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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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정보·치안 인물 210명

유리 이바노비치 드로즈도프

Юрий Иванович Дроздов

KGB 불법정보국을 12년간 지휘한 소련의 전설적 첩보장교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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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5붉은 군대 복무,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서 베를린 입성
  • 1945–1952주독 소련군 및 발트 군관구 포병장교
  • 1952–1956군사외국어대학 졸업, 독일어·영어 전공
  • 1956–1957KGB 전입, 불법정보요원 훈련
  • 1957–1963동베를린 KGB 연락장교, 슈타지와 협력하며 불법요원으로 활동
  • 1964–1968KGB 베이징 주재원 (문화대혁명 시기)
  • 1968–1975PGU 중앙기구 근무, S국 부국장
  • 1975–1979KGB 뉴욕 주재원, 유엔 소련 부대표로 위장
  • 1979–1991PGU 부국장 겸 S국장 (불법정보 총괄), 빔펠 창설

필리프 데니소비치 봅코프

Филипп Денисович Бобков

KGB 이념방첩의 설계자, 12명의 수장 아래 45년간 살아남은 체키스트

「우리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것 없이는 소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45년간 12명의 기관장 아래 근무한 봅코프는 KGB 제5총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종교·민족주의 운동을 감시·탄압하는 이념방첩 체계를 설계했다. 만년에는 사하로프 추방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소련 붕괴 후 올리가르흐 구신스키의 모스트 그룹 분석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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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붉은 군대 복무, 서부·발트 전선, 두 차례 부상
  • 1946레닌그라드 스메르시 학교 졸업, MGB 배치
  • 1956KGB 제4국(이념방첩) 부장
  • 1961KGB 제2총국 부국장
  • 1969–1983KGB 제5총국장(이념방첩 → 헌법질서 수호)
  • 1983–1985KGB 부의장
  • 1985–1991KGB 제1부의장
  • 1992–2001모스트 그룹 분석국장

예브게니 막시모비치 프리마코프

Евгений Максимович Примаков

대서양 상공에서 비행기를 돌린 아랍주의자 총리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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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62국영방송 아랍어 편집국, IMEMO 연구원
  • 1962–70《프라우다》 중동 특파원, 카이로 주재
  • 1970–77IMEMO 부소장, 비밀 중동 외교 임무
  • 1977–85소련과학원 동양학연구소 소장
  • 1985–89IMEMO 소장, 소련과학원 아카데미크
  • 1989–90정치국 후보위원, 소비에트연방회의 의장
  • 1991KGB 제1총국장 → 중앙정보국장 → SVR 국장
  • 1996–98러시아 외무장관, 다극체제 독트린
  • 1998–99러시아 총리, 대서양 반전 귀국

빅토르 표도로비치 그루슈코

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Грушко

해외정보부터 방첩까지 아우른 KGB 작전부사령관

1991년 8월 18일 오후, 야조프 국방장관이 공수군 사령관 그라초프에게 크렘린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하면서 덧붙였다. "KGB 부의장 그루슈코·아게예프와 협조하라."

소련 KGB에서 해외정보(PGU)와 방첩(VGU) 양대 본부를 모두 지휘한 정보 장교.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MGIMO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주재 외교관으로 출발, 1960년 KGB로 전직한 후 오슬로 주재관을 거쳐 PGU 제3(영국·스칸디나비아)부장, PGU 제1부국장으로 승진했다. 1989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체제에서 제2총국(방첩)을 맡으며 KGB 부의장이 되었고, 1991년 1월 KGB 제1부의장으로서 작전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구금 중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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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0소련 외무부, 노르웨이 대사관 근무
  • 1960–1961KGB 제101학교 수료, PGU KGB 제3부 배치
  • 1968–1971오슬로 KGB 부주재관 (정치첩보)
  • 1971–1972오슬로 KGB 주재관
  • 1975–1980PGU KGB 제3부장 (영국·스칸디나비아 담당)
  • 1983–1989PGU KGB 제1부국장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2총국장 (방첩)
  • 1991.1–1991.8KGB 제1부의장

