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는 카스피해로 흐른다
인물보리스 필냐크
1
강(江)은 지구가 천문학적 상태에서 지질학적 상태로 옮아가던 그 시대에 생겨났다. 규석, 화강암, 점판암, 모래, 점토 — 탈베크[1] — 강, 물의 흐름 — 유량, 활단면(活斷面), 수위, 유로(流路) — 여울과 소(沼)와 모래톱 — 오직 물리의 법칙, 힘과 무게와 중량의 법칙만이 결정권을 쥐는 지극히 엄정한 합법칙성. 자연은 직선운동을 알지 못하며, 모든 강에는 경사의 수평면을 따라 떨어지는 물의 힘으로 두 개의 흐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나는 충돌하며 위로 솟구치는 흐름, 쐐기 모양으로 한데 모여드는 흐름으로, 항로(航路)의 바닥까지 내려가 그 바닥을 깎아내고 깎인 모래를 양옆으로 흩뿌리며 두 번째 흐름으로 변한다. 두 번째 흐름은 갈라지며 바닥을 따라가는 흐름, 항로의 바닥에서 기슭으로 향하는, 더럽혀지고 짓눌려 제 살아 있는 힘을 잃어버린 흐름이다.
수백 년 동안 그러했고, 또 그러하다.
강의 골짜기는 침식에서 생겨난다. 강은 제 탈베크를 따라 언제나 뱀처럼 굽이치며 가지, 결코 곧은 물길로 가는 법이 없으며 — 강바닥이 떨어지는 수위는 계단을 닮았으니 — 여울, 소, 여울, 소 — 강의 폭포는 강의 발원지 쪽으로 물러나며 살아간다. 물리의 법칙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니, 그러지 않았다면 자연 속에서 소와 여울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의 살아 있는 힘이 풀려나 헤아릴 수 없는 힘과 빠르기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리하여 강은 아무것에도 가로막히지 않은 채 제 물을 죄다 쏟아붓고는 사라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곧은 흐름을 알지 못한다. 물은 제게 장애물을 세우기 위하여 제 물길을 부순다.
이 두 흐름, 갈라지며 바닥을 따르는 흐름과 충돌하며 위로 솟는 흐름, 바로 이 둘이 소와 여울의 운명을 결정한다. 강의 굽이가 가파를수록, 오목한 기슭의 휘어짐이 가파를수록, 충돌하는 흐름은 더 빨라지고, 살아 있는 힘은 더 거세지며, 바닥은 더 깊이 깎인다 — 그리하여 여기 소가 생겨난다. 그러나 물은 지쳐, 제 힘을 부수고 나서, 바닥의 고요한 안식으로 쉬러 나온다. 물은 더 이상 바닥을 깎아낼 힘이 없다 — 그리하여 여기 여울이 생겨나, 소와 소 사이에 모래로 누워 있다. 흐름의 힘이 토양보다 세면, 그 힘은 제 힘을 다 써버리고 균형을 맞추려 기슭을 부수고 깎아낸다 — 그리하여 강은 제 살아 있는 흐름을 넓되 낮은 가로의 수면으로 펼치며 얕아진다.
지구가 천문학적 상태에서 지질학적 상태로 옮아가던 그 시대부터 그러했다. 강의 물은 포물선, 쌍곡선, 타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수력공학 기사들은 강의 흐름의 법칙을, 오차란 있을 수 없는 수학의 공식 속에 담아 놓았다.
쥐라기, 데본기, 석탄기의 지층을 파헤치며 기사들은 강의 나이를, 그 젊음과 늙음을 계산해 낸다. 콜롬나 부근 오카강에 던진 나뭇조각은 카스피해로 떠내려가겠지만 — 거기 같은 자리에 던진 돌은, 충돌하는 흐름의 살아 있는 힘이 그 돌보다 세질 때라야 비로소 물에 들려 올라간다. 그런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며, 그래서 돌은 강바닥을 어지럽힌다. 직선운동은 영(零)처럼 추상적이다. 수천 년 전 라(Ra)강이라 불렸던 볼가의 사라토프 시 부근에서, 칠십 년 전 벽돌을 실은 거룻배 한 척이 가라앉아 제 뒤의 흐름을 부수고 — 사라토프 맞은편에 모래로 된 섬 하나를 통째로 낳았으니,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볼가를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물의 움직임은 일정하지 않아, 적은 유량에서 많은 유량으로, 갈수기에서 홍수기로 옮아간다 — 그러나 일단 길을 떠나면, 제 무게에 복종하여 오직 그 무게만으로 움직이는 물은 제 운동을 멈추지 않고 이어간다. 수력공학 기사들은 물의 힘을 안다 — 그리고 그들은 이 힘과 싸울 수 있음을 안다. 결코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결코 그것에 맞서지 않으면서, 다만 — 그것을 조율함으로써.
2
피멘 세르게예비치 폴레티카 교수는 새 강을 건설하는 공사장으로 레닌그라드에서 가고 있었다.
공사는 여러 현(縣)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콜롬나 부근, 오카강과 모스크바강이 합류하는 지점 아래에서는 오카와 모스크바강의 물을 떠받쳐 뒤로 되돌려 보내는 모놀리트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모스크바 부근에서는 모스크바강과 클랴지마강을 잇는 운하가 파이고 있었다. 클랴지마강의 셸코보에서 니즈니까지는 새 물길이 마련되고 있었다. 공사의 목적은, 그 흐름의 길이 콜롬나에서 모스크바강의 옛 물길을 거슬러 모스크바까지, 모스크바 아래 운하를 지나 클랴지마까지,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니즈니까지 클랴지마의 물길을 따라가는 강 하나를 만들어 내는 데 있었다.
공사의 발기인인 폴레티카 교수는 콜롬나로 가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하루를 묵었다 — 고스플란, 최고국민경제회의, 모스크바현 토지부, 교수가 ‘건설 사무소’라 부르는 여러 기관에 들러야 했던 것이다. 폴레티카 교수는 노년에 접어든 사람으로, 동작이 느리고 엄격하며 등이 굽은, 엄격하고 낡은 원칙을 지닌 노인이었으며, 혁명을 살아온 사람치고는 보기 드문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다.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학자이자 위대한 이론가요 위대한 실천가이며 건설자인 피멘 세르게예비치 폴레티카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분열시킨 그 당대회가 열린 날들로부터, 곧 천구백삼년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을 그 볼셰비키적 해석으로 받아들였다. 천구백십칠년에 러시아에는, 교수가 젊은 시절에 그 철학을 받아들였던 바로 그 정의가 찾아왔고,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새로 고쳐 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십사년에도 십사년과 마찬가지로 교수는 옛 정자법으로 글을 썼고, 자신의 강의를 이런 말로 시작했다. —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 러시아 전체에서 두세 십 명 남짓한 이들만이 이십사년에도 십사년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 권리를, 혁명 이전에 그들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자신의 업적으로 얻어냈으니, 그 업적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고 제정 러시아 시절의 온갖 다툼 위로 그들을 들어 올렸다 — 또 그들을 알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 권리는, 어떤 시대에도 변함없이 통하는 것으로 드러난 그들의 인간적 품격으로 더욱 굳건해졌으니, 혁명은 그들의 권리를 확인해 주었다. 폴레티카 교수는 노인답고 교수답게 괴팍한 노인으로, 결코 자동차를 타지 않았고 언제나 프록코트 차림으로 집을 나섰으며, 느림을 진보의 근본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떠받들었고, 이십오년에는 레닌의 편지가 든 두툼한 묶음을 레닌 연구소에 기증했다. 십사년의 학생과 기사들이 교수에게 품었던 존경은, 이십사년의 학생과 기사들이 품은 존경과 똑같은 것이었다.
천구백이십육년부터 러시아의 세월을 물들인 그 의지, 곧 산업 건설은 건설자 폴레티카의 여러 설계를 현실로 옮겨 놓았고, 그는 수많은 공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곳곳을 다녀야 했으나, 피멘 세르게예비치에게 레닌그라드에서 파블롭스크로 가는 채비는 뉴욕으로 가는 채비와 매한가지였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레닌그라드발 급행으로 아침에 모스크바에 도착해 — 삯마차를 타고, 학생 시절부터 늘 묵었고 그를 이름과 부칭으로 알아보는 볼샤야 모스콥스카야 호텔로 갔다. 천구백이십구년에 볼샤야 모스콥스카야는 그랜드 호텔이라 불렸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달걀부침 하나와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들고는 — 역에서 자신을 태워다 주었고 오는 길에 귀리와 직물의 가위[2]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바로 그 삯마차를 타고 — 볼일을 보러 고스플란, 인민토지위원회, 모스크바 토지부로 갔다. 모스크바 토지부에서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모놀리트 공사장에 에드가르 이바노비치 라슬로 기사가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이 말을 듣고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낯빛이 어두워졌고, 눈썹이 엄하게 곤두섰다. 십사년 전 라슬로 기사와 함께 피멘 세르게예비치를 떠나간 것은 그의 아내였던 것이다.
모스크바 토지부에서의 이 대화로부터 이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사건의 사슬이 시작되었다.
사도보-트리움팔나야 거리, 옛 현 젬스트보 청사 건물에 자리한 모스크바 토지부에서, 삯마차는 교수를 골목길로 — 보로트니콥스키, 피메놉스키 골목으로 — 태우고 갔고,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현상의 반복이라는 법칙을 따라 두 번째로 제 아내를 떠올렸다.
이십오 년 전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갓 학교를 마친 콧수염도 나지 않은 기사로서, 스타리 피멘 교회에서 혼례를 올렸다. 그때는 젊음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날, 젊은 기사는 주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래도 엄숙하게 제단 앞에, 그리고 모든 순결한 사랑이 그러하듯 성스러운, 신부(新婦)를 향한 사랑 앞에 서 있었다. 그날로부터 십일 년 뒤 아내는 피멘 세르게예비치를 떠나며 아이들을 데려갔고, 인간의 품격에 관한 상념을 남겨 놓았다. 혼례를 올린 그날 이후로 교수는 이 교회에도, 이 골목에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교수는 스타리 피멘 교회 곁에 마차를 세우라고 일렀다. 교회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모스크바 전당포 경매장.”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교회 마당으로 들어섰다. 현관 계단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나무 위에서는 까마귀들이 울어댔다. 허리띠를 졸라맨 짧은 외투며 현관의 머릿수건들, 스몰렌스크와 수하렙스카야와 타간카 시장의 분명한 사람들이, 점잖고 사무적인 낯으로 따분해하고 있었다. 그 무지렁이들과는 떨어진 곳에, 서로 몹시 닮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장인인지 인텔리겐치아인지 분간이 안 되는, 묘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대략 오스트롭스키의 등장인물들처럼 — 칠피 장화에 칠피 챙이 달린 차양모를 쓰고 검은 긴 자락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다. 자신도 늘 프록코트를 입는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그들의 프록코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위로 보이는 자가 가축 장수 흉내를 내며 교수에게 말했다.
— 네 시에 시작합니다. 마호가니에 관해서라면 별것 없습니다. 불(Boulle) 양식 장식장 하나가 있긴 하지요. 들어가서 직접 보십쇼. 필요하시면 한 벌로 맞춰 드릴 수도 있고요.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채 고맙다 하고는, 화가 나 모자를 홱 잡아당기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는 화재에서 살아남은 물건들을 쌓아 둔 창고 같았다. 벽가에는 장롱이며 옷장이며 소파가 나뒹굴었고 재봉틀도 많았다. 성상(聖像)들은 급히 회칠한 벽에서 사라졌고, 제단은 헐렸으나 제단의 벽화는 남아 있었다. 벽은 공고문과 포스터로 덧발려 있었다. —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방위를 굳건히 하자!” — 바닥의 석판은 진흙 부스러기로 뒤덮여 있었다. 제단에서 남은 계단 앞에는, 군청 소재지 극장에서처럼, 흥정하는 자들을 위한 긴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제단 자체는 찬장과 옷장 밑으로 사라져 버렸으며, 그 위로 사람 키 세 길 높이에, 옷장 두 개를 받침 삼고 그 위 식탁 위에, 의사봉이 놓인 작은 탁자와 경매인을 위한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교회 안, 곧 전당포 안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 그들은 모자도 벗지 않은 채 사무적으로 물건들을 살펴보고는, 옷장이며 침대며 안락의자에, 그 안락의자와 소파와 재봉틀의 번호표와 나란히 내걸린, 경매가 시작될 값들을 큰 소리로 따져대고 있었다. 어스레한 빛이 교회 창의 쇠창살과 먼지를 뚫고 떨어졌다. 교수는 다른 이들을 따라, 쓸데없이 이 물건 저 물건을 옮겨 다녔다. 여기서는 전당포에서 기한 내에 찾아가지 않은 물건을 경매에 부치고 있었다 — 온갖 우연으로 얼룩진 가난을 팔고 있었다. 사라사 천을 씌운 푸프 의자며 니켈 도금한 침대며 보리수로 만든 식탁이, 러시아 가난의 역사를 읽어 주고 있었다. 경매에 온 사람들은 장사치들이었다 — 곧 물건의 옛 주인들은, 제 가난뱅이 살림이 헐값에 넘어가는 그 헐값조차 손에 쥐지 못했던 것이다. 전당포 안은 눅눅하고 잿빛이었으며 도무지 거룩하지 않았다.
여드름투성이 젊은이가 모자를 쓰고 외투 앞을 풀어 헤친 채 손가락을 조끼 주머니에 찌르고 옷장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옷장들 위에 얹은 식탁에서 망치를 두드리며 판에 박힌 가락으로 기운차게 외쳤다.
— 경매 시작합니다! 일 번. 다들 보셨지요?! — 이십! — 더 부르실 분?! — 하나!
손님들은 얼굴을 엄격한 무관심 속에 통조림해 놓고 벤치에 앉았다. — 둘!
— 이십일! — 뒷벤치에서 긴 외투 차림의 사내가 무심하게 외쳤다.
— 왼쪽에서 이십일, — 더 부르실 분!? — 하나! — 여드름투성이 멋쟁이가 기운차게 외쳤다. — 둘!
교수는 교회에서 나왔다. 까마귀들이 나무 위에서 소란을 떨었다. 땅거미가 고요하고 맑게 내려앉고 있었다. 배우 한 패가 보도 대신 깔아 놓은 마당의 널판을 따라 가고 있었으니 — 아마도 스타리 피멘 뒤에 자리 잡은 배우들의 작은 선술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배우들은 한 줄로 걸으며 껄껄 웃었다. 삯을 제대로 못 받은 마부가 큰 소리로 배우들을 나무랐다.
— 내가 전차에서 들은 이야기를 안 했던가? — 앞서 걷던 배우가 말했다. — 전차마다 금주 포스터가 걸려 있잖아. 그중 하나에 이렇게 적혀 있어. “첫 잔은 네가 잡지만, 둘째 잔은 너를 잡는다!” — 내가 전차를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직공이 그 포스터를 한 번, 두 번 읽더니, 한숨을 쉬고 생각에 잠겼다가 진심을 담아 내게 이러는 거야. “그랬으면 좋겠구먼.” 직공이 말했어. “그런 형편이면 시골에 집을 세 채째 올렸을 텐데 — 그런데 이 망할 것을 마시고 또 마셔서, 그년이 나를 잡을 때까지 암송아지 한 마리를 통째로 마셔 없앤단 말이오!” —
배우들은 다시 껄껄 웃었다. 교수는 자기 마부에게로 다가갔다.
이십오 년 전 젊은 기사는 사륜마차를 타고 바로 이 문 앞에 와서 현관 계단 곁에서 신부를 기다렸으니, 제 이름을 지닌 교회에서 혼례를 올리기로 한 것은 조금은 장난기에서였다. 그때 오월은 꽃이 지고 있었고, 혼례 시각에 땅거미가 내렸으며, 바로 이 나무들 위에서 까마귀들이 — 파괴의 넋들이 — 똑같이 울어댔다. 젊은 기사는 그때 명예도 의무도 행복도 알았고, 평생을 두고 제 손에 받아 든 것, 곧 사랑의 기운찬 무게도 알았으며 — 폴레티카 교수의 사랑은 평생 단 하나뿐이었다. 인간의 노동이 그러하듯 인간의 의지와 명예도 늘 벌거벗은 자연과 싸우니 — 바로 그 자연으로 싸우며, 자연으로 자연을, 노동을, 명예를, 의무를 조직한다. 무엇도 인과의 사슬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진리를, 그에게 진리이고 그의 삶에서 늘 확인된 진리를 알고 있었으니 — 사람은 언제나 사람이 치른 그대로 사람에게 갚는다는 것이다. 고결하지 못한 자에게 고결하게 대하기만 하면 — 그 고결하지 못한 자는 일에서뿐 아니라 생각에서까지 정직해지려 애쓰며 —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없이 고결한 사람을 악당으로 셈해 대하면 — 그는 악당으로 응답한다. 폴레티카 교수는 자연과학자였다 — 고결해야 한다는 인간의 규칙을, 그는 이른바 더 높은 도덕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그저 이롭기 때문에도 필요하다고 여겼으니, 인간에게 고결함이란 더 편하고 더 이롭고 더 이성적이기 때문이었고 — 인간의 이성을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무엇보다 높이 받들었다. 교수는 고결함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을 병리로 여겼다. 그런 벗어남이 아내와의 결별이었을까 — 아니면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다른 원인들이었을까? — 생물학, 인간 속에 짐승에게서 남은 무의식과 잠재의식, 본능, 피, 유전이었을까? — 그러나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이 모든 것을 인간 속의 어둠이자 인간에게 걸맞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아내는 깨끗한 여인으로, 실러와 투르게네프의 낭만으로 세상을 한정한 조용한 처녀로 왔다. 그녀의 갈색 눈은 푸른 러시아 하늘처럼 맑아지곤 했다. 그런데 피멘 세르게예비치에게 행복하고 힘찬 것으로 보였던 결혼 두 번째 십 년의 문턱에서 — 집안의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남편의 일이 순조롭고, 그의 명성이 쌓이고, 착한 아이들이 자라던 때에 — 아내는 남편을 떠나 대학생과, 아들의 가정교사와 살림을 차렸고, 떠나면서 아이들을 데려갔다. 이 일은 천구백십사년에 일어났다. 교수는 텅 빈 아내와 아이들의 방을 잠갔다 — 그리고 혁명은 이 얼어붙은 방들을 지나갔을 뿐 교수의 서재로는 들어오지 않았으니,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거기 제 강의와 설계와 도면과 공식들과 더불어 홀로, 제 노동과 더불어 홀로 남았다. 천구백십칠년 이후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무엇 하나 고쳐 세울 필요가 없었고, 운명은 그에게 제 개인사, 제 자존심, 삶과 죽음의 문제들을 풀도록 맡겼으니 — 세월의 연대(聯隊)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할 때 누구나 풀어야 하고,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들이었다. 대학생 라슬로는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발자취를 따라 기사가 되었고, 공동의 일이 이따금 그들을 마주치게 했으나, 그들은 영영 모르는 사이로 남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큰아들은 천구백십구년에 내전의 전선에서 전사했다. 아내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모스크바 토지부에서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라슬로가 모놀리트 공사장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들은 떠나간 것으로 돌아가, 시간에 뒤덮인 십 년 세월 속을 파고들었다. 생각은 즐겁지 않게 쌓여 갔다.
마부는 트베르스카야 거리로 나섰다. 해는 저녁놀 속으로 지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전시 체제로 배치된 사무원 계층이 일터에서 돌아오는 시각이었다. 거리 청소부들이 거리에 물을 뿌렸다. 인민위원부와 신디케이트와 트러스트와 그 밖의 숱한 사무 기관들이 그 시절 모스크바에서 저희 임금표 사람들에게 제복을 입혔더라면 — 그 시각 트베르스카야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포스터처럼 제복으로 가득 찼으리라. 사무원 계층은 전차와 버스로 기어올랐고, 자동차로 으르렁거렸고, 검은 중대를 이루어 보도를 따라 쏟아졌고, 운동용 반바지 차림으로 보도 곁 차도를 종종걸음으로 달렸으며 — 빵을, 소시지를, 보드카를, 양배추 든 겹겹 파이를, 영화표를 사려고 가게 앞에 뱀 같은 줄을 지어 섰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사무원 계층을 좋아하지 않았고, 포스터들은 그를 겁먹게 하여 불안하게 만들었다. 스트라스트나야 광장은 영화와, 이오노프의 책의 집과, 로스타 통신사와, 『저녁 모스크바』와, 『이즈베스티야』의 포스터들로 울부짖었다. 푸시킨 동상은 말이 없었다. 스트라스트나야에서 소비에츠카야까지의 트베르스카야는 베이징을, 천 간판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 중국 도시를 닮았으니 — 출판사, 잡지, 극장, 영화, 복권의 광고가 길을 가로질러 걸려 하늘을 가렸다. 오직 현 집행위원회 광장 위에서만 하늘이 어두워졌고, 칠월답게 지친 금빛 하루가 고요히 저물어 갔다.
삯을 치르며 교수는 마부에게 물었다.
— 그래, 여보게, 결국 삶에 대해서는 뭐라 하겠나? — 골로먀나인가? —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마부에게서 얻어들은 말을 되풀이했다.
— 골로먀나지요, — 마부가 대답했다. — 물론 안경을 안 쓰고 보면 말입니다 — 안경을 쓰면 쥐뿔도 안 보이니까요!
— 아니, 자네가 틀렸네, 여보게, — 교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 삶은 결코 나쁠 수 없네, 그래서는 안 되네.
볼샤야 모스콥스카야 호텔 식당에서는 악단이 연주하고 있었고, 풀 먹인 식탁마다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 건설을 이빨로 맛보겠다고 모스크바로 몰려든 외국인, 기자, 사업가들이 앉아 있었다. 폴레티카는 교수를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는 무심한 웨이터에게 마른 빵과 우유 수프를 주문했다.
현상의 반복은 언제나 예사롭지 않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스타리 피멘 교회를 생각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심부름꾼을 불러, 쪽지를 들려 니콜스카야 거리의 고서상 미하일로프에게 보내, 성 피멘의 전기가 실린 『성인전 월력』을 사 오게 했다.
악단은 그 러시아의 세월에 금지되어 있던 폭스트롯을 듣기 좋게 연주했다. 외국인들은 날마다 저녁 식사를 식당 유흥으로 만들어, 솔랸카와 라스테가이로 이름난 옛 러시아 술집을 유럽-미국식 「팔라스」로 바꿔 놓았다. 외국인 남자들은 회색 여행복 차림으로 느긋했고, 여자들은 무도회 옷차림이었다. 흰옷의 웨이터들은 서두르는 느림으로 위엄을 부렸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배부른 사람들을 둘러보았고, 그에게는 생화가 놓인 이 풀 먹인 식탁들에서 저질러져야 하고 저질러져 온 악행과 고통이 보이는 듯했다 —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왜 자기가 악행을 생각하는지 알지 못했다.
영미계로 보이는 외국인들의 식탁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며 호령이라도 받은 듯 껄껄 웃었다 — 피멘 세르게예비치에게 등을 돌리고 앉은 사람이 재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귀에 이런 말이 들렸다. “돈바스, mal, malheur” — 그는 이를 러시아어로 옮겼다. “악, 불행.” — 재담꾼이 돌아보았고 —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폴토라크 기사를 알아보았다. 폴레티카는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였다. 폴토라크가 한 번 더 돌아보자 — 그의 식탁이 잠잠해졌다. 그러자 폴토라크는 일어나 피멘 세르게예비치 쪽으로 걸어왔고 — 외국인들은 눈으로 그를 좇으며 러시아 학자를 살피다가, 피멘 세르게예비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폴토라크 기사는 인사하며 피멘 세르게예비치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 혼자 계시는군요, 교수님 — 제 친구들, 외국인 기사들이 교수님의 명성을 알고 있어서, 저희 자리로 옮겨 앉아 주신다면 영광으로 여길 겁니다, — 폴토라크가 말했다.
교수는 나른하게 외국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기사에게 대답했다.
— 고맙소, 그분들께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나는 피곤하고, 게다가 우유와 구운 빵만 먹소.
— 네, 네, 교수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말을 들은 듯합니다 — 러시아로서는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 폴토라크 기사가 말하며 교수 곁에 걸터앉았다. — 오늘 공사장으로 가십니까? 저도 시전기궤도국 일로 그리 갑니다.
옷차림으로 폴토라크는 외국인 같았으나 광대뼈는 슬라브인이었다. 그의 푸른 재킷은 남들 눈뿐 아니라 임자의 나리다운 평온을 위해서도 지어진 것이었다. 폴토라크의 가르마는 포마드로 번들거렸다. 그의 집게손가락에서는 옛 세공의 다이아몬드가 번쩍였다. 폴레티카 교수의 눈길은 바로 이 반지에 머물렀다가, 그런 다음에야 기사의 더없이 정중한 얼굴로 옮아갔다. 폴토라크의 눈은 실행하는 눈으로, 영리하고 정확했다 — “그래도 점잖은 사람이라면 지니지 말아야 할 그런 눈이야, — 교수는 생각했다. — 다이아몬드 뒤에 감추는 게 옳지.”
폴토라크 기사는 아주 잘 가꾼 사람이었다 — 그리고 교수는 기사에게서 무엇보다 자기를 놀라게 한 것이 정성껏 관리한 금으로 흉하게 된 이빨들이었음을 떠올렸다. 이 사람은 언제나 모든 건설 위원회에 나타났고, 정부 경제 기관 열 곳에 한꺼번에 근무하고 있었다.
기사가 입을 열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 머리가 희고 털투성이인 거대한 노인, 투덜대는 얼굴, 풀 죽은 안경, 구식 프록코트에 수염 밑으로 나온 흰 나비매듭.
— 물론 아시겠지요, 저희가 방금 그걸로 농담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 알고 보니 돈바스에 물이 모자랍니다, 지금 벌써 모자라요.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공업 중심지의 하나입니다 —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요 — 스탈린그라드에는 트랙터 공장이 건설되고 있는데, 일 년에 노동일이 삼백 일이라면 날마다 트랙터 백서른세 대를 찍어 낼 겁니다 — 돈바스의 엄청난 의의야 저보다 잘 아시겠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모든 설계와 계획을 거슬러 돈바스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돈바스는 물이 말랐고, 거기에는 생산만이 아니라 사람과 온갖 부대 시설에 쓸 물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그림을 그려 봅니다. 물 없는 재앙이 불길하게 돈바스로 밀려오고, 공장들이 지쳐 쓰러져 모래에 묻히고, 모든 것이 햇볕에 타 버리고, 공장들이 숨이 막혀 제 용광로로 헐떡이며 외치는 겁니다 — 물, 물!
— 글쎄, 그렇다 칩시다, — 교수가 말하고는 안경과 텁수룩한 눈썹 사이 틈으로 엄하게 바라보았다.
— 돈바스 급수 설계를 만들고 계신다지요? — 말씀 좀 해 주십시오!
— 방책은 아주 많소, — 교수가 엄하게 대답하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 때가 되면 발표하겠소.
— 저는 여전히 위원회 백 곳에 있습니다, — 기사가 빈정거리듯 말하고는 재빨리 물었다. — 콜롬나에는 오래 계십니까? — 어마어마한 설계지요! — 그러고는 제 말을 끊었다. — 눈여겨보신 적 있습니까, 피멘 세르게예비치, 모든 건설이 언제나 피 위에 서 있다는 것을요. 하기야 살아 있는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피 속에서 태어나고, 피가 멈추기 때문에 죽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납니다. 저는 피가 없었던 건설을 하나도 모릅니다 — 집을 지으면 노동자가 서까래에서 떨어지고, 공장을 지으면 기계가 직공을 갈아 버리고, 철도를 놓으면 기차가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운하를 파면 둑이 터져 노동자들이 물에 잠깁니다. 신비스러운 말입니다만 사실입니다 — 모든 것이 피 위에 있습니다. 사방이 피, 또 피입니다. 그리고 붉은 — 피의 — 혁명의 깃발은 피 흘리는 탄생의 상징이지요. 그런데 피가 사라지면, 그때 돈바스는 물 없는 모래에 묻힐 겁니다. 교수님 공사장에는 아직 피가 없었습니까? — 폴토라크는 조용히 묻고는 입을 다물었다.
— 오늘은 내게 현상이 반복되는 날이오, — 폴레티카가 놀라서 말했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건, 뭐, 별것 아니오.
— 그래서 교수님 공사장에 피는 아직 없었습니까?
— 없었소, — 폴레티카가 대답했다.
— 있을 겁니다, 있을 겁니다! — 폴토라크가 외쳤고, 금으로 흉하게 된 그의 이빨이 바로 그 금으로 표독하게 번쩍였다. 그는 잠시 아주 진지해졌고, 눈이 과녁을 겨누기라도 하듯 재더니 사무적으로 말했다. — 오늘은 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으시군요. 양쪽 다 흥미로웠을 텐데요.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콜롬나에서 뵙지요.
폴토라크 기사는 언제나 빈틈없이 깨끗해 보이는, 다부진 사람이었으나 — 폴레티카 교수에게는 언제나 더럽고 끈적한 느낌을 일으켰다.
폴토라크는 일어나 제 식탁으로 갔다. 외국인들이 폴레티카에게 고개를 숙였다. 웨이터가 구운 빵과 우유 수프를 가져왔다. 교수는 엄하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이들이 하듯 뒤로 묶어 냅킨으로 수염을 가리고 — 천천히 화난 듯 먹기 시작했으니 —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화난 기색이 실은 아주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럽 러시아로 밀려오는 사막에 관한 생각은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것이었고, 그의 궁리는 두세 사람의 동료와 제자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 그런데 폴토라크가 그의 말로 이야기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이를 현상의 반복 탓으로 돌렸다.
외국인들과 유럽인 흉내를 내는 러시아인들의 이 홀에서 교수는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악단이 위층 회랑에서 쿵쾅거렸다. 이 흰 홀에 전깃불이 아주 넉넉하게 켜졌다.
심부름꾼이 팔월의 『성인전 월력』을 가져와 수고비를 받으며 말했다.
— 그 피멘 성인들이 알고 보니 열 분쯤, 어쩌면 더 된다고 합니다요. 다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전화를 드린답니다.
기차 시간까지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제 방에서 『성인전 월력』을 보며 보냈으니, 평생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로 된 건설 서적과 순수 수학 서적의 수학 페이지를 수만, 수십만 장 넘겼듯 그렇게 주의 깊게 넘겼다. 그 순수 수학은 끝이 없고 인간이 알지 못한 것에 맞닿아 있으며, 인간에게 별의 계산으로 운하와 새 강과 공장 기계를 세우고 원자를 가려낼 권리를 주는 수학이었다. 책을 앞에 두면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노인 같지 않았다.
한번은 교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 폴레티카 교수 동무십니까? — 안녕하십니까, 피멘 세르게예비치. 골동품상 미하일로프입니다. 팔월 월력을 보내 드렸고, 다른 것은 아직 못 구했습니다만 구하는 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선 정교회 성인 피멘 몇 분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팔레스타인의 수도 성인으로, 마우리키우스 황제 때 루바 사막에서 수행했습니다. 오백팔십이년에서 육백이년까지입니다. 축일 팔월 이십칠일. 둘째. 대(大) 피멘. 사백오십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집트의 아바입니다. 대 파이시오스와 요한 콜로보스의 동료입니다. 제 죄와 남들의 죄를 두고 늘 울었습니다. 가르침을 주는 말로 둘레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셋째와 넷째. 병 많은 피멘과 수도 성인 피멘으로, 키예프 동굴 수도원의 수도사들입니다. 그들의 유해는 안토니 동굴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중 뒤의 분은 수도 성인 쿠크샤의 벗으로, 예언의 은사를 지녔습니다. 축일 팔월 이십칠일. — 우선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는 며칠 안으로 글로 알려 드리고 책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고서상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교수는 책상으로, 월력으로 돌아왔다. 왜 성인이자 수도 성인인 피멘들이 필요해졌는지 그는 분명히 알지 못했다. 피멘들 뒤로 라슬로 기사가 떠올랐다. 책에 익숙한 학자의 버릇으로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출판자 — 키예프 동굴 수도원을 기억에 넣어 두었다. 키예프는 피멘 세르게예비치의 고향이었고, 김나지움 학생 시절 그는 어둠 속에 흔들리는 초와 등잔의 공포 속으로, 드네프르강 위 동굴의 축축한 서늘함 속으로 자주 달려갔으니, 거기 성골함 속에는 무섭지 않은 성인들의 시신, 유해가 누워 있었다. 동굴의 축축함은 페테르부르크 집의 환한 너른 공간을, 복도를,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올가와 작별한 문턱을 떠올리게 했다.
