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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행정 · 미국 국가기관 인물 20명

조건 모두 해제

허버트 C. 후버

Herbert Hoover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74–1964 ○ 병사

기근 구제의 거장이자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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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의 퀘이커 가정에서 출생
  • 1895스탠퍼드대 졸업, 광산기사로 중국·호주 등에서 부 축적
  • 1914–1919벨기에 구제위원회(CRB) 위원장, 점령지 벨기에에 식량 지원
  • 1917–1919미국 식량청장, '식량 독재자'로 전시 식량 통제
  • 1919–1923미국구제청(ARA) 국장, 동유럽·러시아 구제 주도
  • 1921.08.20리가 협정 조인, 볼가 기근 구제의 자율성·비용 조건 확정
  • 1921–1928상무장관
  • 1929–1933제31대 대통령, 대공황 속 재선 실패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2–1945 ○ 뇌출혈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미국, 얄타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 4선 대통령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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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뉴욕주 하이드파크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출생
  • 1913–1920해군 차관보,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확장 주도
  • 1921소아마비 진단, 하반신 영구 마비
  • 1929–1932뉴욕 주지사, 대공황 대응 실업구제 정책 선도
  • 1933–1945제32대 대통령, 뉴딜·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3.11테헤란 회담, 스탈린과 첫 대면
  • 1945.02.04–11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 참전·유엔 안보리 틀 합의
  • 1945.04.12그루지야주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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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4–1972 ○ 자연사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으로 냉전의 미국 틀을 세운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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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미주리주 라마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 포병대 대위로 참전
  • 1935–1945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 위원회로 전시 계약 부패 조사
  • 1945.01–04부통령, 루스벨트 사망으로 4월 12일 대통령 승계
  • 1945–1953제33대 대통령, 원자폭탄 투하·트루먼 독트린·마셜 플랜·NATO 창설·한국전쟁
  • 1947.03.12트루먼 독트린 선언, 그리스·터키 군사원조 요청
  • 1948.04.03마셜 플랜(경제협력법) 서명
  • 1951.04.11맥아더 극동사령관 해임

해리 홉킨스

Harry Hopkins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90–1946 ○ 자연사

뉴딜의 행정가이자 전시 외교의 실무자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대일전 준비 시점을 물었고, 스탈린은 8월 8일을 제시했다.

해리 홉킨스는 대공황기 미국의 공공구호를 유급 일자리 정책으로 조직한 행정가이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참모였다. 그는 연방구호와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한 뒤 상무장관을 지냈고, 전쟁기에는 무기대여법과 연합국 협력을 조율했다. 건강 악화에도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특사로 소련과 협상했으며,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시점과 일본 점령 구역을 물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쟁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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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5뉴욕 빈곤개선협회 가족복지부 고용국 감독관
  • 1915–1918뉴욕시 아동복지국 사무국장
  • 1921–1923미국 적십자 남서부 지부 총괄 관리자
  • 1933–1935연방긴급구호청장
  • 1935–1938공공사업진흥청장
  • 1938–1940미국 상무장관
  • 1940–1945루스벨트 대통령 특별보좌관·전시 특사
  • 1945트루먼 대통령 특사, 모스크바 회담 대표
  • 1946뉴욕에서 사망

존 J. 매클로이

John Jay McCloy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5–1989 ○ 자연사

전후 미국 국제질서를 설계한 실무가

흐루쇼프는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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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미 육군 포병 장교, 프랑스 전선 복무
  • 1921–1940뉴욕 변호사, 월스트리트 법률가
  • 1941–1945전쟁부 차관보, 전시 동원·정보·안보 정책 담당
  • 1947–1949세계은행 제2대 총재
  • 1949–1952미국 독일 고등판무관
  • 1953–1960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
  • 1953–1970외교협회 이사회 의장
  • 1961케네디 대통령 군비축소 고문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Adlai Ewing Stevenso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0–1965 ○ 심장마비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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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제임스 웨브

James Edwin Webb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906–1992 ○ 자연사

아폴로를 조직한 행정가

아폴로 1호 화재 뒤 그는 NASA가 조사와 수습을 맡아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제임스 웨브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대규모 공공사업을 조직한 미국의 행정가였다. NASA 국장으로서 아폴로 계획에 안정적인 예산과 정치적 지지를 결합하고, 연구센터와 산업·대학을 조정하는 중앙집중적 운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유인 달 착륙을 추진하면서도 마리너와 파이어니어 같은 행성과학 및 우주망원경 연구를 지지했다. 아폴로 1호 화재 뒤에는 조사를 이끌고 NASA의 책임을 의회에 설명하며 계획의 연속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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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졸업
  • 1936워싱턴 법학대학원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 1936–1944스페리 자이로스코프 인사·재무·경영 담당
  • 1946–1949미국 예산국 국장
  • 1949–1952미국 국무부 차관
  • 1961–1968미 항공우주국 국장
  • 1969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우주시대의 관리』 출간

폴 니츠

Paul Nitze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인 미국계 1907–2004 ○ 자연사

핵전략과 군비통제를 오간 냉전 설계자

1982년 제네바 협상 중 유리 크비친스키와 ‘숲속 산책’을 하며 타협안을 모색했다.