유리 세르게예비치 플레하노프

Юрий Сергеевич Плеханов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0–2002 ○ 체포 1991, 사면 1994

KGB 도청 전문가에서 경호 총괄로, 8월 쿠데타의 방아쇠를 당기다

고르바초프의 회고: 「옐친은 누군가 옆에서 도청하는 듯 불편해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9국장 플레하노프가 그 방을 준비한 것이다.」

안드로포프의 개인 비서로 출발해 KGB 12부서(도청·검열)를 13년간 지휘한 도청 전문가. 크류치코프의 지시에 따라 1991년 7월 29일 노보오가료보 회담실을 사전 도청 장비로 세팅했고,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강경파 교체 밀약이 녹음되어 쿠데타 세력에 전달되면서 8월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다. 쿠데타 당일에는 포로스 별장으로 날아가 공모자들을 고르바초프 앞에 들여보냈고, 실패 후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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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CPSU 중앙위 서기 안드로포프의 비서
  • 1970–1983KGB 12부서장: 도청·전화감청·우편검열 총괄
  • 1983–1990KGB 9국장: 당·국가 요인 경호
  • 1990–1991KGB 경호국장 (9국 후신), 콜레기움 위원
  • 1991.7.29노보오가료보 회담실 도청: 녹음이 쿠데타 세력에 유출
  • 1991.8–1994포로스에서 쿠데타 가담, 체포,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수감, 사면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블라소프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Власов

OMON을 창설하고 옐친에게 패한 마지막 공산당 RSFSR 총리

내무부에서 블라소프를 부르던 별명은 「티샤이시」였다 — 가장 조용한 자. 조직범죄를 방치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부랴티야의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체첸-인구시 공화국과 로스토프 주의 당 제1서기를 지낸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였다. 1986년 1월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특수경찰부대 OMON을 창설했으나, 조직범죄 대응에 소극적이란 비판을 받으며 2년 8개월 만에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1988년 10월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으로 옮겼고, 1990년 5월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게 535 대 467로 패배했다.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당 조직의 적응 논리를 체현했으나 결국 양쪽에 밀려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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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5체렘호보 탄광 5호 갱부 감독; 콤소몰 체렘호보 시위원회 선전부장, 제2서기
  • 1955–1961이르쿠츠크 주 콤소몰 제2서기, 제1서기
  • 1961–1965이르쿠츠크 주 지민스키 구당 제1서기; 이르쿠츠크 공업주당 제2서기; 이르쿠츠크 주 집행위 제1부의장
  • 1965–1972야쿠트 주당 서기, 제2서기
  • 1972–1975CPSU 중앙위 감찰원
  • 1975–1984체첸-인구시 공화국 당 제1서기
  • 1984–1986로스토프 주당 제1서기
  • 1986–1988소련 내무장관 (중장, 재임 중 상장 진급)
  • 1988–1990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8.9–1990.7)
  • 1990.5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 패배 (467:535)
  • 1990–1991CPSU 중앙위 사회경제부장
  • 1994–2002이르쿠츠크 향우회 「바이칼」 회장

레너드 H. 퍼루츠

Leonard H. Perroots

핵전쟁의 문턱에서 신중함을 택한 정보장교

소련의 핵준비가 비정상적이었지만 NATO 경보를 더 높이지 말라고 권고했다.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NATO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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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미 공군 임관
  • 1970년대공군 지휘·정보 보직
  • 1982–1984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3애이블 아처 83 당시 NATO 경보 격상에 신중한 판단을 권고
  • 1984–1985미 공군 정보참모차장
  • 1985–1988국방정보국장
  • 1989미 공군 퇴역
  • 2017사망

올레크 다닐로비치 칼루긴

Олег Данилович Калугин

KGB 최연소 장군이자 최고위 망명 비판자

"나는 미국인들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7개월을 이곳에서 보낸 지금, 공산주의 체제가 여러분의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 195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위장한 24세 KGB 장교가 《뉴스위크》에.