폴레티카 교수는 슬라브 장식 글자를 읽었다.
“오늘 그대를 무어라 부르리, 피멘이여. 수도자의 본보기요 치유를 스스로 행하는 이요, 절제의 상처로 영혼의 정념을 찌른 이요, 천사들의 시민이자 벗이요, 지극히 높은 대도시의 주민이요, 덕의 이웃이요, 경건한 이들의 버팀이여. 우리 영혼이 구원받도록 기도하소서.”
“분별의 등불이 되어, 믿음으로 그대에게 나아오는 영혼들을 비추고 그들에게 삶의 길을 보이시니, 지혜로운 이여. 그러므로 찬양으로 그대를 기리며, 그대의 백 번째 축일을 올리나이다, 피멘이여, 교부들의 자랑이요 금욕자들의 꾸밈이여. 우리 영혼이 구원받도록 기도하소서.” 월력의 돋을새김 검은 장정 표지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있었다.
교수는 책을 옆으로 치우고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어린 시절, 동굴 수도원의 동굴, 스타리 피멘 교회, 아내, 결혼 생활, 혁명의 십 년, 스타리 피멘 곁의 전당포 — 이 월력은 순진하고 노쇠하고 또 — 죽어 있었다. 삶은 결코 그리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인간 정신의 이 강은 죽었고, 기독교는 끝났다. 거기서는 참으로 모든 것이 피 위에 있었다. 그 피가 러시아에서 질 나쁜 캅카스 카고르 포도주와 체로 친 밀가루의 누룩 없는 빵으로 변했다 해도 말이다. 이십오 년 전 그 시절의 도덕은 교수의 사랑을 축복했고, 이제 전당포의 찬장에서는 응유와 과자를 판다 — 교수이자 건설자인 폴레티카의 봄은 라슬로가 대신했으나, 노동을 교수는 사회주의에 바쳤다. 성에, 사랑에, 피에 — 사람은 누구나 제 삶에서 많은 것을 바친다. 전당포 경매에서는 재봉틀과 수하렙카풍 모던 찬장을 팔고, 긴 외투의 사내들이 그것을 거간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다 —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깨끗해야 한다. “덕의 이웃”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파멸이다 — 그리고 누구나 저마다의 명예를 지녀야 한다. 성 피멘들, 그 죽은 자들은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 안토니 동굴, 키예프 동굴 수도원은 춥고 어둡고 무섭다 — 소년 폴레티카는 동굴에 들어가면 늘 무력해졌고, 모든 것이 쓸모없어졌다 — 거기서는 영원에 맞닿은 등잔과 초가 타올랐고, 초들은 공포와 쓸모없음을 — 이 동굴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의 쓸모없음을 — 확인해 주었다. 삶에서 모든 것이 쓸모없어질 때가 그러하니 — 이것은 병이고 죽음이다. 폴레티카 교수는 영원을 기운과 건설로 바꾸어 놓았다. 인간 생명의 물리 법칙을 파고들어 인간 불멸의 물리적 토대를 쌓던 라자레프 학술원 회원은 인간의 지각이 스무 살에 가장 예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 그렇다 치자. 스무 살까지 얻은 것을 사람은 평생 견주어 본다 — 그리고 견주어 보려면 정직하게 해야 한다 — 물리 법칙과 인간 생활의 건설을 위하여.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과거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냈다. 폴토라크가 떠올랐다. 동굴의 한기 뒤로 사막의 무더위가 다가왔다. 그리고 사막 뒤로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이, 사회주의 건설이 다가왔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창가로 다가갔다. 땅은 어두워져 있었다. 크렘린은 제 탑들을 하늘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고, 별들은 칠월답게 지친 빛으로 하늘에서 빛났으며, 중앙집행위원회 건물 위에서는 붉은 불이 타올랐다. 크렘린 아래에는 천구백이십구년의 모스크바가, 거대한 일들과 구상들의, 거대한 용기와 거대한 긴장의 모스크바가 누워 있었다. 온통 긴장하여, 경련이 일 만큼 긴장하여, 모스크바는 온 소비에트 연방이 그러하듯, 승리하기 위하여 사회주의를 향한 출정의 군대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시절 역사는 걷지 않고 달렸으며, 흐르지 않고 건설되었으니, 온 러시아가 건설되던 것과 같았다. 정말이지, 건설자 직종의 제복이 도입되었더라면 러시아는 군대를 이루어 다녔을 것이다. 또 정말이지, 그해 모스크바는 군영(軍營)의 생활을 살았으니, 병사의 외투처럼 잿빛이고 영웅적인 일상 속에서,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포위 상태의 영웅적인 명령 속에서, 줄지어 늘어선 — 그러나 무섭지는 않은 — 식량 배급의 요새살이 속에서 살았다. 비군사적이던 도시가 요새로 변했고, 도시에는 노인들과 아이들, 역사의 출정에 쓸모없어 거기 매달려 있는 이들만 남았다. 도시는 요새의 과밀 속에 살았다. 요새와 출정에서 늘 그러하듯, 역사를 이끌고 나아가는 빙하와 빙하의 의지 때문에 — 그 빙하 때문에, 그 빙하로부터, 그 빙하 아래로부터, 불만과 불신과 피로와 배신과 오물과 진창과 악취의 눅눅함과 곰팡이가 기어 나왔으니, 요새에서는 쓰레기를 내다 버릴 데가 없기 때문이다. 또 요새에서 흔히 그러하듯, 바로 그 쓰레기가 전쟁에 관해 가장 많은 것을 말했다. 모든 것이 이해할 만했다. 역사란 건설될 때면 바로 그렇게 건설되기 마련이다. 쓰레기는 잊어야 한다. 일찍이 없던 것을 향한 새 길을 닦아야 하니, 그 길을 따라 삶이 나아가도록, 사람들을 역사 속으로 몰아넣어야 하니, 무릇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자갈은, 건설의 자갈을 그러하듯, 지질 속에 파묻어야 한다.
도시와 크렘린은 그 시각 밤의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고, 중앙집행위원회 건물 위에서는 깃발의 붉은 불이 타올랐다. 크렘린에서, 키타이고로드에서, 옛 먀스니츠카야였던 제일오월 거리에서, 그 시각 역사를 사회주의로 밀고 가는 기관들의 유리벽 사무실들이 텅 비어 갔다. 사람의 모스크바는 집들의 비좁음 속으로, 극장으로, 영화관으로, 서커스로, 공원으로, 선술집으로, 맥줏집으로 흘러들어, 전쟁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은 채 — 가부키에 관해, 고리키에 관해, 동청철도에 관해, 그리고 봉급표에 관해, 마리야 이바노브나들과의 밀회에 관해, 인원 감축에 관해, 오늘 자 『석간 모스크바』에 관해 떠들어댔다. — 그래도 좋다. —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자신의 일을 생각했다. 몇 달 뒤면 모스크바 아래로, 오카의 물을 제 안에 받아들인 새롭고 젊은 강이 흐를 것이다.
그, 피멘 폴레티카 교수는, 제 노동과 지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의 의지와 더불어, 노동자들의 힘과 노동으로 이 젊은 강의 설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싸움이었으니, 폴레티카 교수가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방식대로, 인간의 노동이 제 의지로 강을 다시 세우며 그 강으로 요새의 쓰레기를 씻어내고 새로운 노동의 관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강은 역사와 더불어 맑은 물의 빙하가 되어, 군영의 비좁음도, 불만의 피로도, 시간마저도 씻어내야 한다 — 인간의 장수(長壽)를 만들어 내는 것은 라자레프나 보로노프나 슈타이나흐 같은 학자들만이 아니라, 해방된 노동, 곧 사색과 이성과 여가를 위하여 인간을 제게서 풀어 주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어둠을 뚫고 보았다 — 화가들이, 있는 것뿐 아니라 보고자 하는 것까지 볼 줄 알 때 지니는 그런 눈으로 —
봄밤, 강, 강의 너른 펼침, 물 위의 불빛들, 모스크바 아래의 바다 기선들, 화강암 둑. — 물 위에서는 언제나 소리가 유달리 퍼져 나가니, 마치 소리가 물기에 젖는 듯하다 — 교수는 강에서 처녀의 웃음소리를 들었으니, 물기에 젖은 젊은, 콤소몰 단원인 딸의 웃음이었다. 웃음은 젊음과 더불어 영원히 인류의 행복으로 남으리라. 그러나 웃음이 또렷해졌고,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 그것은 이십오 년 전 그때, 올가의 웃음이었다. 천구백이십구년에 러시아에서는, 건설하느라, 사람들이 별로 웃지 않았다. 그래, 그래 — 웃음이 인류의 행복이라면, 긴장으로 이마에 모인 근육은 — 인류의 긍지다. 교수의 텁수룩한 눈썹이 엄격하게 모였다.
교수는 계산서를 청하려 벨을 울렸다.
교수는 수첩에 적어 넣었다.
“사막과의 투쟁 설계에 관하여. 봄철 물에 씻겨 나가는 부식토의 계산, 그것이 바다로 흘러드는 비율.”
3
폴레티카 교수의 기차는 열 시 사십오 분에 떠났다.
역에서는, 시큼한 냄새와 희끄무레한 불빛 속에서, 늘 그렇듯 사람들이 부산을 떨었다. 가스등 불빛 너머로 철길이 따뜻한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가, 어두운 러시아의 공간을 더듬었다. 침목에서는 칠월답게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공간은 중세에서 물러나며 누추함 속에 머물러 있었다. 기차는 완행이었고, 근교의 사람들이 제 가난을 객차로 끌고 들어왔다.
승강장 군중 속에서 폴레티카 교수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를, 그의 제복 모자와 가죽 외투의 어깨를 보았다. 폴토라크는 교수에게서 눈을 숨겨 군중의, 사람들 뒤통수 너머의 어딘가로 돌렸다 — 폴토라크의 눈은 아주 주의 깊게,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 교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폴토라크 기사는 화사한 차림의 여인과 함께 군중 뒤로 사라졌고, 교수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어느 객차에 탔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객차 안, 폴레티카 맞은편 좌석에는, 오늘 스타리 피멘에서 본 그 두 거간꾼이 앉아 있었으니, 긴 자락 프록코트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 검은 모자가 파괴의 영혼인 칠피 부리의 까마귀를 닮은 자들이었다.
손위가 교수에게 고개를 숙여 공손히 말했다.
— 아까 피메놉스키 골목 경매장에서 뵌 듯합니다만?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대답하지 않고, 현상이 어색하게 겹친 탓에, 옆 사람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그러자 그 옆 사람들도 교수를 잊었다. 기차는 철길의 너른 공간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모스크바의 불빛이 아주 빠르게 스러졌다. 들판은 태곳적 같은 모습과 고요로 누웠고, 그 고요가 객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제 가난뱅이 보따리를 머리맡에 쑤셔 넣고 잠들었다. 객차 안에서 코 고는 소리가 일었고, 잠든 사람들의 냄새와 장화 가죽 냄새와 갓 탄 그을음 냄새가 풍겼다. 흐릿한 등불 속의 양초는 객차를 말 마구간으로 바꿔 놓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책을 읽으려고 탁자에 양초를 맞춰 세웠다 — 그러나 차장이 와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서 있다가 양초를 끄라고 일렀으니, 정해지지 않은 자리에서 양초를 켜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객차의 어둠을 들어 반박해 보려 하자 — 차장은 서두르지 않고 다시 설명했다.
— 객차는 책 읽으라고 만든 게 아니라 타고 다니라고 만든 겁니다. 벌금 물지 않으시려거든 끄십쇼.
기차는 러시아의 마을들 사이로 시간을 끌고 가며, 역으로 그 시간을 멈춰 세웠다. 폴레티카는 베개를 머리에 받치고 졸았다. 그의 길동무들, 야로슬라블계 슬라브 혈통이 분명한 이 두 형제는 깨어 있었다. 길동무들은 차양모를 벗었고, 둘 다 한가운데 가르마를 탄 머리였다. 그들은 가는 내내 코냑을 마시며 드문드문 말을 주고받았다. 대략 반 시간마다 손위가 은제 술병집을 열어 먼저 제가 한 잔 들이켜고, 이어 아우에게 따라 주었으며, 아우가 마시면 — 손위는 술병집과 병을 가방에 넣었다 — 아우가 물었다.
— 유리구슬은 사들일까요?
— 반드시, — 손위가 대답했다.
반 시간을 그들은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마시고, 아우가 물었다.
— 자기(瓷器)는 사들일까요?
— 반드시, — 손위가 대답했다.
다시 반 시간이 지나 아우가 또 물었다.
— 이른바 러시아 고블랭은 사들일까요?
— 반드시.
기차는 밤을 끌고 가며, 불빛으로 — 붉은빛, 노란빛, 초록빛 — 그리고 역의 외침으로 시간을 멈춰 세웠다. 객차는 밤의 성스러운 의식 속에서 평화로이 코를 골았다. 창밖에서는 야윈 초승달이 하늘로 먼지를 피워 올렸다. 칠월은 숨 막히는 먼지를 일으켰다. 창밖으로는, 통나무집의 시골 어머니 러시아가 뒤로 던져졌다 — 들판, 숲, 늪, 브론니치와 콜롬나의 땅들, 시골의 미덥잖은 마찻길들. 기차는 달의 이슬 같은 메마름에도 아랑곳없이, 침목 위 제 소음 너머로 먼지 회오리를 일으키며, 메아리로 우르릉거렸다.
비몽사몽 속에서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생각했다. 티무르 시절에 정원과 들판이 꽃피던 그곳이 — 지금은 사막이요 모래요 무더위요 돌이라는 것을, 일찍이 러시아에, 이 콜롬나 땅에 와 있던 타타르인들이 아랄해와 카스피해의 초원에 — 절멸뿐 아니라 몽골의 모래까지 알리는 사자로 왔다는 것을, 아라비아의 사막이 한때는 더없이 풍요롭고 꽃피던 문화와 학문과 종교의 나라였다는 것을 — 이집트의 붉은 모래도 한때는 그처럼 꽃피었다는 것을 — 한데 타타르인들은? 다섯 세기 전, 러시아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는 아주 최근에, 볼가 하류에는 타타르인들의 더없이 풍요로운 도시들이 서 있었고, 아랍과 제노바의 학자들과 노르만의 상인들이 그에 관해 썼다 — 한데 지금 그 도시들은 모래 속에서 제 자취조차 잃어버렸다 — 모래의 물 없는 무더위가 볼가 유역으로 니즈니까지, 돈바스로, 쿠반으로 밀려들었다 — 모래, 무더위, 죽음, 타타르인들의 얼굴을 모래처럼 누렇고 메마르게 만든 그것들이.
— 후기 알렉산드르 양식은 안 사들일까요? — 아우가 물었다.
손위가 대답했다.
— 불가능해.
기차는 동이 트기 한 시간 전, 밤이 먼지로 자욱해지고 푸르스름한 동녘으로 차가워질 무렵 콜롬나에 닿았다. 사회주의를 위한 싸움터인 건설 현장은, 공기마저, 그 무엇까지 다 뜯어고치는 불빛과 소음과 활기로 사방에 누워 있었다 — 그러나 역은 아직 후방의 버려짐 속에 머물러 있었다. 객차에서 내리니 기운이 났다. 폴레티카를 사디코프 기사가 맞았다.
승강장에 — 폴토라크와 그 길동무 여인도, 폴레티카도, 거간꾼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둘레의 침목 너머로는 건설 현장의 어수선한 불빛들이 타올랐으나, 역 현관 너머로, 역의 부속 건물들 너머로 도시 쪽으로는, 텅 빈 광장이 도시 자체를 어둠 속으로 함몰시켰다. 그곳에서는 늙은 개들이 짖었다. 광장의 어둠 속에서 말들이 콧김을 뿜었고, 도시 쪽에서 불어오는 밤은 말의 땀 냄새를 풍겼다.
폴토라크가 말했다.
— 당신도 이 기차였습니까? 객차가 다른 게 유감이군요. 서로 모르는 사이시죠? 나데즈다 안토노브나 사란체바, 여배우입니다. 아, 당신들도 여기 있었군, 골동의 기사들이여? 이쪽은 제 벗이자 납품업자들입니다 — 마호가니 세공·복원가인 파벨, 스테판 표도로비치 베즈데토프 형제이지요.
그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 어이, 마부!
교수를 맞으러 나온 사디코프 기사는, 잠 못 이룬 밤 뒤라 으슬으슬 떨면서도, 피멘 세르게예비치를 정성껏 부축했다. 사디코프의 광대뼈는 흙빛이 돌았고 어깨는 구부정했다. 교수가 건설 현장에 온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농담 삼아 ‘선반에서 온 기사’라 부르던 사디코프 기사는, 이 노인에게 모인 지식을 존경할 줄 알게 된 사람이었다. 노인은 싸움터의 원수(元帥)처럼 기운차게 걸으며 제 가방을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았다. 사디코프는 보고서처럼 무미건조하게 상황을 보고했다. 침목 너머에서 궤도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궤도차는 건설 현장의 불빛 앞이라 유독 새카만 어둠 속을 나아갔다. 협궤가 더듬어 가는 그 어둠 너머에서, 밤일의 쇳소리가 날아들었다. 궤도차는 가로등 불빛 속으로 들어가, 창고의 육중한 짐들 사이를 지나, 흙더미 둑 아래 막사들 곁에 섰고, 궤도차로 불어들던 바람도 궤도차와 함께 멎었다. 사디코프는 둑길을 따라 앞장서 갔으니, 파헤쳐진 흙더미 곁으로, 시멘트 통과 벽돌과 목재와 잡석이 든 도랑을 따라, 가로등 불빛에 오려지고 베인 그 길을 따라, 화강암과 콘크리트가 자연에 맞서고, 땅과 강과 숲이 쇠와 인간의 노동으로 재갈 물린, 싸움의 참호를 지나갔다. 거대한 모놀리트가 가로등의 사슬을 이루며 오카 너머 몇 킬로미터로 뻗어 들어갔다.
교수를 기다린 것은 푹신한 침대, 머리맡 탁자 위의 양초, 잡지 『건설』의 최근 호였다 — 침대 밑 바닥에는 요강 하나가 어렴풋이 소시민의 자취를 풍기고 있었다. 사디코프는 작별 인사를 했다. 창을 열어 둔 방에는 칠월의 밤과, 솔향이 나는 고요, 곧 새 공사장의 경계하는 듯한 고요가 살랑거렸다. 창밖에서는 덤프카의 작은 기관차들이 기적을 울렸고, 준설선들이 일찍이 없던 늪의 새들처럼 콧김을 뿜었으며, 바로 창 밑에서는 야경꾼들이 서로 휘파람을 주고받아 고요와 밤을 도드라지게 했다. 전기는 언제나 생기 넘친다. 숙박소는 전등 불빛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포스터가 붙은 고요한 복도는 솔향을 머금고 있었다. 벽 너머에서는, 일하러, 기계를 조립하러 건설 현장에 온 스웨덴인과 독일인과 미국인들이 잠들어 있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곧장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낡아빠진 작은 가방에서 그는 두툼한 방수포 공책을 꺼냈으니, 가장자리가 붉고, 학생들이 흔히 쓰는 이른바 ‘통합 공책’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 교수는 그 안에, 모래의 무더위에 관한 생각이 숨겨진 수학 공식을 적어 넣었다.
4
……더없이 오래된 러시아의 땅, 오카 유역, 오카강, 모스크바강 — 랴잔 지방, 옛 타타르의 길, 옛 모스크바의 길, 도적의 길 — 무롬, 메랴, 랴잔, 메셰라로부터, 분국(分國) 시대로부터 철도에 이르기까지의 러시아 역사 — 크림 침략과 동란의 세월에 맞선 방어의 기념물, 죽음을 잃어버린 여인 마리나 므니셰크의 마지막 남편이었던 카자크 이반 자루츠키의 기념물 — 리만 대령의 원정 — 그리고 그 이전, 러시아 이전에는 — 사르마트인, 알란인, 핀인, 스키타이인, 석기와 청동기 시대. 예부터의 러시아 풍경이다. 모스크바강은 들판을 지나 오카로 흘러들고, 오카 위로는 소나무가 우거진 구릉의 기슭이, 슈로보와 체르노레치예의 숲들이 펼쳐진다 — 풍경은 음울하다 — 들판, 구릉, 나무, 풀, 돌, 모래, 표석(漂石), 옛이야기 같은 오카의 물, 쥐라기의 시대들. 체르노레치예의 숲에는 — 산불, 늪, 늑대들. — 여름, 유월의 희고 하늘 없는 밤이던 삼 년 전, 이곳에서는, 두 강이 합류했고, 포병 창고로 바뀐 골루트빈 수도원이 말없이 서 있었으며, 콜롬나 공장이 연기를 뿜었고, 러시아의 브뤼헤인 콜롬나가 죽어가고 있었으니, 카잔카 철도가 깔린 날들로부터 죽기 시작한 도시였다 — 카잔카의 침목들이, 오카와 모스크바강을 건너는 다리들이, 소나무가, 모래가, 하늘이, 그리고 여자들이 감자를 심고 풀밭을 베고 가축을 치던 비셀키와 보브레네보 농민들의 노래가 있었으며, 사내들은 콜롬나 기계공장으로 쇠를 두드리러 다녔다.
이곳에서 나라는 옛 러시아, 라세야, 루시와 — 사회주의를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삼 년 전 유월, 이곳 풀밭으로 사람들이 왔으니, 땅을 재고 시추하며, 공간과 미래를 들여다보았고, 쥐라기와 페름기의 시대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강가와 풀밭을 거닐고, 일찍이 유목민들이 그러했을 법하게 모닥불을 피웠다 — 그리하여 이곳에서 역사와 지질을 다시 세우는 사회주의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것이, 보브레네보도 파르펜테보도 아메레보도 세르기옙스카야도 그 밖의 많은 마을도 더는 없으리라는 것이 알려졌으니, 그 땅들이 물 밑으로 잠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브레네보 사람들은 새 터로 옮겨 가야 했다. 사내들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 응하지 않았다 — 그러나 측량기를 든 사람들 뒤로 수천 명이 왔고, 사람들은 싸움에 쓸 자재를 실어 나르며 길과 전초와 보루와 능보(稜堡)를 쌓았으니, 사람들과 더불어 풍요와 활기와 일거리가 왔다 — 그리하여 일 년 뒤 보브레네보 사람들은, 물론 자기들이 찾아온 자들을 속여 넘긴 거라고 여겼다. 찾아온 자들은 보브레네보를 유럽식으로, 모범적인 마을로 새로 옮겨 세워 주겠노라 제안했다 — 아낙들은 보브레네보를 옮기되 있던 그대로 똑같이 세워 달라 요구하며, 새끼줄로 천장과 문과 창과 처마의 너비와 높이를 재어 매듭으로 표시해 두고는, 그 매듭대로 한 치도 틀림없을 것을 요구했다 — 한편 사내들은 꾀를 부려 건설 현장으로 일하러 나갔다. 건설 현장에서는 보브레네보를 ‘두라키노(바보골)’라 별명 붙였다 — 두라키노는 늑대처럼 네 발로 기어 건설 현장에서 호로셰보 숲으로 달아났으나, 호로셰보 마을도 두라키노를 따라 기어갔다 — 한데 두라키노 사람들은 건설 현장에서 집으로 루블을, 새로운 셈속의 잣대를, 책을, 배부름을, 일찍이 없던 일들에 관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끌고 왔다. — 이곳에서는 지질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젊은 강이 건설되고 있었다.
모스크바강, 오카강, 오카 유역. 강은 지질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강은 마을과 역사뿐 아니라 고고학까지 없애고 있었다. 마을들은 새 터로 옮겨 갔다. 기사들은 지반을 시추하고 파헤쳤다. 고고학자들은 수천 년과 작별했다. 고고학자들은 영영 물에 잠길 수십 제곱킬로미터를 자기네 조사대와 발굴로 헤집으며, 원시인의 야영지를, 옛 메셰라의 토성(土城)을, 봉분과 묘지를 찾아 — 선사(先史)를 그러모았다. 가물막이가 오카의 바닥을 드러내자, 고고학자들은 물에 잠겨 있던 세기들을 찾았다.
기사들은, 어느 건설 현장에서나 있기 마련인 그 새것의 탄생이 주는 활기를 잘, 아주 잘 알았다 — 고고학자들은 작별의 활기를 알았다. 피 위에서 일어나는 탄생이라는 신비를 믿어서는 안 되었다. 시골 마을과 콜롬나의 옛것 속에서는 아시아의 아낙 같은 러시아가 결핍과 죽어감의 줄서기로 구걸하며 살았다 — 그러나 이곳 건설 현장에서는, 삼 년 전, 수백 년 전과 마찬가지로 풀밭의 고요가 있던 이곳에서는, 지금 승리의 쇳소리와 소음 너머로 새 삶이, 일의 활기가, 끈질기고 즐거운 노동이, 이성과 풍요가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옛 러시아의 옛이야기들은 두라키노 사람들에게로 물러갔다. 오카, 모스크바, 클랴지마 강의 종단면이, 그 탈베크와 하상(河床)과 지질 기반과 활단면과 유량과 유황(流況)과 그 힘이 — 강에 관한 지식이 주는 모든 것이 계산되었다. 모스크바강의 종단면, 모스크바시와 콜롬나시 부근의 그 수위는 겨우 칠 미터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 곧 모스크바시 아래의 모스크바강은 콜롬나 아래의 모스크바강보다 — 해수면을 기준으로 — 칠 미터 높았다 — 그러니 콜롬나 아래에서 모스크바강을 단 팔 미터만 떠받쳐도 모스크바강의 물은 거꾸로 흐를 것이었다. 콜롬나 아래의 둑 — 모놀리트 — 은 이십오 미터로 세워지고 있었으니, 오카의 물이 모스크바강의 물을 거슬러 몰아붙여 모스크바 쪽으로 흐르게 할 셈이었다. 옛 도시 로스치슬라블 아래, 콜롬나 아래, 브론니치 아래에 거대한 호수들이, 지리를 다시 세우는 새 강의 저수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모놀리트 아래의 굴착 구덩이는, 고고학자들의 세기와도 같은 강바닥을 드러냈다. 고고학자들은 세기들을 떠나보냈다.
5
칠월의 하루가 낮의 황금빛으로, 이슬과 하늘의 가벼운 구름으로 밝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멘들의 경매는 메말라 가도록 어제에 남겨 두었다. 식당에 들기 전에,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혼자서, 슬그머니 옆길로, 상설 수준점(水準點)을 둘러보고 점검하러 갔다 — 폴레티카에게는 한 가지 버릇이 있었으니, 그는 수준점의 질서를 작업 질서의 첫째 징표로 여겼다. 콘크리트로 된 건설 현장의 파수꾼은 풀밭을 더없이 정연하게 지키고 있었다. 건설 현장은 노동으로 일상을 보냈다. 노동자 마을에서는 밤새 켜 둔 확성기들이 요란했다.
일곱 시 무렵 숙박소 식당으로 한 기운찬 노인, 건설자, 일을 만드는 사람이 나왔다. 식당의 십장과 기사들, 가랑이까지 오는 방수 장화를 신은 골똘한 사람들이, 말없이 달걀부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는 싸움터로 떠났다. 집 뒤에서는 노동의 무더위로 굴착기들이 쉭쉭거렸다. 흰 가운을 입은 날랜 하녀들이 그릇을 절그럭거렸다.
식당 벽, 게시판에는 명령의 일상이 걸려 있었다. 교수는 늘 이 일상을 주의 깊게 읽었으니, 그 질서가 수준점만큼이나 중요함을 알아챈 까닭이었다. 만 명의 건설자 군대는, 경찰관에서 라디오 송신탑에 이르기까지, 만 명의 인간 사회가 지니는 모든 것을 제 안에 지니고 있었다. 벽신문은 활판으로 찍은 것이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사디코프를 기다리며 읽기 시작했다.
촌평 기사는 두라키노 사람들에게 바쳐져 있었다. 기사에는 건설 현장에 영화 기사(技士)가 왔다는 소식이 실렸으니 — 본보기 무단결근자를 촬영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본보기 무단결근자 가운데 하나가 그 자리에 사진으로 붙어 있었으니, 한 젊은이가 머리를 구덩이에 처박고 다리와 등을 위로 한 채, 손에 단장을 쥐고 잠들어 있었다. 무단결근자 선발 대회가 공고되어 있었다. 여성부는 멋쟁이 차림의 여자들을 비웃었다. 풍자화는 기사인지 기술자인지 모를, 모표 달린 모자를 쓴 자의 합성된 얼굴을 그렸으니, 열 개의 손으로 포도주 병과 머릿수건 두른 여공과 모자 쓴 아가씨와 수준기를 한꺼번에 끌어안고 있었다. 사설은 건설이란 노동의 해방이며 인간 시간의 해방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창조해 내는 것이라고 썼다. 건설 현장에는 영화관 둘과 ‘푸른 작업복’ 극단과 살아 있는 신문과 열일곱 개의 순회 도서관이 있었다 — 이들은 벽신문으로 제 존재를 알렸다. 두 번째 사설에서는 인부 셋이 여공을 강간한 일과, 골루트빈 역에서 열린 기술자들의 토요일 무도회를 다루며 낙인찍었다. — 기사용 게시판에는 열 개 사회단체의 열 개 회합 소식, 노동자에게 행하는 강연 시간표, 수석기사의 통지, 기술국의 업무 지시, 외국 건설 잡지의 새 호가 들어왔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긴장된 노동, 절도 있는 분주함의 명령이 풍기는 이 기운찬 공기를 들이마시기를 좋아했으니, 그 공기는 모든 것이, 이 숙박소의 솔향 나는 식당처럼, 새것의 냄새를 풍긴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 새 벽, 새 탁자, 새 식탁보, 틀에 황금빛 끈적한 송진이 배어 나온 새 진열장. 여공 강간, 추바롭시나 같은 폭행은 — 추악한 일이었다 — 철도역에서 화장한 타자수들과 벌이는 멍청한 무도회는 — 속물근성이었다 — 이 모든 것은 주된 것, 결정적인 것, 이성적인 것 — 건설 속으로 가라앉았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사디코프 기사를 기다렸다. 기사와 기술자들은 흩어졌고, 교수는 혼자 남았다. 교수는 흰옷 입은 하녀에게 물었다.
— 그런데 내가 신문에서 읽은 게, 어떤 못된 자들이 처녀를…… 욕보였다더군. 대체 어찌 된 일이오?
— 그게 다가 아니에요! — 하녀가 엄하게 대답하며 접시를 골나서 절그럭거렸다. — 우리 데서는 어느 기사의 아내가 목을 맸어요. 혁명이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었으니, 우리가 본때를 보여 줄 거예요. 우리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그러고는 입을 다물어, 더 말하기를 마다하고, 칸막이 너머 큰 솥 쪽으로 가 버렸다.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그녀가 동료에게 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 꼭 가야 해, 그자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거야, 어떻게…… 우리는 조직적으로 항의할 거라고!……
표도르 이바노비치 사디코프는 늦게 왔다. 하녀들은 피멘 세르게예비치에게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은 채, 칸막이 뒤에서 저희끼리 소곤대며 치웠다. 사디코프는 침울하고 사무적이고 지친, 그러나 활동적인 모습으로 왔으니, 장화는 복사뼈까지 갓 묻은 진흙으로 들러붙었고, 이마는 햇볕에 젖었으며, 모자챙 자국으로 이마가 그을음에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이 기사는 건설 현장의 수석기사였다 — 그러나 사디코프는 수석기사다워 보이지도, 원수다워 보이지도 않았으니, 선반에서 온 기사였다. 수석기사들은 수만 명의 사람을, 수백만 톤의 화강암을, 수천만의 돈을, 그리고 두뇌들을 지휘해야 하기에 — 비서들과 보고서로 둘러막힌 사무실 사람들이다 — 사무실은 통통하게 살진 흰빛을 만들어 내고 부드러운 양복을 입힌다 — 그러나 사디코프에게서는 흙냄새가 났고, 풀어 헤친 셔츠 깃 사이로 쇄골이 드러났으며, 그는 장인을 닮았고, 비서들이 그를 따라다니지도 않았다. 폴레티카 교수는 곧은 생각과 곧은 행동을 지닌 이 사람을 좋아했다.
