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쿠데타 기도에 관한 MPLA 정치국 성명 (1977년 7월 12일)
인물니투 알베스, 조제 반두넴, 시타 발레스, 아고스티뉴 네투, 이코 카레이라, 루시우 라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용어앙골라 해방인민운동, 프락시오니즈무 (니티즈무) 사건앙골라 독립과 MPLA 정권 형성
5월 27일 쿠데타에 관한 정치국 성명
지난 5월 27일 분파주의자들[1]의 반동적 쿠데타 기도는 MPLA 투사들과 FAPLA·DISA 구성원들이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아 즉각 분쇄했다. 이제 그 기도가 생겨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전체가 사실상 풀렸다.
쿠데타의 진짜 기원과 진짜 목적은 반혁명 과정 그 자체의 복잡성 속에 뒤섞여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조제 반두넴이 이끄는 옛 「상니콜라우 수용소」[2] 출신의 일정한 수의 전 수감자들과, 니투 알베스를 우두머리로 한 제1정치군사지역[3] 책임자 한 줌이 식민주의 파시즘이 무너진 첫 순간부터 이상한 친연성을 드러냈고, 그것이 1974년 9월의 투사 지역간 회의 때부터는 MPLA의 구조 밖에서, 그러나 언제나 MPLA를 방패 삼아 벌이는 집단적 정치 활동이라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 두 우두머리가 중앙위원회에 선출된 것은 바로 이런 집단 활동의 결과였으며, 식민지 전쟁의 끝이 가까워지고 제국주의가 MPLA를 상대로 공세를 펴던 당시의 정세가 그것을 쉽게 해 주었다. 그 공세에는 운동 내부에서 부추겨져 UNITA와 FNLA라는 꼭두각시 집단들을 이롭게 한 이른바 「능동적 반란」(Revolta Activa)과 「동부 반란」(Revolta do Leste)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 집단은 처음에는 다른 분파 집단들(아밀카르 카브랄 위원회, 엔다 위원회 등)과 섞여 그들을 발판으로 삼다가, 경쟁자들이 무력화된 뒤에 — 그 무력화에는 이 집단도 MPLA 지도부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 더 큰 세력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경쟁하던 적수 집단들이 청산되자,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 집단은 니투 알베스가 제2차 해방전쟁 동안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았고 뒤이어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는 사정을 이용했다. 그것은 MPLA의 구조와 정부의 주(州) 기관들을 장악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신뢰하는 투사들을 써서 병행 구조를 만들기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 투사들의 상당수는 MPLA의 활동에서 「순수한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포르투갈인들이었다.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 집단은 그렇게 하면, 여건이 갖추어지는 대로, 자신들의 야심과 행동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청산하거나 신용을 떨어뜨려 소리 없이 권력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 독립국가를 세우는 데 따르는 온갖 어려움, 게다가 나라를 북에서 남까지 파괴하고 수십만 동포를 집도 재산도 없이 내몬 격렬한 침략 전쟁이 낳은 문제들까지 이용해 손쉬운 선동을 일삼았다.
우리 인민의 어려움을 이렇게 조작하면서 그들은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의 옷을 입혔다. 앙골라의 혁명적 인민이 혁명의 이상과 사회주의에 언제나 보여 온 호응을 철저히 이용한 것이다.
그들은 또 직무상 그 집단의 전략 전체가 펼쳐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지도자와 투사들에 대해 가장 비열한 중상을 퍼뜨렸다.
그 중상은 조잡하게 다루어졌지만, 체계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일부 동지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 지도자와 투사들의 정직성과 정치적 확고함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
분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모험주의적 계획을 위해 몇몇 우방국의 지원까지 청했고, 그 목적을 위해 대사관들을 찾아가 청렴한 지도자와 투사들을 중상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분파주의자들은 우리 인민의 선의를 악용했다. 그들의 행동으로, 집단 대부분의 엘리트주의적 태도로, 그들이 쓰던 허세 섞인 공허한 말투로, 그들이 퍼뜨린 거짓말로, 그들은 인민에 대한 깊은 경멸을 늘 드러냈다. 그들은 경솔하게도 인민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언제나 대중의 이름으로 말했지만, 실제로는 대중에게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 줄도 모르는 그 대중을 경멸했다.
그들이 실패한 쿠데타를 정당화하려고 내세운 「시위」 자체가 루안다 노동자와 동네 주민들의 진정성과 혁명 정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래도 지정된 장소로 나간 수백 명의 주민은 속은 것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것이 운동 지도부와 대통령 동지를 겨냥한 쿠데타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이 그 속임수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인민 시위」는 무산되었다.
사실 제2차 해방전쟁의 승리로 기운을 되찾은 MPLA 투사들의 그 모든 열의와 투쟁 역량으로도, 분파주의자들이 우리 혁명 과정에 균열을 내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들의 행동을 제국주의자들과 국내 반동 세력이 주의 깊게 지켜보았고, 그들은 그 집단이 벌이던 반MPLA 활동 전체를 이끌어 주고 지원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군대에서, 노동 부문에서, 동네에서, 그리고 특히 공직 사회에서 분파주의 반동분자들은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적 공론을 방패로 삼아 MPLA와 정부의 지도부를 청산하고 그 자리를 자기네 대표들로 채우려는 수많은 공작을 가동했다.
국가의 독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이 과정 전체에서 우스꽝스러운 점은, 그것이 1974년 4월 이후 그 주요 지도자들이 겪은 정치적 변화를 그대로 비춘다는 것이다.
처음에 조제 반두넴과 니투 알베스는 엔베르 호자의 저작에 담긴 알바니아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개념들에 자신들의 분석을 기댔다. 그 저작은 포르투갈 소집단들의 젊은 활동가 무리가 앙골라의 학교에 퍼뜨리던 것이었다. 그러다 1975년 초 몇 달 사이에 그 분석은 중국 혁명에 관한 마오쩌둥의 저작에서 영감을 얻게 되었다.
그 일당이 MPLA 안에 자기네 지지 거점을 만들어 가는 도구의 하나였던 「학습 모임」에서, 니투 알베스는 「앙골라의 계급 분석」이라는 앞뒤 맞지 않는 장광설까지 늘어놓았다. 그것은 중국의 계급에 관한 마오쩌둥의 글을 앙골라에 단순하게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는 청년층 일부가 이념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갑자기 혁명 문헌의 샘을 손에 넣게 되자 그것을 게걸스럽게 읽어 치웠고, 곧바로 모든 정치 문제의 해답이라며 앙골라의 상황에 옮겨 놓았다.
그때는 아밀카르 카브랄 위원회와 엔다 위원회, 그리고 조제 반두넴과 니투 알베스가 그 궤도를 맴돌던 다른 좌익주의 지식인들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MPLA의 합법 활동이 더 강하게 힘을 발휘할수록 그 집단들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그 대신 훨씬 역동적이고, 구성원 저마다가 국민 생활의 여러 부문, 특히 교육·경제·행정에서 맡은 직무를 통해 앙골라의 과정과 훨씬 밀접하게 연결된 다른 한 집단이 득세했다.
바로 그때 시타 발레스가 이상하게도 그 무리 속에 「나타나」, 니투 알베스의 보증을 받아 MPLA 대중조직부에서 극히 중요한 직무를 맡았고, 곧 그 직무를 다른 부서로까지 넓히려 했다.
1975년 중반 시타 발레스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은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갔다. 그때는 꼭두각시들과 포르투갈 반동분자들에 맞선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몇몇 포르투갈 진보주의자들이 MPLA 곁에서 투사로서 기여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런 참여를 규약 차원에서 검토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시타 발레스는 한 무리의 사람들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가 포르투갈 공산당(PCP)과 연결되어 있다고 자처했는데, 이는 때가 되자 PCP가 부인했다.
이 무리는 니투 알베스와 조제 반두넴의 계획을 떠받치는 지원 집단이 되었다. 그들의 행동은 이제 마오쩌둥 읽기가 아니라 레닌과 다른 마르크스주의 저자들의 몇몇 글을 피상적으로 읽은 데서 영감을 얻었다. 그 글들은 참된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분석되는 일이 드물었지만, 갈수록 활발해지던 분파 집단의 이런저런 입장을 정당화하려고 자주 인용되었다.
이 과정 전체는 지도 기관들이 다소 수동적인 가운데 전개되었다. 지도 기관들은 상황의 복잡성에 짓눌려 있었고, 몇 달 동안은 군사 분야의 심각한 문제들이 MPLA의 조직 문제와 이념적 명확화의 필요보다 앞서서 해결을 요구했다.
분파주의자들은 이미 말만 번지르르하고 앙골라 혁명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개념들을 퍼뜨려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지도부가 앙골라 사회 현실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 기초하지 않은 분석을 퍼뜨리지 않으려고 보인 신중함은 지도부를 「우경」이라고 깎아내리는 데 이용되었다. 14년 동안의 무장투쟁이 기본적으로 농민 출신 게릴라들이 해낸 것이라는 현실을 짚어, 투쟁의 그 단계를 당시 그 과정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던 앙골라 노동계급의 각성과 혼동하는 중대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 한 조심성, 그 조심성은 「사회민주주의적」 또는 「마오주의적」 태도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그 터무니없는 개념들은 MPLA와 정부 책임자들의 상당수에게 「반소련주의」나 「반공주의」의 딱지를 붙이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주장이었지만, 정직한 투사들이든 이미 분파주의의 길에 들어선 투사들이든 일부 투사들은 거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주장은 또 온갖 종류의 침투에 맞서는 운동 기구의 저항력을 약화시켰고, 게다가 그 집단이 자주 찾아가 공략하던 우방국 외교관 일부의 불신을 사기도 했다.
그 집단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MPLA의 이름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운동이 지닌 강력한 동원력을 무대에서 지워 버리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가장 나쁜 것은 제국주의 첩보기관들, 특히 프랑스 기관들과 그 유럽 동맹국 기관 몇몇이 지체 없이 이곳에 자기네 거점을 만드는 데 성큼성큼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 거점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무력화되었다.
분파주의자들의 계획
5월 27일에 실행된 계획은 3년 넘게 준비되어 온 것이었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 「상니콜라우 수용소」라 불리던 곳에 갇혀 있던 1970년대의 젊은 정치범들 가운데 비교적 작은 한 무리의 생각과 공동 경험과 야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리는 가장 착취당하는 계급 출신인 대다수 정치범들과 섞이지 않았고, 상니콜라우에서 이미 자기네 소부르주아적 편견을 넘어서지 못하는 엘리트주의적 핵심을 이루었다.
이 무리의 지도자는 조제 반두넴 말고도, 몇 해 전 루안다에서 「루안다 지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조직의 주요 구성원 몇 사람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주카 발렌팅과 베르나르두 테이셰이라(나두)가 있었다.
옛 「상니콜라우 수용소」 출신의 이 젊은 전 수감자 무리가 한 역할은 실패한 쿠데타의 과정 전체에서 결정적이 되었다. 그 역할은 포르투갈 파시즘이 무너진 뒤 이어진 전면 석방 이후, 당시 제1정치군사지역의 CIR[4]을 이끌던 니투 알베스가 가담해 무리가 커지면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전술적으로 그 계획은 뚜렷이 구별되는 세 단계를 예정하고 있었다. 운동과 국가의 기구 전체에 침투하는 단계, 기존 구조를 사보타주하고 그 신용을 떨어뜨리는 단계, 권력을 장악하는 단계다.
전략적으로 그 목표는 혼란스러웠다. 이 계획 전체를 떠받치고 서투르게 위장한 원초적 인종주의를 가리던 공허한 말투는, 책상 위에서 구상되었을 뿐 참으로 사회주의적인 내용은 전혀 없고 과학적인 내용은 더더욱 없는 기묘한 「과학적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도구가 될 「당」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퍼뜨렸다.
그리하여 그 계획은 우리 인민을 분열시키고, 혁명 과정의 전진과 확고한 민족의식의 확립을 가로막는 요소로 나타났다.