KGB 최연소 소장으로 대외방첩국(K국)을 이끌며 냉전기 대미 첩보전을 지휘했다. 1980년대 말 체제 개혁파로 전향하여 KGB의 부패를 공개 비판했고, 1991년 쿠데타에서 옐친을 지지한 뒤 미국에 망명해 회고록으로 기관 내부를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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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6KGB 외국어대학 (레닌그라드)
  • 1956–1958KGB 제101고등정보학교
  • 1958–1959컬럼비아 대학 풀브라이트 장학생 신분으로 작전 실습
  • 1960–1964KGB 뉴욕 레지덴투라 작전장교 (모스크바 라디오 기자 신분)
  • 1965–1970KGB 워싱턴 레지덴투라 부레지던트 겸 대행
  • 1971–1973제1총국 제2국(후일 K국) 부국장
  • 1973–1980KGB 제1총국 K국(대외방첩) 국장
  • 1980–1987KGB 레닌그라드국 제1부국장
  • 1990소련 최고회의 인민대표로 선출

레오니트 블라디미로비치 셰바르신

Леонид Владимирович Шебаршин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책임자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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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주파키스탄 소련 대사관 통역·3등서기관
  • 1962KGB 제1총국 입국, 101정보학교 훈련
  • 1964–1968파키스탄 주재 KGB 정보장교
  • 1971–1977주인도 KGB 부주재관 → 주재관
  • 1979–1983주이란 KGB 주재관
  • 1983–1987KGB 제1총국 정보분석국 부국장 → 국장
  • 1987–1989KGB 제1총국 부국장 (중동·아프리카 담당)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1총국장
  • 1991.8.22–23KGB 의장 대행

보리스 카를로비치 푸고

Борис Карлович Пуго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937–1991 ✕ 자살, 발사 순서는 논쟁 중

라트비아 KGB에서 소련 내무장관까지, 쿠데타가 무너뜨린 질서의 수호자

체포영장이 발부된 1991년 8월 22일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고 썼다. 발사 순서는 사료가 엇갈리며, 검찰은 그가 먼저 쐈다고, 야블린스키의 목격 진술은 아내가 마지막에 쐈다고 본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콤소몰과 당 사업을 거쳐 1980~1984년 라트비아 KGB 의장, 1984~1989년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12월 소련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법질서 노선을 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해 내무기관을 그 결정 실행에 동원했다. 쿠데타가 무너진 8월 22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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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69콤소몰 라트비아 프롤레타르스키 구위원회 서기, 제1서기; 라트비아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0–1974전연방 콤소몰 중앙위 서기; CPSU 중앙위 감찰원
  • 1974–197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 시당위 제1서기
  • 1976–1980소련 KGB 감찰국 부서장; 라트비아 KGB 제1부의장
  • 1980–1984라트비아 SSR KGB 의장 (소장)
  • 198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8–1990CPSU 당통제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9.9–1990.7)
  • 1990–1991소련 내무장관; 안전보장회의 위원 (1991.3–)
  • 1991.8GKChP 위원; 쿠데타 실패 후 자살

바딤 빅토로비치 바카틴

Вадим Викторович Бакатин

KGB를 해체하도록 임명된 마지막 의장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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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73케메로보 건설현장 기술자·관리자
  • 1973–85케메로보 시·주 당 간부, 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85–87키로프 주당위 제1서기
  • 1987–88케메로보 주당위 제1서기
  • 1988–90소련 내무장관
  • 1991.3–8소련 대통령 직속 안전보장회의 위원
  • 1991.8–11KGB 의장 (마지막)
  • 1991.11–92.1공화국간보안국(MSB) 국장
  • 1992–97레포르마 재단 부총재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골루시코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Голушко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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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케메로보 검찰청 수사관
  • 1963–1974케메로보주 KGB, 작전요원 → 제5과 부과장
  • 1974–1983KGB 제5총국 제2과(민족주의 담당) 과장
  • 1983–1984KGB 제5총국 부총국장
  • 1984–1987KGB 사무국 제1부국장 겸 당직근무국장
  • 1987–1991우크라이나 공화국 KGB 의장, KGB Collegium 위원
  • 1991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SNBU) 의장 대행
  • 1992–1993러시아 보안부 제1차관
  • 1993러시아 보안장관
  • 1993–1994러시아 연방방첩국(FSK) 국장