사디코프 기사를 뒤따라, 콜롬나에서 온 폴토라크 기사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 사디코프가 크게, 힘겹게 말했다. — 어제 제 옛 아내가 죽었습니다. 저와 헤어진 뒤 라슬로 기사의 아내가 된 사람이지요. 목을 맸습니다. 오늘이 장례입니다. 곧 사무소로 옮기시면, 보고를 받으실 겁니다. 모두에게 이미 알려 두었습니다.
사디코프는 탁자 곁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탁자 위에 놓았다. 햇볕이 그의 빡빡 깎은 머리 위로 모자를 가지런히 잘라 냈다. 하녀들은 그릇 소리를 멈추었다. 햇볕은 여전히 빛났다.
현상의 반복! 올가는 이제 라슬로의 아내가 아니었다 — 아내, 스타리 피멘, 스타리 피멘의 전당포, 페체르스크의 동굴, 체티미네이 — 이 모든 것이 어제로, 수십 년 속으로, 무(無) 속으로 가 버렸다 — 안토니 동굴의 무력함은 병이다 — 그러나 긴장으로 이마에 모인 근육은 긍지란 말인가?!
피멘 세르게예비치는 제 눈을 눈썹 아래로 숨기고, 긴 의자에 좀 더 단단히 앉았다. 우연의 겹침이, 반복이 체계를 이루어 갔다.
덤프카 열차가 곁을 스치며 기적을 울렸다. 사이렌이 울렸다.
— 어떻게 목을 맸습니까? — 교수가 물었다.
— 복잡한 사연입니다, — 사디코프가 대답했다. — 저는 라슬로를 만나 그가 장례에 올지 물어야 했습니다. 안 온다면 제가 장례에 가야 했으니까요. 이 일을 말씀드리기가 괴롭습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
사디코프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라슬로의 첫 아내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당신의 아내였지요?
— 그렇소, — 피멘 세르게예비치가 대답했다.
— 그분은 콜롬나에서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류보비 피메노브나 폴레티카, 그리고 알리사 라슬로와요.
폴토라크 기사가 놀라 서둘러 물었다.
— 류보비 피메노브나라면, 스물세 살쯤 된 처녀입니까?
— 그렇소, 그 둘은 — 내 아내와 딸이오, — 폴레티카가 말했다.
—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일합니다. 공산당원이지요, — 사디코프가 말했다.
이 대목에서 대화가 끊겼으니, 건설 현장의 경비원이자 미친 눈을 한 사내, 부랑자 이반 오조고프가 식당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하녀들과, 사디코프와, 폴레티카와 황급히 악수하며, 저마다에게 따로 자신을 소개했다. — “천구백이십일년까지의 진정한 공산주의자 이반 오조고프올시다!” — 그는 폴토라크 앞에 멈춰 서서, 경멸을 드러내는 끔찍한 상판을 짓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두 손을 등 뒤로 숨기고 말했다. — “당신하고는 인사하기 싫소, 내 동생하고나 입이나 맞추시오, 파괴자 같으니!” — 그러고는 다시 한번 눈을 흘기고 입술을 멍청하게 늘이더니, 폴레티카에게 돌아서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감격하여 외쳤다.
— 이분이 바로 그 늙은 볼셰비키, 피멘 세르게예비치 폴레티카 교수십니까?! 우리 이야기 좀 나눠야겠습니다!
낮 열 시 반쯤, 폴레티카 교수와 사디코프 기사는 건설 현장을 둘러보러 사무소를 나섰다.
작업은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모스크바강과 오카강이 아득한 옛날부터 흐르던 풀밭에서 만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 밤낮으로 작업에 매달려서. 칠천 명의 흙일꾼, 손수레꾼 사내와 아낙, 석공, 목수, 칠장이, 소목장이, 광부 따위의 노동자들이 기계와 나란히 자연을 파헤치고 다시 세웠다. 러시아제 ‘나미’ 자동차가 사디코프와 폴레티카를 모놀리트로 데려갔으니, 폴레티카는 모놀리트가 지질 속으로 박혀 드는 그 자리, 곧 어깨와 잠금부가 어떻게 마무리되고 있는지 보고 싶어 했다. 기중기들이 ‘응축된 공기’라 불리는 화강암 줄을 쌓아 올렸다. 수백 명의 손수레꾼 아낙들이 굴착기의 토사 배출관을 대신하여 흙을 실어 날랐다. 밀짚모자를 쓰고 흰 셔츠에 가랑이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십장이 사디코프 기사에게 노동자 ‘한 손’[3]을 더 달라고 설득했고, 기술자의 이가 햇볕 아래 번득여, 모놀리트의 잠금부가 박혀 드는 바로 그 화강암을 깨물 기세였다. 오카는 제 물길을 부수고, 여기서 이 킬로미터 떨어진 우회 운하로 흘렀다. 가물막이에서는 펌프들이 물에 사레들리며 쉭쉭거렸다. 굴착 구덩이는 오카의 바닥을, 모래와 화강암과 조개껍데기를 드러냈다. 거대한 굴착기들이 무게에 삐걱이며 흙을 퍼내고 그 속을 파고들었다. 폴레티카 교수는 화강암 위로 기어 올라가, 눈을 눈썹 아래 숨긴 채 살펴보고 둘레를 둘러보았다. 그 위로는 기중기들이 등을 굽혔고, 그 아래로는 둑의 기슭으로, 굴착 구덩이로 화차의 궤도가 미끄러져 내려갔다. 거대한 굴착기들이 석회암을 깨물었다. 궤도 곁에서는 손수레꾼 아낙들이 일했다. 햇볕 아래 파헤쳐진 흙과 콘크리트의 냄새가 났다. 폴레티카 아래에서, 알록달록한 통치마를 입고 붉은 머릿수건을 두른, 맨발에 소매를 걷어붙인 수백 명의 우람한 처녀와 아낙들이, 하나씩 차례로 판자 위로 손수레를 밀어, 화차에 흙을 쏟아붓고는, 다른 판자를 따라 빈 손수레를 끌고 새 흙을 가지러 갔다.
옛 러시아에 맞서 새 러시아를 위해 싸우는 이 싸움터에, 폴레티카와 사디코프가 원수로 서 있는 이 풍경은, 표트르가 페테르부르크를 걸어가는 세로프의 그림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때 아닌 시각에 기적이 울렸다.
그러자 손수레꾼 아낙들이 기적 소리의 명령에 따라 손수레를 내던졌다. 여자들이 줄을 짓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작업장을 떠나 말없이, 엄숙한 줄을 지어 갔다. 여기서 일 킬로미터 떨어진 콘스탄티놉스카야에서도 알록달록한 여자들의 행렬이 생겨났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가물막이에서 출발했다. 여자들은 도시 쪽으로 떠나갔다.
— 저게 무슨 일이오? — 폴레티카가 물었다.
— 모르겠습니다, — 사디코프가 어리둥절하여 대답했다. 여자들은 말없이, 사무적으로, 병사처럼 떠나갔다.
십장이 자전거를 타고 여자들을 뒤쫓아 가, 앞질러 자전거에서 내렸다. 여자들은 멈추지 않고 말없이 그를 지나쳐 갔다. 십장은 밀짚모자를 뒤통수로 밀어 올린 채 돌아왔다. 여자들은 떠나갔다. 들판으로는 그런 행렬이 몇 줄이나 가고 있었다. 십장은 야전 전화기로 달려갔다.
— 파업인가 뭔가요?! — 십장이 달리며 외치고는 모자를 휘둘렀다.
사디코프는 ‘나미’로 갔다. 폴레티카가 그 뒤를 달려갔다. 기술자는 전화 수화기를 내던지고 ‘나미’로 내달렸다. 제자리 아닌 곳에 내던져진 수화기가 갑자기 삑삑거리다가 이내 끊겨 버렸다. 풀밭을 가로질러, ‘나미’를 마주하며 노동자위원회 위원장이 달려왔다. 때 아닌 기적의 명령에 따라 건설 현장 전체에서 여자들이 일을 던지고 콜롬나로 갔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던 노동자위원회 위원장은, 땀에 흠뻑 젖어 숨을 헐떡이며 땅에 쓰러져, 터질 듯한 심장을 안고 누운 채, 자기도 영문을 모르는 일을 사디코프에게 보고했다. 사무소에서는 모두가 발칵 일어섰고, 전화 수화기들이 갈고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콜롬나 집행위원회로 버스가 떠났고, 집행위원회에서는 들판을 가로질러 오토바이가 내달렸다. 굴착기들이 쉭쉭거리기를 멈추었다. 햇볕은 한낮으로 빛났다.
6
라세야, 루시, 콜롬나 — 지방. — 거리 건너편, 무너져 가는 붉은 벽돌담은 한 모퉁이에서는 망루가 달린 황토색 집에, 다른 모퉁이에서는 교회에 가 닿고, 그다음에는 광장, 다시 교회, 수양버들, 여름 하늘, 자갈길. 돼지 한 마리가 길 한복판 먼지 속에 누워 있고, 모퉁이에서 물장수가 나오는데, 돼지가 비키지 않자 물장수가 날렵하게 겨냥하여 돼지 꼬리 위로 지나가니, 돼지가 비명을 지르며 뒷다리로 곤두섰다. — 한데 쪽문 너머로는 — 푸른 마당, 정원으로 난 울타리, 야생 포도 덩굴이 덮인 테라스, 보리수 아래 푸르스름하게 바랜 작은 집, 반쯤 허물어진 목욕간, 고요, 햇볕, 양지의 개, 해바라기의 작은 해들. 거리 쪽 창 안에는 집주인인 노처녀 자매 카피톨리나와 림마 스쿠드리나가 산다. 정원 쪽 창 안, 테라스 너머에는 폴레티카와 라슬로의 옛 아내가 두 딸과 함께 산다. 류바 폴레티카와 알랴 라슬로다. 목욕간에는, 카피톨리나와 림마의 친동생이자 막내로, 스쿠드린에서 오조고프로 제 성을 바꾼 부랑자 이반 오조고프가 개와 함께 외로이 산다.
자매에 관한 이야기다. 카피톨리나 카르포브나의 방은 더없이 가난하면서도 더없이 정갈하게 치워져 있었으니, 노처녀에게, 처녀 노파에게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 수십 년에 걸쳐 자리 잡힌 모습이었다 — 흰 덮개를 씌운 침대, 작업대, 발재봉틀, 마네킹, 모슬린 커튼.
이 두 노파, 카피톨리나와 림마 카르포브나는 콜롬나시와, 그리고 온 소시민 루시의 대대로 내려온 명예로운 세습 소시민이요, 흰 바느질꾼이자 재봉사였다 — 그러나 본질을 따지자면 그들은 저희 자신 말고는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다. 자매는 한 살 터울로 태어났다. 카피톨리나가 손위였다. 카피톨리나의 삶은 소시민 도덕의 품위로 가득 차 흘렀으니, 그녀의 온 삶이 온 도시의 눈과 온 도시의 도덕의 손바닥 위에서 흘렀고 — 온 도시의 잡것들에게 축복받았다 — 카피톨리나 카르포브나는 명예로운 소시민이었다. 온 도시뿐 아니라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토요일이 철야기도로 흘러갔다는 것을, 그녀의 모든 나날이 블라우스와 셔츠의 가두리 장식과 솔기에, 수천 아르신의 아마포와 무명천에 굽혀졌다는 것을 — 단 한 번도 낯선 이가 그녀에게 입 맞춘 적이 없다는 것을 — 그리고 오직 그녀만이, 삶을 쓸모없게 만드는 그 생각들, 삭아 버린 인생의 포도주가 주는 그 아픔을 알고 있었다 — 한데 삶에는 청춘도, 젊음도, 늦여름도 있었건만 — 단 한 번도 그녀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온 도시의 명예의 본보기로 남았으니, 성(性)의 순결로, 하느님으로, 콜롬나의 도덕으로 제 삶을 삭혀 버린 것이다.
흰 바느질꾼인 림마 카르포브나의 삶은 또 다르게 펼쳐졌다.
이 일은 이십팔 년 전에 일어났고, 그때 삼 년 동안 이어졌으니 — 온 콜롬나의 수치로 삼 년 동안 이어져, 그 수치가 평생토록 남게 되었다. 이 일은 림마의 나이가 서른을 넘어가며 젊음을 잃고 절망을 뿌리던 날들에 일어났다. 콜롬나에는 한 국고(國庫) 관리가, 아마추어 배우가, 미남이자 쓰레기 같은 자가 살고 있었으니, 그는 결혼하여 아이들이 있었고 술꾼이었다. 림마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림마는 제 사랑에 복종하여 온 콜롬나의 도덕을 악마에게나 던져 버렸다. 모든 일이 온 콜롬나의 수치로, 불운하게 벌어졌다. 콜롬나 너머에는 일곱형제 숲이 자랐고, 모스크바강 너머에는 비밀을 지킬 만한 술 취한 강굽이가 놓여 있었다. — 림마는 밤에 ‘접시’라 불리는 작은 가로수길에서 이 사람에게 몸을 내맡겼다 — 한데 사내아이들이 덤불 뒤에서 그들을 엿보다가, 이튿날 아침 야유하고 수치를 알리려 했다. 그리고 수치의 모든 세월 내내, 림마는 집의 지붕 아래에서는 단 한 번도 제 아마추어 배우를 만나지 못했으니, 들판에서, 거리에서, 무너진 크렘린의 마린킨 탑에서, 버려진 거룻배에서, 가을이며 겨울에도 만났다. 마린킨 탑은 마리나 므니셰크의 죽음뿐 아니라 림마 스쿠드리나의 사랑의 죽음까지 제 안에 간직했다. 거리에서 낯선 이들은 림마를 손가락질했고, 아는 이들은 모른 체했다. 누이 카피톨리나조차 그때는 누이 림마를 멀리했다. 국고 관리 배우의 본처는 림마를 때리러 다녔고, 자프루드의 사내녀석들을 — 역시 림마를 때리도록 — 부추겼다 — 그리고 콜롬나는 제 법으로 본처 편에 섰다. 사람들은 림마에게 셔츠를 지을 솔기 장식과 가두리 천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굶주렸다. 림마에게 바르바라라 이름 지은 딸이 태어나, 수치스러운 증거의 본보기요 수치 그 자체가 되었다. 림마에게 둘째 딸 클라브디야가 태어나, 클라브디야가 두 번째 수치의 증거가 되었다. 림마의 여권에는 “자녀 둘 있음”, “처녀”라고 적혀 있었으니 — 혁명 이전의 러시아에서라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그렇게 적혔을 것이다. 국고 관리 아마추어 배우는 림마를 때렸고 술을 빌려 그녀를 사랑했으며, 본처와 함께 콜롬나를 떠났다. 림마는 두 계집아이와 함께, 잔혹한 가난과 수치 속에 홀로 남았으니, 그때 이미 서른을 한참 넘긴 여자였다.
그로부터 다시 삼십 년 가까이 흘러, 시간이 가려 주고 시간이 걸러 주었다 — 그리하여 림마는, 제 삶에 — 있었음을 안다. 행복이 — 그녀의 삶은 가득 차 있고, 채워져 있다. 손위 바르바라는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고, 벌써 두 아이를 두었다. 바르바라의 남편은 제도사로 일한다. 바르바라는 교사로 일한다. 막내 클라브디야는 보육교사로 일한다. 림마 카르포브나는 살림을 꾸리는 안주인이요, 집안의 어머니다. 림마 카르포브나는 제 삶에 행복하다. 늙음이 그녀를 작게 만들었고, 행복이 그녀를 살지게 만들었다.
이제 카피톨리나 카르포브나에게도 — 오직 하나의 삶이 있을 뿐이니, 림마와 바르바라와 클라브디야와 손주들의 삶이다. 성서의 무화과나무 같은 순결도, 온 콜롬나의 명예와 정직함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카피톨리나 카르포브나에게는 제 삶이 없다. 시간이 걸러 주었다. 림마의 생물학적 명예가 카피톨리나의 온 콜롬나적 명예보다 강한 것으로 드러났고, 수치가 행복으로 변했으니, 무릇 무(無)는 — 오직 무로써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한편 림마의 명예는 사랑의 모놀리트로 떠받쳐진 강의 여울과 소처럼 만들어졌다!…… 카피톨리나 카르포브나의 방에는 — 마네킹, 재봉틀, 멈춰 버린 시간.
7
콜롬나 위로 종소리가 죽어 갔다.
러시아의 옛것들, 러시아의 지방, 오카 유역, 숲, 늪, 마을, 수도원, 영지. 소시민의 콜롬나에는 교회 스물일곱, 수도원 넷이 있다. 타루사, 카시라, 로스치슬라블, 콜롬나, 랴잔, 카시모프, 무롬으로 이어지는 도시들의 사슬은 역사의 약효 있는 카밀러 속에 깃든 러시아 분령공국과 골목들의 기억이요, 살인과 세기의 돌 기념비요, 크렘린의 잿빛 돌들이다. 콜롬나의 마린킨 탑에서는 마리나 므니셰크가 죽었다. — 그해 모스크바가 전쟁하는 요새를 닮았다면, 소시민의 콜롬나는 깊숙한 후방의 도시, 조세와 징집과 할당의 도시로, 나라가 전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전쟁을 받아들인 도시였다. 소시민의 도시는 직업 수첩과 줄 서기 속에서 살았고, 상점에는 전선으로 넘어간 물건들이 없었다 — 상점에는 두 줄이 있었으니 직업 수첩을 가진 사람들의 줄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줄이었고, 영화표도 다른 이들에게는 이십오, 사십, 육십 코페이카였으나 수첩 소지자에게는 오, 십, 십오 코페이카였다. 직업 수첩은 콜롬나의 집들에서, 그것이 있는 집이라면, 빵 배급표 곁 첫째 자리에 놓여 있었고, 빵 배급표는, 따라서 빵은, 시민권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왔다 —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빵이 주어지지 않았다. 소시민의 후방은 전쟁 속에서 피 없이 가난해지고, 누레지고, 우레도 대포도 없이 말을 잃는다. 후방의 사람들은 잠잠해지고 많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후방의 집들은 귀가 멀고, 딱총나무에 뒤덮이고, 무너져 내린다. 후방의 줄은 군(郡)의 땅거미처럼 흐리고 느리다. 그때 후방에서는 가축을 부지런히 치고 약탈자들이 약탈한다. 도시에서 파는 술은 사실상 두 가지뿐이었으니, 보드카와 교회 포도주였다. 보드카는 많이 마셨고, 교회 포도주는 그보다 덜했어도 역시 많이 마셨으니 — 그리스도의 피와 따뜻한 물로도 쓰였고 여자들을 위해서도 쓰였다. 궐련은 도시에서 「푸시카」, 한 갑에 십일 코페이카, 그리고 「복스」, 십사 코페이카를 피웠고 — 다른 것은 피우지 않았다. 보드카와 궐련에는 수첩 있는 줄과 수첩 없는 줄이 섰으되, 이제 노동조합의 원칙이 아니라 담배와 술의 원칙을 따랐다. 깊숙한 후방이 콜롬나를 지휘했고 — 콜롬나는 병사들의 후방으로 살았다. 옛 유물 박물관들의 관장은 콜롬나를 실크해트에 소매 넓은 외투, 체크무늬 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녔고, 그리보예도프처럼 구레나룻을 길렀다. 사람들은 그를 그리보예도프라 불렀다. 그의 외투 주머니에는 박물관과 수도원들의 묵직한 열쇠가 들어 있었다. 그리보예도프에게서는 양파와 보드카와 땀 냄새가 났다. 광을 닮은 그의 집에는 박물관의 성서와 백의와 영대와 소매 덮개와 수단과 제의와 성작 덮개와 덮개포와 제단 옷이 — 십삼 세기, 십오 세기, 십칠 세기의 것들이 — 굴러다녔고, 보브레네보 수도원에서 가져온 십칠 세기 작품인, 가시관을 쓴 벌거벗은 나무 그리스도가 먼지 속에 뒹굴었다. 그리보예도프의 서재에는 지주 카라진의 마호가니가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붉은 띠와 흰 윗부분을 지닌 귀족의 자기(瓷器) 모자가 재떨이로 쓰이고 있었다. — 지주 카라진,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는 한때 근위기병 연대에 복무하다가 혁명 이십오 년쯤 전에 퇴역했다. 동료의 도둑질과 난동을 조사하라고 파견된 그가 연대장에게 진실을 보고했는데, 그 진실은 근위기병대 명예 연대장에게 쓸모없는 것이었으니 — 명예 연대장, 곧 황태후 마리야 표도로브나가 그 도둑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진은 전역을 청하고 영지에 들어앉아, 일주일에 한 번 시내로 장을 보러 왔으니, 하인 둘을 거느리고 낡은 큰 마차를 타고 와서는 코스타코프의 가게에서 흰 장갑으로 가리켜 캐비아 반 푼트, 발리크 사분의 삼 푼트, 철갑상어 한 마리를 싸게 했다. 하인 하나가 값을 치르고 다른 하나가 물건을 받았다. 한번은 상인 코스타코프가 나리에게 손을 내밀려 하자, 카라진은 손을 내주지 않고 짧게 말했다. “그럴 것 없다!” — 카라진은 귀족 모자를 쓰고 니콜라이 시대의 외투를 입고 다녔다. 혁명은 카라진을 영지에서 도시로 내쫓았으나 외투와 모자는 남겨 주었다. 줄에 서면 지주는 모자를 쓴 채, 하인들 대신 아내를 제 앞에 세웠다. 카라진은 옛 물건을 팔아 살았다. 그런 일로 그는 박물관지기를 찾아가곤 했다. 박물관지기의 집에서 그는 혁명의 뜻으로 제 영지에서 빼앗긴 가구를 보았고, 그것을 경멸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카라진은 박물관지기의 책상 위에서 귀족 모자 모양의 재떨이를 보고 모자의 띠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 치우시오, — 그가 엄하게 말했다.
— 왜요? — 박물관지기가 물었다.
— 러시아 귀족의 모자는 침 뱉는 그릇이 될 수 없소, — 카라진이 대답했다.
옛것 애호가들은 서로 말다툼을 했다. 카라진은 다시는 박물관지기의 문턱을 넘지 않았다.
콜롬나에는 마구장이 한 사람이 살았으니, 그는 어린 시절 카자크 사동(使童)으로 카라진 밑에서 부릴 때, 굼뜨다는 이유로 카라진이 왼손 단 한 방에 제 이를 일곱 개나 부러뜨린 일을 고맙게도 기억하고 있었다.
8
콜롬나 위로 종소리가 죽어 갔으니, 종들은 광물금속무역 트러스트로 보내려 종루에서 떼어 내고 있었다. 도르래와 통나무와 삼밧줄로, 종루 높은 곳에서 종들을 종각에서 끌어내, 땅 위 높은 데 매달았다가 아래로 내던졌다. 종들이 밧줄을 타고 기어 내려오는 동안, 그것들은 음울한 통곡으로 울부짖었다. 이 통곡은 도시의 음울함 속에서 죽어 갔다. 종들은 으르렁거리고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대포처럼 울부짖으며 땅속으로 두 아르신쯤 파고들었다. 대대로 내려온 러시아의 종들은 동틀 녘부터 울부짖기 시작했다.
9
마호가니 세공·복원가인 파벨, 스테판 표도로비치 베즈데토프 형제는 늘 모스크바의, 옛날에 지보데르카라 불리던 블라디미로-돌고루콥스카야 거리에 살았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도 지보데르카에 살았다. 지보데르카는 — 굽고 좁고 어두운 거리로, 막다른 골목과 대문 통로가 많고, 언제나 우레 같은 짐마차꾼들과 먼지로 메워진, 모스크바-아시아적 거리의 본보기였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옛것의 예술과 무명(無名)에 헌신하고 있었다.
표트르가 러시아에서 시작한 러시아 마호가니 가구의 예술에는 제 나름의 기억이 있었다. 이 농노의 예술에는 기록된 역사가 없으며, 시간은 장인들의 이름을 보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예술은 이름 없는 외톨이들의, 도시의 지하실과 영지의 머슴 오두막 뒷방의, 독한 보드카와 고독의 잔혹함의 일이었다. 자코브와 불이 스승이 되었다. 농노 소년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리로, 빈으로 보내졌다 — 그곳에서 그들은 솜씨를 익혔다. 이윽고 그들은 돌아왔다 — 파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지하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머슴방 뒤의 골방으로 — 그리고 창조했다. 어떤 장인은 수십 년에 걸쳐 무슨 침상이며 화장대며 작은 책상이며 책장 따위를 만들었다 — 일하고, 마시고, 죽으며, 제 예술을 조카들에게 남겼으니, 장인에게는 자식을 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조카는 — 큰아버지의 예술을 이어가거나, 그것을 본떴다. 장인은 죽었으나 물건들은 지주의 영지와 저택에서 살아남아, 그 곁에서 사람들이 사랑하고 침상 위에서 죽었으며, 책상 비밀 서랍에는 은밀한 편지가 간직되었고, 신붓감들은 화장 거울 속에서 제 젊음을 들여다보았으며, 노파들은 제 늙음을 들여다보았다. 옐리자베타, 예카테리나 — 로코코, 바로크, 청동, 곱슬 장식, 작은 꽃들, 자단(紫檀), 장미목, 흑단, 카렐리야 자작, 페르시아 호두나무. 파벨은 — 엄격하다, 파벨은 — 몰타 기사단원이다. 파벨에게는 군대식 프리메이슨의 군대식 선(線)이, 엄격한 안식이 있다 — 마호가니는 짙게 광이 나도록 닦이고, 초록 가죽에, 검은 사자와 그리핀. 알렉산드르 — 앙피르, 고전, 그리스. 니콜라이 — 다시 파벨이로되, 형 알렉산드르의 위대함에 짓눌린 파벨. 그렇게 시대들이 마호가니 위에 새겨졌다. 이 예술을 먹여 살리던 농노제가 무너지자, 농노 장인들을 가구 공장이 대신했다. 그러나 장인들의 조카들은 — 보드카를 통하여 — 살아남았다. 이 장인들은 이제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옛것을 복원한다 — 그러나 그들은 큰아버지들의 솜씨와 전통을 간직했다.
파벨과 스테판 베즈데토프는 위대한 장인들의 조카로 살았으니, 외톨이요 과묵한 사람들이었다 — 그러나 그들은 큰아버지들 외에도 상업학교와 스트로가노프 학교에서 배웠다. 큰아버지들을 기려 그들은 지하실에 살았다.
이런 장인은 가구 공장으로 보낼 수도 없고, 니콜라이 일세 이후에 만들어진 물건을 수리하게 할 수도 없다. 그는 — 골동상이요, 옛것의 복원가다. 그는 모스크바 집의 다락에서, 전당포에서, 군청 소재지 작은 읍에서, 불타지 않은 영지의 헛간에서 — 예카테리나, 파벨, 알렉산드르 양식의 탁자며 삼면경이며 소파를 찾아낼 것이고 — 죽은 물건들의 살아 있는 삶을 되살리려, 제 지하실에서 그것들을 두고 몇 달이나 매만지고, 담배 피우고, 생각하고, 눈으로 가늠할 것이다. 그는 — 복원가요, 물건들의 시간 속, 과거를 바라본다 — 어쩌면 그는 작은 책상의 비밀 서랍에서 누렇게 바랜 편지 묶음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는 이렇게 주장하리라. 이 복원가들은 철학자처럼 제 일을 자랑스러워하고 시인처럼 그것을 사랑한다고 — 그들은 영락없는 괴짜이며, 괴짜답게 저와 똑같은 괴짜 수집가에게 복원한 물건을 팔되, 거래하면서 — 예카테리나 시절의 독수리 문양 술병으로 옮겨 부은 코냑을, 옛 황실의 다이아몬드 그릇 세트에 딸린 술잔으로 함께 마시리라고.
베즈데토프 형제가 역에서 나왔을 때, 콜롬나는 음울한 고요와, 말의 땀내가 밴 원시적인 새벽 전의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가 삯마차로 그들을 앞질러 갔다.
그는 마차를 세우고 포장마차에서 뛰어내려, 파벨 표도로비치에게 말했다.
— 내일 저녁 스쿠드린 댁에서!
근교 모스크바의 칠월 밤은 — 이미 가을 같고, 어둡고, 느리다. 밤의 어둠 속에는 언제나 공간과 냄새의 뒤엉킴이 있으니, 군청 소재지의 소박한 꽃들이 향기를 풍기되 어둠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편 새벽은 빛을 가져와 신비를 없애 버린다. 도시는 동녘의 푸른빛으로 차가워져 갔다. 동녘은 이윽고 보랏빛이 돌았고, 그러자 공간이 부예지기 시작했다. 거리들은 새벽 전 개 짖는 소리 속에, 거리의 자갈 포장 속에, 지난 반세기 동안 죽어 가던 석조 가옥의 관(棺) 속에 잠겨 있었다. 파트니츠키예 문은 크렘린으로 통했다 —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쿨리코보 들판으로 출진하던 바로 그 문이다. 요새의 성벽은 먼지 어린 어스름 속에 이끼처럼 헐벗어, 양딱총나무와 세월에 뒤덮였다. 마리나 므니셰크의 탑은 하늘을 떠받치며, 희끄무레해진 구름에 걸리고, 제 기슭을 안개 속에 숨겼다. 땅이 밤에서 기어 나왔고, 밤은 먼지 어린 동녘으로 스러져 갔다. 풀밭에서 도시로, 새벽으로 안개가 기어들었다.
크렘린 안의 어느 집, 외로운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 집은 박물관지기의 것이었다. 형제는 창가로 다가가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헛간 같은 방은 백의(白衣)며 영대(領帶)며 제의(祭衣)며 사제복으로 어지러웠다. 방 한가운데에는 둘이 있었으니 — 박물관지기가 벌거벗은 사람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벌거벗은 사람은 두 팔을 엇갈려 모은 채 미동도 없이 있었다. 박물관지기가 사분의 일 병에서 보드카 한 잔을 따라 벌거벗은 사람의 입술로 가져갔으나, 그자는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박물관지기가 보드카를 마셨다. 벌거벗은 사람의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얽혀 있었다.
그제야 형제는 알아보았다. 박물관지기는 사람 키만 한 나무로 깎은, 앉아 있는 그리스도의 목상(木像)과 함께 홀로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박물관지기는 나무로 된 그리스도의 입술로 잔을 가져가며 보드카를 마셨다. 박물관지기는 제 그리보예도프식 프록코트를 풀어 헤쳐 털 많은 가슴을 드러냈고, 구레나룻은 부글거렸다. 박물관지기는 한없이 취해 있었다. 그리스도는 무심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가슴에 핏방울이 맺힌 채 두 팔을 엇갈려 모은 나무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저런 개자식들! — 손아래 베즈데토프가 놀라 말했으나 — 그가 누구를 개자식이라 여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리나 므니셰크의 탑이 하늘을 떠받쳤고, 그 기슭을 안개가 끌어안았다. 풀밭 너머, 모스크바강 너머에서 해가 땅 뒤로 나오려 하며 새 하루를 낳았다. 밤은 사무적으로 희미해졌고, 빛은 교회의 종루를, 박물관지기 집 아래의 물방앗간을, 둑과 수양버들을 어둠에서 끌어내, 그것들에게서 흐릿함을 씻어 내고 그것들을 낮의 자리에 세웠다. 박물관지기 집 창의 불빛이 희미해졌다. 밤은 크렘린 토루 아래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물방앗간과 급수탑을 지나 둑을 건너 형제는 자프루디예로 들어갔다. 물방앗간 곁에서는, 새벽이 먼지 어렸음에도, 폐어초(肺魚草)의 축축한 향기가 났다. 새벽 아래 음울한 고요가 식어 갔고, 살아남은 교회 종루들의 새벽 기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에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빛이 어둠에서 공간을 끄집어내 제자리에 세웠다. 안개는 서둘러 사라졌다. 형제의 얼굴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밤에 속아, 창백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 스쿠드린은 자프루디예의 스쿠드린 다리 옆, 제 소유의 기둥 달린 집에 살았다. 형제는 소(沼) 곁에 멈춰 섰고, 새벽 안개 속 둑가에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잠옷 바람에 맨발로, 오른손은 터진 틈으로 내민 채 왼손에 잔가지를 들고 소들을 치고 있었다. 해가 풀밭 뒤에서 제 빛살을 뿜어내, 교회 십자가와 마린킨 탑에 가 부딪쳤다. 단번에 이슬이 차가워졌다. 얼빠진 갈까마귀 떼가 머리 위를 날아갔다. 도시는 종루에서 끌어내려지는 종들로 신음하기 시작했다. 멀리 건설 현장의 발파 작업장에서 산소가 펑 터졌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생각에 잠겨 베즈데토프 형제를 알아채지 못하다가 — 알아보고는 반가워하여 — 끙끙거리고 코를 훌쩍이고 빙긋 웃으며 마중 나와 — 말했다.
