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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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국제활동 인물 110명

예두아르트 암브로시예비치 셰바르드나제

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외교·국제활동 소련 국가기관 소련·그루지야 그루지야 1928–2014 ○ 자연사, 사망

냉전을 끝낸 소련 외무장관, 그루지야 대통령이 되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외무장관직 사임과 탈당을 선언했다. 일부 기록은 이 연설을 12월 21일로 적어 날짜가 엇갈리며,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28년 그루지야 마마티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을 거쳐 1972년 당 제1서기가 되어 대규모 부패 단속과 아바샤 실험을 벌였고, 1985년 외교 경험 없이 소련 외무장관에 발탁되어 군축과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을 협상했다. 1990년 12월 20일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사임했고, 1992년 조국으로 돌아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으로 2003년 장미혁명 때까지 이끌었다. 2014년 7월 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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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 1957–61그루지야 콤소몰 제1서기
  • 1992–2003국가평의회 의장, 의회 의장, 국가수반, 대통령

율리 미하일로비치 보론초프

Юлий Михайлович Воронцов

소련군 아프간 철수를 외교로 마무리한 군축 협상가

“2년 반 동안 우리는 입장을 좁혀, 당대 가장 현대적인 무기의 완전 폐기 조약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께 감사하게도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 1987년 INF 조약에 대해

소련과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아래서 외무부 제1차관(1986–1990)을 지내며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소련군 철수 시기인 1988–1989년 아프가니스탄 대사를 겸임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로부터 철수 부대에 대한 사격 금지 보장을 받아냈다. 군축 수석협상가로서 1987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아나톨리 도브리닌 아래 워싱턴 대사대리와 인도·프랑스 대사를 거쳐 소련의 마지막 유엔 상임대표와 러시아 초대 주미 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에도 유엔 사무차장으로서 쿠웨이트 실종자 및 재산 반환을 조정하는 임무를 죽을 때까지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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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63소련 외무부 유럽부·국제기구부, 유엔 대표부
  • 1966–1977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워싱턴 대사대리
  • 1978–1983주인도 소련 대사
  • 1983–1986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86–1990소련 외무부 제1차관, INF 조약 수석협상가
  • 1988–1989주아프가니스탄 대사 겸임, 소련군 철수 외교
  • 1990–1994유엔 주재 소련·러시아 상임대표
  • 1994–1998주미 러시아 대사

레이건의 '소비에트 101'을 편성한 NSC 소련 전문가이자 소련 주재 마지막 미국 대사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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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두비닌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Дубинин

고르바초프 시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를 워싱턴에서 대면한 소련 대사

1986년 5월, 유엔 주재 소련 대표에서 워싱턴 대사로 전격 이동한 두비닌은 백악관에 신임장을 제출하며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 INF 조약 체결과 몰타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뒷받침했다. 날치크 출신으로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을 졸업하고 유네스코와 주프랑스대사관에서 외교 경력을 쌓은 유럽통이었다. 1986년 봄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를 거쳐 미국 대사로 부임해 냉전 종식을 위한 양국 정상 간 채널이 작동하도록 실무를 조율했다. 1990년 프랑스 대사로 자리를 옮겨 소련 해체까지 파리에 머물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외무차관과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내며 1997년 우크라이나와의 우호협력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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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6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실습
  • 1956–1959유네스코 사무국 직원 (파리)
  • 1959–1963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3등·2등서기관
  • 1963–1968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참사관
  • 1968–1971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부과장
  • 1971–1978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과장
  • 1978–1986주스페인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6.3–5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6–1990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0–1991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4–1996러시아 외무차관
  • 1996–1999주우크라이나 러시아 대사

제임스 베이커

James Baker

냉전 종식을 설계한 실무형 외교가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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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출생
  • 1952–1954프린스턴대 졸업 후 해병대 장교로 복무
  • 1957–1980휴스턴에서 기업 변호사로 활동
  • 1981–1985레이건 대통령 백악관 비서실장
  • 1985–1988미국 재무장관, 플라자 합의와 베이커 계획 추진
  • 1989–1992미국 국무장관, 몰타 회담과 냉전 말기 외교를 조정
  • 1992–1993부시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복귀
  • 2010년대–공공정책과 국제 현안에 자문역으로 참여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판킨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Панкин