올레크 안토노비치 고르디옙스키

Олег Антонович Гордиевс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8–2025 → 1985년 망명 · 궐석 사형 선고

서방에 망명한 최고위 KGB 장교이자 1983년 전쟁 공포의 결정적 증언자

PR 계열 동료들은 랴얀(РЯН) 작전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무도 제1총국의 평가에 이의를 달아 중앙에서 체면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망명한 KGB 장교 중 최고위 인물로, 제1총국 대령이자 1974년부터 11년간 MI6의 정보원 '오베이션(Ovation)'으로 이중 활동했다. 런던 주재관으로서 랴얀(РЯН) 작전과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경계를 영국·미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핵심 정보원이었고, 이 증언은 1983년 핵전쟁 위기를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CIA 내통자 올드리치 에임스에게 배신당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약물 심문을 받다가 1985년 외교 차량 트렁크에 실려 탈출했고, 궐석 재판에서 반역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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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KGB 제1총국 S국(비합법 첩보) 입직
  • 1966–1970코펜하겐 KGB 레지덴투라 장교 (영사부 위장)
  • 1972–1978코펜하겐 부레지던트(정치정보), 1976년 레지던트 대행
  • 1978–1982제1총국 영국·스칸디나비아부 근무
  • 1982–1985런던 레지덴투라 (대사관 참사관 위장), 1984년 부레지던트, 1985년 레지던트 대행
  • 1974–1985MI6 정보원 '오베이션'으로 이중 활동
  • 1985망명, 소련에서 궐석 사형 선고

알렉산드르 필리포비치 카투세프

Александр Филиппович Катусев

숨가이트 포그롬의 불씨를 당긴 소련 부검찰총장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에서 그는 아스케란 충돌로 숨진 두 청년이 '아제르바이잔인'이라 밝혔고, 그날 밤 숨가이트 포그롬이 터졌다.

벨로루시 출신의 소련 군사법률가로, 1987년 소련 부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스케란 인근 충돌로 사망한 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의 이름과 국적을 거론한 순간이다: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숨가이트 포그롬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부터 주임군사검사로 재임하며 판필로프 28영웅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나, 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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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야금학교 졸업, 드네프르 야금 콤비나트 노동자
  • 1965하리코프 법학대학 졸업
  • 1966자바이칼 군관구 수비대 검찰 수사관
  • c. 1970s–1987소련 검찰청 수사관, 선임수사관, 수사부서장, 주임수사국장 역임
  • 1987–1989소련 부검찰총장
  • 1989–1991소련 주임군사검사 겸 부검찰총장
  • 1991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

하랄트 예거

Harald Jäger

국경 통제관에서 장벽 개방의 명령자로

“내 부하들에게 장벽을 열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랄트 예거는 동독 국가보안부에 복무한 국경 통제 장교로, 국가의 여행 통제와 정보활동을 집행했다. 1989년 11월 9일 그는 상관의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채 Bornholmer Straße에 몰린 군중과 폭력 위험에 직면했다. 그는 통제 체계의 일부였지만 그날 밤 장벽을 열어 수천 명의 동독 시민이 서베를린으로 건너게 했다. 이후 그는 동독 체제의 내부 모순과 장벽 붕괴의 자유를 함께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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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바우첸에서 출생
  • 1961독일 국경경찰 자원 입대
  • 1964–1989국가보안부 여권통제부대 복무
  • 1976–1981국가보안부 법률고등학교 수학, 법학사 취득
  • 1989Bornholmer Straße 국경통과소 부지휘관
  • 1989.11.09상관의 지시 없이 국경 통과소 장벽 개방 명령
  • 1990국가보안부 해체 과정에서 해임

겐리흐 류시코프

Генрих Люшков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02–1945 다롄에서 사망, 정황 미확인

극동 NKVD 국장, 최고위 망명자

1938년 6월 13일 밤, 훈장을 단 야전 복장으로 제59국경분견대에 나타난 류시코프는 분견대장에게 비밀 요원과 단독 접선한다며 물러나게 한 뒤 국경을 넘어 일본 측에 투항했다.