— 아아, 손님들이로군…… 내가 자네들 주려고 프롤레타리아 이론을 하나 지어냈다네!…… 왔구먼!……
— 소 치나? — 파벨 베즈데토프가 묻고 킬킬거렸다.
— 치지, — 노인이 대답하며 파벨 표도로비치를 따라 킬킬거렸다.
— 그러게나!
— 그러게 말일세!
— 지키나? 망보나? — 자네, 전사(戰士)로군!……
— 망보지. 그래서 뭐?…… 싸우기도 하지, 암!…… 자네들 주려고, 예브게니 예브게니치 주려고 착상을 하나 지어냈다네.
—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께서 저녁에 들르신다고 전하라 하셨소. 우리와 함께 오셨소…… 한데 그리보예도프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드카를 마시고 있더이다.
— 마시지!
셋이서 가축을 앞세워 몰며, 약초 같은 카밀러가 우거진 거리로 들어섰다. 그들 위로 얼빠진 갈까마귀 떼가, 이미 햇살에 잠긴 높은 하늘에서 날았고, 제비들은 소리 없는 고요 속에 밤을 배웅하며 땅 위 낮게 날았다. 거리는 제비들의 침묵 속에 잠겨, 약초 카밀러가 우거진 채, 텅 비고 노쇠하여, 제정 분국 시절의 모습으로 있었다. 마지막 박쥐가 날아갔다. 잿빛 소들이 카밀러와 빈카의 꽃봉오리를 느릿느릿 뜯었다. 새벽의 고요가 끝나 가고 있었다. 낮이 다가왔다.
— 들리지? 신음하는 소리, — 스쿠드린이 말했다.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황제 시절과 꼭 마찬가지로, 종을 훔쳐 가는군. 이 도시에는 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느라 신경쇠약에 걸린 이가 많다네. 알다시피, 사격장의 미숙한 사수들은, 같은 중대 옆 사람이 쏘려 하면 눈을 질끈 감지 않나. 종이 떨어질 때면 영락없이 대포처럼 쾅 하거든. 그래서 이 도시에는 눈을 질끈 감고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신경쇠약에 빠져 아무것도 못 보고 다니는 이가 많다네. 그리고 — 잘 보게나 — 다른 건 몰라도, 종만은 노동인민위원회도 없이 새벽부터 끌어 내린다 이 말씀이야.
스쿠드린의 집은 늙은 영감처럼 시간에 기댄 채, 기둥의 깨진 송곳니를 햇볕에 들이대고, 흐려진 무지갯빛 유리창으로 바라보며, 구레나룻처럼 라일락에 뒤덮여 있었다. 쪽문은 옆으로 비스듬히 매달려, 지의(地衣)와 이끼의 지친 역사를 이루었다. 쪽문으로 들어가, 기둥 아래 테라스를 지나, 말린 버섯처럼 바싹 마르고 거뭇해진 십팔세기 방들로, 셀러리와 양파 냄새 속, 먼지 낀 응접실의 마호가니로 갔다. 응접실에는 아직 밤이 끼어 있었다. 파벨 베즈데토프는 감식가의 눈과 장인의 손으로 소파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래도 버틸 텐가? 안 팔 거야? 노인은 안절부절못하고 킬킬거리며 우는소리로 대답했다.
— 그래, 그래, 그 말일세. 못 해, 안 돼, 못 해. 내 것은 내 곁에 둬야지, — 그러고는 악의에 차 덧붙였다. — 내가 자네들보다 더 오래 살 거야!…… 한데 어디서 사들일지는, 자네들 줄 목록을 작성해 뒀네.
침실에서 아내 마리야 클리모브나가 나와, 두 손을 앞치마 밑에 감추고 손님들에게 허리 굽혀 절하며 노래하듯 말했다.
— 귀하신 손님들, 어서 오십시오, 오래 기다린 손님들이여……
문 뒤에서 딸 카테리나가 잠옷 바람으로, 맨 장딴지를 드러내고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빼꼼 내다보았다 — 문 뒤에서 손님들에게 무릎 굽혀 인사했고, 나무토막 같은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노인은 펠트 장화를 신었다. 손님들의 눈은 죽은 자의 눈처럼 텅 비었다. 노파는 안부를 거듭 물으며 우유를 권했다. 낮이 왔다. 손님들은 잠을 청하여, 응접실 바닥의 깃털 이불 위에 프록코트는 벗되 바지는 입은 채 함께 누웠다. 집 위로, 거리 위로 떨어지는 종이 울부짖었고, 유리창이 쟁그랑거렸으며, 집이 흔들렸다.
10
1. 곤차리 구역 포사드스카야 거리에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이 집에는 일흔 살 노파인 미시키나 미망인이 살았다. 집은 거리에 대해 모로 서 있었으니, 거리가 생기기 전에 지어진 까닭이었다 — 게다가 이 집은 켠 목재가 아니라 도끼로 다듬은 목재로 지어졌으니, 곧 목수들이 아직 톱을 쓰지 않고 도끼 하나로만 일하던 때에 지어진 것이다 — 그러니까 표트르 시대 이전, 그리고 표트르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그 시절 기준으로는 보야르의 집이었다. 집에는 그 시절부터 — 양치기와 보야르를 그린 십칠세기 그림에 황토와 유약을 입힌 타일로 꾸민, 타일 벽난로와 타일 온돌 침상이 간직되어 있었다.
베즈데토프 형제가 쪽문으로 들어섰다.
태곳적 같은 노파가 돼지 구유 앞 흙벽 가에 앉아 있었다. 돼지가 구유에서 끓는 물에 데친 쐐기풀을 먹고 있었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인사하고 말없이 노파 곁에 앉았다. 노파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반갑고 또 겁먹은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노파는 해진 펠트 장화에 사라사 치마를 입고 페르시아풍 알록달록한 숄을 두르고 있었다.
— 그래, 어떻습니까, 파시겠소? — 파벨 베즈데토프가 물었다.
노파는 두 손을 숄 밑에 감추고 눈을 땅으로, 돼지 쪽으로 떨구었다. 스테판과 파벨 표도로비치는 음울하게 서로를 바라보았고, 스테판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 팔 거라고. 보랏빛 손톱이 달린 뼈만 남은 손으로 노파는 양피지 같은 입가를 훔쳤고, 손이 떨렸다.
— 글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구려, — 노파가 미안한 듯 형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 우리 할아버지도, 증조부도 사셨고, 그 시절은 가물가물 잊혔으니…… 내 셋방 사람이 죽고 나서는, 천국에 가셨겠지만, 정말 견딜 수가 없게 됐다오. 그이가 방값으로 한 달에 삼 루블씩 내고 등유도 사 줬으니, 나한테는 그걸로 족했지. 한데 이 침상에서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남편도, — 어쩌면 좋단 말이오?…… 천국에 가셨겠지, 셋방 사람은 조용했고, 삼 루블 내고 내 손에서 숨을 거뒀다오……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몇 밤이나 잠을 못 잤소…… 파벨 표도로비치가 말했다.
— 벽난로와 침상의 타일은 — 백스무 장이오. 약속대로, 한 장에 이십오 코페이카. 그러니 당장 댁에 삼십 루블이오. 평생 쓸 만하지요. 우리가 미장이를 보내 그것들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벽돌을 놓고 회칠까지 해 드리겠소. 죄다 우리 돈으로.
— 값에 대해선 할 말 없소, — 노파가 말했다. — 값은 후하게 쳐 주시는구려. 우리 데서는 누구도 그런 값을 안 줄 거요…… 게다가 나 말고 누구한테 그게 필요하겠소?…… 부모님만 아니었더라면…… 외로운 몸이라오……
노파는 생각에 잠겼다. 오래 생각했다 — 아니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 그녀의 눈은 보지 못하는 눈이 되어 눈구멍 속으로 꺼져 들었다. 돼지는 쐐기풀을 다 먹고 코로 노파의 펠트 장화를 쿡쿡 찔렀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사무적이고 엄하게 바라보았다. 노파는 다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러고는 미안한 듯 빙긋 웃으며, 미안한 듯 마당과 채마밭의 비뚜름한 울타리들을 둘러보고는 — 미안한 듯 베즈데토프 형제 앞에서 눈을 떨구었다.
— 그럼, 그렇게 합시다,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 노파가 말하며 파벨 표도로비치에게 서투르고 수줍게, 그러나 본격 장사 전통이 요구하는 대로 손을 내밀어 — 옷자락에서 옷자락으로 물건을 넘겼다.
2. 성당 광장의, 한때 제 소유였던 집 반지하에 — 지주 투치코프 일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의 옛 영지는 우유 공장으로 바뀌었다. 이곳 지하에는 — 어른 둘과 아이 여섯이 살았다 — 여자 둘, 곧 노파 투치코바와 그 며느리였으니, 며느리의 남편은 옛 장교로, 이십오년에 결핵으로 죽기 전날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늙은 대령은 십오년에 카르파티아에서 전사했다. 네 아이는 며느리인 올가 파블로브나의 자식이었고 — 나머지 둘은 반혁명죄로 총살된 막내 투치코프의 자식이었다. 올가 파블로브나는 유모로 일하며, 저녁이면 영화관에서 피아노를 쳤다. 서른 살 여자인 그녀는 노파처럼 보였다.
베즈데토프 형제가 왔을 때, 지하실은 모든 가난한 집이 그러하듯 잠겨 있지 않았다. 올가 파블로브나가 그들을 맞았다. 그녀는 들어오라 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 이불 밑에 침구가 없는 것을 낯선 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침대를 가리려, 이른바 식당이라는 데로 앞서 달려갔다. 올가 파블로브나는 알렉산드르 앙피르 양식 마호가니 화장대의 삼면경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형제는 사무적이고 빈틈없었다.
스테판은 의자를 거꾸로 세우고, 소파를 밀어내고, 침대의 매트리스를 들추고, 서랍장의 서랍을 빼내며 — 마호가니를 살폈다. 파벨은 세밀화와 유리구슬과 자기를 들춰 보았다. 젊은 노파 올가 파블로브나에게는 처녀다운 동작의 가벼움과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이 남아 있었다. 복원가들은 방 안에 말없는 난장판을 벌이며, 더러움과 가난을 하느님의 빛 아래로 끌어냈다. 여섯 아이가 예사롭지 않은 것에 호기심을 느껴 어머니 치마로 기어들었고, 손위 둘은 난장판을 거들 채비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부끄러웠고, 손아래 아이들은 치마 곁에서 칭얼대며 어머니가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방해했다.
스테판은 의자 셋과 안락의자 하나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말했다.
— 한 벌이 안 맞소, 짝이 안 차요.
— 무슨 말씀이세요? — 올가 파블로브나가 되물었다! — 그러고는 어쩔 줄 몰라 아이들에게 외쳤다. — 얘들아, 제발 여기서 나가 있으렴! 여긴 너희 있을 데가 아니야, 부탁이야……
— 한 벌이 안 맞소, 짝이 안 차요, — 스테판 표도로비치가 말했다. — 의자가 셋인데 안락의자는 하나뿐이오. 물건은 좋아요, 두말 않겠소, 허나 손을 많이 봐야 하오. 보시다시피 — 눅눅한 데서 사니. 한 벌은 채워야 합니다.
복원가가 입을 열자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 네, — 올가 파블로브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다 있긴 했는데,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떠나올 때 일부는 영지에 남았고, 일부는 농민들 손으로 흩어졌고, 일부는 아이들이 부쉈고, 그러다 — 보시다시피 — 눅눅해서, 헛간으로 옮겨 뒀어요……
— 아마 스물네 시간 안에 나가라 했겠지요? — 스테판 표도로비치가 물었다.
— 네, 우리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밤에 나왔어요. 미리 내다봤지요……
파벨 표도로비치가 대화에 끼어들어 올가 파블로브나에게 물었다.
— 프랑스어하고 영어를 아십니까?
— 오, 네! — 올가 파블로브나가 대답했다. — 할 줄 알아요……
— 이 작은 그림들은 — 부셰와 코즈웨이겠지요?
— 오, 네, — 이 세밀화들은……
파벨 표도로비치가 형을 흘긋 보며 말했다.
— 한 점에 이십오 루블씩 쳐 드려도 되겠지요? 스테판 표도로비치가 동생의 말을 엄히 끊었다.
— 부서진 거라도 좋으니 가구 한 벌을 채워 주시면, 가구를 다 사들이겠소. 농민들한테 있다 하셨으니, 그리로 가 봐도 좋고.
— 오, 네! — 올가 파블로브나가 대답했다. — 절반이라도 채운다면…… 우리 마을까지는 십삼 베르스타니, 거의 산책이나 다름없어요. 절반은 채울 수 있어요. 오늘 마을에 다녀와서 내일 답을 드리지요. 한데 — 몇몇 물건이 부서져 있다면……
— 그건 상관없소, 값을 깎으면 되니. 답을 줄 것도 없이, 바로 오늘 밤 역으로 실어 오십쇼. 거기 우리 포장꾼이 받아 셈하고 꾸려 둘 테니. 소파는 십오 루블, 안락의자는 — 칠 루블 오십, 의자는 한 점에 오 루블. 포장은 우리 쪽에서.
— 오, 네, — 지금 바로 가지요, 우리 마을까지는 십삼 베르스타밖에 안 되니, 거의 산책이에요, 걷는 데는 익숙하답니다…… 지금 곧 가겠어요.
손위 사내아이가 말했다.
— 엄마, 그럼 제 신발 사 주실 거예요?
지하실 창밖으로 황금빛 칠월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3. 지주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카라진은 식당 소파에 누워, 닳을 대로 닳은 다람쥐 가죽 윗옷을 덮고 있었다. 식당은, 그와 그 아내의 서재 겸 침실과 마찬가지로, 우편 마부의 셋집에 차려진 진열실 같았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문턱에 서서 인사했다.
지주는 한참 그들을 뜯어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 나가라, 이 사기꾼들아!…… 여기서 나가!
형제는 꼼짝하지 않았다.
카라진은 얼굴이 시뻘게져 다시 버럭 소리쳤다.
— 내 앞에서 꺼져라, 못된 것들!
고함 소리에 아내가 나왔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카라지나 부인에게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 나딘, 지난달 우리를 속여 먹은 저 비열한 것들을 나는 볼 수가 없소, — 카라진이 아내에게 말했다.
— 알겠어요, 뱌체슬라프, 당신은 서재로 가세요, 제가 저들과 이야기하지요. 아, 당신은 다 아시잖아요, 뱌체슬라프! — 카라지나가 대답했다.
— 저것들이 내 휴식을 깨뜨렸어. 알겠소, 서재로 가리다. 다만, 부디 저 종놈들에게 허물없이 굴지는 마시오.
카라진은 윗옷을 질질 끌며 방을 나갔다. 그 뒤로 베즈데토프 형제가 방에 들어와 다시 한번 공손히 인사했다.
— 댁의 러시아 고블랭을 보여 주시고, 작은 책상의 마지막 값도 말씀해 주십시오, — 파벨 표도로비치가 말했다.
— 앉으시지요, 여러분, — 카라지나가 말했다.
서재 문이 벌컥 열리며 카라진의 머리가 문에서 쑥 나왔다. 카라진은 베즈데토프 형제를 행여 보지 않으려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소리쳤다.
— 나딘, 저들을 앉히지 마시오! 저들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알 턱이 있소? 저들이 고르게 두지 마시오! — 우리가 팔아야겠다 정한 것만 저들에게 파시오. 자기와 시계와 청동만 파시오!
— 우리는 그냥 가도 됩니다, — 파벨 표도로비치가 말했다.
— 아, 잠깐만요, 여러분,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가 진정하게 두세요, 저이는 아주 편찮으세요, — 카라지나가 말하며 힘없이 탁자에 앉았다. — 우리도 몇 가지는 꼭 팔아야 하니까요. 아, 여러분……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부탁이에요, 문 좀 닫으시고, 우리 말은 듣지 마시고, 정원으로 나가 계세요……
야코프 카르포비치 스쿠드린은 자프루디예의 스쿠드린 다리 옆, 제 소유의 집에서 시간을 멈춰 세운 채 살았다. 혁명도 그의 여든다섯 해는 건드리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마 젊음이라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는 늙음으로 제 자신을 속여 넘기려 살았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 그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들 알렉산드르와 셈을 치르듯 삶과 셈을 치렀다. 노인은 비굴하면서도 음흉한, 더없이 추레한 미소 속에 몸을 숨겼다 — 웃을 때면 그의 희끄무레한 눈에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늪에 절은 사시나무 등걸처럼 미끈거리고 옹이진 제 삶의 선을 그어 나갔다. 노인은 모질게 살았고 모질었으니, 그의 아들들이 그에게서 모질게 나온 것과 같았다. 손위 아들 알렉산드르는, 이십세기가 한참 멀던 시절, 아버지가 이미 노인이던 때, 랴잔으로 가는 기선에 급한 편지를 전하라는 심부름을 받았다가 기선을 놓치고는, 아버지에게서 “서둘러라, 못된 놈아!” 하는 말과 함께 따귀를 맞았다. 이 따귀가 집안의 꿀단지에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이었으니 — 사내아이는 열네 살이 되어 가던 참이었다 — 사내아이는 돌아서서 집을 나갔다 — 그러고는 육 년이 지나서야 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학생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이십세기의 문턱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세월 동안 아버지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라 명하며 부모의 축복을 거두고 영영 저주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자랐다. 바로 그 편지에, 아버지 서명 바로 아래 아들은 이렇게 적어 넣었다. — “그깟 당신 축복, 악마에게나 줘 버리쇼!” —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편지를 돌려보냈다. 집을 나간 지 육 년 만에, 햇살 좋은 봄날 알렉산드르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반가운 미소를 띠고 아들을 때리려 손을 치켜든 채 종종걸음으로 마주 나왔다. 아들은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제 손으로 아버지의 손목을 잡았고, 다시 한번 웃었으니, 그 웃음 속에 힘이 즐겁게 빛났고, 아버지의 손은 집게에 물린 꼴이 되었다. 아들은 손목을 살짝 눌러 아버지를 앉히고, 탁자 곁 안락의자에 앉히며 즐겁게 말했다.
—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 어찌 그리 애쓰십니까, 아버님? — 좀 앉으시지요, 아버님.
아버지는 코를 훌쩍이고 꿀꿀거리고 킬킬거렸으며, 얼굴에 모진 선량함이 스쳤다 — 아버지가 아내에게 외쳤다.
— 마류시카, 그래, 히히, 보드카를, 보드카를 가져오너라, 여보, 지하실에서 시원한 걸로, 시원한 안주랑 같이! 아들이 컸구나, 컸어 — 우리한테 복덩이로 왔구나, 이 망할 자식!……
아들은 아버지를 꺾어 누른 첫 번째 존재였다 — 두 번째는 혁명이었다. 그 무렵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 그러나 기사가 된 아들 알렉산드르는 혁명에 부딪혀 거기에 이마를 깨뜨렸으니, 혁명에 복종하지 않고 그 도끼 밑에 서서, 군청 지하실 벽 앞에서 나간 총알에 목숨을 잃었다. 평온하고 모진 눈으로 총알을 맞으며 — 그리고 아버지는 — 아들을 속여 넘겼으니, 아무도, 아들도 혁명도 믿지 않은 채 혁명과 잔꾀를 부린 것이다.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아들들은 이렇게 풀려 나갔다. 기사, 사제, 발레 배우, 의사, 다시 기사 — 그리고 그 가운데 누구도 제 아버지의 집을 마다하지 않았고, 모두가 혁명에 머리를 깨뜨려, 잔꾀의 삶은 노인에게 남겨 두었다. 천구백이십구년에 이르러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손위 손주들은 이미 결혼했으나, 막내이자 외동인 딸은 열아홉 살이 되어 가고 있었다. 노인이 치던 그 과거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들 알렉산드르는 명예의 기억이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탈장을 앓아, 걸을 때면 오른손으로 바짓가랑이 터진 틈을 통해 그 탈장을 받쳐 들었다 — 그의 푸르스름한 두 손은 수종으로 부어올랐다 — 빵에는 공용 소금통에서 소금을 듬뿍 쳐 와지끈와지끈 씹었고, 남은 소금은 아껴 도로 소금통에 부어 넣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사람답게 자는 법을 잊어버려, 한밤중에 깨어 성경을 읽거나 동틀 녘까지 풀밭에서 소를 치며 깨어 있다가, 그러고 나서 한낮까지 잤다. 한낮이면 그는 신문을 읽으러 도서실로 갔다 — 구독료로 돈을 쓰지는 않았다. 지난 십 년 동안 그는 잔꾀를 부렸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수종으로 뚱뚱하고 머리가 온통 세고 벗어졌으며, 말을 꺼낼 채비를 하는 동안 한참 쌕쌕거리고 코를 훌쩍였다. 스쿠드린의 집은 한때 지주 베레이스키의 것이었으니, 그는 농노 해방 뒤 선출직인 치안 중재관 자리에 있다가 가산을 탕진한 자였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개혁 이전의 군대살이를 마치고 베레이스키 밑에서 서기로 일하며 재판소의 농간을 익혔고, 그가 가산을 탕진하자 집을 사들이면서 사설 대리인, 곧 농민 사건을 대신 다니는 자의 자리까지 함께 사들였다. 집은 예카테리나 시절 그대로 손대지 않은 채 서 있었고, 백오십 년의 세월 동안 제 마호가니처럼 거뭇해지고 유리창이 푸르죽죽해졌다. 노인은 모든 것을 기억했다 — 제 농노 마을 지주에서부터, 세바스토폴 징집에 이르기까지. 그는 농노제를 아들 알렉산드르처럼 기억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그는 러시아의 모든 장관과 인민위원의, 제정 러시아 궁정과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 온 모든 대사의, 열강의 모든 외무장관의, 모든 황제와 국왕과 교황과 총리의 이름과 부칭과 성을 다 기억했다 — 노인은 햇수 세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 나는 니콜라이 파블로비치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도,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도 다 살아 넘겼다 —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도 살아 넘길 게야.
집에는 — 노인과 아내 마리야 클리모브나, 그리고 딸 카테리나가 살았다. 집은 마호가니로 예카테리나 시절을 말없이 간직했으되, 혁명 속에서도 노인의 잔꾀 속에서도, 사람들이 예카테리나보다, 아니 표트르보다도 한참 전에 살던 그대로 살아갔다. 노부부는 채마밭으로 살았다. 집 안에 산업에서 온 것이라곤 — 성냥과 등유와 소금, 그것뿐이었다. 성냥과 등유와 소금은 노인이 관리했다. 마리야 클리모브나와 카테리나와 노인은 봄부터 가을까지 양배추와 비트와 순무와 오이와 당근에, 그리고 설탕 대신 쓰는 감초 뿌리에 매달렸다. 밤이면 동틀 녘까지 노인은 소를 쳤으니, 건설 현장 쪽 풀밭으로 나가 맨발에 잠옷 바람으로 안개 속을 헤맸다. 겨울이면 노인은 성경 위에서 깨어 있는 그 시간에만 등불을 켰다 — 다른 시간에는 어머니와 딸이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한낮이면 노인은 도서실로 가, 공산주의 혁명의 이름들과 소식을 제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러면 딸은 클라브생 앞에 앉아 교회 합창단을 위한 카스탈스키의 성가를 익혔다. 노인은 해 질 녘에 집으로 돌아와,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집은 여자들의 속삭임 속으로 함몰했다. 해 질 녘이면 카테리나는 집에서 몰래 빠져나갔다 — 성당 합창 연습으로, 동무들에게로. 아버지는 한밤중에 깨어났다. 노인은 시간을 잃어버려, 죽음을 두려워하기를 그쳤고, 삶을 두려워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가축을 치듯 그는 과거를 쳤다. 어머니와 딸은 노인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교회 말고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며, 죽과 양배춧국을 끓이고, 피로그를 굽고, 우유를 데우고 발효시키고, 묵을 굳히고, 증손주들을 위해 공기놀이 뼈를 챙겨 두고, 방을 치웠다 — 곧 러시아 사람들이 십오세기에도 십칠세기에도 살던 그대로, 십칠세기와 십오세기의 먹을거리로 살아갔다. 마리야 클리모브나는 마르고 늙은 노파로, 마땅히 그러하듯, 성모상 같은 옛 성상들과 더불어 러시아의 시골 마을에 간직되는 그런 러시아 여인의 부류였다. 오십 년 전 혼례를 올린 이튿날, 손가락에 침을 발라 관자놀이 머리를 어떻게 빗어 넘겨야 하는지 아프게 보여 주던 남편의 모진 뜻이 — 마리야 클리모브나의 모든 기쁨을 죽을 때까지 쇠 박은 궤짝 속에 가둬 버린 그 모진 뜻이, 복종으로 그녀를 단련시켜, 그녀를 영영 군말 없고 말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녀의 세계를 쪽문까지로 좁혀 놓았다.
어머니는 딸과 함께 카스탈스키의 시편을 불렀다. 집에는 표트르 이전의 루시가 깃들어 있었다. 노인은 밤마다 성경을 읽었으니, 삶을 두려워하기를 그친 것이다. 아주 드물게, 몇 달에 한 번, 밤의 말 없는 시간에 노인은 아내의 잠자리로 가, 코를 훌쩍이며 속삭였다.
— 마류시카, 그래, 크흠, 음!…… 이게 인생이야, 마류시카, 그렇지!……
그의 손에서 양초가 떨렸고, 그의 눈은 눈물에 젖어 웃었다. 마리야 클리모브나는 겁에 질려 제 몸과 남편에게 성호를 그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불을 껐다.
집 너머로는 혁명이 흘렀고 혁명 후방의 도시가 누워 있었다. 딸 카테리나는 벽 너머에서 잤다. 카테리나는, 끝없는 잠 탓에 멈춰 있는 듯 보이는 작고 누런 실눈 뒤에서 살았다. 부어오른 눈꺼풀 둘레로는 일 년 내내 주근깨가 돋았다. 그녀의 팔다리는 통나무 같았고, 가슴은 스위스 소의 젖통처럼 컸다. 노인은 카테리나를 십칠세기의 순결로, 목욕간 마룻장 밑에 묻어 둔 혼수로 지켰다.
하루를 까마귀들이 흩뜨려 갔다. 해 질 녘 내내 까마귀들이 몹시 부산을 떨며 하루를 훔쳐 갔다. 그리고 해 질 녘은 비가 될 채비를 하며 모여드는 잿빛 구름이라는 물장수 늙은 말들이 실어 갔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종이 울부짖기를 그친 시각에 스쿠드린에게 돌아왔으니, 일을 마친 피로 속에 형제의 눈은 죽은 자의 눈처럼 텅 비었다.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으며 그들은 쉬려고 코냑을 마셨다. 그리고 점심 뒤 — 다시 옷을 벗지 않은 채, 머리맡 바닥에 코냑병을 세워 두고, 바닥 깃털 이불 위에 잠자리에 들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점심을 마치자마자 길 떠날 채비를 했으니, 주머니가 베즈데토프 형제의 루블 지폐와 잔 목록으로 두둑해졌고, 그는 사들인 것 — 예카테리나, 파벨, 알렉산드르 양식의 물건들 — 을 꾸려 역으로 부치도록 일을 시키러, 목수에게, 짐꾼에게, 밧줄과 거적을 구하러 나섰다. 노인은 챙 넓은 펠트 모자를 썼으되 맨발이었다. 일에 바빠 떠나며 그가 말했다.
— 옮기고 꾸리는 일은 저 부랑자들한테 맡겨야 할 텐데 — 얼간이긴 해도 더없이 정직한 사람들이지. 한데 안 돼. 내 동생 이반 카르피치가, 저들의 우두머리 혁명가가 허락을 안 할 거야 — 반혁명 일은 못 하게 하지, 히히!……
땅은 밤을 향해 나아갔다. 저녁부터 가랑비가 흩뿌렸다. 저녁 내내 사람들이 마리야 클리모브나의 창문을 몰래 두드렸다 — 카테리나가 그들에게 나갔다 — 사람들은 가난뱅이답게 알랑거리며 — “댁에 손님들이 묵으면서 온갖 옛 물건을 사들인다던데” 하면서 — 옛 루블과 코페이카 동전, 부서진 사모바르, 책, 촛대, 쌍안경 따위를 내밀었다. 이 후방의 사람들은 옛것의 예술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온통 가난했다. 카테리나는 세월에 푸르죽죽해진 구리 등잔 따위를 든 그들을 집 안에 들이지 않았다 — 손님들이 쉬고 나서 내일 보겠거니 하며 물건을 두고 가라 일렀다.
해 질 녘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칠월이 팔월로 넘어가며 먹구름을 몰고 왔으며, 비가 가을처럼 흩뿌렸다. 마호가니의 예술은, 장인들이며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은 물건들의 예술이다. 그날 밤을 향해, 오카 위 숲으로 올가 파블로브나 투치코바가, 노파의 얼굴과 처녀처럼 젊은 동작을 지닌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해 질 녘은 잿빛 구름에 덧칠해져 스러졌고, 숲은 팔월의 바람으로 술렁였으며, 오카의 너른 펼침은 태곳적처럼 늙어 갔다. 이곳에는 숲과, 구릉과, 풀과 더불어 사는 너른 바람이 불었다. 오카는 이 자리에서 제 물길을 부수었다. 이 여자는, 숲에 대한 처녀다운 두려움 속에서, 한때 농노의 마을이던 곳으로, 농민들에게는 쓸모없는 마호가니 안락의자와 의자를 사러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혼례를 올린 지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마리야 클리모브나는 그날 저녁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 춤추는 것을 보았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마호가니 일로 다니던 길에서 때 아닌 시각에 돌아왔다. 그의 펠트 모자가 한쪽으로, 뒤통수로 비뚜름히 흘러내려 있었다. 쪽문을 지나 백 년 된 제 마당으로 들어서며,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맨발 뒤꿈치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처구니없고 젊디젊은 앙트르샤를 차 댔다. 어느 때는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았고, 어느 때는 후사르처럼 발길질을 했으며, 어느 때는 뒤꿈치를 마주 부딪치며 마주르카로 펄쩍 뛰었으니, 펠트 모자를 짝으로 삼아서였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비도 밤도 보지 못했다 — 그러나 마리야 클리모브나는, 그의 생애 마지막 시간 가운데 하나인 이때, 노인의 얼굴이 행복으로 주름지는 것을 보았다.
하루를 까마귀들이 실어 갔다. 마리나 므니셰크의 탑이 콜롬나 크렘린에서 어둠 속으로 잠겨 들며 말없이 서 있었다. 검은 물장수들이 밤과 비를 흩뿌렸다.
11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도시에서 돌아와 마당에서 한바탕 춤추고 나서, 서둘러 응접실의 복원가들에게로 갔다. 그는 복원가들을 바닥에서 일으켜 서재로 데려갔다. 그는 등 뒤로 문을 꼭 닫았다. 그의 뒤꿈치를 따라 바닥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노인과 함께 볼테르식 서재로 아시아의 콜롬나가, 흙벽이며 쪽문이며 대문가 작은 걸상이며 해바라기씨 껍질이 기어들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서둘러 스탠드 등에 불을 밝혔다.