침투 단계
1974년 6월 니투 알베스가 앙골라를 빠져나가 대통령 동지와 MPLA의 다른 지도자들을 만나고, 루사카 대회의 싸움과 동부 전선의 투사 지역간 회의에 참가하도록 일을 꾸민 것은 조제 반두넴과 그 무리였다.
대회의 성격을 띤 그 회의에서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 집단의 동질성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운동의 강령과 실천과 양립할 수 없는 인종주의 이론을 옹호하고 나섰고, 대표들의 압도적 다수가 그것을 물리쳤다.
포르투갈과 정전 협정이 조인된 뒤, 정치국이 서둘러 앙골라에서 합법 활동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자, 이 집단은 수도의 불안한 치안을 핑계로 지도부의 루안다 입성(1974년 11월)을 늦추려 했는데, 그 시도가 실패한 것 역시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이 운동의 조직 기구 전체를 손에 넣어, 지도부가 도착했을 때 지도권을 그 집단에 넘겨줄 수밖에 없는 기정사실 앞에 서게 하려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사이에도 장기적인 권력 장악 전략은 계속되었다. 1974년 말 제1지역에 새 CIR, 곧 CIR 「세르테자」(확신)가 세워졌다. 여전히 니투 알베스의 지도 아래, 바칼로프가 책임자였던 구역에 세워진 이 CIR에서는 혁명적 정치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연수생들에게 몇 가지 그릇된 생각이 주입되었고, 그것이 그들의 분파주의적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니투 알베스는 그 연수생 가운데 열다섯 명을 그곳에서 빼내어, 이미 악명 높은 「전국 DOM[5] 사무국」의 첫 핵심을 꾸렸다. 이 사무국은 운동 전체를 장악하려는 새 분파주의자들의 전략에서 첫 번째 커다란 창끝이 된다.
그때 그들은 저마다 운동을 장악하려던 다른 분파들과 격렬하게 싸워야 했다. 처음에는 CAC(아밀카르 카브랄 위원회), 그다음에는 엔다 위원회와 싸웠는데, 그것도 이 모든 분파와 싸우고 있던 운동의 구조를 방패로 삼아서였다.
첫 단계에서 이 「전국 DOM 사무국」은 조직을 갖추고, 이미 뚜렷하게 정해진 관점에 따라 선발한 자기네 활동가들을 길러 냈다. 포르투갈의 UEC(공산주의학생동맹)에서 온 시타 발레스는 우리 투쟁과 우리 운동의 현실을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니투 알베스에 의해 이 조직의 우두머리에 앉혀졌고, 곧바로 작전 지휘권을 손에 넣었다. 시타 발레스의 득세를 미심쩍게 본 것은 바로 그녀의 협력자들, 곧 안토니우 멘드스 코스타, 비르질리우 산투스 네투(은잠바), 파울루 마누엘, 킹, 그리고 CIR 「세르테자」 출신의 다른 이들이었다. 그 득세는 그녀가 동거하던 알베스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타 발레스는 곧바로 운동의 구조를 청산하고, 포르투갈에서의 당 활동 경험에서 착안한, 처음에는 비밀 조직인 다른 구조로 그것을 바꾸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해서 전국 DOM 차원에 니투를 우두머리로 한 첫 구조가 생겨났다. 노동 부문과 동네 부문은 산투스 네투(은잠바)와 코스타가, 교육 부문과 지식인 부문은 시타와 후이 코엘류가 그의 대리인으로 맡았다. 이 부문에서는 안토니우 마르케스(빅), 마누엘 비디갈, 누누 시몽이스로 이루어지고 조제 헤이스가 보좌한 만만치 않은 무리가 사실과 문서를 분석하고 행동을 기획하는 두뇌 노릇을 했다.
노동 부문과 동네 부문에서는 은잠바와 안토니우 멘드스 코스타가 (자기네 사람인 비센트 포르투나, 파울루 마누엘 킹, 그레이시 카르도주, 조제파 나르시주를 심어 두었던 옛 전국 DIP[6]의 지원을 받아) 세 「안테나」 — 부아케, 이마누엘 무옹구, 아우구스투 도밍구스 잉글레스 — 를 통해 같은 방식으로 기존 구조를 해체하는 활동을 벌였다. 기존 구조를 자기네 비밀 구조로 바꾸려는 것이었는데, 그 구조에서는 책임자 한 사람이 세 사람을 통제하고, 그 세 사람이 저마다 다시 세 사람을 통제하는 식이었다.
계획에는 기존 보도 기관을 장악하고 새 기관까지 만드는 일이 들어 있었다. 국영 라디오를 이끌던 음발라 네투와 『디아리우 드 루안다』의 편집국을 맡은 비르질리우 프루투오주는, 여건이 무르익는 대로 분파주의자들의 기반이 될 여론의 흐름이 생겨나도록 온갖 일을 다 했다. UPA와 UNITA라는 꼭두각시들을 공격해 자리를 굳혔던 프로그램 「쿠디방겔라」는 교묘하게 MPLA와 정부를 겨냥한 선전을 폈고, 동네 인민위원회를 인민권력의 기관이 아니라 MPLA에 맞서는 이념 조직으로 내세웠다. 『포데르 포풀라르』(인민권력)라는 신문은 그 인민위원회의 투쟁 기관지가 되려 했다.
말란즈, 루방구, 로비투에서는 MPLA 기관의 통제를 벗어난 신문들이 나타나 분파주의 사상을 교묘하게 퍼뜨렸다. 일부 지방 라디오 방송국에는 분파주의 분자들이 조금씩 침투해 자기네 지침을 내보냈다.
동시에 조제 반두넴은 나두와 갈리아누의 뒷받침을 받아 FAPLA 정치위원부에 침투했고, 고(故) 지카 정치위원이 그에게 보낸 신뢰를 악용해 곧바로 여러 부대에 심복들을 배치하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자기들에게 보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교체하기까지 했다.
이 책임 있는 지위를 발판으로 그는 FAPLA 안에 자기 조직망을 깔기 시작했다.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당시의 조직적 불안정, 게다가 운동 지도부가 제2차 해방전쟁이 떠안긴 수많은 과업 하나하나에 동원할 수 있는 여러 간부들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정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전면적 인민 동원」이라는 구호를 이용해, DOM 사무국의 페르난두 소자와 은달라탄두 FAPLA의 쿠디아를 통해 ODP[7]를 장악했다. 여기에는 (이미 알려진 모험주의자 「코만도」) 카를루스 파셰쿠와, 지식인 집단에서 시타 발레스와 함께 위세를 부리던 포르투갈인 조앙 드 알메이다가 정치적 지원을 보탰다.
그와 동시에 조제 반두넴은 역시 정치위원부를 통해 새로 만들어진 헌병대를 장악했다. 그는 책임자인 자크레와 봉가를 자기가 신뢰하는 다른 사람들, 곧 파울루 테이셰이라(디아부), 가스파르 퐁발 네투(퐁발), 아르민두 오르넬라스로 갈아 치웠다. 오르넬라스는 뒤에 분파주의자들과 관계를 끊게 된다.
그는 군관구마다 정치위원단과 그 보좌진을 두었는데, 모두 루안다의 소부르주아지에서 충원한 자들이었다.
군사학교들도 분파주의자들의 공략을 피하지 못했다. 식민지 군대에서 장교나 부사관으로 군사 기술을 익힐 기회를 가졌던 일부 특권층 청년들이 이 집단에 가담한 것이 그 공략을 쉽게 해 주었다. 그들의 기술은 이제 이 학교들을 재빨리 틀어쥐는 데 쓸모가 있었다.
독립 뒤 첫 특공대 몇몇을 길러 내던 CIR 「인민의 피」의 책임자 자리에 조제 반두넴은 자기 심복의 하나인 아마데우 네베스(데데)를 앉혔다. 이 자는 수상한 태도 때문에 이미 가벨라의 CIR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가벨라 CIR은 여러 경향의 분파주의자들, 그 가운데에는 CAC에서 갈라져 나와 리스본의 지도를 받던 이른바 OCA — 앙골라공산주의조직 — 구성원들까지 자라나던 온상이었다.
CIR 「킴푸안자」(오늘날의 「베네디투 지휘관」 하급전문병학교)는 사실 분파주의 전략에서 가장 멀리 내다본 도구의 하나였다. 그곳에서는 몇몇 전략 병과의 전문병을 길러 내야 했다. 조제 반두넴은 이 학교의 지도부와 교관 자리에 자기 친척과 친구 무리를 앉히는 데 성공했는데, 그들은 이미 식민지 시기에 「킴푸안자 위원회」라는 비밀 집단을 결성한 바 있었다. 펠릭스 마티아스 네투(펠리투), 제카 반두넴, 아폰수 안토니우, 그리고 조제 반두넴의 친척 여섯 명이 그들이었다. 이 집단이 옛 「킴푸안자 위원회」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조직된 반동 세력이나 좌익주의의 기미가 있는 어떤 세력이든 쓸 수 있도록 「운동 안의 분파주의 섬들」이 계속 남아 있게 하려 했다는 것은 징후적이다.
특기할 것은, 1975년 말 CIR 「킴푸안자」가 문을 열자마자 조제 반두넴과 바칼로프가 전략 병과 연수생 자리를 모두 채우려고 바칼로프의 심복 200명을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이 술책은 너무나 뻔해서, 그 공작에 가담하지 않은 군 책임자들은 모두 그것을 알아채고 고발했으며, 바칼로프에게 연결된 그 사람들은 전국에서 제1차·제2차 해방전쟁 때 이미 자신을 입증한 다른 전사 200명으로 교체되었다.
카빈다에서 쓰러진 지카 정치총위원의 자리를 조제 반두넴이 대신 맡았으나 그는 군사 경험이 전혀 없었으므로, 니투 알베스의 제안으로 바칼로프가 정치총위원에 임명된다. 바칼로프는 오랫동안 엔다 위원회의 영향을 받았는데, 엔다 위원회는 그를 자기네 깃발로 삼으려 했다. 니투가 「엔다 위원회」와 결별하자 바칼로프는 얼마간 망설이다가 니투 분파에 줄을 선다. 그리하여 이 분파는 모든 군사학교에 대한 통제를 쉽게 굳힐 수 있었다. 뒤에 정치위원단을 양성하려고 세운 「지카 지휘관」 정치군사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통제는 여성분견대도 비켜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페르난다 델핑(난디)과 엘비라 다 콘세이상(비리냐)을 통해 분파주의의 독이 스며들었는데, 그 독은 언제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적 장광설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정치위원부는 분파주의 전략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지도자들, 곧 조제 반두넴, 바칼로프, 나두, 갈리아누와 학교·여성분견대·각 군관구의 책임자 무리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올바르지만 전사들의 실제 문제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책상물림 지시를 내렸고, 전사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분파주의가 스며들기 쉽게 만드는 앞뒤 안 맞는 어휘를 퍼뜨렸다. 그러면서도 병사들을 찾아가지 않았고, 언제나 집무실 회의, 집무실 분석, 집무실 결정을 더 좋아했다. 작전 지역을 방문할 때조차 바칼로프 자신은 전사들을 만나기를 피했고, 도시에서 정치위원부 구성원들을 모아 상황 보고를 듣는 데 그쳤다.
정부와 행정 차원에서는, 니투 알베스가 이끌던 지금은 없어진 내무부를 통해 분파주의자들이 전국의 통치 구조를 장악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옛 「상니콜라우 수용소」나 CIR 「세르테자」 출신의 심복들 가운데서 사람을 뽑아 주(州) 위원, 시(市) 위원, 모든 부처의 고위 공무원에 임명했다. 그 결과 행정 전체에 금세 분파주의자들이 침투했고, 동네 인민위원회(CPB)에 침투한 자들도 거기 포함되었다.
