사

게르만 아르세니예비치 곤차로프

Герман Арсеньевич Гонча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8–2009 ○ 사망

사하로프 팀에서 출발해 소련 수소폭탄 역사의 수석 기록자가 된 물리학자

사하로프조차 비밀에 부친 '제3의 아이디어'의 수수께끼에서, 곤차로프는 그 실마리가 푹스의 1948년 보고서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하로프의 이론 부서에서 출발해 RDS-6s, RDS-37, 차르 봄바 개발에 참여하고 메가톤급 신형 전하 설계를 제안한 소련의 핵물리학자다. 냉전 후기 옐친 정부 아래 소련 핵무기 문서고의 수석 해제자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를 편찬했으며, 클라우스 푹스의 1948년 보고서와 '제3의 아이디어'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으로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기록 작업은 1955년 방사선 내파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실증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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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KB-11(아르자마스-16) 실험원자로부 선임연구보조원, 이후 엔지니어
  • 1953KB-11 이론부서 정식 연구원(사하로프 휘하)
  • 1955RDS-37 2단계 열핵전하 설계·계산 공동 수행
  • 1961차르 봄바(RDS-220) 물리 설계 참여
  • 1965메가톤급 열핵전하 신설계 방향 제안, 1966년 시험 성공
  • 1967–2004VNIIEF 이론부서장
  • 1990년대–2009『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다권본 책임 편찬자, 핵무기사 연구
  • 2002–2009VNIIEF 이론·수리물리연구소 수석연구원

예두아르트 암브로시예비치 셰바르드나제

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외교·국제활동 소련 국가기관 소련·그루지야 그루지야 1928–2014 ○ 자연사, 사망

냉전을 끝낸 소련 외무장관, 그루지야 대통령이 되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외무장관직 사임과 탈당을 선언했다. 일부 기록은 이 연설을 12월 21일로 적어 날짜가 엇갈리며,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28년 그루지야 마마티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을 거쳐 1972년 당 제1서기가 되어 대규모 부패 단속과 아바샤 실험을 벌였고, 1985년 외교 경험 없이 소련 외무장관에 발탁되어 군축과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을 협상했다. 1990년 12월 20일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사임했고, 1992년 조국으로 돌아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으로 2003년 장미혁명 때까지 이끌었다. 2014년 7월 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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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 1957–61그루지야 콤소몰 제1서기
  • 1992–2003국가평의회 의장, 의회 의장, 국가수반,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