그리고 노인은 마호가니 세공가들과 소곤대기 시작했다.
— 오늘 건설 현장에서 폭동이 있었네, 아낙들의 파업이지. 열 시 반 정각, 기적 소리에 맞춰, 때 아닌 기적이 울리자, 현장의 여공들이 죄다 일을 던지고 줄지어 도시로 밀려들었네, 가지런하게, 노래도 부르지 않고. 레핀스카야 거리 모퉁이에서 그들은 사디크 마누라의 관과 마주쳐, 관 뒤를 따라가며 장송곡을 불렀고, 많은 아낙이 흰돌고래처럼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네. 파업이라니 — 별꼴을 다 보겠어!
— 다이너마이트는 자네 풀밭에 있나? — 파벨 베즈데토프가 물었다.
— 오늘 밤, 소란을 틈타서 — 아낙들 치마폭 밑에서!……
복원가들은 선 채로, 근심에 잠겨 말없이 들었다. 복원가들의 얼굴이 엄해졌다. 노인은 끝장난 자의 들뜸 속에서 환호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젖은 발꿈치 자국을 따라 들어온 지방, 아시아의 콜롬나는, 이 파업을 어리둥절해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건설 현장의 손수레꾼인 여자들이 욕설과 고함보다 더 무서운 침묵 속에서 마리야 사디코바를 땅에 묻을 때 — 흙투성이가 되고 돌 같은 노동으로 돌처럼 굳어진 수백 명의 여자들이, 러시아 옛것에서 남은 알록달록한 통치마와 앞치마의 말 없는 줄을 이루어, 콜롬나의 옛 거리들을 메우고 관을 따라 무덤까지 갔다. 스쿠드린은 이 행렬 너머로 아들 알렉산드르를, 그의 지하실과 이마에 박힌 총알을, 짓밟힌 제 시간과 품격을, 목욕간 마룻장 밑에 묻어 둔 카테리나의 혼수인 귀고리와 반지를, 제 십팔세기를, 제 늙음을, 그리고 신문이 자기를 비웃던 도서실의 시간들을 보았다 — 이 여자들의 행렬 너머로 노인은 다이너마이트의 연기와 굉음을, 부서진 사람들을, 모든 것을 부수는 물을 들었다 — 그리고 다이너마이트의 연기 너머, 물줄기 너머, 파헤쳐진 화강암 너머에 선 제 자신을 보았다 — 추레한 늙은이인 제 자신을, 베즈데토프 형제를, 폴토라크를, 표트르가 상트피테르부르흐를 걸어가는 세로프의 그림에서와 얼추 비슷하게. 추레한 늙은이가 표트르였다. 추레한 늙은이는 제 자신을 위해, 알렉산드르를 위해, 러시아를 위해, 제 볼테르식 마호가니를 위해 앙갚음하려, 제 종기들을 혁명에 쑤셔 넣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발꿈치를 타고 흘러내린 지방은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 살아 있음을 누리며 살았다.
— 우르릉, 쾅, 히히, 연기와 굉음 너머로 아무도 우리를 알아채지 못할 게야.
스탠드 등이 그을음을 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 기사는 아홉 시 정각에 도착해, 삯마차로 집 앞에 대고는, 서둘러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서 어깨의 물을 털고, 서재로 갔다. 그 시각 카테리나는 응접실에서 클라브생으로 제 반주를 하며 카스탈스키의 성가를 아주 구슬프게 부르고 있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서재는 마호가니에 잠겨 있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책상 위로는 청동에 끼워진 수정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이 군함에 코냑을 부었으니, 군함의 작은 꼭지를 통해 잔으로, 다시 사람들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알코올을 빌려, 이 군함을 타고 볼테르식 공상의 북동풍 속을 알코올로 항해하려는 것이었다. 마호가니 세공가들은 폴토라크를 기려 군함에 코냑을 부었고, 빈틈없이 단추를 채운 프록코트 차림으로 군함 곁에 말없이 서서, 죽은 듯 깜박이지 않는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창밖의 비가 가을밤을 확고히 했다.
그리고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도, 스쿠드린처럼, 이날 저녁에는 예사롭지 않았다. 정연한 유럽식 주의력을 지닌 폴토라크는 이날 저녁 몹시 서둘렀으며, 짧은 대화 속에서 오직 제 자신에게만 귀 기울여, 제 자신을 엿듣고 제 자신을 노렸다. 그는 서두르면서도, 제 시간을 늦추며 그것을 뒤엉키게 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맨발로 폴토라크 둘레를 비둘기처럼 종종거리며, 그에게 들러붙어, 어느 때는 킬킬거리고 흥흥거리며 빤히 잔꾀를 부리다가, 어느 때는 모질고 더없이 평온한 진지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 살아 있었다.
— 들으셨소,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파업 말이오?! — 스쿠드린이 말했다.
— 그래, 들었네 — 항의지.
— 그걸 어찌 보시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어찌 보느냐고? — 나는 오늘 노동자들 생산 회의에 갔었네. 그들은 이제 결정한다네 — 제 봉급을 얼마로 정할지가 아니라 — 나한테 일을 안 넘기기로 결정하고, 기사들 대신 어떻게 일할지를 결정하더군.
— 그래서 아낙들 파업도 — 하나로 맞아떨어지는구려? — 노동자뿐 아니라 아낙들까지 힘을 얻는다? — 스쿠드린이 나직이 묻고는 엄하게 덧붙였다. — 오늘 밤 시작하지, 미룰 것 없네.
— 시작해야지, — 스쿠드린을 따라 손위 베즈데토프가 확언했다.
— 그래, 해야지, — 폴토라크가 맞장구쳤다. — 지금은 물이 없으니, 아주 사소한 것만 망쳐 놓는 셈이지…… — 그러고는 놀란 듯 힘없이 물었다. — 어떻소? 어찌 지내시오, 야코프 카르포비치? — 당신은 — 사람을 죽일 수 있겠소? — 오늘 회의에서 나는, 노동자들의 심리가 이렇게 바뀐 걸 느꼈소, 그들이 — 주인이요, 결정자요, 심판자라고!……
— 어떠냐니 — 어찌 지내느냐고? — 오늘 밤 폭파하지.
그래, 해야지. 지금은 물이 적다고 했지만, 물은 다이너마이트보다 세거든 — 그러고는 다시 폴토라크가 무력에 빠졌다. — 야코프 카르포비치, 당신은 사람을 죽일 수 있소?
— 어떻게 죽이느냐고?
— 어떻게든 상관없소, 다만 — 죽일 수 있소?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살아 있음을 누렸다.
— 죽이느냐고? — 그가 되묻고는 서둘러 킬킬거리며 말했다. — 내가 자네들 줄 생각을 하나 마련해 뒀네, 크흠, 생각을! — 마르크스 이론에 관해서지. 프롤레타리아트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 그저 어리석은 소리요, 머지않아 잊힐 거야, 반드시 잊히지,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한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총살됐소 — 내 아들 셋이 벽 앞에서 죽었고, 오늘은 사람들이 오카강을 떠내려갈 거요. 자, 이게 내 생각이라네, 그래…… 그러니까 혁명도 죄다 헛일이오, 역사의 착오지, 크흠, 우리 등골에 진 사소한 착오야. 두세 세대만 더 지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 먼저 미합중국에서, 영국에서, 독일에서 사라질 거요. 마르크스는 근육노동의 시대에 제 이론을 썼고, 근육노동이 영영 그대로 남으리라 여겼지. 한데 알고 보니, 이제는 기계노동이 근육을 대신하오, 머지않아 기계 곁에는 기사들만 남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기사로 변할 거요. 기계 하나에 사람 다섯, 한데 사무실에는 — 마흔이니, 사무원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겠지. 자, 크흠, 이게 내 생각이라오! 한데 기사는 —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오, 사람이 교양 있을수록 허영스러운 욕구가 줄고, 모두와 물질적으로 똑같이 사는 게 편하니까, 물질의 재화를 고르게 해서 생각을 자유롭게 하는 게 편하거든, 그래, 크흠!…… 착취는 남느냐 물으시겠지? — 남소, 그래, 그건 핏속에 있으니까 — 허나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는 아니오, 아니지. 짐승이라 착취할 수 있는 농사꾼은 — 기계 곁에 못 붙이오, 부숴 버릴 테니, 한데 기계는 수백만 값이거든. 기계는 사람 하나당 오 코페이카 아끼자고 두기엔 너무 비싸오 — 사람이 기계를 알아야 하고, 기계에는 아는 사람이 필요하지 — 그래서 예전 백 명 대신, 단 하나면 되오. 그런 사람은 애지중지해야지! — 노인은 얼간이 흉내를 내며, 흐뭇하게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까딱거리고, 손을 제 탈장에 쑤셔 넣은 채 말했다. — 우리 데서는 말이오 — 장사치와 농사꾼을 견줘 보시오 — 장사치는, 사제처럼, 광대 차림을 하고 으리으리한 집에 살지, 내 왼발이 바라는 게 그거요. 한데 나는 맨발로 다녀도 그 때문에 더 못해지진 않소, 크흠, 그래 — 안 못해지오. 사람은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존중해야 하오. 그러면 죽여선 안 되지.
폴토라크는 제 자신에게 귀 기울이느라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는 코냑을 마셨는데, 아마 생각을 꺼 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가 노인의 말을 끊었다.
— 잠깐, 야코프 카르포비치, 잔꾀 부리지 마시오. 당신은 사람을 죽일 수 있소? — 제 손으로 죽일 수 있느냐 말이오?
— 글쎄올시다, — 스쿠드린이 대답하며 얼버무리듯 킬킬거리고, 꿀꿀거리고, 가래를 돋웠다.
— 아니, 당신은 잘못 알아들었소, 아니, 어쩌면 제대로 알아들었나. — 폴토라크의 이가 모진 금빛으로 번득였다. — 나는 누구를 죽이자는 게 아니오. 원칙으로 말하는 거요 —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
— 그래, 오늘 밤 건설 현장에서 작은 폭파가 일어날 거요…… 글쎄올시다…… 나는 풀밭에서 가축을, 젖 주는 소들을 치오…… 기억하시오, 당신이 말했지, 죄다 피 위에서라고. 작은 폭파로, 두고 보시오, 한쪽으로는 머리들이 폭탄처럼 날아가고, 다른 쪽으로는 다리며 팔이 날아가고, 물이 죄다 악마에게로 쓸어 가겠지. 이것도, 따지고 보면, 살인이오!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그의 눈은 평온해지고 거의 젊어졌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사무적으로 마시며 깜박이지 않는 눈으로 들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가 서재를 서성이고,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비가 들이치기 시작해, 창밖에서 후두두거렸고, 바람이 커튼과 스탠드 등의 불빛을 흔들었다. 볼테르식 서재는 볼테르주의에 잠겨 있었다. 스쿠드린의 발꿈치에서 소파로 흘러내린 아낙 같은 지방이 소파에서 제 몸을 긁적였다.
— 아니, 그 얘기가 아니오, — 폴토라크가 외쳤고, 다시 그의 이가 번득였다. — 제 손으로 죽이는 것, 목 졸라 죽이지도, 쏴 죽이지도, 독을 먹이지도 않고 — 죽이는 것, 피 한 방울 없이도.
— 어떤 이는 되고, 어떤 이는 — 안 되지.
— 누구는 — 되고? 누구는 — 안 되오?
— 바로 우리 넷은 되지.
— 넷이 — 뭐가?
— 죽일 수 있다네.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손을 탈장에서 빼내고 똑바로 섰다. 영영 흐릿한 그의 눈이 똑바로, 모질게 바라보았다. 그는 꿀꿀거림도 킬킬거림도 없이 말했으니, 그의 쉰 저음이 단단해졌다 — 노인은 살아 있었다.
— 어째서요? — 폴토라크가 외쳤다.
— 우리가 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오, 아주 간단하지,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우리는 죄다 알고 죄다 할 수 있소. —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킬킬거리고 다시 진지해졌다. — 나는 양심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지 않소.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아. 그까짓! — 벌거벗고 머리로 거꾸로 서 다니기도 했소, 시키니까, 내 나이도 아랑곳없이. 양심과 수치심은 당신과 나한테서 없어졌소, 우리는 죄다 할 수 있소, 훔치고, 배신하고, 죽이는 것. 나는 이따금 생각해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소 — 나한테 금지된 게 대체 뭔지. 굳이 꼽자면 딸은 지키고 싶소만, 그것도 어리석은 짓이지. 죄다 할 수 있고, 나는 오직 악만을 바라며, 악에서 기쁨을 얻소. 내 아들들은 —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법이니 — 그들은 새 대문에 들이받는 황소처럼 혁명에 이마를 들이댔다가 죽었소 — 한데 나는 내 머리에, 잔꾀에 기댔지, 죄다 속여 넘기려 했고, 어쩌면 속여 넘길지도 모르오, —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킬킬거리고 다시 진지해졌다 — 아니 어쩌면…… 나는 늙은 바보인 척, 정신 나간 척했소 — 나 자신도 러시아도 속여 넘길 작정이었지, 그래, 크흠. 말이 길어져 미안하오. 오늘이 내 영명축일이라 — 내 소들과 함께 풀밭에 숨겨 둔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일 참이오 — 이건 잔꾀랄 것도 없이 솔직한 일이오 — 한번 즐겨 보려고……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모스크바강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건 볼셰비키만이 아니라 — 러시아도, 러시아 루블도, 러시아 손도 그러하오 — 한데 나는 당신 지시와 내 동의에 따라 가축을 치고 있소. 정직해야 하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허나 지금 우리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명예에서가 아니라 파렴치에서 말하고 있소! —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꿀꿀거렸다. — 절망에서 정직해야 하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필사적인 정직! 죽일 수 있소, 사람 목숨은 — 헐값이고, 입에 풀칠은 비싸지 — 우리한테는 사람이 없고, 조직만 있소 — 우리는 명예로 사는 게 아니라 목숨 부지에 매달려 사오. —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킬킬거리고, 흥흥거리고, 꿀꿀거렸다. — 늪에는, 아마, 등걸들이 있겠지 — 진창이 그것들을 빨아들이고, 거머리가 그 위에 붙고, 가재가 파고들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소들이 거기 오줌을 누고, 악취에, 진창이지 — 한데 나는 살아 있소, 얼간이 짓을 하고, 더럽히며 — 죄다 알고 보면서. 우리는 죽일 수 있소. 명령하시오 — 누구를. 일 얘기를 해야 하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오늘 밤이 — 더없이 좋소, 비가 오니 사내녀석들이 계집들을 풀밭으로 끌고 가지 않고, 죄다 파업을 틈타 넘어갈 거요. 나는 가축을 치러 가겠소, 당신은 베즈데토프 형제와 — 산책이나 나가시구려.
— 한데 나는 죽이고 싶지 않소, — 폴토라크가 나직이 말했다. — 살인자가 될 수 있는 건, 공상이 없는 사람이오……
— 그게 무슨 말이오, 죽이고 싶지 않다니? — 손위 베즈데토프가 엄하게 물었다.
— 옳은 말이오, — 스쿠드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옳은 말이오, 허나 온전히 옳진 않지 — 살인자는 공상이 없어야 하오, 환영(幻影)이, 유추가 그를 괴롭힐 테니. 다만 그건 그에게 명예가 남아 있는 경우에 한해서요. 한데 당신과 나는 바로 그 공상 덕에, 어떻게 펑 터지나 구경하며 즐길 거란 말이오.
폴토라크가 군함에서 코냑을 따라 마시고, 제 자신에게 말했다.
— 나는 죽이고 싶지 않았소…… 가 봐야겠소, 기다리는 이가 있소. 잘들 있으시오. 노동자들은 우리가 되돌리지 못하오……
— 그게 어찌 당신을 기다린단 말이오? — 손위 베즈데토프가 엄하게 물었다.
— 일 얘기를 해야 하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스쿠드린이 다정하게 말했다. — 당신은 갈 데가 없소. 좀 기다려야 하오.
— 나는 한 여인과 함께 왔소. 기다리고 있소. 어릴 때 나는…… 머리가 아프오, 서둘러야 하오…… 어릴 때, 열셋쯤에, 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었소 — 그때 나는 얼마나 울었던지, 아나톨 쿠라긴이 나타샤 로스토바에게 입 맞추는 그 대목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 짓밟힌 순결을 위해 울었소, 감히 순결을 건드린 아나톨의 더러움에 치를 떨었지…… 아니, 나한테는 공상이 있소. 짓밟힌 순결을 위해 — 나타샤 로스토바가 아니라 러시아 여인들의 순결을 위해 — 오늘 묘지에서 여자들 스스로 들고일어났고, 회의에서도 한 여자가 나와 맞섰소.
베즈데토프 형제가 코냑에서 몸을 일으켜 폴토라크 뒤에 가 섰다.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킬킬거렸다. 폴토라크는 머뭇거리며 앉아, 알코올 속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 내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리리다, 서두르지 마시오, —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흥흥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 나타샤 로스토바라 — 그건 — 그래, 두말없이 공상이오. 러시아에서는 뒤를 돌아봐야 하고, 뒤를 보기가 무섭소…… 내 이야기를 하리다, 내가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 들어 보시오, 헤아려 보시오, 이에 관한 책들이 내 장에 있으니 꺼내 올 수 있소. 헤아려 보시오 — 거지, 점쟁이, 동냥아치, 추수 걸립꾼, 나사로꾼, 순례자 남녀, 불쌍한 자들, 거짓 신자, 눈먼 가객, 예언자, 미친 여자, 미친 사내, 위선자, 바보 성자 — 보시오, 거룩한 어머니 루시의 무슨 꽈배기들이오, 거룩한 땅의 거지들, 떠도는 눈먼 가객들, 그리스도를 위한 불쌍한 자들, 거룩한 루시의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성자들 — 보시오, 무슨 알록달록한 꽈배기들인지!…… 그리고 잘 보시오, 이들이 루시에 천 년을 존재했소, 키예프-페체르스크 수도원 시절부터. 얼마나 많은 작가가 이들에 관해 학문의 펜을 적셨소, 역사가도 민속학자도 학술 논문을 썼지. 이 복된 자들은 작가들과 함께 있었으니 — 미치광이거나 사기꾼이면서도, 교회의 꽃이요, 그리스도의 형제요, 세상을 위한 기도자로 여겨졌소. 우리 콜롬나의 다닐루시카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내 동생 이바누시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지금은 전 러시아의 이반 야코블레비치에 대해 아뢰게 해 주시오. 그는 칠십 년대에 죽었소, 나는 다 기억하오, 신학원 낙제생이었지. 모스크바의 프레오브라젠스카야 병원에서 죽었소. 그의 장례에 대해서는 기자들도, 시인들도, 역사가들도 썼소. 『모스크바 통보』에 시가 실렸으니, 한번 들어 보시구려.
노란 집은 무슨 잔치를 차리는가?
어이하여 그리로 백성의 물결이 흘러드는가,
짐수레로 사륜마차로, 이륜마차로 또 걸어서,
어이하여 모든 가슴이 어두운 근심으로 가득한가?
그 틈에서 이따금 어렴풋한 소리가 들리니,
가슴 저미는 무거운 아픔으로 가득한 소리라 —이반 이아코블리치 때 이르게 스러졌네,
더 나은 운명에 마땅한 예언자가 스러졌네!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말을 이었다.
— 풍속 작가 스카브론스키는 『모스크바 소묘』에서 이렇게 전하오, 보시오, 주검이 묻히지 않은 닷새 동안, 주검 곁에서 삼백 번도 넘는 진혼 미사가 올려졌고, 많은 이가 교회 곁에서 밤을 새웠다고. 이반 야코블레비치는 일요일에 묻기로 정해졌고, 『경찰 통보』에도 그리 공고되었소. 그날 동이 트자마자 숭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소. 한데 정확히 어디에 묻을지를 두고 다투느라 매장이 이뤄지지 못했소. 하마터면 주먹다짐까지 갈 뻔했고, 욕설은 벌써,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오갔지. 어떤 이들은 그의 고향 스몰렌스크로 옮기려 했고, 어떤 이들은 교회 아래 그를 위해 무덤까지 파 둔 남자 포크롭스키 수도원에 묻히기를 바랐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의 유해를 여자 알렉세옙스키 수도원에 넘겨 달라 애틋이 청했고, 또 어떤 이들은 관에 매달려 체르키조보 마을로 끌고 갔소. 이반 야코블레비치의 시신을 도둑맞을까 다들 겁냈지. 그동안 내내 비가 내려 끔찍한 진창이었으되, 그럼에도 시신을 옮기는 동안 여자들이, 처녀들이, 크리놀린을 입은 아가씨들이 땅에 엎드려 관 밑을 기어 다녔소. 이반 야코블레비치는 살아생전, 말씀드리기 송구하나, 제자리에서 오줌똥을 누어 — 그 밑으로 흘러내렸고, 그래서 지기들에게 그 밑 바닥에 모래를 뿌리라 일렀소. 이반 야코블레비치 밑에서 적셔진 이 모래를, 그 숭배자들이 그러모아 집으로 가져갔고, 모래가 의술의 힘을 보이기 시작했소. 어느 아기가 배앓이를 하자, 어미가 죽에 모래 반 숟갈을 타 먹였더니 아기가 나았다지 뭐요!…… 고인의 코와 귀를 틀어막았던 솜은, 영결식 뒤 신자들에게 나눠 주려 잘게 쪼갰소. 많은 이가 작은 병을 들고 와, 관에서 흘러나오는 진물을 거기 받아 모았으니 — 고인이 수종으로 죽은 까닭이었지. 이반 야코블레비치가 입고 죽은 속옷도 신자들을 위해 잘게 찢었소. 교회에서 내가는 무렵에는 불구자며 바보 성자며 거짓 신자며 순례자며 절름발이가 모여들었소. 그들은 비좁아 교회에 들지 못하고 거리에 남았는데 — 바로 거기서, 대낮에, 백성에게 설교가 베풀어지고, 환영이 나타나고, 예언과 저주가 토해지고, 돈이 거둬지고, 불길한 포효가 울려 퍼졌소…… 자 보시오, 사람이 얼마나 거룩하게 죽었는지.
— 그 얘긴 무엇 하러 하시오? — 폴토라크가 힘없이 물었다.
— 그 얘긴 무엇 하러 하느냐고? — 스쿠드린이 되물었다. 스쿠드린은 살며 누렸다. 아낙 같은 지방이 소파에 주의 깊게 자리 잡고 앉았다. — 들어 보시오! — 스쿠드린이 엄하게 외쳤다. — 그리고 이반 야코블레비치가 무엇으로 이름났는지 아시오? — 예언이오. 그는 입으로만 예언한 게 아니라 글로도 했으니, 역사 연구를 위한 자료가 남아 있을 정도요. 사람들이 그에게 편지로 물었소 — 아무개가 결혼하겠느냐고 — 그가 답하기를 — “고생 없이는 단물도 없느니!” —
— 그 얘긴 대체 무엇 하러 하시오?! — 폴토라크가 외쳤다.
— 나는 죽음을 앞두고 삶을 누리고 있소,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어쩌면 이게 내 가장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오! 들어 보시오! — 노인이 모질게 외쳤다. — 치즈를 외국 음식으로 치는 건 전혀 부질없는 노릇이오 — 나는 그걸 양파처럼 민족적인 러시아 음식으로 치오. 양파를 나는 아주 좋아하오. 러시아의 으뜸 치즈는 키타이고로드였고, 그 구더기는 바보 성자들이었으니, 그들이 거기 떼 지어 다녔지. 어떤 이는 시를 짓고, 어떤 이는 수탉이며 공작이며 뻐꾸기 소리를 냈으며, 어떤 이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에게 쌍욕을 퍼부었고, 어떤 이는 예언으로 여겨져 그 예언자에게 명성을 안겨 주는 한 문장만 알았으니, 이를테면 — “사람의 인생은 동화요, 관은 — 마차라, 가는 길 — 덜컹이지 않네!” —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는 애호가들도 있어, 짖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예언했소. 거지, 동냥아치, 점쟁이, 추수 걸립꾼, 나사로꾼, 거짓 신자 — 거룩한 온 루시의 불쌍한 자들 — 이 무리에는 농민도, 소시민도, 귀족도, 장사치도 있었소 — 아이들도, 노인들도, 우람한 사내들도, 새끼 잘 배는 아낙들도. 그들은 죄다, 보시오, 취해 있었고 양파 냄새를 풍겼지.
— 그 얘긴 무엇 하러 하시오? 나는 가 봐야 하오, — 폴토라크가 다시 힘없이 말했다.
— 곧 끝나오, — 스쿠드린이 대답했다. — 이 모든 바보 성자들 위에는, 뭐랄까 — 양파 모양의 푸른 러시아 왕국의 위엄이 서서, 치즈와 양파처럼 쓰디쓴 우리를 덮어 주었소, 교회 위 양파 지붕은, 양파처럼, 양파 같은 러시아 삶의 상징이니 — 상징 말이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이걸 당신 생각거리로 말하는 거요, 살인에 대해 당신 스스로 결정하라고. 우리는 갈 데가 없소, 한데 사회주의로는 — 나는 가기 싫소. 작정한 대로 강을 막으면, 우리가 그 둑을 폭파하지 않으면 — 우리 자프루디예가 물에 잠기고, 바로 이 방이 물로 채워질 거요, 우리 대신 여기서 물고기가 헤엄칠 거고, 코냑 마시러 바로 이 작은 배로 헤엄쳐 들어오겠지. 한데 나는 이 작은 집에서 자립했고 내 자식들이 여기서 태어났소. 나는 — 러시아 편이오, 나는 물고기한테 가기 싫소, 사회주의보다는 내 빈대들과 함께가 더 좋단 말이오, 보시오!…… 그리고 이반 야코블레비치를 떠올린 건, 나도 죽어야 할 테고, 그의 죽음이, 그가 받은 영예가 부럽기 때문이오. 내 동생 이반도 부럽소. 나는 — 시샘 많은 사람이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가 모질게 말했다.
— 야코프 카르포비치, 당신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빼놓으셨소, 바로 바보 성자들이, 사기꾼이든 미치광이든, 죽이는 자이자 죽임당하는 자였다는 것 말이오. 죽인 건 — 사기꾼들뿐이오. 미치광이들은 — 도리어 죽임을 당했지.
— 지당한 말씀이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사기꾼들은 번성했고 미치광이들은 죽어 나갔소, 잘 기억하오. 이반 야코블레비치는 모든 정황으로 보아 사기꾼이었지. 러시아는 사기꾼을 사랑하오! — 한 가지 더 짚게 해 주시오. 이렇게 이야기할 기회가 드물어서,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나도 한 사람의 시민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시오. 당신 생각에, 세상을 — 문명을, 학문을, 기선을 움직이는 게 뭐요? — 노동이오? 지식이오? 사랑이오? — 아니, 천만에, 크흠! — 기억이오! — 기억이 세상을 움직이오. 한 장면을 그려 보시오. 내일 아침 내가 깨어났는데 — 감각도, 이성도 남았으되 — 기억이 없소. 침대에서 깨어 거기서 떨어지오, 공간을 잊어버렸으니까. 의자에 바지가 놓여 있고, 나는 춥소 — 한데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오. 어떻게 걸어야 할지도 모르오, 손으로 갈지 네 발로 길지. 어제를 기억 못 하니, 죽음도 두렵지 않소, 그것을 모르니까. 기사들은 제 도면을 죄다 잊어, 전차도 기관차도 운하도 죄다 악마에게로 가오. 사제들은 교회 가는 길을 못 찾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기억 못 하오. 나한테는 본능이 남았는데, 그것도 일종의 기억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칩시다 — 나는 뭘 먹어야 할지 모르오, 의자인지 밤새 의자에 남은 빵인지, 그리고 여자를 보면, 내 딸을 아내로 알겠지…… 기억! 공상! — 기억의 공상이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기억이 당신을 죽일 수 있게 하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한데 기억 없음은 당신 어미를 딸과 헷갈리게 하지. 당신과 나는 비열한 자들이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당신은 감각이 어지러워졌소. 정말이지 가서 쉬어야겠소, 당신은 심란해 있으니 — 나는 아내 잠자리로 가리다. 그런 당신이 풀밭으로 가는 건 위험하오. 거기 지기들이 다니는데, 내가 가축 치는 건 익숙해도 당신을 목동으로 본 적은 없거든. 한 시간쯤 당신 여인한테 가 있으시오, 그다음 내가 당신을 모놀리트로 데려다주겠소. 죽음을 앞두고 좀 쉬시오. 나한테는 기억이 있소, 아들들처럼 빼앗기지 않았지. 나는 이반 야코블레비치를 기억하오 — 한데, 나 대신 물고기가 내 서재를 헤엄쳐 다니는 것은 — 그건 바라지 않소. 하고 싶은 대로들 하라지, 허나 내 집은 내가 지키겠소.
아낙 같은 지방이 제 곤죽을 풀어헤친 채 아주 주의 깊게 들었다. 서재는 볼테르주의에 잠겨 있었다.
베즈데토프 형제가 엄하게 폴토라크를 제게로 손짓해 불렀다. 폴토라크는 힘없이 형제 곁에 앉았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누리며, 살아 있었다 — 진지해져, 음모자들과 군함 위로 몸을 숙이고, 탈장을 야무지게 받쳐 든 채 아낙 같은 콜롬나의 어깨에 기댔다.
— 집에 변고가 생겼소, 전보를 받았소, — 폴토라크가 말했다. — 아내가 친 거요. 좋소, 일 얘기를 합시다.
— 일 얘기를 합시다, — 손위 베즈데토프가 따라 말했다.
— 일은 짧게 말하겠소, — 스쿠드린이 말했다. — 다 준비됐고, 필요한 데 다 갖다 뒀소. 새벽 한 시쯤 나는 가축을 치러 가겠소. 당신은 당신 여인한테 가시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아니면 내 데서 누우시든가. 이야기는 짧소. 내가 풀밭으로 데려다주겠소, 아무도 못 볼 거요.
— 골루트빈 부교(浮橋)에서 만납시다, — 손위 베즈데토프가 말했다.
— 가시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내 데서 앉아 있기 거북할 테니. 아직 세 시간 남았소. 죽음이나 명예 얘긴 할 것 없소. 다만 두말 않겠는데 — 명예는 누구에게나 남아 있소, 가령 나한테는 — 내 딸 카탸가…… 나도 내 노파 잠자리로 가리다. 나는 카탸를 위해 사오. 그리고 오늘 밤 죽을 생각은 없소.
알코올 군함은 베즈데토프 형제가 조종했고, 군함과 더불어 서재의 마호가니 속, 십팔세기에 — 볼테르 동지가 박혀 있었다. 창으로 스탠드 등을 향해 밤나방들이 날아들었고, 창밖 어둠 속에서는 비가 살랑거렸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폴토라크 둘레를 꼼지락거리며, 비둘기처럼 종종거리고, 터진 틈으로 탈장을 받쳤다. 그의 눈은 여든다섯 해로 눈물에 젖었고, 노인은 부어올라, 핏물처럼 부석부석하고 푸르죽죽하고 행복했다. 육중한 노인은 혀 짧은 소리로, 가래를 돋우고 꿀꿀거리며 얼간이 짓을 했으니, 무섭고 역겨웠다. 베즈데토프 형제는 코냑 곁에 말없이 있었다. 폴토라크는 거뭇한 턱을 두 손바닥으로 괴었으니, 그의 생각은 이 볼테르식 서재에 있지 않았다.
—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 손위 베즈데토프가 점잖게 말을 꺼냈다. — 콜롬나에서 우리와 셈을 치르겠다 하셨지요. 지금이 셈하기에 딱 좋은 때일 듯합니다만.
— 그래, 그래, 돈푼 받는 거야 나쁠 것 없지! — 스쿠드린이 맞장구쳤다.
— 그래,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소, 우리가 잃은 게 많진 않아도 중요한 것 — 양심을 — 잃었다는 게, — 폴토라크가 말했다.
— 한데 나는 안 잃었소. 나는 그걸 안 잃었어! — 창밖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창 쪽으로 돌아보았다.