니투 알베스와 그 무리는 내무부가 제공하는 모든 술책의 여지를 빠짐없이 이용했고, 부패를 이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저런 자리를 주는 대가로 그들은 몇몇 동포를 자기네 궤도 안에 붙잡아 두었는데, 그 동포들은 때로 자기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분파주의자들이 지금 유일한 「좌익」 장관이라고 소문을 내던 아이르스 마샤두(미네르바) 전 장관은 해로운 활동을 벌였다. 그 역시 (처음에는 노동부에서, 다음에는 국내상업부에서) 요직에 분파주의자들의 심복을 앉혔고, 그들은 정부의 신용을 떨어뜨리려고 실행에 옮겨진 사보타주, 특히 소비재 분배와 관련된 사보타주의 고분고분한 도구가 되었다.
그는 두 부처에서 포르투갈인 코스타 마르틴스 소령[8]의 보좌를 받았다. 앙골라 인민공화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누리던 이 자는 결국 외국 이익에 봉사하는 첩자로 드러났다.
주목할 것은, 분파주의자들이, 특히 니투 알베스가 목적을 이루려고 이미 OPVDCA와 PIDE[9]에 복무한 적이 있는 이름난 반동분자 몇몇에게 기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존 구조를 사보타주하고 신용을 떨어뜨리는 단계
말란즈, 벵겔라, 우일라, 북콴자, 남콴자의 전 주 위원들과 수많은 시 위원들이 분파주의의 열성적인 추동자가 되었다. 체계적으로 니투 알베스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중앙위원회와 정치국, 그리고 MPLA와 앙골라 인민공화국 대통령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을 던진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 문제들은 결국 그들의 고의적인 사보타주 때문에 꽉 막혀 있었던 것이다. 상품의 자유로운 유통을 금지하고, 생산 감소로 생긴 부족을 메우려고 정부가 어렵사리 사들인 소비재의 분배를 어렵게 만든 것이 바로 그 주 위원들이었다. 때로는 지킬 수 없음을 알면서 약속을 하고, 때로는 지금의 어려움을 중앙 기관 탓으로 돌리면서 농민 생산물의 반출을 가로막은 것도 바로 그 주 위원들이었다.
그들의 고의적인 사보타주 행위는 국민경제 전체의 목을 조르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그들은 그렇게 만든 상황을 정부와 MPLA 지도자들을 겨냥한 선전에 이용했다.
루안다와 벵겔라에서 분파 집단은 인민권력 기관들을 MPLA의 구조에 맞서는 싸움에 이용한다. 니투 알베스와 그 일당은 인민권력의 화신을 자처하기까지 했으며, 그 기초 구조인 CPB에 MPLA에 맞서는 새 당의 기관이 될 수 있을 만한 권한을 주었다.
CAC가 해체되자, 동네 인민위원회는 이번에도 주로 CIR 「세르테자」와 옛 「상니콜라우 수용소」 출신인 분파주의자 무리의 습격을 받아 장악된다. 그 앞장에는 마누엘 네투(음발라), 아델리아누 산투스(베티뉴), 은잠바, 아고스티뉴 로페스, 아우렐리누 드 올리베이라(콘데케), 에두아르두 실바(피스쿠), 조앙 샤룰라 드 아제베두(샤룰라), 줄리우, 안토니우 타바르스(베투 무안자)를 비롯한 많은 자들이 있었다.
니투를 우두머리로 한 이 집단이 꾸민 선거 소극(笑劇)은 CPB의 진짜 지도부를 정직한 투사들로 가린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 정직한 투사들은 얼마 안 가 지도부에서 밀려났다.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는 이 과정을 비판하고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이 모든 분파 활동을 뒷받침하려고 보도 기관 차원의 지원망까지 꾸려졌다.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지금은 폐간된 『디아리우 드 루안다』(비르질리우 프루투오주가 이끈)와, 「쿠디방겔라」(음발라와 후이 말라키아스가 맡은)나 「무장한 인민」(갈리아누와 나두가 맡은) 같은 국영 라디오의 몇몇 프로그램이었다.
MPLA와 정부의 지도 기관에 맞서고 주민의 사활적 문제에 관한 결정을 사보타주한 CPB의 부정적 역할은 정치국이 여러 차례 밝혀 왔다. 정치국은 언제나 혁명 과정으로 되돌리고 싶었던 동지들을 깨우치려 했다.
대통령 동지 자신도 여러 차례 CPB를 불러, 특히 그들이 동네에 인민상점이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고 심지어 사보타주까지 했을 때, 그들이 고수하는 입장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게 하려 했다. 그 모든 노력은 헛되었고, 이제 와서야 그것이 공공연한 사보타주였음이 드러났다.
CPB는 주택, 물·전기 공급, 생필품 조달, 위생과 보건 문제에 한 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보건소조차 병원 밖 보건 부문 동지들의 노력 덕분에 세워졌다.
동네 주민들의 구체적 문제는 무정부적이고 반동적인 정치 활동에 밀려 무시되었고, 그 활동에서는 선동과 장광설이 무기 노릇을 했다.
JMPLA[10]도 분파주의자들의 파괴적 광기를 피하지 못한다. 루이스 키툼바는 어렵지 않게 JMPLA 「집행부」를 조종하고 주(州) 조정위원 일부, 그리고 루안다의 동네와 몇몇 코뮌의 JMPLA 「조정위원」 몇몇을 장악한다. 「집행부」는 거창한 활동을 하는 척하며 기상천외한 계획을 들고 모든 캠페인에 끼어들었지만, 청년들이 여러 동원에 호응한 열의를 살리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사탕수수 베기 캠페인이 그랬다. 여러 차례의 부름에 호응한 수천 명의 청년들이 「집행부」의 태만 때문에 일을 이어 가지 못했다. 또 예를 들어 문맹 퇴치를 위한 「엔다 여단」이 그랬다. 이 여단은 쓸 수 있는 수단이 주어졌는데도 「집행부」로부터 효과적인 활동에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집행부」는 분파주의 이데올로기의 추동 기관으로 비치는 데 더 마음을 썼다. 그러려고 「이념 교육」이라는 혼란스러운 글을 펴냈고, 1977년 2월 16일 말란즈 회의 같은 모임까지 열어, MPLA 중앙위원회와 그 정치국이 「우경」·「마오주의」 편향에 빠져 있다는 유치한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론은 분파주의 일당에게 미리 「교육받은」 청년들을 통해, 똑같이 무책임하고 유치한 방식으로 청년층의 다른 조직들에 당연히 「주입」되었다.
UNTA[11]에도 분파주의가 들어왔다. 분파주의는 대체로 UNTA가 MPLA와 손발이 맞지 않게 움직이도록 이끌려 했고, 그 때문에 이따금 UNTA가 운동과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 행동의 부정적 영향은 특히 몇몇 노동조합위원회에서 나타났다. 이 위원회들은 그 구성원인 이런저런 분파주의 분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자기 권한을 넘어섰고, 함께 방침을 연구해야 할 행동위원회를 깎아내리거나 아예 그것과 싸웠으며, 행정에 직접 간섭하기까지 해서 생산과 계획 업무에 뚜렷한 피해를 주었다.
그 노동조합위원회들 가운데 상당수는 노동조합주의의 원칙과 명백히 어긋나게 자기 자신을 임명했다.
UNTA의 일부 책임자들은 분파주의의 적극적인 하수인이었고, 로비투와 벵겔라, 루안다, 루에나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그랬듯이 공업에서든 농업에서든 생산 부문을 사보타주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데 한몫했다.
일부 노동조합 책임자들은 기업 안에 MPLA 행동 집단을 만드는 것을 공공연히 반대하며, 그것은 오로지 UNTA만의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여러 부문에서 분파주의자들의 활동을 거들었고, 또 몇몇 꼭두각시 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기회주의를 부리게 해 주었다.
OMA와 OPA[12]조차 분파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런 조건이 5월 27일의 비극적인 쿠데타로 이어졌다…
쿠데타 세력의 기만 선전 / 중앙위원회의 개입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가 MPLA 안의 분파 활동에 대한 조사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그 두 중앙위원의 직무를 정지시키자, 조제 반두넴과 니투 알베스, 중앙위원회 안의 그 하수인들, 그리고 분파주의 일당 전체가 불안에 빠졌다. 그 결정은 「조직」에 관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내려졌다. 그 보고서는 조직 사업을 어렵게 하는 일련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마치 두 개의 MPLA가 있고 그 하나를 조제 반두넴과 니투 알베스가 이끄는 것 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주제 에두아르두 동지[13]가 이끄는 중앙위원회의 한 위원회가 그 조사를 수행했다.
곧바로 새로운 쿠데타 전략이 짜였고, 거기에는 군사 쿠데타까지 들어 있었다. 그러려면 체계적인 기만 선전으로 대중과 특히 군대를 움직여야 했다.
분파주의와 싸우면서 운동 지도부는 언제나 분파주의자들을 되찾으려 했다. 그래서 언제나 행정 조치를 피했고, MPLA 기관들 안에서 문제를 토론하는 방법을 먼저 썼다.
교육 부문 행동위원회(CAS)의 부식(腐蝕) 작용을 막아야 했을 때도 그렇게 했다. 그곳에는 시타 발레스의 패거리가 몽땅 들어가 있었고, 그들은 말란즈의 주(州) 지도위원회 회의까지 장악하려 들었다. 시타 발레스와 은잠바에게 연결되어 노동 부문에 「비밀 조직」을 꾸리는 임무를 받은 노동 부문 활동가 무리를 막아야 했을 때도 그렇게 했다.
분파 집단이 루이스 키툼바에게 미치던 영향력을 이용해 계속 독을 퍼뜨리려 하던 JMPLA 전 지도자들에게도 그렇게 대했다. 정치국원들과 대통령 동지 자신이 이 청년들과 토론하는 회의를 수없이 열었다. 그들은 도달한 결론에 동의하는 척하고는 JMPLA와 MPLA 자체의 기층 투사들 사이에 나가 중상하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운동의 기관 안에서 토론하고 비판하고 자기비판하는 이 방법을 분파주의자들은 지도부가 무르고 심지어 나약하다는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투사답게 분파 활동을 그만두기는커녕 지도 기관을 겨냥한 공공연하고 뻔뻔한 행동에 뛰어들었다. 분파주의 하수인들이 혼란과 분열을 퍼뜨리러 몇몇 주로 파견된다. 그들의 활동은 너무도 격렬해서, 벵겔라에서 아나스타시우가 그랬듯이, 전국 DOM의 이름을 내걸고 나타나 회의를 준비하기에 이른다. 니투 알베스가 단 몇 분 참석한 그 회의에서 지도위원회 위원들이 쫓겨나고, 필요할 때 조종하기 더 쉬운 「투사」 무리로 바뀌었다.
그들은 자기네 비밀 과업을 조율하려고 여러 주의 운동 기관과 정부 기관 사이의 회의를 부추기기까지 한다.
어떤 교사들은 니투 알베스의 「업적」에 관한 수업을 통째로 (그것도 수업 일지에 적어 가며!) 하면서 아이들까지 혼란에 빠뜨린다. 니투 알베스는 거기서 뛰어난 전략가이자 철학자이자 시인으로 그려진다.
앙골라가 아닌 이익에 봉사하는 어떤 노동조합 책임자들은 기업 안의 MPLA 행동 집단을 상대로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미심쩍은 「노동조합위원회」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그 집단을 청산하는 데 여러 번 성공한다.
그들은 「폭넓은 이념 토론」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뻔뻔스럽게 밀고 나간다. 그런데 정직한 투사들이 이념 토론을 일으키려 하면, 그들 앞에는 똑같이 공허하고 갈수록 광신적인 말투가 버티고 있다. 그 말투는 투사적 분석을 조금만 해도 견디지 못하지만,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해명 회의에서 무언가를 얻어 낼 가능성을 사보타주한다.