쿠데타 이후 붕괴 직전의 외무장관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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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8–11외무장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주소 대사에서 『아프간츠이』의 저자까지, 소련을 가장 깊이 이해한 영국 외교관

「우리가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민스 파이를 먹고 있을 때, 고르바초프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다고 세계에 알렸다」, 1991년 크리스마스 모스크바에서.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시기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주소 영국 대사를 지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개인적 신뢰를 쌓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와 옐친의 부상, 소련 해체를 현장에서 목격했고, 이후 존 메이저 총리의 외교정책 보좌관과 합동정보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2011년 출간한 『아프간츠이』(Afgantsy)는 소련군이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고 질서 있게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정보적 실패였다고 주장해 '소련판 베트남'이라는 서방의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대표적 수정주의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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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52군 정보부 복무, 비엔나 주둔
  • 1955영국 외교부 입부
  • 1963–1966주소 영국대사관 근무 (모스크바 첫 부임)
  • 1975–1978주유럽공동체 영국대표부, 브뤼셀
  • 1982–1984주미 영국대사관 무역 공사
  • 1984–1988외무부 사무차관보, G7 셰르파팀
  • 1988–1992주소련·러시아 영국 대사
  • 1992–1993총리 외교정책 보좌관, 합동정보위원회 의장

1989년 철의 장막을 절단한 헝가리 외무장관이자 개혁 총리

1989년 6월 27일,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볼트커터로 철조망을 함께 끊으며 '철의 장막'에 첫 구멍을 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개혁파 외교관료에서 민주화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정치가로, 1989년 외무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알로이스 모크와 함께 절단하며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적 순간을 연출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 탈출을 위한 헝가리 국경 개방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고, 이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 헝가리 사회당을 압승으로 이끌어 총리가 되었고, 보크로시 긴축 개혁으로 시장경제 전환의 틀을 다졌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56년 혁명 진압 부대 복무라는 깊은 그림자와 1989년 국경 개방의 역사적 공로 사이에서, 20세기 헝가리 좌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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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9재무부 근무
  • 1959–1969외무부 외교관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주재)
  • 1969–198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 국제부 근무, 1983년 국제부장
  • 1985–1989외무부 차관(국무장관)
  • 1989–1990외무장관: 철의 장막 개방, 소련군 철수 협정 체결
  • 1990–1994헝가리 사회당 대표, 국회 외교위원장
  • 1994–1998헝가리 총리: 보크로시 긴축 개혁 단행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스메르트니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ссмертных

소련 말기의 마지막 정규 외무장관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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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1–8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

Alois Mock

철의 장막을 가른 오스트리아 유럽주의자

1989년 6월 27일, 모크와 호른 줄러가 쇼프론 인근 철조망을 절단하며 국경 개방을 세계에 알렸다.

알로이스 모크는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정치가로, 유럽 통합을 오스트리아 외교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외무장관으로서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오스트리아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추진하며 냉전 종식기의 중부 유럽 재편에 관여했다. 1989년 6월 27일 호른 줄러와 국경 철조망을 상징적으로 절단한 장면은 동독 주민들의 탈출과 동구권 붕괴로 이어진 국경 개방의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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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빈대학교 법학 박사
  • 1961–1966연방수상실 유럽경제공동체·유럽자유무역연합 담당관, 파리 OECD 대표부
  • 1966–1969요제프 클라우스 수상 비서실장
  • 1969–1970교육·과학·연구·예술·문화·체육 연방장관
  • 1979–1989오스트리아 국민당 연방당수
  • 1987–1989오스트리아 부총리
  • 1987–1995오스트리아 외무장관
  • 1990국방 행정 임시 관장
외교·국제활동 유엔 에콰도르 칠레계 1935–2014 ○ 급사

6년의 제네바 왕복으로 소련군 철수를 틀 지운 에콰도르 출신 유엔 외교관

고르바초프가 철수 의사를 굳힌 것은 스팅어 미사일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와 외교 덕분'이라고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단언했다.