창밖에서 빗물받이 함석이 덜그럭거리고, 토대의 외장이 우수수 떨어지며, 창이 더 활짝 열렸고, 스탠드 등 불빛 속으로 부랑자 이반 오조고프의 손과 머리와 가슴이 나타났다. 그는 야코프 카르포비치와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는 다른, 한 핏줄의 막내 동생으로, 스쿠드린에서 오조고프로 제 성을 바꾼 자였다. 이반 오조고프는 두 팔꿈치를 창턱에 괴었다. 모자도 안 쓴 그의 머리가 비에 젖어 머리카락이 빗물에 들러붙었고, 성상화처럼 된 그의 얼굴은 광기 속에 잠겨 있었다. 오조고프는 윗옷 깃을 세웠고, 구멍 나도록 닳은 넥타이가 비뚜름히 흘러내려 있었다. 오조고프는 방 안에 있는 이들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 나는 안 잃었소, — 오조고프가 말했다. — 그리고 피멘 세르게예비치 폴레티카 교수도 그걸 안 잃었소. 강과 더불어 가야지, 강을 거슬러서는 안 되오. 우리는 그분과 오늘 속을 터놓고 이야기했소…… 안녕들 하시오! — 오조고프가 잠시 말이 없다가 덧붙이며 인사했다. — 들었소 — 정의가 일어섰소 — 오늘 여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다시 우리 시대가 오고 있소. 사람들이 명예를 바라오!……
오조고프의 인사에는 폴토라크 혼자 답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안절부절못하고 동요하며, 맨발로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아낙 같은 지방이 소파에 손님으로 자리 잡았다. 볼테르가 스탠드 등으로 깜박였다.
— 대체 무엇 하러 오셨소, 동생? 내가 폴레티카 교수를 못 만날 줄 아시오? —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물었다.
— 반혁명의 꼴들을 좀 보려고요, 형님, — 오조고프가 대답했다.
— 여기 무슨 반혁명이 있단 말이오?
— 형님으로 말하면, 형님은 생활의 반혁명이오, — 오조고프가 나직이 말하며 미친 듯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리고 내가 집행위원장이던 시절에 형님을 벽 앞에 세워 총살하지 않은 게 참으로 한스럽소. 마호가니 세공가들로 말하면, 저들은 역사의 반혁명이오, 저 파괴자 폴토라크 나리와 한패로 조직된. 나는 자네들에 대해 죄다 알고 있소, 개자식들 같으니, 다만 사람들이 나를 안 믿을 뿐이지.
베즈데토프 형제는 주석 같은 눈으로 경계하며 말이 없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보랏빛 분노와 승리감으로 동시에 차올라, 순무 대신 삶은 비트 꼴이 되어 — 창가로 가, 예의와 승리감 속에 킬킬거리고, 두 손을 부산히 놀려, 추위에 떨 듯 서로 부지런히 비벼 댔다.
폴토라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야코프 카르포비치, 바보 성자들 가운데 비열한 자가 죽이고 미치광이가 죽임당한다 하셨는데, 혹 틀린 게 아니오?
스쿠드린은 폴토라크에게 답하지 않았다.
— 이보시오, 동생, —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아주 정중하고 아주 의기양양하게 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 당장 악마에게로 꺼지시오. 진심으로 부탁하오!
— 미안하오, 야코프 형님, 나는 형님한테 온 게 아니오, 형님 집에는 내 발 한 짝도 들이지 않겠소, 나는 중립 지대에 — 창턱에 있소. 나는 역사의 반혁명을 보러, 그것과 이야기 나누러 왔소, — 이반이 대답했다.
— 그러니 부탁이오 — 악마 어미에게로 꺼지시오. 오늘은 우리 거리에 사육제요! 폴레티카는 내가 직접 만나겠소.
— 한데 나는 그 여자한테 안 갈 거요!
파벨 표도로비치가 주석 같은 눈으로 동생 스테판을 천천히 흘긋 보고 엄하게 말했다.
— 바보 성자와는 말을 섞을 수 없지 — 안 나가면, 스테판한테 네 목덜미를 잡아 내쫓으라 이르겠다.
스테판이 형과 똑같은 눈으로 보고는 의자에서 고쳐 앉았다. 부랑자는 음흉하게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없이 꼼짝하지 않았다. 스테판 표도로비치가 마지못해 군함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부랑자는 겁먹은 듯 창턱에서 내려가, 불빛 속에 머리 하나만 남겨 두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가 의기양양하게 킬킬거렸다. 스테판이 창가로 다가가자 — 이반 오조고프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집 너머로 비가 요란했다. 어둠 속에서 부랑자가 말했다.
— 나한테서는 못 벗어나오, — 그러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집 너머로 비가 요란했고, 숲속이 그러하듯 고요했다. 밤에 밀려든 숲이 콜롬나로 다가들었다. 마린킨 탑에서는 올빼미들이 탑의 세기들을 지키며 울었다. 콜롬나는 말의 땀 냄새를 풍겼다. 올가 파블로브나 투치코바는 그 시각 이미 제 마을에 다다라, 의자와 안락의자를 팔아 준 나자르 시소예프 영감에게 고마워하며 행복하게, 반 시간 뒤 의자들을 싣고 도시의 기차로 떠나려, 나자르의 오두막 짚단 위에서 반 시간 눈을 붙이고 있었다. 카라진은 그 시각 노인성 히스테리 발작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린킨 탑가에서 올빼미들이 울었다. 부랑자는 가 버렸다. 의기양양한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이때가 무섭고 긴 제 생애의 마지막 시간 가운데 하나임을 그 시각 도무지 알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비가, 벌써 가을답게, 여러 시간 동안 쏟아졌다.
— 가 보겠소, —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힘없이 말했다.
— 새벽 한 시까지, — 손위 베즈데토프가 말했다.
— 새벽 한 시까지, — 스쿠드린이 말했다.
— 그래, 한 시까지.
12
비 내리는 도시 위로 밤은 이곳의 역사처럼 미동도 없이 새카맣게 흘렀다. 스쿠드린의 집은 어둠 속으로 함몰하여, 풀밭의 물길을 앞두고 말이 없었다. 스쿠드린 노인은 행복과 활기 속에 잠겨 있었다 — 그리고 침실의 시큼한 고요 속으로 노인의 슬리퍼가 — 마리야 클리모브나의 잠자리로 — 철벅철벅 다가갔다. 양피지 같은 노파 마리야 클리모브나는 잠들어 있었다. 야코프 카르포비치의 손에서 양초가 떨렸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킬킬거렸다. 야코프 카르포비치는 마리야 클리모브나의 양피지 같은 어깨에 손을 댔다. 그의 눈은 쾌락 속에 눈물이 비어졌다. 아낙 같은 지방은 서재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 마류시카, 마류시카, 그래, 크흠, 이게 인생이야 — 이게 인생이지, 마류시카, 그렇고말고!…… — 그러면서 노인은 폭발의 굉음을 들었고, 솟구치는 그 불꽃을, 연기를, 냄새를, 사방으로 날아가는 돌을, 물의 쉭쉭거림을 보았다. 노인은 잠자리 곁에서 한바탕 춤을 췄다.
십팔세기가 러시아-볼테르식 어둠 속으로 함몰했다.
그 시각 다락방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손아래 베즈데토프 스테판 표도로비치는 카테리나와 마주쳐, 말처럼 단단하고 소처럼 고분고분한 그녀의 어깨를 만지고, 취한 손으로 더듬으며 속삭였다. 카테리나는 고분고분하고 힘없이 서 있었다.
— 너희 식구들한테 말해 둬, — 스테판이 말했다. — 다시 한판 벌이자고. 자리를 알아봐, 너희 목욕간이든 어디든.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또 올 거야. 너는 지금 곧장 목욕간으로 가.
카테리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 같은 그녀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고분고분하고 힘없이 베즈데토프 곁에 서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베즈데토프를 끌어안아, 그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를 짓눌렀다.
지난 몇 차례 베즈데토프 형제가 다녀가는 동안 그들에게는 하나의 관례가 생겼으니, 소시민 후방에서 흔하디흔한 것이었다 — 카테리나가 동무들을 불러 모으면, 형제가 술을 구해 왔다 — 스쿠드린 노인이 카테리나의 혼수를 보관해 두던 목욕간, 정원 깊숙한 구석의 그 목욕간에서, 창에 휘장을 치고, 목욕간 선반을 탁자 삼아, 처녀들이 선반 위에 삶은 소시지며 정어리 통조림이며 사탕이며 절인 사과를 늘어놓으면, 베즈데토프 형제가 술병을 땄다. 목욕간에는 술판이 벌어지는 첫 한 시간 동안 등잔이 켜졌다가, 이내 꺼졌고, 목욕간에서의 모든 시간 내내 말벗이자 술벗들은 속삭여 이야기했다. 목욕간은 집과 마찬가지로 십팔세기에, 볼테르식의 홀린 듯한 마법 속에 잠겨 있었다. 처녀들은 마시고 취했다. 형제는, 취한 사람들에게서, 특히 여자들에게서, 그들이 몹시 취하면 알코올이 빚어낸 똑같은 표정이 얼굴에 오래도록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흥미로워했다. 림마 카를로브나의 딸인 보육교사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가 사내처럼 손으로 머리를 괴기 시작하고, 이가 드러나고, 입술이 경멸 속에 돌처럼 굳고, 담배를 하나씩 잇달아 피우며 코냑을 물처럼 마시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때 — “내가 취했냐고? — 그래, 취했어 — 그래서 어쩌라고! 내일 나는 또 학교에 가르치러 가 — 한데 내가 뭘 알아? 뭘 가르쳐? — 당신들 마호가니를 사들이지? 옛것을? — 당신들 우리도 술로 사들이고 싶은 거야? 내가 인생이 뭔지 모르는 줄 알아? — 아니, 알아!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라고! — 한데 내일 여섯 시에 나는 보육 회의에 가, — 자, 여기 내 수첩, 다 적혀 있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의 이가 드러나고 그녀가 추하도록 아름다워지는 이 시각에 — 스테판 표도로비치가 비꼼이 가득한 다정한 말로 카테리나를 꾀기 시작했으니 — “한데 너는 블라우스를 못 벗을걸, 카튜샤, 못 벗을 거야!” — 그러면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가 짧게 깎은 머리를 헝클며, 사내처럼 머리를 괴고, 멈춰 선 제 눈을 탁자에서 떼지 않은 채, 짓눌린 속삭임으로 외쳤다 — “보여 줄걸! 카치카, 저들한테 가슴을 보여 줘! 보라 그래! — 나도 벗을게, 그럴까? — 당신들 내가 술꾼인 줄 알아? — 나는 오늘 인사불성으로, 인사불성으로 취하려고 왔어 — 알겠어? — 인사불성으로!…… 될 대로 되라지!…… 카치카, 벗어, 보라 그래, 우리는 낡은 관념 따위 부끄러워하지 않아!” — 그러면서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가 제 블라우스 깃을 잡아 뜯기 시작하면, 카테리나가 늘 똑같은 말로 달래며 단추 푸는 것을 거들었다 — “클라바, 옷 찢지 마, 집에서 알면 큰일 나 — 화내지 마, 차라리 내가 벗을게……” — 그러면 손위 파벨 표도로비치가 등잔을 껐다.
다락방으로 오르는 계단은 어두웠다. 카테리나가 베즈데토프를 끌어안아, 장사 같은 제 몸으로 그에게 달라붙어 그를 짓누르며, 모질고도 고분고분하게 울기 시작했다.
— 왜 그래? — 스테판 표도로비치가 물었다.
카테리나는 울며 대답하지 않았다 — 그녀가 스테판 표도로비치를 계단 난간에 어찌나 세게 밀어붙였던지, 그는 숨쉬기가 괴롭고 아파 균형을 잃었다.
— 왜 그래, 카테리나? — 스테판 표도로비치가 물었다. 그러자 카테리나가 울부짖으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스테판을 놓아주며 머리와 어깨를 난간에 무너뜨렸다. 난간이 그녀 밑에서 삐걱이며 흔들렸다.
— 나 임신했어! — 카테리나가 울부짖었다. 마린킨 탑이 밤 속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시각 아카티예보 마을에서는 — 모놀리트 공사가 끝나면 물에 잠길 그 마을에서 — 나자르 시소예프 영감이 올가 파블로브나를 깨워, 그녀 위에 쪼그려 앉아, 소매를 잡아당기며, 음울하고 백발이 성성한 영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파블로브나, — 그가 말했다. — 어이, 파블로브나! 나는 말을 매러 가겠소, 떠날 때가 됐으니, 일어나오, 우유는 광에 있소. — 그가 잠시 말이 없었다. —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요, 올가 파블로브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요, 응? 한번 들어 보오, 땅에 귀 기울여 보오 — 고요하지. — 무엇 때문일꼬? —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기를 그쳤소, 다들 으르렁대니, 영락없이 전쟁 통 같소. 내 아들들은 — 바실리는 전쟁터에서 곧장 부랑자로 빠졌고, 스테판과 표도르는 — 공산주의자가 되어 건설 현장으로 갔소.
— 네? 그래요? — 일어나야 하나요? — 올가 파블로브나가 잠결에 물었다.
— 아니, 자오, 좀 더 자오, 내가 말 매는 동안. 나는 늙었고, 게다가 외톨이라오, 그 아들들은 — 보다시피, 저 모양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오. 우유는, 말했듯이, 광에 있소, 새색시. 나는 말 매러 가겠소. 그러니 나를 기다리오…… 한번 들어 보오!…… 할아버지도 사셨고, 증조부도 사셨고, 우리 아카티예보 마을에는 가업이 있었소 — 우리는 볼가로 뗏목을 몰았소, 천 년을 몰았지, 어쩌면 더 됐을지도, 어릴 적부터 익혀, 언덕 하나하나, 여울 하나하나를 다 아오, 랴잔 부근이며, 카시모프 부근이며, 무롬 부근이며. 아득한 옛날부터 강으로, 뗏목으로 살았소. 한데 들리는 말로는, 우리 삶이 끝난다오, 이제 랴잔 부근에도 블라티마 부근에도 오카가 없어진다, 강이 끝나고, 모스크바로 흘러 새 터로 옮겨 간다…… 한번 들어 보오! — 내 생각엔, 거짓말이오, 그런 강은 없을 거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 천 년을 살았는데 느닷없이 우리 삶이 끝난다니. 강 얘긴 거짓말 같소, 정말로 짓고들 있긴 해도. 우리가 뗏목 모는 걸 그치는 것도 모자라, 아카티예보 자체가 키테시 마을처럼 물밑으로 들어간다니, 믿을 수가 없소…… 한번 생각이나 해 보오!……
콜롬나의 마린킨 탑가에서 올빼미들이 울었다.
피멘 세르게예비치 폴레티카가 그 시절의 모스크바를, 새 러시아로, 지식으로, 평등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군대의 군영 같다고 한 것은 옳았다. 모스크바는, 지나간 세기도 지금의 세기도 다가올 세기도, 죽어 가던 거리도 새로 짓던 거리도, 사람들도 죄다 단련되고 파헤쳐진 건설 현장 같았다. 그러나 폴레티카 교수는 제복을 헤아리며 한 가지를 놓쳤다. 그해 제복은 수백만의 목과 발에 똑같은 무늬로 걸린 톨스토이 셔츠, 먼지막이 외투, 챙모자, 양말, 넥타이의 대량 규격으로, 똑같은 액수로 벌어들이는 루블과 똑같은 가능성으로 도입되고 있었다. 새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군대식 카키 차림에, 지휘관의 가죽끈을 가슴에 엇갈려 둘렀다. 무더운 칠월, 여름이 대개 그러하듯,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카야와 사도바야 거리는 하수도 도랑으로, 변두리는 자갈 포장으로 파헤쳐져, 크라스니예 문과 교회들을 역사 속으로 파묻었다. 젊은이들의 카키가 미래로 밀고 들어갔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는 역사의 도랑 너머에 살았다. 그리고 그는 병들어 있었다.
그는 저 전문가들의 삶을 살았으니, 남의 눈에는 시류를 거슬러 사는 듯 보이는 자들이었다. 십여 개의 산업 위원회와 더불어 그는, 참호 너머에서 시류에 휩쓸려 사는 모스크바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 몇 안 되는 모스크바 술집의 단골이었다 — 점심은 볼샤야 모스콥스카야, 저녁과 폭스트롯과 새벽의 만남은 피메놉스키 골목의 배우 모임(바로 경매장 뒤편), 일요일의 휴식은 경마장, 토요일의 카드 형이상학은 카지노. 그러나 폴토라크에게는 옛말이 뜻하던 그대로의 가정도 있었으니 — 아내, 아이들, 흰 앞치마를 두르고 세기 초에 유행하던 머리 모양을 한 하녀, 좁고 격식 있는 집안의 벗들, 양탄자, 청동, 그림, 마호가니, 가르드네르 그릇 세트, 통화의 용건과 누구인지 캐묻는 데 시간을 더 쓰는 엄격한 전화기가 있었다. 폴토라크는 집 밖에서는 헤프게 쓰고 집 안에서는 인색했다. 아이들은 영어를 배웠다. 손님은 초대받았을 때만 집에 왔다. 그럴 때면 포도주와 과일과 캐비어와 철갑상어가 사들여지고, 자기가 차려졌으며, 안주인이 새로 들어오는 이를 두고 일러두었다 — “아무개 수력공학 기사, 비당원인데, 쉿, 그들과 가깝다오!……” — 폴토라크의 집에 공산주의자들은 드물게, 그래도 오긴 했으니, 폴토라크가 혁명의 신뢰받는 전문가로 여겨진 까닭이었다 — 그럴 때면 폴토라크는 작업복 블라우스를 입었다. 폴토라크의 아내는 늙어 갔으니, 지치고 격식 있는 여자로, 집안의 체면을 지켜야 하는 그 빠듯한 루블의 셈속 속에서 거리로부터 집에 숨겨져 있었다.
폴토라크는 병들어 있었다. 그는 제 병이 언제 시작됐는지 몰랐고, 그 병을 무어라 부를지도 몰랐다. 그는 서두르기 시작했고, 시간이 그를 다그쳤다. 그는 혼자 있지 못해, 어디에나 있어야 했다. 그는 제 본능을 풀어헤친 채 여자들로 앓았다. 그는 제 병을 알지 못했다. 영국인 셔우드의 눈도 그의 병에서 운명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풀밭에서의 파멸은 사물의 논리로 드러났다. 건설 현장으로 떠나기 한 주 반 전, 아내의 자매를 진료하던 의사에게서 크림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의사는 처제에 관해 전보를 쳤다 — “가망 없음, 환자를 도로 데려가도 좋다고 봄.” — 의사들은 환자가 제 손에서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의료 윤리의 규칙상 이 전보는 환자가 곧 죽을 테니, 가까운 이들의 손에서 숨을 거두도록 의사에게서 데려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이 전보를 숨겨, 아내에게 보이지 않았으니, 아내를 심란하게 하고 죽어 가는 이를 옮기는 데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전보가 왔다 — “환자를 속히 데려가시길 청함” — 그리고 그것이 아내의 손에 들어갔다.
아내는 마호가니 탁자 — 그 위에서 회신 수령증에 서명한 — 곁에서 전보를 손에 든 채 한 시간 넘게 서서, 눈으로 제 자신과 시간을 멈춰 세웠다 — 그러고 나서 몇 시간을 더, 그리핀이 새겨진 파벨 양식 침대에 누워, 눈물에 젖고, 죽음의 무의미와 아픔을 달래려 이로 깨문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죽어 가고 있었다, 무의미 속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 자매가, 어린 시절부터 삶에 남은 단 하나, 온 삶을 함께 지나온, 가족과 핏줄과 혈연의 사랑으로 맺어진 그 사람이.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기운차고도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아내를 알아채지 못한 채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굳어진 입술로 말했다.
— 죽어 가요.
그러고는 아내가 남편에게, 살붙이에게 매달렸으니, 그 살붙이의 친근하고도 낯선 온기로 제 자신을, 두려움과 무의미 앞의 제 무력함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남편이 여비가 모자란다 하자, 아내는 그래도 힘을 내어 가서 제 처녀 시절 혼수인 시계와 브로치를 전당 잡혔다 —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폴토라크는 크림으로 떠났다. 아내가 배웅하며 딱딱한 좌석 차표를 사 주었다.
포돌스크에서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딱딱한 좌석칸을 국제 침대칸으로 바꿔 탔다. 길동무는, 몇 마디 나누자 공통의 지인이 생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잠들기 전 그들은 식당칸으로 가, 백포도주를 마시며, 혁명을 거치며 전문가로 변하고 그 탓에 거세당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 관해 이야기했으니, 인텔리겐치아의 사회적 봉사가 혁명에 의해 셈에서 지워진 일에 관해서였다.
세바스토폴에서 얄타까지 폴토라크는 자동차로 실려 갔고, 크림은 아름다웠다. 바다, 산, 길, 사람들의 들뜸, 칠월 — 모두가 황홀했다 — 그래서 폴토라크는 베라 그리고리예브나에게 갈 때 애써 눈썹을 슬픔으로 모았다.
크림은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를 바꿔 놓았다. 폴토라크는 테라스 안락의자에 앉은 그녀를 보았으니, 그녀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이마에 입 맞췄다. 폴토라크는 늘 그대로의 자신이 되려고 제 주름을 풀었다.
그녀가 말했다.
— 잘됐어요. 의사 선생님이 내가 완전히 좋아졌대요. 모스크바로, 비소키예 고리 요양원으로 가야 해요, 거기서 새 방식으로 새로 기흉을 넣어 준대요, 게다가 여기선 더위가 내게 안 좋아요. 한 달이면 나는 일어날 거예요 — 그리고 가을부터는 다시 무대에 서고요!
이것이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한 첫마디였다.
이월에 크림으로 떠난 뒤, 그녀는 — 좋은 쪽으로 — 몹시 달라져 있었다. 햇볕에 그을고 살이 올랐으며, 거뭇한 홍조가 돌고, 눈은 더 깊고 아름다워졌으며, 눈 밑 그늘이 매혹적이었다. 신체의 변화 외에 정신의 변화도 있었으니, 그것이 문득 폴토라크를 들뜨게 하고 그의 마음에 들었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부끄러움과 호기심을 잃었다 — 그녀는 모스크바에 대해 거의 묻지 않고, 대뜸 체온을 몇 시에 재는지, 어떻게 땀이 나는지, 위가 어떻게 소화하는지, 무엇을 먹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살붙이를 몹시 반가워하며 농담을 했다 —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도 장단을 맞춰 답했다.
의사답게 근심하고 근심스레 농을 던지는 의사가 폴토라크를 공원으로 데려갔다. 공원 작은 벤치에서 의사는, 결핵이 장으로 옮아갔으며, 죽음은 피할 수 없고 그 시한은 며칠, 아니 몇 시간 단위라고 말했다. 폴토라크는 눈을 떨구고 주름을 모았다. 의사는 비꼬듯 흘긋 보고는 잠시 말이 없다가 농을 던졌다.
— 뭐, 뭐, 다들 가는 데지요!
폴토라크가 빙긋 웃었고, 둘은 의사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모스크바에 새 소식은 뭐가 있소? — 의사가 물었다.
해 질 녘에 폴토라크는 바다로 갔으니, 바다는 푸르렀고, 바위에는 수영복 차림의 남자와 여자들이 한데 뒹굴고 있었다. 폴토라크는 벌거벗은 기사 부인 둘과 마주쳐,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농을 쳤다. 저녁은 베라 그리고리예브나의 잠자리 곁에서 보내며, 그녀의 손을 제 손에 쥐었다. 밤늦게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잠들자, 폴토라크는 의사의 안내로 의사와 함께 붉은 포도주를 마시러 그리스 식당으로 갔다 — 의사는 시원찮은 길동무였고, 아는 기사 부인들은 집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베라 그리고리예브나와 폴토라크는 세바스토폴로 떠났다. 세바스토폴 호텔에서 기차 시각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에게 관장을 도와 달라 청했고, 그는 식당으로 따뜻한 물을 가지러 갔다. 세바스토폴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는 밤에 떠났다.
환자는 얄타에서 오는 자동차에 기진하여, 옷도 벗지 않은 채 역에서부터 잠들었다. 침실칸은 배부른 고요와 밤 등불의 보랏빛 속에 점잖게 잠겨 있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깨어 있었으니, 산과 자동차의 하루는 그를 조금도 지치게 하지 않았다. 그는 객차가 잠들 때까지 따분해하며, 담배 피우러 복도로 나가고, 코냑 한 잔 마시러 식당칸에 들렀다. 잔코이 부근에서 환자가 깨어 물을 청하고,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에게 옷 벗는 것을 도와 달라 했다. 그는 그녀의 부츠 끈을 풀고 양말을 벗겼다. 그러자 그는 제 병의, 언제 찾아왔는지 모를 그 병의 불안한 발작을 느꼈다.
— 나머지는 내가 벗을게요, — 그녀가 말했다. — 나를 좀 붙잡아 줘요.
그녀가 블라우스를 벗고 치마의 후크를 풀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주었다.
— 가방에서 슬리퍼하고 잠옷을 꺼내 줘요, — 그녀가 말했다. — 씻는 걸 도와줘요. 돌아서요. 수건을 줘요.
그녀는 의사에게 말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 말하기가 힘겨웠다. 부축 없이는 걸을 수 없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세면실 칸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씻으려 어깨에서 잠옷을 내렸다. 그녀가 잠옷을 입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그녀를 잠자리로 데려가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홑이불로 감쌌다. 그녀는 물을 청하고, 베개를 고쳐 달라 하고, 손을 머리 밑에 받친 채, 빙긋 웃으며 쉬었다. 그는 그녀의 발치에 앉았으니, 씻고 흡족한, 무탈하게 평온한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는 크고 아주 아름다운 젊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제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쉬고 있는 그녀의 눈은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침실칸을 좇았고, 그녀에게서는 불안한 향수 냄새가 났다. 국제 침대칸의 밤이 풀먼 객차로 평온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뛰어난 변호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으니, 그의 두 손 밑에 무릎이 놓인 베라 그리고리예브나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는 아마 고해할 때 쓸 법한 그런 어조로, 더없는 진실로, 더없는 솔직함으로 말했다. 그는 발작 중이었다.
— 사랑이란 무엇이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 — 그리고 삶이란 무엇이오? — 죽음이란 무엇이오? — 누가 알겠소? — 그리고 진실이란 무엇이오? — 나는 거짓인 진실을 많이 아오! 그리고 크나큰, 아주 크나큰 정의가 된 거짓도 아주 많이 아오. 갖가지 미덕이며 정절이며 의무 따위는 말하지 않겠소 — 죽음 앞에서 그건 죄다 부질없으니! — 당신은 몹시 아프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 — 몹시 아프오! — 당신은 알 거요, 당신이 싸우는 게 — 병이 아니라 — 죽음 그 자체와 싸우는 것임을!…… — 죽음은 — 아무것도 아니오. 나는 거기 무언가 있으리라 믿지 않소 — 당신도 그걸 알 거요, 베라 그리고리예브나. 모든 진실, 모든 정의, 온갖 도덕은 죽음 앞에서 — 아무것도 아니오, 바로 죽음이 무(無)요, 영(零)이기 때문이오 — 한데 영을 곱하면 모든 것이 제 자신으로 변하지. — 사랑이란 무엇이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 — 사랑이란 무엇이오? — 갖가지 진실로 차려입은 사랑이 많이 있소.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천 번씩 되뇌어야 하는, 그것뿐인 사랑이 있소. 기도 같은 사랑이 있소. 몽상의 사랑이 있소. 자연은 죽음처럼 잔혹하오. 이 모든 사랑은, 자연이 준 단 하나, 중세 기독교에서 남은 우리 도덕이 더럽혀 놓은 그것으로 가는 서곡일 뿐이오 — 단순하고 육체적인, 물질적인 — 나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소 — 육체의 쾌락으로서의 사랑으로 가는 서곡 말이오. 죽음의 영 앞에서는 — 죄다 헛소리요, 영이 오기 전까지는 육체의 사랑이 남소 — 이 하나 말고 다른 모든 진실은 그르오. — 나를 심판하시오, 허나 나는 정직하오. 나는 죽음 앞에서 말하고 있소 — 당신은 그걸 아오. 한 달 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소? — 나는 정직하게 말하오 — 나는 당신의 손에, 눈에, 가슴에 입 맞추고 싶소, 아무것도 영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당신은 여자요, 행복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여자요. 나는 당신에게 — 우리에게 — 행복이, 육체의 행복이, 기쁨이, 쾌락이 있기를 바라오, 그것으로 우리는 죽음과 싸우는 거요. 나는 말도, 도덕의 인습도 두려워하지 않소. 나는 지금 당장 당신에게 입 맞추고 싶소 — 당신을 위해. 이 모든 게 진실과 도덕 바깥에 있게 하시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더없이 능란한 웅변가처럼 말하며, 눈을 떨구고 손바닥으로 가렸다 — 그리고 그는 이미 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없이 부드럽게 베라 그리고리예브나의 겨드랑이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밀쳐 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얹었다. 그는 말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머리 뒤로 젖혀진 채 놓여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몹시 가쁘게 숨 쉬었으나, 심장은 거의 뛰지 않았다.
— 입 맞추지 말아요, — 그녀가 말했다. — 내가 당신을 옮길 거예요.
— 멋진 사람! 우리는 세균보다 강하오! — 그가 황홀하여 외쳤다.
그녀의 입술이 아픔으로 오므라들었고, 그녀가 그의 이마에 입 맞추자, 그녀의 손이 그의 목으로 떨어졌다.
— 이건 추악한 짓이에요, 예브게니,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말하고는 문득 흠칫하더니, 떨기 시작하고, 휘파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제 자신을 가눌 능력을 잃었다.
그리고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서둘러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이튿날 낮에 베라 그리고리예브나의 상태가 나빠졌다. 아침부터 체온이 사십 도에 다다랐고, 맥이 사라졌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땀 웅덩이에 누워,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폴토라크는 기차를 뒤져 의사를 찾다가 딱딱한 좌석칸에서 의대생을 찾아냈다. 의대생은 환자를 하리코프에서 객차 밖으로 내려야 한다고 했다 — 폴토라크는 거절했다. 하리코프에서 환자에게 장뇌 주사를 놓았고, 저녁 무렵 죽어 가는 여자는 잠 속에 잠잠해졌다. 폴토라크는 차장에게 지켜봐 달라 부탁하고 점심을 들러 식당칸으로 갔다 — 답례 삼아 의대생에게 보드카와 백포도주를 대접했다. 이미 대(大)러시아에 든 깊은 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위쪽 침상에서 자고 있을 때,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그를 깨웠다. 그녀는 그의 잠자리에 머리를 기댄 채 서 있었다.
— 여보, — 그녀가 속삭였다. — 당신을 깨웠네요, 한참 전부터 당신을 불렀는데, 못 듣는군요…… 내게로 와요, 한 번 더 당신에게 입 맞추고 싶어요 — 죽기 전에…… 나 자신에게도, 언니에게도 부끄러워요…… 너무 무서워요. 나는 죽어요…… — 그녀는 들러붙은 입술을 겨우 움직이며 말을 뱉었다. 그녀의 입술은, 새파랗게, 떨렸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답했다.
— 왜 이래, 왜 이래, 진정해, 누워!…… 곧 갈게……
—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예브게니?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을 한 거예요? —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 당신이 나를 사랑하긴 해요? — 언니에게 부끄러워요. 온 세상 앞에 무서워요.
모스크바에는 비가 쏟아졌다. 역에서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의 아내와 아이들이 맞았다. 자매가 울며 입을 맞췄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짐꾼과 함께 가방을 날랐다. 여자들과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택시를 탔고, 아이들은 전차로 갔다.
— 예브게니에게 고마워요, 그이가……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말했다. 그녀는 전에 한 번도 폴토라크를 부칭 없이 부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낯선 눈으로 흘긋 보며, 그 눈을 매질 아래 들이댔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숨을 그러모았다. — 예브게니에게 고마워요, 그이가…… 그이가 아주 자상했어요, 그이가…… 밤마다 내 곁에 앉아 내 안식을 지켜 줬어요,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말했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의 눈은 여전히 낯선 채였다. 아내가 남편을 고맙게 바라보았다.