반발의 물결은 기세를 올렸고 몇몇 새 인물을 앞세워 감히 앞으로 나서기까지 한다. 이제는 베티뉴나 음발라 같은 자들이 아니라, 정치위원부에 속한 FAPLA의 몇몇 책임자들이었다. 이 기관에서 갈리아누, 나두, 데데, 페드루 산투스가 군기 위반이 명백하다는 이유로 총참모부에 의해 잇달아 직무 정지되었다. 처음에는 갈리아누를, 다음에는 페드루 산투스를 옹호하는 전단들이 돌기 시작해 대량으로 뿌려졌다. 그 전단들은, 니투 알베스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거창하게 「나를 변호하는 13개 테제」라는 제목을 단 꽤 두툼한 세 번째 전단과 함께, 쿠데타에 알맞은 분위기를 만들어 낼 동기들의 진짜 무기고가 되었다.
그 무기고 전체는 한편으로는 운동 지도부를 「사회민주주의」, 「우경」, 「사회배외주의」, 「반공주의」, 「마오주의」, 「반소련」이라고 낙인찍는 것으로 요약되었다. 그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았고, 진실도 MPLA의 역사도 전혀 존중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앙골라 혁명의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재 부족의 책임을 뒤집어씌운 정부 또한 무능하고 반동적이라고 여겼다. 「좌익」 인사로 여겨지던 「일관된 국내상업부 장관」만은 예외였다.
이 끊임없는 기만 선전 작업에는 모든 기관에서 저질러진 범죄적 사보타주 행위가 뒤따랐는데, 그것은 언제나 정부가 무능하다고 인민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운동 차원에서는, 투사 대중에게 주입하려던 터무니없는 말투와, 파괴하거나 적어도 약화시키려던 기관에 하수인들을 침투시키는 일 말고도, MPLA를 수십 년 역사를 가진 몇몇 공산당과 비교해 지도자들의 노선 편향과 그릇된 사고방식을 입증하려 했다. 그러면서 MPLA가 공산당이 아니며 아직 당조차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 해방투쟁을 지배한 보편 법칙들이 독립 뒤에도 그 투쟁의 특수성을 없애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언제나 무시했다.
분파주의 지식층은 — 파시즘 몰락 전이든 뒤든 — 포르투갈의 온갖 정치 문제에 쉽게 끌려다녔다. 식민지 시대에 물려받은 사고방식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자주 지적(知的) 신식민주의의 모습을 띠는 일종의 「이념적 온정주의」를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독립한 앙골라 인민과 MPLA 안에서 자라난 투사들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20년 동안 투쟁을 겪거나 이끈 투사들의 성숙과 경험을 오만하게 경멸한 그 지식층은 이념적 혼란을 퍼뜨리는 또 하나의 하수인이 되었다. 그 혼란은 MPLA의 사회주의 선택에 대한, 그리고 대회 개최와 마르크스-레닌주의 당 창건 결정을 출발점으로 그 선택을 실천에 옮기려던 중앙위원회의 발의들에 대한 공공연한 사보타주가 되었다.
통치 차원에서 분파주의자들은 보수적인 관료층에 기대어 통치자들의 결정이 실현되는 것을 끊임없이 가로막았다. 인민의 이익에 맞는 혁명적 결정을 이행하기 전에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핑계로 걸핏하면 EFU(해외영토공무원법)[14]를 쓰고 남용했다.
식량 분배 차원에서는 완벽한 사보타주가 조직되었다. 국가가 소비재를 수입하려고 치른 희생은 주민들이 그것을 손에 넣는 사정이 나아지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동네 인민위원회에서 국내상업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에서 병목이 생겼고, 이 모든 것은 MPLA와 정부에 대한 인민의 불만과 반발을 불러일으키려는 공공연한 목적에서였다. 책임을 가리려 하면, 어떻게든 그 과정에 연결된 다른 부문들로 「떠넘기는」 교묘한 장치가 작동했고, 결국 병목의 진짜 원인은 언제나 감추어졌다.
바로 여기에서 분파주의 전술 전체의 범죄적 바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신들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내세우려고 쓰는 요란하지만 공허한 장광설 속에는, 그들의 입장에 늘 따라다니는 거대한 공백이 있다.
그들의 연설에도, 글에도, 회의 발언에도 그들의 경제 구상을 보여 주는 단서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고, 앙골라 경제의 절박한 문제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니투 알베스든 분파주의 우두머리 누구든 주민에게 생산을 늘리자고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가운데 누구도 나라에 그토록 필요한 설비재(트랙터, 기계, 운송 수단 등)를 희생하면서 식량을 사들이느라 외화가 걱정스럽게 줄어드는 문제를 언급한 적이 없다. 그 가운데 누구도 간부 부족의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분석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들의 선동 전략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위대한 고전에서 따온 인용문으로 「쉽게」 건설할 수 있는, 책상 위에서 구상된 사회주의에 대한 경솔하고 말뿐인 약속으로 속이는 일이었다…
분파주의자들은 쿠데타를 준비하는 데 스포츠까지 이용했다. 식민지 시대에 앙골라 애국자들이 이미 썼던 전술을 빌려, 스포츠 클럽 하나를 키워 대중의 호감을 끌어모으고, 그것을 특정한 목적을 위한 선전에 이용했다. 「프로그레수 두 삼비장가」가 그런 클럽이었는데, 이 클럽은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고 최근에는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했다. 삼비장가 CPB의 분파주의자들이 북돋운 이 클럽은 하루아침에 니투 알베스를 회장으로 맞았고, 여러 주에서 경기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클럽에 「정치적 목적」이 있었고 그 간판 아래 「키페루 돌격대」가 꾸려졌다고 밝힌 것은 바로 살인자 키페루 자신이다. 이 돌격대는 쿠데타 동안 물리적 청산과 그 밖의 폭력적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DISA[15]에는 국가안전위원회의 결정을 방해하고, 무엇보다 분파주의자들의 반동 활동에 쓸 정보를 얻으려고 분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몇 차례 정보가 새어 나간 것 말고도, 바칼로프 아내의 옷 안감에서 극비 문서의 복사본 한 묶음이 발견되었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 밍가스, 페헤 삼빌라 같은 침투 요원들이 DISA 문서고에서 빼돌리던 것이었다. 이 무리는 문서를 훔쳤을 뿐 아니라, 언제나 「우경」 따위의 공허한 공식으로 포장한 지역·인종·종족 감정을 이용해 보안기관의 다른 요원들을 타락시키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DISA가 「일관된 투사들」만 잡아들여 고문한다고 비난하며 DISA를 중상했다. DISA가 짧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적 요원들의 침투, 캄망가 밀매꾼들[16], OCA 분자들과 싸우며 국가에 이미 세운 뚜렷한 공로는 주민들에게 일부러 감추었다. 그러면서도 분파주의자들은 서슴없이 자기네 첩보망을 꾸렸고, 그것을 공화국 대통령실에까지 뻗쳤다…
군대에서는 온갖 동기가 다 이용되었다.
봉급, 피복, 식량, 심지어 무기의 부족까지 국방부와 총참모부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정치위원부 구성원들은 이런저런 상황을 「확인」하는 데 그쳤고, 필요한 해결책을 찾는 일을 돕는 데는 조금도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주 전사들의 불만을 부채질하며, 지금의 폐해를 언제나 사령관이나 총참모부나 국방부 탓으로 돌렸다.
운송과 식량·장비·피복의 분배를 정상화하려는 FAPLA 지도 기관들의 노력은 지역이나 부문 차원에서 자주 장애에 부딪쳤는데, 그것은 간부들이 함께 애쓰면 쉽게 넘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간부들 가운데 일부는 불만을 불러일으키려고 상황이 썩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 쪽을 택했다. 전사들의 수당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지역에서는 이해할 수 없게도 상상조차 못 할 지연이 있다는 불평이 나왔고, 이 모든 것이 총참모부와 국방부의 탓으로 돌려졌다. 쿠데타 당일에야 분파주의 장교들이 전사들에게 돌아갈 돈을 쥐고 있으면서 (그리고 자주 그것을 사사로이 쓰면서) 전사들에게는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고 말해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쿠데타 뒤 며칠 동안 분파주의자들의 서류 가방과 금고, 심지어 그들 명의의 은행 계좌에서 수백만 콴자가 발견되었다. 병사들에게 갈 그 돈이 몇 달째 책임자들 손에 머물러 있었던 것인데, 이는 국가 감찰 기구를 만들 간부가 아직 없다는 사정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것이 니투 알베스와 조제 반두넴에 대한 조사에 관한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대응하려는 분파주의 일당의 계략이다.
쿠데타 구상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다
올해 1월 이미 니투 알베스는 그의 동조자 킨단다의 농장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는 바칼로프, 몬스트루, 조제 반두넴, 주카 발렌팅, 음발라, 베티뉴, 루이스 키툼바, 페드루 포르투나투 등이 참석해, 뒤에 「나를 변호하는 13개 테제」라는 제목을 달게 될 전단을 검토했다.
그 글에서 저자들(니투와 그 사상가들)은 내용의 3분의 2를 채운 인용문의 홍수 말고도, 그 집단이 중앙위원회에 품은 적의, 특히 니투 알베스의 이름으로 운동 안에서 벌어지던 분파 활동에 대해 이런저런 기회에 비판과 우려를 밝힌 모든 동지들에게 품은 적의를 한껏 쏟아 냈다. 결국 모든 것은 늘 하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 말투로 요약되었는데, MPLA 안에 「반소련주의… 운동 안에 주입된 마오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의 공통분모」가 있다고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MPLA와 그 지도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우방 사회주의 나라들의 인민과 당, 특히 소련 인민과 소련공산당에 보내는 존중과 우정도 안다. 분파주의자들은 이 전술로 MPLA 지도부를 우방 공산당들로부터 떼어 놓을 뿐 아니라, 그들의 눈에 그 우정의 가장 훌륭한 수호자로 비쳐 그들의 지지를 끌어오려 했다.
그런데 특별히 주목할 만한 점이 하나 있었다. 이 전단식 문서는 결론에서 쿠데타 구상의 조짐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군사 혁명지도위원회를 구성」해 즉시 정치국을 대신하고 「편향주의자」로 여겨지는 모든 분자를 청산하는 조치를 취하게 한다는 결정으로 나타났다.
그 회의에서 전단이 승인되자 그것을 퍼뜨릴 방법은 쉽게 찾아졌다. 공식적으로는 대통령 동지, 중앙위원회, 주 지도위원회들, JMPLA 중앙위원회, UNTA 전국사무국에 전달될 것이었다. 실제로 그것을 받을 권한이 있는 것은 중앙위원회 조사위원회뿐이었다. 그러나 분파 집단은 비밀 조직망을 통해 그것을 전국적으로, 몇몇 대사관에까지 널리 퍼뜨렸다.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분파 집단은 두 중앙위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중앙위원회가 비밀로 해 주기를 바랐다.
조사위원회의 결론을 검토할 중앙위원회 회의 날짜가 다가오자 다른 「고위급」 회의들(조제 반두넴, 니투 알베스, 몬스트루, 바칼로프, 미네르바)이 열렸다.
2월 28일 중앙위원회는 서둘러 회의를 열어 결론이 늦어진 데 대한 조사위원회의 해명을 들었다. 그리고 작업을 3월 31일까지 마쳐야 한다고 결정했다.
3월 한 달 동안 분파 일당은 니투 알베스와 조제 반두넴에 대한 예상되는 징계를 막으려고 중앙위원회의 결정적 회의 날에 벌일 시위를 집중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다. 3월 말 비밀 조직의 중간 기관들 사이의 회의에서는 이미 그 시위가 띨 형태를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보급난, 긴 줄, FAPLA의 결핍, 지도자들의 「이념적 편향」이라는 망령을 휘두르며 대중을 선동할 필요가 있다고 내다본다.
이 모든 활동은 대통령의 유고슬라비아·폴란드 방문으로 중앙위원회 회의가 미루어지면서 잠시 멈춘다.