오데사 출신으로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근무하며 1920년대부터 우크라이나와 모스크바, 극동의 체카·OGPU·NKVD 요직을 거쳤다. 1930년 독일 융커스 사에 대한 산업스파이 임무를 수행했고, 1936~1937년 아조프-흑해 지역과 극동의 NKVD 국장을 지내며 대숙청의 대규모 체포와 처형을 지휘했다. 1937년 극동 NKVD 국장 재임 중 고려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는 데 관여했으며, 이는 25만 명 규모 추정치의 사망자를 낳은 소련 최초의 민족 단위 강제이주였다. 1938년 6월 체포될 것을 알아차리고 만주국으로 넘어가 일본 측에 투항해 소련 군사정보를 넘겼고, 1945년 8월 소련군이 다롄에 다가오자 일본 측 인사에게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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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제14군 정치위원
  • 1920오데사 체카 요원
  • c.1930독일 융커스 사 산업스파이
  • 1937–1938극동 NKVD 국장, 3급 국가보안위원
  • 1938만주국 망명
  • 1938–1945일본 관동군 정보 협력자

미하일 코즐롭스키

Михаил Козловский

안드로포프 시기 KGB 국경수비대를 지휘한 보안장교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이후 소련 국경수비대는 3년 만에 병력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고, 코즐롭스키는 이 팽창기를 지휘했다.

소련 KGB에서 국경수비대 총국(GUPV)을 관할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시기 국경 통제와 내부 단속 강화에 관여한 보안기관 간부이다. 브레즈네프 시기 KGB의 제도적 팽창 속에서 국경·내부 보안 체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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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79KGB 부의장 겸 국경수비대 총국장
  • 1979–?KGB 제1부의장
  • ?–?KGB 고등학교장

방학세 이그나티예비치 방

Пан Игнатьевич Хак Се

조선 보안기구의 창설자이자 정치탄압의 집행자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란코프가 1946년(란코프는 9월), 영어 위키백과가 1945년 10월로 갈린다. 1947년에는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란코프는 그가 조선 국가보위의 최초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러시아 제국 출신 고려인으로, 출생지는 문서로 확정되지 않았고 출생 연도도 출처에 따라 1912~1914년으로 갈린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와 정보기관에서 일했고,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란코프가 1946년, 영어 위키백과는 1945년 10월로 적는다. 1947년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1948년 9월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이 되었으나,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회안전상(1951년 3월/5월설)과 내무상(1960년 11월까지)을 지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를 탄압 체계의 조직자이자 명령에 순종한 집행자로 함께 서술한다. 소련파였으나 충성으로 숙청을 피해 1992년 7월 18일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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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4카자흐스탄 강제이주 후 크질오르다에서 검사, 1942~1944년 크질오르다·탈디쿠르간 검찰 근무(러시아어 위키백과). 1940년 당 입당. 란코프는 1946년 이전 행적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본다
  • 1947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란코프). 영어 위키백과는 1947년 5월 내무국 총국장으로 적으나, 1948년 이후 내무성 산하 국(局) 체제와 어긋나 단정하기 어렵다
  • 1948최고인민회의 대의원(러시아 위키백과)
  • 1948년 9월–1951년 2/3월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영어 위키백과).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 1951년 3월/5월–1952년사회안전상(정치보위국이 사회안전성으로 개편). 3월설은 영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월설은 영어 위키백과 사회안전성 문서
  • 1952년 10월–1960년 11월내무상(사회안전성이 내무성으로 개편)
  • 1956년 8월8월 종파사건 때 내무상으로서 경찰을 동원해 평양을 감시하고 '종파주의자' 수사를 지도(영어 위키백과). 같은 사건 문서에는 당시 그가 해외에 있었다는 기술도 병존한다
  • 1956–1980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56년 4월 선출, 1970년 11월·1980년 10월 재선)
  • 1960년 11월–1972년중앙재판소 부소장, 1966년 11월부터 당 연락국 정보 책임자
  • 1972년 12월–1992년중앙재판소 소장(1982년·1986년 재임명, 사망 시까지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