집, 블라디미로-돌고루콥스카야의 집에서 수위와 청소부가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를 삼층으로, 폴토라크 집의 마호가니의 묵직함 속으로 들어 올렸다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여기서 다시, 마지막으로 — 관에 담겨 내려가게 하려고. 아내가 서재 문턱에서 혼절하여 비틀거렸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서재의 소파에 뉘어졌다. 아내가 자매를 거들러 서재에 들어갔다가, 복도에서 소리 없이 울려고 거기서 나왔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환자에게 갔고, 그녀가 눈으로 그를 불렀다.
— 여보, — 그녀가 속삭였다. — 언니는 어디 있어요? — 당신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 알아듣지 못한 채, 문 쪽을 흘긋 보고는 서재에서 나왔다. 그는 비극적으로 두 손을 비틀며 아내를 제게로 손짓해 불렀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 끔찍하오 — 죽음이란! — 그가 말했다. — 나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진이 빠졌소. 사흘 밤을 못 잤고, 게다가 당신은 나를 궤짝짝에 태워 거기로 보냈지. 그녀는 가는 내내 헛소리를 했소, 음란한 헛소리를. 그녀는 정상이 아니오. 산 채로 썩어 가는 시체요, 끔찍하오!…… 게다가 그 음흉한 꼴, 그녀는 미인이지, 젊은 시절 당신처럼. 허나 그건 부질없는 소리고. 끔찍하오, 죽음이란!……
아내가 남편을 끌어안았으니, 끔찍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낯설고도 친근한 인간의 온기에 매달려 제 자신을 지키려 끌어안듯이. 아이들은 가방 위에서 울었다. 아내가 히스테리의 경련으로 떨기 시작했다.
— 어쩌겠어요, 어쩌겠어요 — 이게 인생인걸! — 아내가 속삭여 말했다.
— 나는 모질지, 나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소, —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침울하게 말했다. — 사람이 죽어 가는 걸 기다리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아내가 공포로 떨었다.
— 네, 그럼요, 네, 어서 끝나기를……
— 나는 집에 있을 수가 없소. 여기가 무섭고, 사흘 밤을 못 잤소. 아는 사람들한테 가 있겠소.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손에 손수건을 든 채, 머리를 벽에 기대고, 무력과 슬픔 속에 서 있었다. 아내가 그를 끌어안고 그에게 매달렸다. 복도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고, 벽에서 죽음의 텅 빈 눈구멍을 한 뿔 달린 사슴 두개골이 폴토라크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내가 서재 문을 열고, 잠시 문턱에 서 있다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욕실로 갔다.
이것이 병이었다. 반 시간 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헐렁한 여름 양복에 말끔히 면도하고, 즐겁고 기운차게 계단을 내려갔다. 모스크바 위로 비가 지나가, 아스팔트를 적시고 김을 피워 올렸다. 지보데르카는 짐마차들로 요란했다. 폴토라크는 활기 속에 베즈데토프 형제의 골동 지하실로, 중세와 눅눅함 속으로, 옛 향수와 아교와 광택제 냄새 속으로, 마호가니와 자기와 청동의 옛것 속으로 갔다. 파벨 표도로비치가 작업대 위에 코냑이 든 — 황실 다이아몬드 그릇 세트의 — 유리병을 올려놓고, 파벨 양식 소파의 비밀 서랍들을 보여 주었다.
— 파벨을 두둔하시오? — 베즈데토프가 물었다.
— 그렇소, 안 그럴 이유가 있소. 파벨은 — 몰타 기사단원이라, 귀신이나 알 노릇이지, 군대식 형이상학이오. 게다가 파벨 양식 소파에서 여인과 저녁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소, 세기들에서 기운이 흘러나오거든. 세기도 현대도 동시에 네 밑에 있는 셈이지.
— 여인한테는 예카테리나 침대도 좋소 — 한데 알렉산드르는, 아무래도 — 좁지, — 파벨 표도로비치가 말했다.
코냑을 한 잔씩 마셨다.
— 셔우드는 왔었소?
— 왔었소. 콜롬나에 다녀오라더군.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전화를 걸어, 나데즈다 안토노브나 사란체바를 수화기로 불렀다.
— 나댜, 당신이오? — 나 왔소. 우리 볼까요? — 푸시킨 동상 앞에서?
마호가니, 그 부서진 조각들이 구석마다 쌓여 있고, 또 그 부서진 조각들이 엄격하고 오래된 질서로 정돈되어 옛 시대를 되살리며, 옛것으로 닦여 빛났다 — 지하실의 어스름 속, 잿빛 거미줄 속에서 중세를 이루었다. 뼈 부스러기로 만드는 목공용 아교는 언제나 죽음 냄새를 풍긴다. 한편 옛 향수는 — 고결하니, 이 파출리는.
모스크바에는 이백만의 사람이 살았으니, 거대한 인간의 숲, 밀림이었다. 한 사람과 수많은 사람이 결코 서로를 알지 못하고,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아주 많은 이들이 제 어우러짐을 끝내 알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숲 — 그리고 이 백만의 숲에는 저마다의 사랑이, 일이, 옷이, 탁자가, 의자가, 잠자리가 있었다. 백만이 사는 도시에는 침대와 수건이 얼마나 많아야 할 것인가!
폴토라크는 여자들의 머리가 어떻게 입술로 숙여지고 입맞춤 아래 눈이 떨리는지, 어떻게 힘 빠지게 하는 말이 오가는지 잘 알았다 — 알코올의 소음과 속삭임 너머로 의식이 무너질 때, 어떻게 여자들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머리로 치마를 밀어 무릎을 드러내는지.
13
콜롬나 승강장에서 폴토라크는 폴레티카에게 나데즈다 안토노브나 사란체바를 소개했고,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폴레티카와 마호가니 세공가들에게 인사하며, 더없이 도도한 여인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근무 후 푸시킨 동상으로 올 때처럼 남자 양말이나 사라사 원피스 차림이 아니라, 여행자의 법도대로 영국제 푸른 정장에 비단 양말, 굽 없는 여행용 부츠 차림으로, 손에 손가방을 들고 있었다 — 서른 줄로 보아 줄 만했다. 폴토라크는 나데즈다 안토노브나와 함께, 중세의 개들이 짖어 대는 어둠 속으로 떠났다.
호텔의 잠에 취한 복도지기가, 양초 안 든 손으로 속바지를 추켜올리며 짧게 물었다.
— 방 하나요, 아니면 둘이요?
폴토라크가 엄하게 답했다.
— 이인용 하나, — 그러고는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를 묻듯이 흘긋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덧창 너머 창밖을 바라보았다. 복도지기는 생쥐와 크레올린, 소독약 냄새가 나는 복도를 따라 앞장섰다. 이 집의 객실들은 백오십 년쯤 된 것이었고, 방은 낮고 벽이 두꺼웠으며, 창은 덧창으로 가려져 있었다. 새벽빛이 덧창 틈으로 기어들었으니, 아마 요새의 능보로 기어들 듯했다. 복도지기는 탁자 위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재떨이에서 꽁초를 제 손에 쏟아 들고는 가 버렸다. 양초가 도둑처럼 타올랐다.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제 가죽 외투와 제복 모자를 갈고리에 걸었다.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손에 손가방을 든 채 탁자 곁에 서 있었다.
— 한데 당신은 나한테 묻지도 않았네요, — 그녀가 처음으로 너라는 말을 쓰며 말했다. — 나한테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안 물었어.
— 여보, 그게 우리한테 무슨 상관이오!? — 폴토라크가 답했다. — 그래, 당신한테 남편이 있소?
— 네, 있어요, 그것도 여럿, — 나데즈다 안토노브나가 무심하게 말했다. — 당신은 나를 여보라 부르네요 — 전에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는데. 알아챘어요? —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말은 — 이제 죽어 버렸어요.
— 여보, — 폴토라크가 말하며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를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 내 사랑, — 당신은 늑대 몰이를 본 적 없소? — 새벽에, 숲에서, 이슬을 밟으며, 침묵 속에 사냥꾼들이 제 자리에 선다오 — 몰이꾼들이 숲에 작은 깃발을 둘러 세우고 살아 있는 사슬로 늘어서지. 늑대들은 에워싸였소. 한데 늑대들은 제 둘레에 죽음이 섰다는 걸 모르오, 무엇보다 고요한 그곳에. 숲 위로 새벽이 오지. 당신과 나는, 늑대처럼 — 깃발에 갇혔소 — 삶은 이 방 문턱 너머에 남았소…… 하긴, 두서없이 말하는군. 여보, 삶은 문턱 너머에 남았소 — 나한테는 아무것도 중요치 않소. 남편도, 과거도, 일상도 —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생활 밖으로 내던져졌다는 게 황홀하오.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제 어깨를 풀고, 모자와 장갑을 벗고, 덧창을 열고, 양초를 껐다. 그 새벽 시각에 양초는 정말 필요 없었다.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탁자 위에 잠시 서 있다가 창가로 가, 능보 같은 창턱에 앉아 작은 창을 열었다. 창밖으로 새벽이 펼쳐졌고, 땅이 어둠과 안개에서 풀려나며 해 쪽으로 돌아갔다. 방에는 몹시 지친 방의 벽을 닮은, 잿빛의, 조금쯤 모질고 지친 어스름이 끼어 있었다.
— 새벽을 기다려요, — 나데즈다 안토노브나가 말했다. — 콜롬나가 밤에서 기어 나오는 걸 보는 건 나도 처음이거든요. — 늑대 얘긴 너무 두루뭉술해요. 그래요, 나한테는 남편이 여럿 — 그리고 당신이 오늘 내 다음 남편이 될 거예요. —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반박하지 못하게 했다. — 당신은 남편이라는 말이 무섭죠 — 무서워 말아요, 나는 당신의 자유를 뺏을 생각도, 당신의 종이 될 생각도 전혀 없으니까. 포도주나 꺼내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가방에서 바르사크 한 병을 꺼냈다.
— 당신은 남편이라는 말이 무서워서 늑대 같은 걸 지어내는 거예요. 그럴 것 없어요, 훨씬 단순하니까. 옛날에는 — 몸을 내맡긴다, 네 것이 된다는 말이 있었죠. 죽은 말들이에요! — 나는 누구에게도 몸을 내맡기지 않아요, 나는 남자처럼 취해요. 그리고 그 어리석은 말 — 사랑.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한 적도 없어요. 나는 남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나 자신을 섬기는 게 재미있어요. 어느 좋은 날 여자가 되는 게 재미있어져서, 나는 여자가 됐어요 — 그때 나는 열여섯이었죠. 나한테는…… — 그녀가 잠시 말이 없었다. — 하긴, 나도 몰라요. 당신은 내가 몇 살인지도, 어디서 일하는지도, 무엇으로 사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네 번째 만나는 거예요.
모스크바에서는 새벽이 우리를 자주 덮치지만, 우리는 집들에 가려 그걸 못 봐요. 봐요, 오 분 뒤면 해가 뜰 거예요, 세상이 얼마나 장엄한지, 하늘이 얼마나 너른지, 땅이 이슬로 씻겼어요. 내가 왜 당신과 함께 왔는지 알고 싶어요? — 우리가 강의 벼랑을 따라 걸어, 강에 맞서 요새를 쌓는 풀밭으로 가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당신은 시인처럼 말하는군, — 폴토라크가 말했다. — 포도주를 더 마셔요.
— 나는 기프로메스에서 일해요, 알잖아요, 한데 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래요, 포도주를 더 따라 줘요. 당신은 혁명을 어떻게 생각해요?
폴토라크가 포도주 따르기를 멈췄고, 그의 눈이 굳어졌다.
— 무엇에 대해서? — 그가 되물었다.
— 혁명에 대해서요. 혁명이 시작됐을 때 나는 열네 살이었어요. 전쟁이 시작됐을 때 나는 계집아이였죠. 하긴, 이건 나중에 또 이야기해요.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는 포도주를 마저 따랐다. 그는 방의 지친 어스름 속에서 창가로 다가가 잔을 건넸고, 그의 얼굴은 잿빛이 돌고 이는 금빛이 돌았다. 그는 창턱 곁에 무릎을 꿇고, 나데즈다 안토노브나의 무릎에 머리를 얹고, 그녀의 무릎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머리 위에 잔을 올려놓고 그것을 받친 채, 제 머리를 창틀로 젖혀 동쪽을 바라보며, 하늘과 안개를 좇았다. 안개에서 크렘린의 탑들이, 가장 멀리 있는 마리나 므니셰크의 탑이 기어 나왔다. 해는 아마 이미 안개 뒤로 떠올랐을 것이다.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단숨에 포도주를 들이켜고, 폴토라크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그를 무릎에서 밀쳐 내며 창에서 일어났다.
— 그래도 우리는 밤의 사람들이에요, — 그녀가 말했다. — 덧창을 꼭 닫아요, 밤이 돌아오게. 우리 삶에 있는 모든 건 아주 적어요. 입 맞춰요 — 도둑처럼 말고, 파렴치하게…… 나는 알아요 — 당신은 여자들로 앓고 있죠. 나는 새벽을 보며 생각했어요, 내 안에서 아마조네스가 깨어난다고, 그리고 짐작도 못 했던 크렘린의 탑들을 봤을 때, 나는 남편들과 함께 싸움터에 나가던 옛 게르만 여인들이 떠올랐어요. 그러다 이런 생각을 했죠. 나는, 나도 모르게, 호민관도 될 수 있고 매춘부도 될 수 있다고. 나는 내가 언제 진짜인지 몰라요. 당신과 있을 때 나는 냉소적인 유럽 여자, 관광객, 무엇이든 허락된 그런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에게도 무엇이든 허락돼요. 이건 어릴 적부터예요, 나는 어두운 방에서 눈을 감아요, 밤마다 그래요 — 누가 이 방에 들어와야 하는지 나는 몰라요 — 한데 수천의 아는 이들 가운데, 들어온 이가 누구든 나는 알아채요, 머리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도 모르는 무언가로, 바로 그것으로, 지금 이 새벽처럼, 세상과 더불어, 해와 더불어, 심장이 유달리 뛰기 시작하는 그것으로. 입 맞춰요.
폴토라크가 덧창을 닫았다. 여자들의 겨드랑이에서는 봉랍 냄새가 난다. 그리고 능보 같은 벽을 한 방, 새벽에서 훔친 어둠 속으로 함몰한 방, 러시아의 군청들을 두루 거쳐 온 군청 소재지 여관방, 아침, 입맞춤 — 모든 것이 정욕의 관청이 되었으니, 군청 소재지 여관 침상의 모든 관청이 그러하듯 몹시 무서웠다. 유럽의 도덕은 이 관청들의 비밀을 제삼자에게 발설하지 말라 명했다.
14
폴토라크는 이 콜롬나의 밤에 잠들지 못했다.
일곱 시 무렵 그는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를 홀로 남겨 두고 공사장으로 떠났다. 그녀의 어깨는 드러나 있었고, 손을 머리 밑에 받친 채, 입을 어린아이처럼 반쯤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거리에서는 햇볕이 눈을 부시게 했고, 거리는 텅 비고 먼지투성이로, 간판들에 떠받쳐 누워 있었다. 천 년 된 러시아 셔츠를 입은 마부가, 제 사륜마차 마부석에 앉아, 바로 그 갖가지 러시아 옛것의 천 년으로, 공사장의 도랑과 둑의 참호 속으로 들어섰다. 공사장의 공간이 눈에서 멀어졌고, 멀리서 또 가까이서 굴착기들이 콧김을 뿜고, 사이렌이 울부짖었으며, 멀리서 묽은 공기가 터졌다. 공간들은 사회주의를 위해 싸웠고, 사륜마차는 네 바퀴로 삐걱댔으며, 말의 꼬리뿌리는 지의에 헐벗어 있었다. 모스크바강은 아직 옛 물길을 따라 흘렀고, 천 년 된 부교로 그것을 건너야 했다. 오카는 수력공학 기사들의 말마따나 제 “강의 유황(流況)”을 부수고 — 배수 운하로 흘렀다. 가물막이로 둘러싸인 그 옛 물길은 모놀리트의 콘크리트 능보로 쌓여 올라가 있었다.
숙박소에서 폴토라크는 나르잔 광천수를 청했다.
폴레티카 교수가 사디코프 기사와 앉아 있었다.
— 그분은 콜롬나에서 딸 류보비 피메노브나 폴레티카와 알리사 라슬로와 함께 삽니다, — 사디코프가 말했다.
—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 스물세 살쯤 된 처녀입니까? — 폴토라크가 폴레티카 교수보다 앞질러 물었다.
폴토라크는 떠올렸다. 콤소몰 단원 류바 폴레티카, 삼 년 전, 삼월, 나데즈다 안토노브나와의 만남처럼 평범했으되, 예사롭지 않은 결말. 류보비 폴레티카는 고고학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세상에는 제 삶을 기이한 것에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삼월에 스무 살의 류보비 폴레티카는, 콤소몰 활동에서 짬을 내어, 제 시간과 생각을 옛 봉분에서 발굴되는 돌 초원 여인상의 어두운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바쳤다. 모스크바에서 이 여인상들은 역사박물관 마당에 무더기로 쌓여 보관되었으니, 육중하고, 백 푸드가 넘으며, 무섭고, 바람과 땅의 세월에 갉아먹혀, 광대뼈와 젖가슴과 배로 이루어져 있었다. 류보비 폴레티카는 이 여인상이 생겨난 시대를, 그것을 만든 민족을, 그 역사를 찾았다. 그녀는 볼가 너머로 고고학자 파울 라우에게 가, 여인상들을 발굴하며, 그것들을 만든 민족과 시간과 기억을 잃어버린 채 수백 년 동안 여인상들을 간직해 온 그 헐벗은 초원 풍경을 보았다. 그때 그녀는 볼가 너머, 의붓아버지의 조상인 웅그르족이 헝가리로 떠나간 그 땅에 있었다. 그때 류보비는 볼가 너머에서, 한때 꽃피고 사람이 북적이던 텅 빈 깃털풀 초원에 대한 상념을, 그 풍경 너머에서 죽어 가며 수천 년과 상념을 위해 — 이 무섭고 돌 같은 여인상들을 남긴 유목민들의 문화에 대한 상념을 가지고 돌아왔다. 여인상들은 정말 무서웠으니,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가늘고, 소처럼 배가 불렀다 —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그것들의 우아함을 이야기했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이 여인상들의 옷 주름에 대해, 텅 빈 초원의 눈을 그린 메마른 선에 대해, 낮은 이마에 대해, 다산의 상징으로 불거진 젖가슴과 배에 대해 몇 시간씩 이야기했다. 이 여인상들은 모권제의 증표로 생겨났다. 여인상을 만든 민족의 미학을 솜씨의 법칙으로 연구하며, 류보비는, 이 여인상들에 제 예술을 남겨 그것으로 시간을 멈춰 세우고 수천 년을 위해 제 미학을 남긴 그 알 수 없는 민족으로부터 인류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곱씹었다. 류보비는 — 이 여인상들로 — 유목민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과 유랑의 세기들을 읽었다. 폴토라크는 처녀들의 머리가 어떻게 입술로 숙여지고 입맞춤 아래 눈이 떨리는지, 어떻게 힘 빠지게 하는 말이 오가는지 잘 알았다 — 그는 류보비 폴레티카의 처녀 방으로, 콤소몰 단원들의 혁명에 대해, 돌 여인상의 세기들에 대해 들으러 다녔다. 류보비는 여인상들이 보관된 역사박물관의 둥근 천장 아래로 폴토라크를 데려갔다. 폴토라크는 이 돌 통나무들을 우상숭배의 잔재로, 로자노프식 성(性)의 신비주의로, 슬라브주의적 스키타이주의로 받아들였다. 폴토라크는 처녀가 제 시간을 신비주의를 위해 이 옛것에 바쳤다고 여기고 싶어, 류보비와 제 자신에게 그렇게 설득했으나, 류보비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류보비는 세기들을 미래에 바치려 그것을 파헤쳤다. 노동으로 가득 찬 이 처녀의 세계는 깨끗하고 맑았다. 붉은 삼월의 해 질 녘은 류보비에게 인류의 초원의 새벽을, 지구상 혁명의 여명을 떠올리게 했다. 폴토라크는 메피스토펠레스로, 그리고 성상화 같은 혁명가로 류보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입술을 제 입술로 숙이려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얹은 저녁이 있었다 — 그리고 그 저녁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하고 메마른 말로, 포옹이라곤 전혀 없이, 눈을 떨구고 손을 늘어뜨린 채, 아주 나직이 말해졌다. 그녀는 그 저녁 그가 자신에게, 손에조차 입 맞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 뒤 그들은 영영 헤어졌으니, 그녀가 사랑을 순결로, 나뉠 수 없는 것으로, 위업으로 여긴 까닭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손에조차 입 맞출 권리를 가지려면, 이 일을, 그들의 사랑을 온 세상에,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 옛 아내에게 부끄럼 없이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류보비는, 아이들과 옛 아내 앞에서 제 행복에 대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는지, 제 행복을 위해 남의 삶을 부술 권리가 있는지 결정할 힘이 없어 괴로워했다. 류보비는, 사랑이 떠났다면 거짓이 온 것이고 — 거짓은 달아나야 할 추악함이라는 것으로, 제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한 채 폴토라크를 두둔했다. 그때 사흘 뒤 그들은 헤어졌으니, 그가 아이들을 희생할 힘도 명예의 권리도 없다고 했기에, 그녀가 제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의 아이들에게 바쳤다. 그녀는 그의 아이들을 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만나러 오지 말라 했다. 그리고 헤어지며 말하기를, 자신에게 사랑은 하나이며, 평생토록 그를 사랑하고, 그가 자신이 깨끗하며 사랑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게 될 때 그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혁명을 남겨 두었다.
기사 숙소의 창밖에서 작은 기관차가 콧김을 뿜고, 기적을 울리며 굴러갔다.
폴레티카 교수는 탁자에 무겁게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폴토라크 기사가 증오에 차 교수를 흘긋 보았다.
— 그 아이가 내 딸이오, 류보비 피메노브나, — 폴레티카가 말했다.
— 몇 해 전에 그분을 알았습니다, — 폴토라크가 공손히 말했다.
— 그 아이는 공사장에서, 고고학 위원회에서 일하며, 물에 잠길 옛 기념물들과 작별하고, 마리나 므니셰크 탑의 역사를 연구하오. 공산주의자요, — 사디코프가 말했다.
떠나간 작은 기관차 자리로 새 기관차가 달려와 창 밑에서 콧김을 뿜었다.
무분별한 남성의 다처(多妻)는 병이기에,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는 사랑할 줄 몰랐고, 수백 년 동안 사랑이라는 말을 규정해 온 그 사랑을 알지 못했으며, 그가 사랑한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여자들 속의 제 자신이었다. 나데즈다 안토노브나가 옳았으니, 폴토라크는 여자들로 앓았고, 그에게는 끊임없이 새롭고 또 새로운 관계가 어른거렸으며, 비정상의 헛것이, 여러 여자가 한꺼번에 뒤엉킨 것이, 수많은 여자의 무릎과 입술과 등과 배가 그를 황홀하게 했다.
모스크바에서, 떠나기 한 시간 전, 폴토라크가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를 역으로 데려가려 서두를 때 — 볼샤야 모스콥스카야 호텔 객실에서 — 영국인 셔우드가 폴토라크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 결정됐소?
— 그렇소, 결정됐소! — 폴토라크가 답했다.
— 결정됐소, — 셔우드가 말했다.
둘은 더없이 주의 깊게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류보비 폴레티카는 피멘 세르게예비치 폴레티카 교수의 딸이었다. 살인자가 살인의 장소로 이끌린다는 이 법칙은 옳다. 그때, 삼 년 전, 류보비 폴레티카는 폴토라크의 삶에 들어왔다가, 폴토라크에게 굴복하지 않은 모욕적인 순결로 그의 삶에서 떠나갔다. 사람들은 굴복하지 않음을 잊지 못하니, 어떤 이들은 순결을 따귀처럼 느낀다. 모든 병이 그러하듯, 사물의 논리란 있을 수 없었다. 폴토라크는 류보비의 무릎을 보았다 — 순결에 침을 뱉는 것은 — 어떤 이들에게는 행복이다. 폴토라크는 잠 못 이룬 밤 탓에 머리가 몹시 아팠다. 세상이 유리처럼 되고 모든 것이 새로 다시 세워지는 그런 두통을, 폴토라크는 삶의 충만으로 여겼다 — 헛소리의 가장자리에서, 불면으로 무거워진 채, 그는 서두르고, 일을 벌이고, 어디에나 닿아야 했으며, 앉아서 저린 팔다리가 마비되듯, 심장이 마비된 듯 지나치게 긴장하여 뛰는 것을 느껴야 했다. 해가 빛났으나, 폴토라크에게 세상은 백야 때처럼 잿빛이었다.
식당으로 부랑자 이반 오조고프가 들어왔다.
폴토라크는 시(市)전기궤도국 일로 공사장에 왔다. 전기기계부 부장 사무실에서 폴토라크를 기다린 것은 전기기계부 노동자 생산회의 의장으로, 졸리고 과묵한 사람이었다. 공장 식당의 클럽에서는 작업을 시전기궤도국에 넘기는 문제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의장은 자료를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 노동자 시소예프요. — 서류를 뒤적이고는 서두르지 않고 덧붙였다. — 문화 찻집으로 가시지요.
제이 마을을 지나갔다. 폴토라크의 겨드랑이에는 서류가 든 가방이 놓여 있었다. 머리가 잠으로 가득 찼다. 시소예프가 느릿느릿 거드름을 피우며 앞장섰으나, 폴토라크가 그를 뒤따라 서둘러야 할 만큼은 빨랐다. 혁명 전 폴토라크는 생산 현장에서 일했고, 혁명 뒤에는 트러스트 위원회들에 박혀 있었다. 풀밭 위에 생겨난 거리 — 공사장의 노동자와 직원만 사는, 가게 주인도 잡계급도 없는 예사롭지 않은 도시의 거리 — 를 걸었다. 거리는 근무 시간이라 텅 비었고, 규격 주택들이 창에 커튼과 제라늄을 단 채 바둑판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갓 심은 포플러가 푸르렀다. 꽃밭이 둘린 네거리는 운동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퉁이에서는 협동조합 가게 간판이 햇볕에 데워지고, 확성기가 쉰 소리를 냈다.
— 이 집들에는 기사들이 삽니까? — 폴토라크가 물었다.
— 아니요, 상근 노동자들이오, — 시소예프가 답했다. — 나는 저기 저 집에 살지요.
무더운 아침에 수탉들이 서로 울어 댔고, 암탉이 꼬꼬댁거렸다. 운동장에서는 사내아이들이 막대치기를 하며 참새처럼 재잘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벤치 옆 아스팔트에 분필로 음란한 낱말을 정성껏 그리고 있었다. 시소예프가 더없이 엄하게 외쳤다.
— 바시카, 망할 녀석, 그래도 소년단원이라고! 귀를 잡아 뜯어 놓겠다! — 사내아이들이 줄행랑을 쳤고, 시소예프는 발로 아스팔트의 분필을 문질러 지우며 폴토라크에게 말했다.
— 바실리예프, 저 개구쟁이가 내 조카요, 저것 봐, 뒤꿈치에 불이 났구먼 — 어찌 매를 안 들겠소? — 그러고는 까닭 모를 말을 덧붙였다. — 올해 임금이 작년 대비 평균 십팔 점 오 퍼센트 올랐고, 노동생산성은 이십칠 점 오 퍼센트 높아졌소. 사회주의 경쟁이지요, 한데 내 형 바실리는 부랑자로 빠졌소. — 시소예프는 분필이 안 지워지는 아스팔트에 모질게 침을 뱉고, 울타리 너머로 사라진 사내아이를 눈으로 찾으며 말했다. — 두고 봐라, 망할 녀석, 또 단장한테 일러바칠 테니, 본때를 보여 줄 게다, — 그러고는 누그러져 앞으로 걸어갔다.
폴토라크는 읽은 적 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자연에 맞서 그것을 조직하는 데 끝이 없는 기계와 강철과 건설에 관한 — 거기에 절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에 관해 서사시를 지어야 한다는. 폴토라크는 생각했다, 가장 주된 것, 결정적으로 주된 것은 — 사람이라고, 그를 위해 기계가 살고, 그로 인해 기계가 살고 강이 흐르며, 건설하기 위해 사는 그 사람이라고 — 그러면서 폴토라크는 류보비 폴레티카를 떠올렸으니, 그녀를 나데즈다 안토노브나와 헷갈렸다.
공장 식당의 유리 건물은 땅에 내려앉은 것이 아니라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현관에서 폴토라크는 제지당해 외투를 벗으라는 청을 받았다 — 폴토라크는 놀랐다. 찻집에는 더없는 청결과, 신선한 공기와, 신선한 빛이 있었다. 폴토라크는 흰 벽과 화분이 놓인 흰 탁자들이 있는 큰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에서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방에서는 신문꽂이에 끼운 신문을 읽고 체스를 두었다. 시소예프는 폴토라크에게 담배를 끄거나 흡연실로 가 달라 청했다. 사람들과 방의 평온함에는 아무런 가식이 없었고, 흰 탁자와 벽의 느림은 요양원을 떠올리게 했다. 시소예프는 식권을 받으러 갔다가 우유와 차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폴토라크와 시소예프는 시간보다 일찍 왔다. 그들 탁자 맞은편에는 깃과 넥타이를 한 셋이 앉아, 먹으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붉은 머릿수건을 두른 처녀가 앉아 있었다.
— 저 양복 입은 자들은 — 누구요? — 폴토라크가 물었다.
— 시추공들이오. 젊은 노동자들이지요 — 여긴 죄다 노동자뿐이오, 둘째 교대요, — 시소예프가 답하고는 정성껏 먹기 시작했다.
— 한데 저 처녀는?
— 전기기계부의 자이치하인데, 역시 여공이오.
폴토라크는, 시소예프도 우크라이나 자수 셔츠에 끈 모양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음을 알아챘다. 마흔 줄의 노동자 둘이 시소예프에게 인사하고 젊은이들 곁에 앉아, 차를 가져와 드문드문 말을 주고받았다. 폴토라크는 극심한 피로에 잠겨 귀 기울이지 않았다 — 가방에서, 시소예프가 살펴보라고 건넨 회의록 묶음을 꺼내 제 앞에 놓았다.
옆 탁자의 손위 노동자가 말했다.
— 소책자하고 신문으로는 — 못 배우오. 학술서가 있어야 해, 진지하고, 또 건설 현장에 맞게, 특히 시골에 맞게 값싼 걸로. 알아듣기 쉽고 곱씹을 만한 그런 책이 있어야 하오. 죄다 찬찬히, 구석구석, 신문이나 소책자 식이 아니게. 예전엔 막대기로도 못 끌어들이더니, 이젠 초등 일 단계조차 자리가 모자라오.
폴토라크가 읽었다.
“노동자 발명 지원 세포 사무국 제17호 회의록, 29년 4월 30일. — 덤프카 차체가 저절로 기울어지는 경우에 대비한 장치 적용에 관해, 체르니 동지와 스타로스텐코 동지에게 저작권을 부여해 달라는 신청 검토. — 청취: 1) 체르니 동지에 대한 질문. 이 장치에 대해 차고 책임자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알린 적이 있는가? — 답변: 아무에게도 없으나, 작업 중 적용하여, 분할핀을 받치거나 너트를 조였음. 또 알리지 않은 것은 이것에 큰 의의가 있으리라 내다보지 못한 까닭임. 2) 코르슈노프 동지가 진술하기를, 자신은 1928년 5월부터 덤프카에서 일했고 오멜첸코프 동지가 안전장치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없었으며, 자물쇠공 체르니, 스타로스텐코 동지는 그 뒤에 이 안전장치 제작에 종사했다고 함. 3) 프로코포프 동지가 이 문제에 관해 경위를 진술함. 나는 차고 책임자로서 G부로부터 덤프카 기울어짐의 안전에 관해 개량을 해 달라는 공문을 받았다. 나는 오멜첸코프 동지와 의논했고, 그가 같은 날 죔쇠를 만들면 그것이 안전장치가 되겠다고 했다. 4) 핍킨 동지가, 해당 발명은 오멜첸코프 동지와 체르니, 스타로스텐코 동지 모두의 집단적 창작이라고 지적함. 5) 소볼레프 동지, 이 문제에 관해 설명하건대, 덤프카 조립에서 첫째는 오멜첸코프 동지였음. 해당 착상은 합리화가 아니라 발명으로 봄,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니, 단순한 발명이야말로 가장 값진 것임. — 결정: 코펠식 및 마고르식 덤프카가 저절로 기울어지는 경우에 대비한 안전장치 제작 장치를 — 장인 오멜첸코프와 자물쇠공 체르니, 스타로스텐코의 집단적 창작으로 본다.” —
맞은편 탁자에서 한 젊은이가 한 말이 들려왔다.