폴 니츠는 미국의 냉전 전략과 핵무기 정책을 형성한 외교·안보 관료였다. 그는 NSC-68에서 소련과의 장기 대결을 군사력 증강의 문제로 정식화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을 관리하려면 정교한 협상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SALT에 참여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INF 협상을 이끌면서, 강한 억지력과 군비 감축을 서로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 실무 노선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비경쟁의 설계자이자 협상 가능한 질서를 찾은 인물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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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전략폭격조사단 부의장
  • 1950–1953국무부 정책기획국장
  • 1961–1963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 1963–1967해군장관
  • 1967–1969국방부 부장관
  • 1969–1973SALT I 미국 대표단
  • 1981–1984INF 미국 수석협상가
  • 1984–1989대통령·국무장관 군비통제 특별고문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8–1973 ○ 자연사

개혁과 전쟁 사이의 냉전 대통령

1968년 7월, 미국과 소련이 전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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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9텍사스 제10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 1949–1951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 1951–1953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 1953–1955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 1955–1961상원 다수당 원내대표
  • 1961–1963미국 부통령
  • 1963–1969미국 제36대 대통령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3–1994 ○ 뇌졸중

데탕트로 소련과 핵무기 제한의 틀을 열고 워터게이트로 무너진 유일한 사임 대통령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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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제럴드 포드

Gerald Ford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3–2006 ○ 사망

선거로 뽑히지 않은 채 데탕트의 마지막 국면을 이끈 대통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기차에서 워싱턴의 눈 치우기가 힘들다는 포드의 말에 브레즈네프가 '우리의 첫 거래는 죽 드리죠, 소련 제설차'라고 받았다.

하원의원 25년과 부통령을 거쳐 1974년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이 된 공화당 정치가로, 한 번도 선거로 뽑히지 않고 백악관에 오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닉슨이 연 데탕트를 계승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브레즈네프를 만나 SALT II의 틀, 운반수단 2,400기와 MIRV 1,320기의 상한을 잡았고, 이듬해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며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법으로 만들었다. 닉슨에 대한 사면이 최대 논란이 되었고, 1976년 카터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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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3하원의원 (미시간 5선거구)
  • 1965–1973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 1973–1974부통령
  • 1974–1977제38대 미국 대통령
  • 1974.11블라디보스토크 회담, 브레즈네프와 SALT II 기본 틀 합의

찰스 배닉

Charles Vanik

이민의 자유를 무역법에 새긴 의원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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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 2007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사망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6–2009 ○ 자연사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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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7–1963 ✕ 암살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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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18 ○ 자연사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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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매사추세츠주 밀턴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 1942–1945해군 뇌격기 조종사로 58회 출격, 지치지마에서 격추되어 잠수함에 구조
  • 1953–1966자파타 오프쇼어 석유회사 창업, 텍사스의 백만장자
  • 1967–1971텍사스주 하원의원, 두 차례 상원 선거 낙선
  • 1971–1977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 의장, 중국 주재 대표, CIA 국장
  • 1981–1989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
  • 1989–1993제41대 대통령: 몰타 회담으로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지지, 걸프전
  • 2018휴스턴에서 94세로 사망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24 ○ 자연사

데탕트의 정점과 종말을 모두 품은 미국의 39대 대통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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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1967그루지야주 상원의원
  • 1971–1975제76대 그루지야 주지사
  • 1977–1981제39대 미국 대통령
  • 1982카터 센터 설립
  • 2002노벨 평화상 수상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5–2020 ○ 자연사

냉전 종식기의 신중한 전략가

몰타 회담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회담의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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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공군 소위 임관
  • 1953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67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 1972–1973리처드 닉슨 대통령 군사보좌관
  • 1973–1975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부차관보
  • 1975–1977제럴드 포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1989–1993조지 H. W.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2001–2005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 의장

테드 소렌슨

Ted Sorense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8–2010 ○ 뇌졸중

쿠바 위기에서 케네디의 펜을 잡은 연설문 작성자, '격리'라는 길을 낸 사람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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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
  • 1961–1964대통령 특별고문 겸 수석 연설문 작성자
  • 1964–1966저술가 (『케네디』 출간, 국제적 베스트셀러)
  • 1966–2010국제 변호사, Paul, Weiss 로펌
  • 1977CIA 국장 지명자 (인준 철회)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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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