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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기관 인물 68명

찰스 배닉

Charles Vanik

이민의 자유를 무역법에 새긴 의원

1974년 그는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하원에 제출해 이민의 자유를 무역 조건으로 만들었다.

찰스 배닉은 클리블랜드 동부의 노동자와 동유럽계 주민을 기반으로 활동한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다. 그는 조세 형평, 사회보장, 메디케어, 오대호 환경 문제를 다루며 국내 개혁 의제를 외교정책과 연결했다. 1974년 헨리 잭슨과 함께 잭슨-배닉 수정조항을 발의해, 이민을 제한하는 비시장경제 국가에 대한 정상 무역관계 부여를 조건부로 묶었다. 이 법은 소련계 유대인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자의 이주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데탕트와 무역을 인권 조건에 연계한 미국 의회의 개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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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클리블랜드 시의회 의원
  • 1940–1942오하이오주 상원의원
  • 1942–1945미 해군 예비역 장교, 대서양·태평양 전선 복무
  • 1947–1954클리블랜드 시 법원 판사
  • 1955–1969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1선거구
  • 1969–1981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 제22선거구
  • 1973–1981하원 세입위원회 무역소위원회 위원장
  • 1985–1995Squire Sanders & Dempsey 워싱턴 사무소 변호사, 동유럽 무역 담당
  • 2007플로리다주 주피터에서 사망

제라드 스미스

Gerard C. Smith

핵시대의 협상가

스미스가 정책기획실장 시절 제안한 모스크바-워싱턴 직통 회선은 국무부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훗날 '핫라인'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구상의 공을 스미스에게 돌렸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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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예일대학교 졸업
  • 1938예일 법학대학원 졸업, 뉴욕 변호사
  • 1942–1945미 해군성 조달 담당관
  • 1950–1954원자력위원회 특별보좌관
  • 1954–1961국무부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및 정책기획국장
  • 1969–1973미국 군비통제·군축청장, SALT I 미국 대표단 수석협상가
  • 1977–1980대통령 특별대표, 핵확산 방지 담당
  • 1981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아서 룬달

Arthur C. Lundahl
보안·정보·치안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5–1992 ○ 호흡부전

U-2 정찰사진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문을 연 사진판독의 대부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 1962년 10월 15일,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미사일을 확인하며

시카고 출신의 지질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사진판독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3년 CIA에 합류해 사진판독부를 이끌었고, 1961년 국가사진판독센터(NPIC)의 초대 소장이 되어 U-2 정찰기와 초기 정찰위성의 영상 분석을 총괄했다. 1962년 10월 15일, NPIC 분석관들이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SS-4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지를 식별했을 때 룬달이 직접 확인하고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는 말과 함께 CIA 본부에 보고했으며, 다음 날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이를 브리핑했다. 1973년 퇴임까지 NPIC를 이끌며 냉전기 미국의 영상정보 역량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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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시카고 대학 지질학 학사·석사
  • 1942–1945미 해군 사진판독 장교
  • 1946–1953해군사진판독센터 측량과장
  • 1953–1961CIA 사진판독부장
  • 1961–1973국가사진판독센터(NPIC) 초대 소장
  • 1973국가안보훈장 수상 및 퇴임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6–2009 ○ 자연사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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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7–1963 ✕ 암살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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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맥조지 번디

McGeorge Bundy
보안·정보·치안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9–1996 ○ 심장마비

쿠바 미사일 위기 첫날 밤,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 국가안보보좌관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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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예일대학교 수학 학사
  • 1943–1946미군 정보장교
  • 1949–1953하버드대학교 정부학 교수
  • 1953–1961하버드대학교 문리학부 학장
  • 1961–1966미국 국가안보보좌관
  • 1966–1979포드재단 회장
  • 1979–1989뉴욕대학교 역사학 교수

발터 슈텔레

Walter Stoessel

데탕트의 현장을 지킨 직업 외교관

1974년 3월 4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했다.

발터 슈텔레는 냉전기 미국 외교관으로, 소련과 유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데탕트 국면의 미소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진 외교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서독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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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미 육군 복무
  • 1947–1953국무부 동유럽·소련 담당
  • 1963–1965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 공사
  • 1968–1972폴란드 주재 미국대사
  • 1972–1974유럽·캐나다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74–1976소련 주재 미국대사
  • 1976–1981서독 주재 미국대사
  • 1982–1983미 국무부 부장관

조지 프랫 슐츠

George Shultz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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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게일 할보르센

Gail Halvorsen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0–2022 ○ 자연사

선의의 행동을 국제적 상징으로 만든 공군 조종사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비행기를 알리는 방법을 묻자 날개를 흔들겠다고 약속했다.