코르도베스는 에콰도르의 외교관이자 유엔 사무차장으로, 1982년부터 6년간 데 쿠엘랴르 사무총장의 개인대표로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간 제네바 협상을 중재했다. 라울 프레비시와 함께 UNCTAD 창설에 참여했고, 유엔 내에서 특별정무담당 사무차장까지 오르며 이란 인질 위기, 이란-이라크 전쟁, 키프로스 분쟁 등 굵직한 현안을 두루 다뤘다. 1988년 4월 제네바 합의 서명을 이끌어내 소련군 철수의 외교적 틀을 완성했으며, 이후 에콰도르 외무장관과 유엔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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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1.03키토 출생
  • 1962칠레대학교 법학 학위 취득, 변호사
  • 1963유엔 입직, 라울 프레비시와 UNCTAD 창설 참여
  • 1978유엔 경제사회담당 사무차장보
  • 1981–1988유엔 특별정무담당 사무차장, 아프가니스탄 담당 사무총장 개인대표
  • 1988.04.14제네바 합의 서명 중재, 소련군 철수 틀 마련
  • 1988–1992에콰도르 외무장관
  • 2005–2007유엔 주재 에콰도르 상임대표

율리 알렉산드로비치 크비친스키

Ю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вицинский

그로미코의 후계 외교관, '숲속 산책'으로 기억된 군축 협상가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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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 1990–1991소련 외무부 차관
  • 1991소련 외무부 제1차관 (5월–9월)
  • 1997–2003주노르웨이 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2003–201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4·5대), 국제문제위원회 제1부위원장

예센스키 게저

Jeszenszky Géza

1956년의 기억을 외교로 옮긴 역사가

열다섯 살에 무장하지 않은 채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예센스키 게저는 1956년 혁명을 경험한 역사학자이자 헝가리의 체제전환기 외교를 이끈 정치가다. 그는 혁명 뒤 처형된 사람을 약 350명으로 추산해 진압의 규모를 기억하는 데 기여했다. 학자로서 국제관계사와 헝가리의 대외 이미지를 연구했고, 민주 헝가리 포럼 창립 세대로서 서방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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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부다페스트에서 출생
  • 1961–1966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서 역사·영어 전공
  • 1976–2011부다페스트 경제대학교 및 코르비누스 대학교 국제관계사 교수
  • 1987–1988라키텔레크 회의 참가 및 헝가리 민주 포럼 창립
  • 1990–1994헝가리 외무장관
  • 1998–2002주미 헝가리 대사
  • 2011–2014주노르웨이·아이슬란드 헝가리 대사

파울루 조르지

Paulo Teixeira Jorge

앙골라 MPLA의 외교관, 제2대 외무장관이자 좌익 분파의 핵심 인물

앙골라의 화학 공학자·외교관·정치인. 리스본 유학 중 1956년 MPLA 창립 문서 「1956년 선언」에 서명하고 1961년부터 PIDE의 감시를 받다가 1962년 포르투갈을 떠나 코나크리에서 MPLA 외교 실무를 맡았다. 이집트·알제리 대표, 콩고-브라자빌 대표부 총괄, MPLA 정보부 책임자를 거쳐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고, 독립 뒤 MPLA 좌익 분파의 대표적 인물로 1998년 인터뷰에서 당·국가 요직은 민족·지역 인구 비중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전위 기준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0년 6월 26일 루안다에서 76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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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2리스본 대학 이학부에서 화학 공학 수학, 제국학생회관 거주, 1956년 선언 서명, 1961년부터 PIDE 감시
  • 1962–1976코나크리에서 MPLA 외교 실무, 이집트·알제리 대표, 콩고-브라자빌 대표부 총괄, MPLA 정보부 책임자
  • 1975루시우 라라와 루사카 휴전·몸바사 회의 교섭, 알보르 협정의 기초 마련, 네투의 파견으로 아바나에서 쿠바 지원 요청
  • 1976–1984앙골라 외무장관(1976년 11월 28일~1984년 10월 21일), 좌익 분파의 대표적 인물
  • 1977–1995MPLA 제1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협력 담당 서기, 비에 주 인민의회 의원, 1986년 인민의회 의원, 쿠안자노르테 주지사(1986–1989), 벵겔라 주지사(1989–1994), 1995년부터 MPLA 정치국 국제관계 담당 서기
  • 1992–2010국민의회 의원(1992년 선출, 2008년 재선), 사망 시까지 MPLA 정치국 위원 겸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