그런데도 CPB와 MPLA 안에 침투한 핵심 조직, 그리고 정치위원부의 분자들은 대중 선동을 밀고 나가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는다.
마침내 회의 날짜가 5월 20일로 정해지자 쿠데타 계획은 구체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5월 초 확대 준비 회의가 다시 열리는데, 이번에는 니투 알베스의 집에서였고, 의제는 「무장 인민봉기 준비」 하나였다. 회의 참석자는 니투 알베스, 조제 반두넴, 바칼로프, 몬스트루, 미네르바, 롤로 키툼바, 페드루 포르투나투, 산투스 네투(은잠바), 베티뉴 등이었다.
우두머리인 니투, 몬스트루, 미네르바가 정치·군사·사회 정세를 분석한 뒤 조심스럽게 계획 준비에 들어간다. 「말란즈가 봉기의 무대가 될 것」이고 곧이어 루안다가 이를 지원하며 「결정타」를 날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말란즈 대표는 결과를 장담하지 못한다. 말란즈의 FAPLA가 지지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지에 가서 가능성을 가늠해 보겠다고 약속한다. 말란즈 주 위원은 그 목적으로 몇몇 동네를 돌며 선동 집회까지 열지만, 그 집회는 FAPLA 책임자 동지들에 의해 곧바로 해산된다. 그들이 주 위원과 몇몇 운동 책임자의 쿠데타 의도를 폭로하자, 이 자들은 주민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러나 루안다에서는 동네, 지식인 부문, 부처 차원의 개별 회의를 거쳐 「대중 선동」 단계로 넘어간다. 삼비장가 동네의 수색을 구실로 이른바 「동네 인민총회」를 열게 하는데, 참여는 적었지만 MPLA와 FAPLA·DISA, 정부를 겨냥한 몇몇 과격한 동의안을 채택한다. 일은 시작되었다. 「파트리스 루뭄바」, 「넬리투 소아르스」, 「오페라리우」, 「항젤」, 「네베스 벤디냐」, 「프렌다」 동네의 위원회에 침투한 분파주의자들이 잇달아 「자기네」 인민총회를 소집해 삼비장가 총회에 연대를 표한다.
이른바 「총회」에 주민들이 별로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갈수록 과격해지는 어조의 「동의안」들이 루안다 주민들 사이에 대량으로 뿌려진다. 전통적인 반동분자들도 이 과정에 뛰어들어, 상황을 이용하려고 정부와 MPLA를 겨냥한 자기네 전단을 펴낸다.
대통령 동지는 이번에도 FAPLA와 DISA의 책임자들을 곁에 두고 삼비장가 CPB를 불러, 수색 중에 주민들에게 저질러졌다는 몇몇 남용 행위의 근거를 캐물었다. 삼비장가 CPB 위원들은 총참모부와 DISA의 책임자들과 함께 가서, 그곳에서 벌어진 수색 중에 남용을 당했다는 주민들을 보여 주기로 한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 주민들은 수색에 참여한 전사들의 올바른 태도를 칭찬했다.
정치국은 루안다 지도위원회에 그 CPB들의 반(反)투사적 활동과 싸우는 일을 맡긴다. 그러나 그 자신도 분파주의에 물든 루안다 지도위원회는 그토록 마키아벨리적인 술책의 진짜 성격을 대중에게 밝혀 줄 능력이 없음이 드러난다. 루안다에서, 그리고 분파주의자들이 체계적으로 밀사를 보내던 몇몇 주에서도 어떤 불안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중앙위원회 회의 날짜가 다가올수록 분파주의 무리 사이에 초조함이 커져 간다. 「인민이 20일에 시위를 할 것이니 FAPLA가 CPPA[17]로부터 인민을 지켜야 한다」는 구실로, 루안다에 주둔한 부대들 일부의 책임자 몇몇이 이미 포섭되어 있다.
우두머리들의 머릿속에서 쿠데타의 첫 계획은 간단했다. 중앙위원회는 키나시시 광장 근처의 박물관에서 회의를 할 것이다. 박물관 일대에서 인민 시위를 일으키고, 앞서 제기한 문제들을 바탕으로 적당히 선동한 뒤, 그 시위가 중앙위원회와 정부의 사퇴를 요구하고 니투 알베스와 조제 반두넴 만세를 외치며 대통령을 고립시키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박물관이 시위대에 둘러싸이면(수백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대통령경호대가 발포할 수도 있다고 보고, 그때 장갑차와 몇몇 군인 무리가 인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영리한 계획의 결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CPB 차원에서든 FAPLA 차원에서든 여러 연루자의 진술은 이 쿠데타를 준비하기에 앞서 벌어진 격렬한 활동과 망설임을 보여 준다.
쿠데타 세력에게는 루안다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그들 생각에 주(州)들은 「결국 따라올 것」이었다. 그런데도 몇몇 주에는 밀사들이 가서 쿠데타 준비와 예정 날짜, 그리고 주의 분파 핵심 조직들이 수행해 주기를 기대하는 임무를 설명했다.
실패한 세 번의 쿠데타
5월 20일이 온다. 쿠데타 세력의 예상과 달리 중앙위원회 회의는 박물관이 아니라 푸퉁구 드 벨라스에서 열렸고, 그 때문에 첫 계획은 실패한다. 우두머리 몇몇은 이 예상치 못한 변경에 대한 짜증을 감추지 않는다.
회의 동안 조사를 받은 두 사람이 쓴 지연 전술은 모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니투 알베스는 「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읽을 수 있도록」 사흘 연기해 달라고까지 요청한다. 실은 그는 위원회 위원이던 몬스트루 이모르탈을 통해 이미 그 결론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새 계획을 다시 짤 수 있었을 것이다. 중앙위원회는 그 흐린 물에 배를 띄우지 않았다.
조사받은 두 사람의 분파 활동 전체가 곧 낱낱이 드러났다. 중앙위원회는 그래도 하루의 숙고 시간을 주었는데, 우두머리들은 그 시간을 초조하게 쿠데타 계획을 다시 검토하는 데 썼다. 그 사이에 니투 알베스, 몬스트루, 바칼로프, 반두넴, 미네르바와 그 대리인들 사이에 새로운 협의가 이어졌다.
바로 20일 당일, 비센트 포르투나(FAPLA 정치위원부)는 (푸퉁구에 있는) 「베네디투」 학교의 교장을 서둘러 매수하려 든다. 이 학교는 첫 계획에서는 고려되지 않았지만, 회의 장소가 갑자기 바뀌면서 이제 특별히 중요해졌던 것이다.
그는 그 시도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21일에 다시 졸랐지만 여전히 긍정적인 답을 얻지 못했다. 같은 20일 밤 10시, 조제 보르즈스(반 트로이)와 다른 자들은 야야 대위(자신투 안셀무)를 납치하러 간다. 그의 지휘 아래 있는 BRDM 장갑정찰차[18]를 이끌고 혹시 있을 「주민 보호」에 가담하도록 강요하려는 것이었다.
21일 오후 시다델라 집회에서 대통령 동지는 분파주의자 두 사람을 제명하고 「모든 분파주의자들과 참되고 진지하게 싸우겠다」는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전국의 모든 투사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 「길 잃은 양들」을 MPLA로 되찾으려 애쓰겠다는 결정도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도 잘못을 저지른 투사들에게 속죄할 기회를 준다는 MPLA의 철학이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은 뜻을 버리지 않는다. 바로 21일 토요일, 마누엘 카셀루(바제)는 몇몇 부대를 찾아가 「루안다 지역의 모든 부대는 시위가 벌어질 경우 주민을 보호할 준비를 갖추라」는 총참모부(EMG)의 「가짜 명령」을 전한다.
22일 일요일과 23일 월요일, 큰 우두머리들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본격적인 「군사 쿠데타」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장갑차의 참여를 확보해야 했다. 정찰중대 지휘관과 접촉했고, 그는 다시 개입·정찰대대 참모장 칸도카의 참여를 보장한다. 쿠데타 세력에게 전망은 유리해 보였다. 이제 쿠데타는 25일 새벽 4시로 정해진다.
분파주의자들이 아무 존중도 없이 제멋대로 이용하던 주민의 역할은 이제 FAPLA의 행동을 지지하는 것이 될 터였다. 대통령 동지의 이름을 더는 지켜 주지 않기로 했다. 이제 적은 중앙위원회, 정부, 그리고 대통령 동지 자신이었다.
24일 팔랑카 동네의 바제의 집에서 전체 계획을 검토하는 마지막 회의가 열린다. 계획을 토론하는 동안 온갖 허점이 드러나 군인들은 꽤 짜증을 낸다. 회의에는 니투 알베스, 조제 반두넴, 바칼로프, 베티뉴, 음발라, 마누엘 조제 벨로주가 참석했다. 니투 알베스는 마지막 지시를 내린다. 첫째, 이코, 라라, 루디, 파카비라, 오남부에의 청산[19]. 둘째, 상파울루 교도소, 국영 라디오, 『조르날 드 앙골라』의 점거(군인들은 병력이 모자라고 정찰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첫째 지시에 난색을 표한다). 셋째, FAPLA를 지지하는 대중의 출동. 넷째, 새 정부의 선포.
새벽 4시, 군인들은 나오지 않았다! 도밍구스 프란시스쿠(킨단다)의 농장에서 쿠데타의 결과를 기다리던 니투 알베스와 바칼로프는 루안다로 와서, 쿠카 동네에서 군인 반 트로이, 퐁발, 시아누크와 DAA(방공대) 장교 몇 명을 불러 회의를 연다. 회의에서 니투 알베스는 계획을 실행하지 않은 군인들의 기개와 용기 없음에 분통을 터뜨리고, 그 뒤 몬스트루, 조제 반두넴과 만나 상황을 분석하고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 오후에는 아침의 그 사람들에 더해 벨로주, 바티스타 네투(파이스카), 바제, 티아구, 베티뉴, 이마누엘 실바(루이스 키툼바)가 쿠카 동네에서 다시 모인다.
한편 반 트로이는 자기 집에서 킨단다, 안토니우 로렌수, 바제, 벨로주, 나두, 주카 발렌팅과 만나고, 루이스 두스 파수스는 정치위원부에서 죽음의 특공대를 이룰 자들, 곧 가마, 시키뉴, 페르난두 보르즈스(키오키사바)와 만난다.
이 분석·점검 회의들의 결과, 그들은 멀지 않은 새 날짜를 생각해 보기로 하고, 니투 알베스는 카시투로 떠난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26일이 결정적인 날이 된다. 3년 가까이 끈질기게 준비해 온 계획은 결국 거의 무릎 위에서 급조하듯 실행에 옮겨져야 했다. 베티뉴와 CPB 무리는 군인들에 대한 믿음을 잃고 20일의 구도로 돌아간다. 「인민봉기, 뒤이어 인민 보호를 구실로 한 군사 개입」이다.
그들은 안토니우 타바르스(베투 음완자), 샤룰라와 함께 안셀무 메스키타(시아누크)의 안내를 받아 카시투로 떠난다. 마부바스에서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을 궁리하고 있던 니투에게 새 계획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CPB 무리의 계획은 작전일로 28일 토요일을 고른다. 삼비장가 동네가 대중 행동을 시작하고, 이름난 CPB 선동가들이 이끄는 다른 동네들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군사 지원은 시아누크가 지휘한다. 니투 알베스는 이 계획에 동의한다. 그들은 모두 곧바로 루안다로 돌아가 모든 준비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베티뉴는 외교단의 특정 인사들과 접촉하고 CPB 선동가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맡는다. 조앙 히베이루(키페루)의 무리는 특정 책임자들을 체포하고 암살하는 임무를 띤 돌격대로 동원된다. 루이스 키툼바는 동네의 JMPLA 분자들을 동원하려 하고, 샤룰라는 지식인·공무원 무리에 경보를 돌리기로 한다.