게일 할보르센은 미국 공군 조종사로, 1948년 베를린 공수작전에 참여해 서베를린의 생존을 뒷받침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템펠호프 공항 철책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껌을 건넨 뒤 손수건 낙하산으로 사탕을 떨어뜨린 일은 Operation Little Vittles로 확대되어 공수작전의 물자 수송에 인간적 얼굴을 더했다. 이 자발적 행동은 미군의 규정과 냉전 선전의 경계에 놓였지만, 베를린 주민과 미국 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서방의 정치적 호소력을 키웠다. 그는 이후에도 공군의 항공·우주 개발과 베를린 템펠호프 지휘를 맡았고 197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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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미 육군항공대 입대, 조종사 훈련
  • 1948–1949베를린 공수작전 C-54 조종사, Operation Little Vittles 창시
  • 1952–1957라이트 항공개발센터 항공화물기 연구개발 담당
  • 1958–1962공군 체계사령부 우주체계 부문 근무
  • 1965–1969공군 본부 우주·기술국, 유인 재사용 우주선 계획 담당
  • 1970–1972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제7350 공군기지단 지휘관
  • 1974미 공군 대령으로 퇴역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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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 1977–2023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설립, 저술 및 12명의 대통령에 대한 외교 자문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18 ○ 자연사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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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매사추세츠주 밀턴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 1942–1945해군 뇌격기 조종사로 58회 출격, 지치지마에서 격추되어 잠수함에 구조
  • 1953–1966자파타 오프쇼어 석유회사 창업, 텍사스의 백만장자
  • 1967–1971텍사스주 하원의원, 두 차례 상원 선거 낙선
  • 1971–1977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 의장, 중국 주재 대표, CIA 국장
  • 1981–1989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
  • 1989–1993제41대 대통령: 몰타 회담으로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지지, 걸프전
  • 2018휴스턴에서 94세로 사망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24 ○ 자연사

데탕트의 정점과 종말을 모두 품은 미국의 39대 대통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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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1967그루지야주 상원의원
  • 1971–1975제76대 그루지야 주지사
  • 1977–1981제39대 미국 대통령
  • 1982카터 센터 설립
  • 2002노벨 평화상 수상
법률·사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5–1968 ✕ 암살

형 대통령의 최측근 법무장관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타결의 실무자가 된 정치인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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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존 F. 케네디 상원 선거 캠프 매니저
  • 1953–1955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매카시 위원회) 법률고문
  • 1957–1959상원 노동부패조사위원회(매클렐런 위원회) 수석법률고문
  • 1961–1964제64대 미국 법무장관
  • 1965–1968뉴욕주 상원의원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5–2020 ○ 자연사

냉전 종식기의 신중한 전략가

몰타 회담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회담의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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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공군 소위 임관
  • 1953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67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 1972–1973리처드 닉슨 대통령 군사보좌관
  • 1973–1975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부차관보
  • 1975–1977제럴드 포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1989–1993조지 H. W.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2001–2005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 의장

리처드 하이저

Richard Heyser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7–2008 ○ 뇌졸중

6분 동안 928장을 찍어 세계를 핵전쟁 직전으로 몰아넣은 U-2 정찰 조종사

「나는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판을 원하지 않았다.」, 2005년 AP 통신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주 아팔라치콜라 출신으로 17세에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쿠바 상공을 6분 동안 비행하며 촬영한 928장의 사진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확인되었고, 이 사진이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올라가며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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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미 육군항공대 입대
  • 1952공군 조종사 훈련 시작, 한국전쟁 전투 출격
  • 1957U-2 기종 전환 훈련 수료 (50번째 U-2 조종사)
  • 1957–1962제4080전략정찰비행단 U-2 조종사
  • 1962.10.14쿠바 상공 정찰비행(임무 3101), 소련 미사일 포착
  • 1960s베트남전쟁 두 차례 전투 배치
  • 1974중령으로 30년 복무 후 퇴역

테드 소렌슨

Ted Sorense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8–2010 ○ 뇌졸중

쿠바 위기에서 케네디의 펜을 잡은 연설문 작성자, '격리'라는 길을 낸 사람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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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
  • 1961–1964대통령 특별고문 겸 수석 연설문 작성자
  • 1964–1966저술가 (『케네디』 출간, 국제적 베스트셀러)
  • 1966–2010국제 변호사, Paul, Weiss 로펌
  • 1977CIA 국장 지명자 (인준 철회)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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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

레이건의 '소비에트 101'을 편성한 NSC 소련 전문가이자 소련 주재 마지막 미국 대사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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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제임스 베이커

James Baker

냉전 종식을 설계한 실무형 외교가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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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출생
  • 1952–1954프린스턴대 졸업 후 해병대 장교로 복무
  • 1957–1980휴스턴에서 기업 변호사로 활동
  • 1981–1985레이건 대통령 백악관 비서실장
  • 1985–1988미국 재무장관, 플라자 합의와 베이커 계획 추진
  • 1989–1992미국 국무장관, 몰타 회담과 냉전 말기 외교를 조정
  • 1992–1993부시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복귀
  • 2010년대–공공정책과 국제 현안에 자문역으로 참여

레너드 H. 퍼루츠

Leonard H. Perroots

핵전쟁의 문턱에서 신중함을 택한 정보장교

소련의 핵준비가 비정상적이었지만 NATO 경보를 더 높이지 말라고 권고했다.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NATO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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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미 공군 임관
  • 1970년대공군 지휘·정보 보직
  • 1982–1984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3애이블 아처 83 당시 NATO 경보 격상에 신중한 판단을 권고
  • 1984–1985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5–1988국방정보국장
  • 1989미 공군 퇴역
  • 2017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