밤 9시에 쿠카 지역의 집에서 준비 진행 상황을 검토하는 회의가 예정된다.
그동안 쿠데타의 진짜 두뇌인 조제 반두넴은 전날부터 쉴 틈이 없다. 군인들에 대한 니투 알베스의 비판에 자극받은 조제 반두넴은 나두와 주카 발렌팅의 보좌를 받아 26일 밤새도록, 그리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움직인다.
그는 FAPA[20]의 루이스 두스 파수스와 하파엘 두스 산투스의 도움을 받아 세 개의 「죽음의 특공대」를 꾸린다. 이 특공대는 이 두 책임자와 DISA의 시도니우 보르즈스가 지휘하고, 마누엘 알비누, 곤자가, 시키뉴, 피쿠, 마디와나, 카알루, 바헤이라 다 모르트, 카탈라아디와 정치위원부 수비대 분자들이 참여하게 된다. 이 무리들은 마누엘 고메스가 준비한 계획에 따라 표적이 된 중앙위원회, 총참모부, DISA의 책임자들을 청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마누엘 고메스는 니투 알베스가 암살 감독을 맡긴 옛 「코만도」였다.
9시에 조제 반두넴은 장교 벨로주, 안토니우, 바제, 마누엘 마테우스(테히벨), 조제 도밍구스(제카 은동구), 조앙 프란시스쿠(시쿠 칼룽가)와 만나 앞선 준비의 허점을 분석한다.
10시에는 카세켈 동네에서 파울루 테이셰이라(디아부), 안토니우 나르시주(이스코르피앙), 벨로주, 비르질리우 네투(질루), 퐁발, 산도카와 함께 27일의 행동 계획을 세우고 장교마다 임무를 나누어 준다.
14시 30분에는 같은 장교들과 함께 군인과 민간인의 행동을 조율하는 계획을 검토한다.
밤 9시, 테하 노바에서 그는 안토니우 카에이루, 이스코르피앙, 디아부, 루이스 키툼바, 도밍구스 비토리누(가투 이모르탈), 산도카, 퐁발, 질루 등과 만나, 여러 부대 분자들과 DISA, JMPLA, CPB 분자들의 합동 행동, 그리고 쓸 장비와 무기를 점검한다. 거기서 BRDM 장갑차들을 상파울루, 국영 라디오, 그라파닐, 카테트 도로로 움직이는 방안이 검토되었고, 그라파닐 포병대가 준비하기로 한 8/8 포를 쓰는 것도 예정되었다.
DAA의 파울루 페드루(파울리투)는 공항과 해안을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작전사령부가 꾸려진다. 바제(제6군관구), 벨로주(헌병대, 뒤에 지휘를 맡음), 시아누크, 파울리투(DAA), 봉핑(포병대), 퐁발(헌병대), 곤살루 알메이다(카하파스)(제9여단), 하울 페레이라(페노메누)(제9여단), 파이스카(공병), 존스(포병대), 안토니우 로렌수(정찰대), 비리냐(여성분견대)였다.
그러니까 쿠데타는 새벽 4시에 시작될 것이었다. 모든 장교는 병영에 있으면서 병사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독려해야 했다. 독려 명분과 첫 행동은 이런 것들이었다. 「대중이 시위를 할 것이니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정부 일부 구성원의 경제 사보타주. 갈리아누, 산투스, 시쿠제, 은잠바 등 「일관된 투사들」의 「부당한」 구속. 니투 알베스와 조제 반두넴의 복권 요구. 정부와 MPLA 중앙 기관을 바꿀 필요성. 장갑차 한 대로 상파울루 교도소와 구치소를 공격해 수감자들을 풀어 줄 것. 국영 라디오를 점거하고 「쿠디방겔라」 구성원들과 이 무리에 연결된 몇몇 직원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구호를 방송으로 내보낼 것.」 그 사이에 「죽음의 특공대」는 예정된 지도자들과 대통령을 지지하는 모든 지휘관을 청산하고, 그동안 CPB 분자들은 눈에 띄는 버스와 트럭을 모조리 동원해 노동자들을 대통령궁 앞에 강제로 집결시키기로 했다.
인민이 대통령궁 앞에 모이면, 국방부에 남아 있을 몬스트루와 니투 알베스와 함께 있을 바칼로프가 대통령에게 사임하고 정부와 정치국을 해임하라고 통고하고, 그런 다음 「시위대」에게 니투 알베스가 지금 이미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라디오로 선언문을 낭독할 것이라고 알리기로 했다. 그들은 대통령이 자기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 그들이 예상한 대로 — 죽일 작정이었다. 「선언문」 초안은 시타 발레스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의 자필이었다. 그것은 「앙골라 인민이여, 정부는 방금 타도되었다」는 말로 시작했다. 「굶주림, 빈곤, 탄압」을 이야기한 뒤 「인민대중과 영광스러운 FAPLA가 전국에 무장 인민봉기를 선포한다」고 했다. 그리고 끝에는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정부는 뒤에 구성하기로 했지만, 벌써 조제 반두넴이 총리로, 몬스트루가 국방장관으로 지목되어 있었다. 미네르바와 페드루 포르투나투는 대사관들에 쿠데타를 「설명」하고 즉각적인 승인을 요청하기로 했다.
몇몇 주 위원들은 새 정부에 참여하도록 불려 올 예정이었다.
이 계획이 정해지자 조제 반두넴은 쿠카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 있던 니투 알베스를 찾아간다. 그때 회의에서는 28일 토요일에 실행할 「민간인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조제 반두넴은 군인들이 쿠데타의 책임을 다시 손에 쥐었고 바로 그날 새벽에 일으킬 것이니 그 계획은 이미 낡았다고 밝힌다.
계획이 설명되고 니투 알베스가 이를 받아들이자, 곧바로 CPB 무리에 지시가 내려지고, 이들은 인민 시위를 이끌 다른 동네 사람들과 접촉하러 즉시 떠난다. 주목할 것은 이 사람들 모두가 하루 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쿠데타가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이 귀에서 귀로 속삭여졌다.
바칼로프는 그날 밤 몬스트루와 마지막으로 만나 최종 계획을 설명한다(몬스트루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회의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바칼로프와 니투와 제만이, 주로는 바칼로프가 그와 음모를 논의했다).
27일 0시 30분, 조제 반두넴은 벨로주, 낸시, 봉핑, 퐁발, 디아부, 다 시카, 안토니우, 존스, 그리고 DISA의 세 사람과 마지막 회의를 연다.
마침내 계획이 승인되자 최고 우두머리들은 킨단다의 농장에 있는 지휘소로 가서 사태를 기다린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대체로 예정대로 진행된다. 몇몇 동네에서 무질서한 총성이 울려 쿠데타 세력이 바라던 소요 분위기를 만든다. 교도소를 공격한 장갑차는 정문을 부수고, DISA 동지들과 심지어 교화된 몇몇 수감자들이 펼친 거센 저항에 맞서 기관총을 쏜다. 많은 수감자가 달아나는데, UNITA와 FNLA 수감자들도 끼어 있다. 용병들, 그리고 능동적 반란과 OCA의 수감자 몇몇은 달아나기를 거부한다. 엘데르 네투 동지와 아델리누 킨티누 동지가 자기 자리에서 영광스럽게 쓰러진다.
다른 장갑차들은 무질서하게 시내 몇몇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국영 라디오를 점거한다.
일터로 가던 노동자들은 길을 막는 바리케이드에 부딪혀 더 가지 못하고 대통령궁 쪽으로 떠밀린다. 그들 대부분은 거부했고, 어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다. 소수는 쿠데타 세력을 따라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을 빼앗고 분열주의 구호를 외치며 니투 알베스 만세를 불렀다.
라디오는 마침내 8시 무렵 장갑차 두 대가 있는 가운데 점거되었고, 라디오 안의 분파주의 분자 몇몇의 도움을 받은 「쿠디방겔라」 무리가 분파주의의 기묘한 말투를 방송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곧 카빈다에서 쿠네느까지 온 인민에게 경각심과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국방장관과 국방차관, DISA 국장, CPPA 총사령관, 그리고 총참모부·DISA·CPPA의 다른 책임자들은 순찰 무선대를 통해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일찍 알게 된다. 일부는 쿠데타에 맞설 병력을 준비하고, 다른 이들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부대들을 찾아간다. 바로 이 작전 중에 — 이는 쿠데타 세력이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 중앙위원이자 FAPLA 총참모부원인 파울루 다 실바 뭉궁구(당제뢰) 지휘관 동지와 FAPLA 총참모차장 조제 마누엘 파이바(불라) 지휘관 동지가 제9여단 정찰대대 병영에서 붙잡히고, 총참모장 시에투 지휘관 동지는 가까스로 같은 운명을 면한다. 다른 동지들도 몇몇 거리에 바리케이드로 준비해 둔 매복에 잇달아 걸려든다. 중앙위원이자 FAPLA 보안책임자인 에우제니우 베리시무 다 코스타(은자지) 지휘관 동지, 루안다 항만청장 시엘 다 콘세이상(가투) 지휘관 동지, CPPA 총사령관 안드레 피트라(페트로프), 그리고 중앙위원이자 재무장관인 사이디 밍가스 소령이 그렇게 당했다.
몇몇 돌격대는 책임자들을 납치하거나 청산하려 한다. CPPA의 테템브와 정치위원의 집에 간 민간인 무리가 그랬는데, 그곳에서 총참모부원 에우리쿠 곤살베스 지휘관과 국제협력국장 안토니우 가르시아 네투 동지가 붙잡혔다. DISA의 카를루스 조르즈 동지의 집에 간 「코만도」 무리도 그랬는데, 그를 찾지 못하자 그의 아내에게 총을 쏘아 다치게 했다.
쿠데타 세력은 또 CPPA 순찰 무선 본부를 점령하고 무선 차량 몇 대를 빼앗아 통제 작전을 어렵게 한다.
그 사이에 대중은 「시위」를 지지하지 않았고, 그래도 대통령궁 근처까지 온 수백 명은 길이 막혀 있는 것을 보았다.
국영 라디오를 점거한 쿠데타 세력은 새 술책을 시도한다. 「시위대」를 국영 라디오 주위에 모으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실패하리라 내다보고 FAPLA가 라디오를 포위하러 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인민은 그들에게 참호 노릇만 했을 뿐이다.
국방장관과 국방차관, DISA 국장과 부국장은 총사령관 동지와 끊임없이 연락하며 곧바로 반란 진압 계획을 세웠다. 국가적 이유에서 진압은 온 국민이 안심하도록 라디오를 되찾는 데서 시작해야 했다. 라디오 근처에 주민 몇몇이 모여 있었고 희생자를 내지 않으려는 배려가 있었기에(쿠데타 세력의 유치한 행동이 그때까지 이미 열 명가량의 사망자와 쉰 명가량의 부상자를 냈으므로), 오남부에 지휘관과 제 마리아, 아리 두스 산투스, 마르셀리누 대위가 지휘하고 니니, 카톤두, 후이 드 마투스 소령이 지원한 우리 병력은 라디오를 되찾을 때도, 제9여단 정찰대대 병영을 되찾을 때도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쿠데타 무뢰배들은 그 병영에서 당제뢰 지휘관, 은자지 지휘관, 밍가스 소령, 불라 지휘관, 에우리쿠 지휘관, 가투 지휘관, 가르시아 네투 동지를 서둘러 끌고 나갔는데, 그들의 시신은 뒤에 삼비장가 행동위원회의 크리스티누 산투스 동지, FAPLA 전사 조앙 호드리게스의 시신과 함께 잔혹하게 불탄 채 발견되었다.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니투 알베스의 직접 명령으로 총살되었다.
학살 뒤 죽은 줄 알고 시신을 실은 차 한 대에 실렸다가 차들이 불태워졌던 가투 지휘관은 중상을 입고도 불타는 차에서 혼자 빠져나와 항구까지 갔고, 그곳에서 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라디오와 제9여단 정찰대대 병영을 되찾고 쿠데타 세력이 이미 흩어져 달아나는 가운데, CPPA 순찰 무선대와 상파울루의 상황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한편, 실종된 책임자들이 있을 만한 곳의 단서를 찾았다. 그들이 삼비장가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마자 우리 병력이 그곳으로 갔지만, 그들이 숨겨져 있던 집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이미 살해된 뒤였다.
갈팡질팡하는 쿠데타 세력은 무기와 군복을 버리고 곳곳에 숨었지만, 결국 FAPLA 여단과 보안기관, 그리고 주민들에게 붙잡혔다.
쿠데타 참모부의 대부분은 그라파닐과 비아나 쪽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한다. 27일 아침 그라파닐에서 제9여단 포병대를 동원하고 있던 조제 반두넴과 갈리아누는 13시에 그곳에서 킨단다의 농장으로 달아난다. 그곳에는 달아나던 책임자들 상당수가 모여 있었고, 그들은 제1지역으로 가기로 한다. 바칼로프가 가장 먼저 떠난 축에 드는데, 카쿠아쿠 검문소에 들어서면서 아직 성공을 확신하고 있던 그는 라디오 탈환을 알리는 국가를 듣는다.
니투 알베스는 킨단다의 농장을 떠나 피리로 가서 바칼로프와 다른 도망자 스무 명가량을 만난다. 조제 반두넴과 시타 발레스는 키암바타 지역의 작은 밭으로 옮겨지는데, 그곳은 도망자들이 모두 이용하던 길(마리아 테레자, 세르카, 팡구, 키바시, 피리) 위에 있었다.
벨로주와 다른 한 무리는 걸어서 마리아 테레자로 가다가 주민들에게 붙잡힌다. 짧게 끝났지만 투사 대중과 온 인민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이 음산한 모험의 책임자들이 하나씩 붙잡힌다.
그 사이 주(州)들에서는 온 인민과 모든 투사가 마음 졸이며 사태의 전개를 지켜보았고, 국영 라디오가 질서 회복을 알리는 것을 듣자마자 환호했다.
몇몇 주에서 분파 핵심 조직들이 세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말란즈에서는 FAPLA 지구사령부가 27일보다 훨씬 전에 이미 주 위원과 MPLA·JMPLA·OMA의 몇몇 책임자의 분파 활동을 무력화해 두었고, 이들은 쿠데타가 실패하자 달아나려 했다.
벵겔라와 로비투에서는 투사들의 경계 덕분에 주 위원과 그 협력자들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비에에서는 중앙위원 잠바 야 미나가 주 위원, DISA 책임자들, 지도위원회와 함께 지방 라디오와 정치위원부를 점거하려던 두 군 책임자의 행동을 무력화했다.
우암부와 우일라에서는 주 위원들과 FAPLA·DISA 책임자들이 즉각 행동했기 때문에 분파 핵심 조직들은 나설 시간도 분위기도 얻지 못했다.
북콴자와 남콴자에서는 두 주 위원 모두 분파주의에 기울어 있었지만 투사들의 경계 덕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북콴자 주 위원은 루안다 쿠데타 이후의 행동에 대해 말란즈 주 위원과 짜고 있었다.
니투 알베스가 전직 장교 통통에게 5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피리로 와서 도망자들을 구하라고 알리려고 밀사를 보냈던 우이즈에서는, DISA 주 책임자들의 시의적절한 개입으로 통통이 어떤 헛된 시도도 하지 못했다.
모시쿠에서는 그곳의 분파 핵심 조직이 루안다 쿠데타를 지원하려던 시도를 FAPLA 전사 책임자들이 즉각 진압했다.
카빈다, 룬다, 자이르, 콴두쿠방구, 모사메데스, 쿠네느에서는 이런저런 이름난 분파주의자가 체포된 것 말고는 특기할 일이 없었다.
혁명의 새로운 과업
대통령 동지는 그토록 비열한 배신에 무참히 상처 입은 온 국민에게 사태의 전개를 차근차근 설명해 왔다.
앙골라의 온 인민은 이 모험주의자·배신자·야심가 무리가 저지른 가증스러운 범죄를 가장 엄하게, 용서 없이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용감하고 소박한 혁명 간부가 드문 젊은 국가에서 그토록 높고 귀중한 책임자들을 잃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다. 적이 우리나라와 아울러 전선국가들, 나미비아·짐바브웨·남아프리카 해방운동들을 불안정에 빠뜨릴 도발을 이어 가려고 우리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때에 우리가 처한 위험한 상황, 범죄적 중상의 그물로 투사들을 분열시키고 인민을 분열시키려 한 쿠데타 실행 전의 준비 작업, 그리고 그럼에도 제국주의의 조종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던 수많은 외국 분자들과의 수상한 연계 — 이 모든 요인 때문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상사태 덕분에, 쿠데타가 만들어 낸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려고 꾸며질지 모를 새 쿠데타 시도의 헛된 기도를 모두 즉시 뿌리째 잘라 낼 수 있었다.
5월 27일의 배신적 쿠데타 연루자들을 재판하고, 그 조직과 실행에 책임이 드러난 모든 자를 용서 없이 처벌하라는 국민의 정서에 부응하려고 특별군사법정이 설치되었다.
앙골라의 온 인민과 많은 우방국이 영광스럽게 쓰러진 이들의 가족과 동지들의 깊은 슬픔에 함께했다.
이 고통스러운 사건은 결국 적에 대한 MPLA의 또 하나의 비상한 승리로 나타났다. 그토록 격렬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또다시 시험대에 오른 MPLA 투사들은 아고스티뉴 네투 대통령 동지의 흔들림 없는 확고함에 이끌려 어려움을 이겨 낼 줄 알았고, 그 어느 때보다 단련되어 분파주의자들과의 싸움, 국가 재건, 대회 준비, 사회주의를 향한 되돌릴 수 없는 전진이라는 절박한 과업을 이어 갈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 이 반MPLA 행동의 엄청난 규모를 더 잘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동이 실패한 덕분에 앙골라와 온 인민은 국가를 헤아릴 수 없는 파국으로 끌고 갔을 극적인 결과를 피했다. 쿠데타 계획에 이미 암살이 들어 있었는데, 쿠데타 세력이 몇 시간만 더 움직일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쿠데타 계획이 제한적으로나마 성공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겠는가? 통치 차원에서 더디지만 확실하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 구조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조금씩 재건되고 있는 아직 허약한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주택·보건·교육 사업은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다. 사실 쿠데타 계획은 국영 라디오의 선언문을 넘어서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민을 위한 것, 국가 재건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니투 알베스와 조제 반두넴과 그 졸개들이 예정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건설되고 있는 것을 파괴하는 일뿐이었다.
국가의 독립과 우리나라 영토 보전에는 어떤 결과가 있었겠는가? 쿠데타가 예정된 며칠 동안 우리 북부와 남부 국경이 심각한 도발과 침범을 당했고, 자이르군과 남아프리카군의 집결까지 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나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았는가?
온 세계가 쿠데타와 니투 알베스를 지지하는 자이르 대통령의 발언을 알아차렸다. 자이르는 이 쿠데타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사빔비와 그 하수인들은 곧바로 쿠데타를 지지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런던에서는 니투 알베스의 수상한 대리인 하나가 UNITA 분자들을 만나러 파리로 간다고 알렸다…
서방 외무부들은 쿠데타의 성공이 자본주의 이익에 가져다줄 이점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국제 제국주의가 애타게 기다리고 교묘하게 조종한 쿠데타의 진짜 성격은 결국 무엇이었는가? 앙골라 인민공화국의 새 동맹자는 누가 되었겠는가?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은 모든 MPLA 투사와 모든 애국자의 입에 있다. 5월 27일 쿠데타는 반동 쿠데타였고, 앙골라 혁명과 MPLA를 청산하려는 것이었다.
투사들은 이 과정 전체의 충격적인 한 측면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진짜 가담자는 누구였는가? 일하는 인민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농민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앙골라 소부르주아지의 여러 층에서 나온 젊은 분자들, 그리고 우리 청년 가운데 가장 특권적인 분자들이었다. 그들은 학생 시절의 지하 활동에서, 정치범 시절의 「상니콜라우 수용소」에서, 또는 그 가운데 일부가 제1차 해방전쟁이 끝난 뒤에 — 그것도 이미 끝나 가던 게릴라 생활의 낭만을 찾아 — 들어간 CIR 「세르테자」에서 공동의 경험을 나눈 자들이었다.
조제 반두넴, 니투 알베스, 미네르바, 루이스 키툼바가 지금의 앙골라 사회(지금만이 아니라…)의 특권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한 층의 표현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두, 발렌팅, 갈리아누는 누구인가? 틀림없이 농민 뿌리에서 나왔지만 다른 계급 조건에 자리 잡게 한 삶을 살아온 바칼로프 같은 자의 계급적 처지는 무엇인가? 시타 발레스, 후이 코엘류, 은잠바, 킹, 또는 작전 본부 노릇을 한 농장의 주인 킨단다 자신은 누구인가? 공직 사회나 노동 부문에서 MPLA 책임자들의 신용을 떨어뜨린 그 모든 분파주의 활동가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이 자들은 모두 극단적 마르크스주의 어휘를 썼지만, 그들의 사생활과 투사로서의 실천은 크게 모자랐다.
그들은 모두 계급투쟁의 문제와 소부르주아지를 청산할 필요성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데 능했지만, 베티뉴가 진술에서 말했듯이 그들 가운데 누구도 봉급이나 주거나 생필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모두가 그토록 미워한다고 말하던 바로 그 소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이었다. 게다가 CPB의 몇몇 협동조합에서는 바로 이 구제 불능의 분파주의자들이 조합원들에게 물자가 분배되는 것을 가로막으면서, 뒤로는 자기와 가족 몫을 챙기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농민층은 분파주의에 물들지 않았다. 종족주의나 지역주의 때문에 가담한 한두 분자를 빼면 말이다.
노동 부문은, (사크마의) 가마나 (인두베의) 주바루 같은 기질의 몇몇 분자와 이런 부류의 몇 안 되는 자들, 그리고 일부 노동조합위원회를 빼면, 모험에 휩쓸리지 않았고 이른바 「일관된 자들」에게 속지도 않았다.
반면 분파주의가 쿠데타의 얼마 안 되는 지지 가운데 많은 부분을 끌어온 곳은 루안다의 룸펜층이었고, 실제로 벌어진 폭력 행동의 일부도 그들에게 기댔다. 그 룸펜층의 상당수는 일반 범죄로 형을 살고 있던 감옥에서 쿠데타 세력이 빼내 온 자들이었다.
분파주의자들은 목적을 이루려고 종족주의, 지역주의, 인종주의를 널리 부추겼다.
분파주의가 패배한 오늘, 사회의 이런 병폐에 맞서는 싸움은 투사적인 바탕 위에서, 그리고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가운데 벌여야 한다.
행동 집단의 투사들은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런 태도가 나타날 때마다, 특히 분파주의의 패배를 특권적 지위를 차지해 다시 기회주의를 마음껏 부릴 기회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나타날 때마다 고발해야 한다.
다른 한편 반동 세력은 지금의 상황을 이용해 고개를 들려 하고 있으며, 이는 모든 투사에게 그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싸움을 요구한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처럼 앙골라도 옛 식민 본국의 이른바 좌파들 때문에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 그들은 앙골라에 왔거나, 식민 본국과 공공연히 맞서며 이미 이곳에 있던 자들이었지만, 독립 뒤에도 앙골라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을 계속 믿지 않았고 「좌익」… 온정주의를 실천했다. 그들은 우리 청년들의 이념적 스승을 자처하며 포르투갈의 정치투쟁 도식을 전했고,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달랐다는 것, 무엇보다 이제 더는 자신을 포르투갈인으로 여길 의무가 없는 인민이 달랐다는 것을 잊었다. 겉으로 좌익을 내세운 그 모든 활동과 더불어, 그것은 이 과정에서 철저히 반동적인 형식과 내용을 띠었다.
제국주의는 이 과정 전체에 어김없이 함께 있었다. 제국주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적당한 때에 자기 궤도로 쉽게 끌려든 자들을 움직여 자기에게만 유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낼 줄 알았다. 앞으로 몇 달이 지나면, 사이비 좌익주의가 제국주의 개입을 가리는 장막 노릇을 한 이 음모에 제국주의가 개입한 구체적 증거들이 드러날 것이다.
MPLA 투사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폭력적 쿠데타를 막아 낼 줄 알았고, 이제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 혁명 과정을 강화할 활동을 강화할 채비를 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간에 사회주의 나라들, 예를 들어 소련, 특히 쿠바 동지들의 국제주의적 우정에 계속 기댈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쿠바 동지들이 있었기에 제국주의의 포위망이 이렇게 만들어진 상황을 이용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들은 한 고위 책임자의 우정 어린 손을 통해 연대의 뜻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분파주의가 치명상을 입은 지금, MPLA 투사들에게 남은 일은 그것에 마지막 일격을 가해, 운동의 조직화와 국가의 조직화라는 우선 과업으로 재빨리 넘어가는 것이다.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MPLA의 구조를 재빨리 다시 세울 역동적인 과정을 일으킬 막중한 책임이 행동 집단과 활동가들에게 지워져 있다.
분파주의의 말잔치를 청산한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이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에 대한 학습을 진지하게 심화하여 투사들의 정치적·이념적 수준을 끊임없이 높여야 한다.
분파주의 분자들을 숙정하는 캠페인, 그리고 일터 차원에서 새 행동 집단을 조직하는 일과 나란히, 우리는 대회 준비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지금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당 창건의 튼튼한 토대를 놓을 수 있도록 학습을 계획할 것이다.
학습을 계획할 때 우리는 MPLA의 기본 문서들, 특히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문서들과 대통령 동지의 연설에 담긴 지침을 통해 MPLA의 역사적 경험에 특별한 중요성을 두어야 한다.
게릴라 시절에도, 포르투갈과 협정을 맺은 뒤의 몇 해 동안에도, 투사들과 인민은 수많은 회의에서 혁명 과정을 분석했고, 투쟁의 새 단계의 기초가 될 교리적 원칙들로 그 과정을 순간순간 풍부하게 했다.
MPLA의 사회주의 선택은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더 명시적으로 표현되었지만, 1956년 선언 이래 MPLA의 모든 문서에 담겨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은 언제나 모든 투사의 관심사였고, 1964년의 첫 CIR은 이미 그것을 교과 과정에 넣었다. 그 학습은 투쟁이 벌어진 각 지역 인민의 가르침, 그리고 도시 지역 노동자들의 가르침으로 언제나 풍부해졌다.
분파주의 때문에 주된 적이 여전히 세계 제국주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 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한 세계 제국주의는 앙골라와 남부 아프리카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지금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프랑스 독점 이익의 공격성, 그리고 불안정과 불안을 일으키려고 아직도 국경에서 침투를 벌이는 모든 꼭두각시들의 공격성이다.
MPLA 투사들은 인민대중에게 이로운 유일한 발전의 길을 더욱 힘차게 지키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가 다시 확인했듯이, 그 유일한 길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학설에 바탕을 둔 과학적 사회주의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향한 우리 인민의 전진이 편향 없이 이어지도록 보장하려면,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국가 재건의 주요 과업을 실현하는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부를 우리 인민에게 돌려주는 방향으로 이미 먼 길을 걸어왔다. 이 분야에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우리는 객관적 조건에 바탕을 둘 수 없는 정당한 열망 몇 가지만 좇아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다.
농업·공업 생산의 증대, 경영에서 계획과 합리적인 생산성 향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부문의 조직화, 교육과 보건의 조직화, 문맹 퇴치가 앙골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보장할 전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업을 수행할 때 우리는 투사로서, 노동자로서 「주민의 물질생활을 돌보라」는 대통령 동지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운동 안의 단결과, 제3차 전원회의가 다시 확인했듯이 노동계급·농민·애국적 소부르주아지·혁명적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우리 인민 안의 단결을 굳힐 것이다.
대통령 동지는 노동계급을 그 동맹자들 — 농민, 애국적 소부르주아지, 혁명적 지식인 — 로부터 고립시키는 그릇된 계급투쟁관에 빠지는 경향과 싸워야 한다고 자주 강조해 왔다.
MPLA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노동계급 — 「과학적 사회주의 학설의 정당한 담지자」 — 이 지도적 역할을 맡도록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노동계급이, 이해관계가 국가 재건의 목표와 일치하는 앙골라 사회의 다른 사회 세력들로부터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주의 나라들, 전 세계의 진보 정당들과 우정을 키우면서 우리 인민의 국제주의 정신을 굳건히 해야 한다. 우리는 해방운동들, 특히 나미비아, 짐바브웨, 남아프리카, 티모르, 서사하라의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5월 27일의 쿠데타 기도로 우리 구조는 몇 가지 동요를 겪었고, 이는 즉각적인 주의를 요한다. 운동 전체 차원의 폭넓은 비판·자기비판 운동은 분파주의자들의 술책을 쉽게 해 주었을 약점들을 찾아내고 바로잡게 해 줄 것이다.
대도시의 동네 차원에서 운동의 위원회들은 지금부터 동네 주민들이 (가능하면 CPB를 통해) 기본 문제 몇 가지를 해결하도록 도와야 한다. 특히 생필품 조달, 보건과 위생, 물과 전기 공급, 학교 문제, 그리고 주거 문제(더 어렵기는 하지만 동네 차원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가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몇몇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오로지 대중에게 봉사하는 인민권력을 강화하는 길로 나아갈 것이다.
모든 제국주의자의 비굴한 하수인인 쿠데타 세력의 마지막 거점들과의 싸움은, 투사 저마다가 생필품 조달, 생산, 일터의 조직과 규율이라는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보태는 기여로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노동자 저마다가 생산 수준의 향상이 온 인민에게 이롭게 돌아가도록 자기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두 차례 해방전쟁에서 치른 인민의 희생은 독립의 열매를 거두기를 기대해도 좋을 만한 것이다.
사보타주꾼, 기생충, 투기꾼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해 혁명적 민주독재를 적용하자.
우리의 경계를 더 잘 조직하고, MPLA 안에서 분파주의를, 인민 속에서 분열주의를 되살리려는 어떤 새 시도든 싹부터 잘라 버리자. 일터에서 경계하고, 동네에서 경계하자. 분파주의자들을 고발하는 데 투사들이 보여 준 참여는 모범적이었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일터 차원에서는 어떤 사보타주 행위도 미리 막아야 한다. 동네 차원에서는 주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며, 그러려면 인민경계여단이 CPPA와 협력해 통제 능력과 범죄 대응 능력을 높여야 한다.
모든 동포를 생산에 동원하자. 도시에서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농업 생산에 이바지해야 한다. 커피와 사탕수수 캠페인을 진지하게 지원하자!
정부 활동은 관료주의의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는 실질적으로 혁명 정부가 되어야 하며, 필요할 때는 식민지 시대의 낡은 법과 인민혁명을 가로막는 관료들을 넘어설 줄 알아야 한다.
대중조직들은 서둘러 재편하고, 구조를 강화하고, MPLA의 구호를 실현해야 한다.
모든 기회주의자들과 싸우자. 특히 분파주의자들이 패배했으니 이제 특권적 지위를 찾아 나서겠다고 벌써 생각하고 있는 소부르주아 분자들과 싸우자.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을 앞당기자.
새로 거둔 승리로 굳세어지고, 쓰러진 동지들의 투사다운 모범에 고무되고, 우리의 사회주의 선택이 옳다는 확신을 품고, MPLA와 국가의 조직화, 국가 재건, 대회 개최, 당 창건을 위한 더 힘겹고 결정적인 싸움을 준비하자.
국민 단결 만세!
분파주의자들에게 죽음을!
대회를 향해 전진!
투쟁은 계속된다!
승리는 확실하다!
루안다, 1977년 7월 12일
MPLA 중앙위원회 정치국
[책자 65쪽] 사보타주꾼, 기생충, 투기꾼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해 혁명적 민주독재를 적용하자 — MPLA 정치국, 1977년 7월 12일
주석
- [옮긴이: 원문은 fraccionista(분파주의자), fraccionismo(분파주의). MPLA가 니투 알베스 일파와 그 활동을 가리킨 공식 용어로, 이 사이트의 용어 카드는 「프락시오니즈무」로 적는다. 이 번역에서는 「분파주의」로 옮겼다.] ↩
- [옮긴이: 포르투갈 식민 당국이 앙골라 남부 모사메데스(지금의 나미베) 지방 상니콜라우(São Nicolau)에 두었던 정치범 수용소.] ↩
- [옮긴이: 원문은 1.ª Região(뒤에서는 1.ª Região Político-Militar). MPLA가 해방전쟁 시기에 나눈 정치·군사 지역의 하나로, 루안다 북쪽 뎀부스·남부앙공구 일대의 산림 지대다.] ↩
- [옮긴이: Centro de Instrução Revolucionária(혁명교육센터). MPLA가 해방구에서 투사와 게릴라를 훈련하던 기관.] ↩
- [옮긴이: Departamento de Organização de Massas(대중조직부)의 약칭.] ↩
- [옮긴이: Departamento de Informação e Propaganda(정보선전부)의 약칭으로 보인다.] ↩
- [옮긴이: Organização de Defesa Popular(인민방위조직). 1975~1976년 MPLA가 조직한 민병대.] ↩
- [옮긴이: 1974~1975년 포르투갈 임시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국군운동(MFA) 장교 주제 다 코스타 마르틴스로 보인다. 1975년 11월 25일 사건 뒤 앙골라로 망명했다.] ↩
- [옮긴이: OPVDCA(Organização Provincial de Voluntários e Defesa Civil de Angola)는 식민 당국의 앙골라 지방 자원병·민방위 조직, PIDE는 포르투갈 비밀경찰(국제국가방위경찰)이다.] ↩
- [옮긴이: Juventude do MPLA(MPLA 청년단).] ↩
- [옮긴이: União Nacional dos Trabalhadores Angolanos(앙골라 전국노동자연맹). MPLA 계열 노동조합 중앙 조직.] ↩
- [옮긴이: OMA는 Organização da Mulher Angolana(앙골라여성조직), OPA는 Organização dos Pioneiros Angolanos(앙골라소년단).] ↩
- [옮긴이: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1979년 네투의 뒤를 이어 MPLA와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다.] ↩
- [옮긴이: Estatuto do Funcionalismo Ultramarino. 포르투갈 식민지(해외영토) 공무원의 신분과 복무를 규정한 식민지 시기 법규로, 독립 뒤에도 한동안 쓰였다.] ↩
- [옮긴이: Direcção de Informação e Segurança de Angola(앙골라 정보보안국). 1975년 11월 29일 법령으로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창설되었다.] ↩
- [옮긴이: 원문은 kamanguistas. 캄망가(kamanga)는 앙골라에서 다이아몬드 불법 채굴·밀매를 가리키는 말이다.] ↩
- [옮긴이: 원문 CPPA. 독립 앙골라의 경찰인 앙골라인민경찰대(Corpo de Polícia Popular de Angola)의 약칭이다.] ↩
- [옮긴이: 소련제 BRDM 장갑정찰차.] ↩
- [옮긴이: 이코 카레이라(국방장관), 루시우 라라(정치국원), 루디 키사순다(DISA 국장), 마누엘 페드루 파카비라, 엔히크 산투스(오남부에). 모두 MPLA와 국가의 지도급 인사로, 원문은 별명이나 성만 적었다.] ↩
- [옮긴이: Força Aérea Popular de Angola(앙골라인민공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