— 『신세계』가 너무 비싸져서 구독이 안 되고, 『붉은 처녀지』는 손도 못 대지. 『별』을 신청하자고 청해야겠어. 그리고 술로 말하면, 젊은이들은 이제 새로운 식으로 마셔. 예전엔 어떻게들 마셨는지 모르겠고. 이젠 우리가 사람당 코냑 반 병에 나르잔 두 병을 사. 코냑을 마시고 나르잔으로 해장을 하지.
노인이 말했다.
— 나는 아들하고 손풍금을 걸고 내기를 했네. 도면 없이는 자네들 못 알아들어. 한마디로, 잘린 원뿔 안에 어떤 크기의 공이 들어갈 수 있느냐는 거지. 아들한테서 손풍금을 따낼 것 같아 — 사흘째 앉아서 계산하고 있다네.
— 자네 아들이 기계부에 있나? — 거긴 일하기가 그저 즐겁고 자격이 팔 급까지 올라가지. 한데 절반이 수작업인 토목부에서는 급이 오 급을 넘지 않아. 잘못된 거지. 뻔한 노릇이야, 젊은것들이 기계부로 몰리는 게.
노동자가 몇 사람 더 왔다. 폴토라크가 읽었다.
“……생산회의와 위원회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생산의 합리화로 귀결되었다. 직장 생산위원회 구성원은 559명이었고, 그 가운데 노동자 431명, 직원 52명, 행정·기술 인원 76명이었다. 일월부터 소집된 생산회의는 모두 95회, 참석 인원 9,257명, 그 가운데 적극 회원 3,758명, 노동자 3,362명이었고 — 제안 730건이 제출되어, 그 가운데 600건이 행정부와 합의되었으며, 343건이 실행, 257건이 실행 단계, 57건이 부결되었다. 수석기사부 자료에 따르면, 실행된 제안의 일부에서 30만 7천 루블의 절감이 드러났으니, 수치로 나타내기가 불가능한 일련의 결함 제거는 셈하지 않은 것이다.” — 노동자들이 어느새 많이 모여 있었다.
— 한데 손풍금은 아들한테서 따낼 거야! — 우리 데서 어느 직업학교 학생 하나가 새 굴착기 버킷을 발명했지 뭐요, 기사들이 깜짝 놀라 공업전문학교로 보낸다오 — 그 젊은이가 제 원리에 푹 빠져 얼이 빠져 다니지.
폴토라크의 머리가 불면으로 쪼개질 듯했다. 시소예프는 마지막 찻잔 받침의 차를 마저 마시고, 콧수염을 닦아 매만지며 점잖게 말했다.
— 회원들이 모였소. 시작해야겠소. 당신이 모두 발언을 하시구려, 시전기궤도국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회원들이 몹시 들떠 있소.
도서실로 들어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 보고하시오, 폴토라크 동지, — 시소예프가 말했다. — 회의를 개회합니다. 안건은 공사장 전기설비를 시전기궤도국에 넘기는 건이오. 회의록, 이반 스테파니치, 그가 발언하는 동안 우리 명단을 적어 두시오.
폴토라크는 생각을 그러모아, 머릿속에서 두통을 밀어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발언하고 그들 앞에서 보고해야 하는 까닭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말없이 들었다. 폴토라크에게는 방도, 사람들도, 제 자신처럼 졸린 듯 보였다. 그는 오래 말했고 제 발언을 기억하지 못했다.
— 질문하시오, 회원들, — 폴토라크가 끝내자 시소예프가 말했다. — 질문을 적어 두시오, 이반 스테파니치.
노동자들이 폴토라크와 시소예프와 서기가 앉은 탁자로 다가앉았다.
— 우리가 규정대로 맞추도록 시전기궤도국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겠소? — 시전기궤도국에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싶소, — 젊은 노동자가 물었다.
— 우리 배전공들이 이 일에 자격이 맞는지, 부담은 얼마나 큰지 질문을 적어 두시오. 그리고 — 시전기궤도국이 무슨 보증을 하는지도?
— 잠깐들, 이보게들. 시전기궤도국이 우리 노동력 한 단위의 값을, 또 제 단위의 값을 알고 있소?
폴토라크의 머리가 아픔으로 쪼개질 듯했다. 그는 생산회의가 처음이었고, 그것이 쓸데없어 보였다 — 호텔에서는 나데즈다 안토노브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폴토라크는 자신이 결코 믿지 않던 것을 모질게 생각했다 — 혁명의 세월 동안 노동자들의 심리가 이미 재편되었다는 것을 — 건설이 그들, 노동자들의 소유이며, 이곳에서 살고 건설하고 지킬 사람이 그들이라는 것이 이미 심리의 생물학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건설과 건설의 조건이 노동자의 공적 영역이 되었고, 그 앞에서 그, 폴토라크가 보고해야 했던 것이다.
— 질문을 적어 두시오 — 배전반용 골조는 주문했소?
— 질문에 답하시오, 폴토라크 동지, — 시소예프가 말했다.
폴토라크가 다시 오래도록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참을성 있게 들었다.
— 쿠브시노프 동지, 토론에서 말하시오, — 시소예프가 말하고는 폴토라크에게 나직이 덧붙였다. — 당신 건은 통과 못 하겠소, 내가 보기엔, 폴토라크 동지.
노동자 쿠브시노프가 헛기침을 하고 바지를 추켜올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 우리 데서 시전기궤도국 문제가 논의되는 게 처음은 아니오만, 이번엔 보아하니, 시전기궤도국이 그럴 만한 근거도 없이 일을 가져가는구려. 나는 이제 시전기궤도국에 아무 일도 주지 말자는 쪽이오. 보고자 동지, 시전기궤도국 대표는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하고 제 말을 스스로 뒤집소. 사람 하루치가 우리 공사장에는 팔 루블, 시전기궤도국에는 십육 루블이라면, 곱절로 비싼 셈이고, 사무소가 시전기궤도국 꽁무니에 삼십만 루블을 내던지는 거요. 한데 우리 손을 아낄 필요는 없소. 보태시오, 칼라가예바 동지.
붉은 머릿수건을 두른 처녀 칼라가예바가 머릿수건을 고쳐 매며 말하기 시작했다.
— 내 생각엔, 이 문제에 아주 신중히 다가가야 하오, 말하건대, 전기기계부 행정부가 문제에 잘못 접근했고, 그래서 아래로부터 이런 소동이 생긴 거요. 사정인즉, 우리가 기한 안에, 물론 빈말이 아니게 해내겠다는 보증을 해야 한다는 거요. 그러면 시전기궤도국이 우리 데서 할 일이 없다고 보오. 우리는 직장의 이익이 아니라 건설의 이익을, 건설의 금고를 지켜야 하오.
시소예프가 폴토라크에게 몸을 숙여 다정하게 말했다.
— 당신 건은 안 되겠소, 폴토라크 동지. 노동자들이 우리를 속여 넘기게 두지 않을 거요. 당신 수작은 통하지 않소. 들어 보오, 저 아가씨가 어떻게 깔끔히 베어 내는지.
폴토라크가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이 사람들에게 매여 있음을 모질게 깨닫기 시작했다. 어디 그 따위 아가씨의 말을 듣는 것이 모질게 느껴졌다. 가장 주된 것은 사람, 가장 주된 것은 — 인간의 삶이다. 노동자라는 사람을, 그 일상과 근심과 영웅적 면모 속의 그를, 폴토라크는 이론으로만 알았거나, 아예 알지 못했다. 폴토라크는 옛 공장의 러시아를 알았다 — 거기서는 노동자와 말을 섞지 않았다. 폴토라크의 머릿속이 증오로 차올랐다. 노동자들은 담배가 금지되어 몹시 피우고 싶은 이 문화 식당에 주인으로 앉아, 주인으로서 — 공적 인간으로서, 혁명에 의해 세계관이 재편된 사람들로서, 지어지는 모든 것이 — 그들의 것, 그들의 일, 그들의 노동, 그들의 근심이라는 것으로써 논하고 있었다. 폴토라크 앞에는 적들이 앉아 있었으니, 이 사람들은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설계를 심판하며, 그를 제 생활에서 내쫓아 제게 굴복시켰다. 머리가 아픔으로 쪼개질 듯했다. 처녀가 발언을 마쳤다. 처녀의 얼굴은 곱고 사무적이었다. 폴토라크는 듣기를 그쳤으니, 분노가 목을 막았고, 폴토라크는 고함이라도 지를 듯했으며, 처녀의 얼굴이 증오스러워졌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폴토라크를 잊었다.
회의가 끝났다. 시전기궤도국의 제안은 부결되었다. 노동자들이 문 쪽으로 갔다. 시소예프가 서류를 챙기며 다정하게 말했다.
— 죄다 넉넉해야 아무도 골내지 않소, 양동이며, 냄비며, 기계며, 빵이며, 고기며. 우리 데는 부자가 없으니, 아무도 안 뺏어 가오. 한데 그러려면 아껴야 하오.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무서워하지 말아야 하오.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를 가엾이 여겨야 하는 법이오.
— 무슨 말을 하는 거요? — 폴토라크가 물었다.
— 바로 사회주의 얘기요, — 시소예프가 답했다. — 우애야말로 참된 공산주의지요. 한데 당신은 — 시전기궤도국이라니! 언짢아 마시오, 당신도 알잖소 — 다 일을 위해서요.
그들은 한낮의 무더위 속으로 나왔다. 폴토라크에게는 해가 검게 비치는 듯했다. 삼 년 전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순결로 폴토라크를 떠나갔다. 살인자는 살인의 장소로 이끌린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연구하던 돌 여인상들은 폴토라크의 병이었다.
15
류보비 피메노브나 폴레티카는 콜롬나에서 어머니와 함께 스쿠드린 노파들의 집에 살았으니, 어머니의 둘째 남편 에드가르 이바노비치 라슬로가 어머니를 떠난 뒤로 어머니와 함께 들어와 살며 —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 알리사를 보살폈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일하며, 야영지와 옛터를 발굴했다. 한편 집은 쪽문까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마당 정원 쪽문 곁 목욕간에는 이반 카르포비치 오조고프가 개 아라프와 함께 살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반 카르포비치는 벽돌 공장 가마 곁 제 콤뮨으로 옮겨 살면서, 목욕간의 개에게 들르기만 했다. 개 아라프는 이반 카르포비치의 잠자리, 곧 그의, 그리고 그들 공동의 목욕간에서 살았다. 이 이야기의 그날 하루 전, 표도르 이바노비치 사디코프 기사가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죽음 뒤 남겨진 볼크라는 두 번째 개를 쪽문 안으로 데려왔다. 볼크는 사디코프의 손에서 먹기를 마다했고, 사디코프는 그 개를 류보비 피메노브나에게 주었다. 개들은 서로 냄새를 맡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마당의 집은, 비스듬히 기울고 푸른 이끼에 뒤덮인 채, 테라스로 정원에 기대 있었고, 마당은 풀로 우거졌으며, 풀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었다 — 쪽문에서 현관으로, 현관에서 헛간으로, 또 현관에서 정원으로, 정원 쪽문으로.
그리고 테라스가 포도 덩굴에 뒤덮이듯 모든 것이 고요에 뒤덮여 갔다. 울타리 위 새집에는 찌르레기가 살았다. 거리로 난 쪽문은 삐걱이며 열렸다가 도르래로 쾅 닫혔다. 정원에서는 사과가 익어 갔다. 집은 고요와 햇볕으로 데워졌다. 여름이면 이런 집에서는 몇 주씩 창을 열어 두어, 칠월의 잔잔한 바람에 밀려, 야생으로 돌아간 포도밭과 옛 정원의 보리수에서 풀물 들고 서늘해진 공기가, 비뚜름한 방들을 떠돌게 한다. 야생으로 돌아간 포도가 그런 날 방들을 황금빛 무더위에서 숨겨 준다.
류보비 피메노브나에게는 마지막 남편을 잃은 어머니 곁에서 보낸 힘겨운 나날과, 마리야의 죽음을 곱씹은 힘겨운 밤 — 마리야가 남긴 볼크 곁에서의 — 이 있었다. 사디코프가 떠난 저녁부터, 새벽에 나무들이 새벽빛 속에 검어지고 옷에 차가운 이슬이 앉던 그때까지,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볼크와 함께 있었다. 볼크는 텅 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눈 속에서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마리야의 죽음을, 볼크가 목격자였던 그 마지막 경련을 보았으며, 마리야가 목을 맨 바로 그 라슬로에게 삶을 송두리째 앗긴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어머니를 보았다. 볼크의 눈 속에서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죽음에 관해 읽었다. 새벽이 보리수와 흰 옷을 — 뼈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여느 때처럼 어머니가 아직 잘 무렵에 일어나, 볼크와 동생 알리사를 데리고 콜로멘카 강으로 멱을 감으러,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스타리예 고로디시차로 갔다. 거기 교회에는 마마이 타타르의 낙인이 간직되어 있고, 그곳을 고로디시차(옛 성터)라 부르는 것은 정말로 삼백 년쯤 전에 여기 콜롬나의 성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디시차 너머, 타보르 숲에서는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콜로멘카의 물은 서늘했고,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머리를 적시지 않으려 단단히 묶었다. 마리나 므니셰크가 이곳에 진을 쳤다 하여 그 이름이 붙은 타보르 숲에서, 노동자들이 봉분을 발굴하며 옛것의 흙을 체에 던졌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어머니가 일어날 무렵에 돌아왔다. 알리사에게 그 동무 미시카가 왔으니, 노동자 시소예프 형제 가운데 하나의 아들이요, 아카티예보의 나자르 영감의 손자였다. 테라스에서는 사모바르가 끓어올랐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어머니에게서 주의 깊은 눈을 떼지 않았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힘없이 장례 이야기를 꺼냈다 —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어머니를 장례에 보내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어머니는 손에 구겨지지 않은 흰 손수건을 쥐고 용기를 그러모으는, 환한 여인이었다.
— 나는 마리야와 가까웠다, — 어머니가 말했다. — 그리고 그 사람은 아무 죄도 없어, 가엾은 사람. 게다가 죽은 이는 심판하지 않는 법이지.
— 엄마, 에드가르 이바노비치도 엄마 자신도 심판하지 마세요, — 류보비가 말했다.
차를 마신 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를 정원으로 데려갔고, 정원에서,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 땅과 벗하여 그 냄새 속에서 — 휴식의 관례대로 — 그들은 두둑 곁을 파헤쳤다. 어머니와 딸은 정원을 거닐고, 테라스와 집에 드나들었다 — 붉은 머릿수건을 두르고, 흙을 묻히지 않으려 두 손을 엉덩이에서 떨어뜨린 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낮에 그들은 테라스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광의 우유를 마셨다. 알리사와 미시카는 빈둥대며 노는 데 싫증이 났고, 미시카는 알리사를 두고 잠깐씩 쪽문 밖 거리의 공간으로 달려 나갔다.
오후 늦게, 하늘이 유난히 푸르러지고, 빠르게 녹았다 다시 생겨나는 구름 아래 무더위가 유난히 금빛으로 물들 무렵,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알리사와 미시카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사내아이는 조용했고, 파란 눈에 주근깨가 있었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집에서 가위를 가져와 미시카의 손톱을 깎아 주었다. 미시카는 더러운 손을 내민 채 생각에 잠겼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옆에서 두둑을 파헤쳤다.
미시카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 나 방금 저쪽 거리하고 큰길에 다녀왔어요. 거기서 마리야 표도로브나를 묘지로 모셔 가더라고요. 사람이 엄청 많았어요!…… 그리고 그러는데, 공사장 여공들이 죄다 일을 던지고 묘지까지 배웅하러 갔고, 묘지에서 집회가 있을 거래요. 에드가르 이바노비치가 고개를 숙이고 검은 모자를 쓰고 가더라고요. 기마 경찰이 묘지로 지나갔어요.
미시카는 제 손과 깎이는 손톱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의 눈이 애원하는 빛이 되었다. 한 달 반 전 에드가르 이바노비치는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를 떠나 마리야에게로 가며,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에게 그녀의 늙음을 남겨 놓았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에게는 남편에 대한 기억과 온갖 기억 말고는 제 삶이 남아 있지 않았다 — 그리고 마리야 사디코바가 목을 맸다.
— 알겠어요, 엄마, 제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볼게요, —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말했다.
— 아니다, 류바, 너는 아무 데도 가지 마라, — 어머니가 엄하게 말했고, 그 눈은 용서를 구했다.
— 아니에요, 갈게요, 엄마, 곧 돌아올게요.
그러나 이때 거리로 난 쪽문이 노래하듯 삐걱이고 쾅 닫혔다. 림마 카를로브나는 온갖 소식을 다 알고 있었다 — 그래, 파업이지, 그래, 관을 무덤까지 배웅한다지, 그래, 살인자라고 에드가르 이바노비치를 배척하자 외친다지. — 미시카의 손톱이 다 깎였다.
— 이제 우리한테 읽어 줘요, — 미시카가 말했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는 방으로 들어가, 제 방 침대에 누웠다. 류보비 피메노브나의 눈은 단단했다. 그녀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알리사와 미시카를 제 곁 긴 의자에 앉히고, 어제 읽다 멈춘 자리에 끼워 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읽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갱에서 일했다. 빨간 머리의 작은 모치카가 일하는 아버지를 거들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등을 대고 누워 곡괭이로 광석을 쪼았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땅속 가스에 불이 붙는 것을 막아 주는 촘촘한 철망에 끼운 흐릿한 등불이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갱을 따라, 땅속을 뒤흔드는 무서운 굉음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곡괭이를 던지고 귀를 곤두세우며 일어나 앉아 굉음에 귀 기울였다. 빨간 머리 모치카가 아버지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아버지와 아들 둘레로 땅이 떨렸다. 아버지가 서둘러 출구 쪽으로 기어갔고, 아들이 그 뒤를 기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흙덩이가 떨어져 내려 아버지를 덮쳐, 그 밑에 묻어 버렸다. 빨간 머리의 작은 모치카가 아버지를 구하려 달려들었다. 흙은 위에서 계속 쏟아져 내렸다. 사내아이는 제 가냘픈 작은 손으로 아버지를 파냈다. 그는 울며 숨이 막혔다. 그의 손가락에서 손톱이 떨어져 나갔다.
— 그만요, — 미샤가 말했다. — 더 읽지 마요.
— 왜?
— 둘이 파묻히는 게 너무 무서워요, 더 읽지 마요! — 사내아이가 말했고, 그 얼굴에 당혹감이 비쳤다.
정원에서는 사과가 익어 갔다. 사내아이는 맨발에 머리가 부수수하고, 주근깨에 파란 눈으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미시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미시카는 눈을 땅으로 떨구었다. 그는 류보비 피메노브나의 무릎에 머리를 얹었다. 정원에서는 따뜻한 흙냄새가 났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미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은 보지 못하는 눈이 되었다. 그녀는 사내아이가 갱과 어둠과 공포의 숨 막힘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했다 — 그리고 사내아이가 인간의 온기를 느끼려 제 무릎에 달라붙었음을 이해했다. 마리야 사디코바는 그 시각 이미 땅에 묻혔다. 어머니는 그 순간 마음으로 마리야 사디코바와 함께 있었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무덤의 어둠을 보았다. 해가 검게 보였다.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 순간 거리로 난 쪽문이 삐걱이고 쾅 닫혔다. 마당의 약초 카밀러를 밟으며 폴토라크가 걸어왔다. 무덤의 흙 속에서 사람에게 구더기가 달려든다. 폴토라크가 마당의 푸른 풀밭을 걸어왔다 — 모든 소리가 사라졌고, 해가 검게 보였다 — 류보비 폴레티카는 문득, 단번에 사내아이도, 어머니도, 정원도, 땅도 잊었다. 그녀는 폴토라크에게로 달려가,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떨구었다.
— 당신이 왔군요, — 그녀가 속삭였다. — 당신이 — 왔어요! 나는 너무 힘들어요.
— 그래, 내가 왔소, — 그도 속삭여 말했다. — 영영!…… 영영, — 그가 되뇌었다 — 그리고 그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제 의지 바깥에서 생겨난 일이, 아마 해가 검어지고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때 류보비 피메노브나에게서 옮아온 일이 닥쳤다 — 머리가 핑 돌고, 생각이 무너져 내렸다.
폴토라크가 땅으로, 무릎으로, 류보비의 무릎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류보비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의 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었고, 생각이 무너져 내렸으니, 뇌가 미끄러진 듯했다. 류보비는 그가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땅에 주저앉았다. 미시카가 류보비 피메노브나를 도와 폴토라크를 붙잡았다. 미시카는 아주 진지했다.
쪽문이 또 한 번 노래하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 부랑자 이반 오조고프가 울타리 곁 한쪽에 섰다.
류보비 피메노브나의 눈이 행복과 희생 속으로 사라졌다.
목욕간의 쐐기풀과 우엉 뒤에서 개들의 머리가 비어져 나왔다.
— 영영, — 폴토라크가 속삭였다. — 무슨 헛소리람. 곧 일어나겠소.
그는 류보비 피메노브나를 붙들고 일어났다.
— 미샤, 물 좀 가져오렴, —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말했다.
— 그래, 물을, — 폴토라크가 말했다.
폴토라크가 미덥잖게 발을 내디뎠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그를 정원으로, 방금 미샤와 함께 앉아 있던 그 긴 의자로 데려갔다.
그녀는 온 존재로 폴토라크에게 달라붙었다.
— 당신은 자유로워졌어요, 당신은 사랑하고, 당신은 왔어요, — 그녀가 말했다.
— 기억하오, 당신이 보리스와 글레프에 대해 썼던 걸, — 폴토라크가 말을 꺼내고는 스스로 끊었다. — 머리가 핑 도오, 밤에 못 잤소…… 가 봐야겠소, 나 자신을 가눌 수가 없소. 호텔로 가겠소. 공사장에 가야 하오. 거기 당신 아버지가 있소. 나한테 아는 영국인이 있는데, 그자의 눈은 구두창처럼 단단하오 — 구두창 같은 눈이지.
—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예브게니? 당신은 아무 데도 안 가요, —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말했다. — 공사장에 아버지가 계신 건 나도 알아요 — 아버지는 우리 데 안 오세요 — 원하시면 직접 오시겠죠. 당신은 왔으니, 내게 다 말해야 해요. 우리한테 큰 불행이 있어요, 엄마한테 — 오늘이 라슬로 아내의 장례예요. 말해 봐요. 당신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 당신은 공산주의자요?
— 네.
— 당신은 내 사람이 되겠소?
— 네.
— 당신은 혁명을 믿소?
— 네. 당신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 공사장에 파업이 일어났소. 당신은 야코프 카르포비치 스쿠드린과 마호가니 세공가 베즈데토프 형제를 아오? — 무슨 헛소리람, 나는 해야 할 말이 아닌 걸 하고 있소……
— 당신 아이들은 어디 있어요?
— 내 아이들? — 없소, 모스크바에 있소.
미샤가 물을 가져왔다. 폴토라크가 마셨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폴토라크를 끌어안았다. 정원에서는 열매가 익어 갔고, 햇볕이 나무 위로 떨어졌다. 해도, 미샤도, 세상도 — 없었다. 부랑자 이반은 정원으로 난 울타리 곁에 서서, 두 손을 울타리에 얹고 그 위에 머리를 얹은 채 익살을 부리고 몸을 비틀었다. 미샤가 이반 카르포비치에게로 갔다. 테라스에는 알리사를 뒤따라 어머니가 나타났다. 세상은 소리 없음 속에 잠겨 있었다.
— 가 보겠소, — 폴토라크가 말했다. — 당신이 나를 어떻게 맞을지 몰랐소. 당신이 여기 있는지도 몰랐소.
— 내가 여기 있는지 몰랐다니요? —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되물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맞을지 몰랐소 —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몰랐소…… 가 보겠소, 저녁에, 한 시간 뒤에 오겠소 — 나는 혼자 있어야 하오, 호텔로 가겠소. 깨끗해야 하오. — 폴토라크가 일어나 정원 안쪽으로 갔다. — 아니, 그쪽이 아니지. 나를 바래다주오. 오겠소, 류바, 오겠소 — 영영.
폴토라크가 서둘러 쪽문으로 갔다. 류보비 피메노브나는 영문을 몰랐다. 류보비 피메노브나가 그를 문턱까지 바래다주었다. 개 아라프가 짖었다. 폴토라크는 쪽문에서 머뭇대지도, 작별하지도 않고 달려 나갔다. 쪽문이 노래하며 요란하게 쾅 닫혔다. 세상은 이 쪽문 소리로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 정원으로 난 울타리, 나무들, 씻는 것을 잊은 흙 묻은 두 손으로 테라스에 선 어머니 — 하늘, 미샤, 이반 카르포비치.
이반 카르포비치는 익살을 부리고 몸을 비틀었다. 이반 카르포비치가 류보비 피메노브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 내 환한 아가씨, 류보비 피메노브나 동지! — 이반 카르포비치가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 안 돼요, 안 돼요! — 당신한테 하는 말이오 — 안 돼요! 그를 사랑하지 마요! 그는 와서 앉지도 않고 여관으로 내뺐는데, 여관에는 그가 모스크바에서 데려온 화장한 계집이 있고, 그 여자가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소. 내 사랑스러운 아가씨, 류보비 피메노브나 동지, 우시오! 그는 몽매한 자요, 그는 내 형 야시카와 함께 모놀리트를 폭파하려 하오!…… 기뻐하시오, 동지들, 사람들이 명예를 위해, 공산주의를 위해, 고결함을 위해 일어섰소!…… 당신도 우시오,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 그리고 너도, 미시카!……
—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해요?! — 류보비가 외쳤다.
— 이반 카르포비치,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 올가 알렉산드로브나가 분개하여 외치며, 용서를 구하는 눈빛으로 부랑자에게 다가갔다.
부랑자는 몸을 비틀며 두 손을 가슴에 댔다.
이제 전쟁에 들어선 도시 콜롬나는 — 니콜라이의, 니콜라이 일세의 도시였으니, 니콜라이 시절부터 콜롬나가 죽어 간 까닭이다. 아스트라한스카야 거리의 호텔은, 마찬가지로 돌로 지어져 땅에 묵직하게 들어앉은 다른 집들과 한 줄로, 넓은 솔기의 니콜라이식 죽어감으로 멀쩡히 서 있었다. 호텔의 객실들은 침침한 능보 같은 작은 창으로 콜롬나를 바라보았다. 객실 맞은편 광장에서는 크렘린의 폐허가 죽어 갔고, 크렘린의 옛 드보랸스카야 거리에서는 박물관지기 그리보예도프가 밤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보드카를 마셨다 — 한편 묵직한 집들과 어두운 대문 통로의 아스트라한스카야 거리는, 러시아가 치르던 그 전쟁을 조직하는 간판들의 줄로 지어져 있었다. 땅이 저녁을 향해 기울었고, 도시 위로 까마귀들이, 파괴의 영혼들이 하루를 흩어 갔으며, 종소리가, 옛것의 통곡이 신음하기를 그쳤다. 해 질 녘에 바람이 불기 시작해 먹구름을 몰고 왔고, 땅이 잿빛으로 변했으며, 비가 팔월답게 내렸다. 땅에서는 이따금, 단번에, 사소한 것에서, 십 분 전만 해도 알아챌 수 없던 봄이 오거나 가을이 오는 일이 있다.
폴토라크는 니콜라이식 집들의 관 아래에서 아주 작아 보였다. 폴토라크는 콜롬나의 옛것을 떠받쳤다. 폴토라크는 사회주의라는 붉은 간판에 부딪치며 아주 느리게 걸었다. 거리들은 비를 앞두고 텅 비어 갔다. 폴토라크는 거리에 가로막혔다.
폴토라크가 능보 같은 객실의 고요 속으로 들어섰을 때,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 너무하네요, — 나데즈다 안토노브나가 말했다. — 당신은 공사장을 보여 주려고, 함께 있으려고 나를 불러 놓고는, 줄곧 어딘가로 가 버려 나를 혼자 두는군요.
폴토라크는 아무 대답도 않고 제게 포도주를 따랐다.
— 하긴, 우습네요 — 이 고독이. 이 관 같은 호텔, 도시 위 이 태곳적 같은 울부짖음, 이 태곳적 같은 광장 — 이건 다 내 거예요. 나는 무슨 태곳적 같은 장례를 봤어요. 행렬이 창 밑을 지나갔죠. 앞에서 관을 메고, 뒤로는 여자들이, 천 명도 넘게 줄지어 갔어요. — 들어 봐요 — 이 태곳적 같은 광장, 이 태곳적 같은 종소리의 울부짖음, 그리고 — 이 태곳적 같은 여자들, 이 프롤레타리아 여자들. 나는 봤어요, 저 아낙들은 돌로 만들어졌어요. 얼굴과 손의 그을음이 자두처럼 거뭇해요, 전혀 흰 살결이 아니에요. 그들은 천 년 된 옷을, 통치마와 앞치마를 입고 있었어요. 그들은 맨발이었어요. 태곳적 같아요, 저 아낙들은. 이건 스키타이인의 행렬, 그 자체로 — 태곳적인. 앞에서 관을 메고 — 저들이 관을 따라갔다면, 통치마를 입은 저 아낙들이 침묵 속에 관을 따라갔다면, 대체 무슨 옛것을 묻은 걸까요? — 나는 온종일 졸며 생각했어요.
나데즈다 안토노브나는 반쯤 옷을 걸친 채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어깨에 잠옷 가운을 걸치고 일어나, 포도주를 마시고, 창가에 앉았다.
— 오스트롭스키와 고골에게서 지방의 창은 줄거리의 발단이자 모스크바 ‘석간’의 노릇을 해요 — 그리고 정말이지 이 창이라는 시대의 신문이 아주 흥미로워요. 당신한테 말 안 했죠, 예브게니. 저 여자들이 옛것을 묻는다는 건 분명해요. 아직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 나는 도덕이 뭔지 잘 몰라요, 아니면 나만의 도덕이 있거나. 이 장례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거기 누군가 죽었지만, 나한테는 아들이 생길 거고, 나는 그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거라고 — 여럿이었거든요, 그리고 나는 임신했어요. 아버지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아요. 이게 내 도덕이에요. 나는 어머니예요 — 그리고 이건 아주 태곳적인 일이죠. 묻힌 이 죽은 이, 내가 모르는 이 사람이 — 어쩌면, 내가 그 아버지를 모르는 채로 아이를 가질 권리를 내게 준 그것일지도 몰라요. 내가 임신했을 만한 상대가 여럿이었으니까요.
— 어제 아침 목맨 라슬로 기사의 아내를 묻은 거요, — 폴토라크가 침울하게 말했다.
— 그 여자가 목을 맸다고요? 왜요?
— 모르오. — 당신은 당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오? — 당신은 저 아낙들이 무슨 옛것을 묻었는지 모르오? — 저들은 우리를 묻은 거요 — 당신을, 나를, 우리 문화를!……
— 내 아들한테는 더 안 좋네요.
폴토라크가 나데즈다 안토노브나 곁에 앉았다.
—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데즈다? — 그가 말했다. — 당신은 잤고, 나는 깨어 있었소. 저들은 우리를 묻었소. 그래, 당신 아들한테는 더 안 좋소, 저들은 그 아이도 묻었으니까. 허나 마찬가지요. 나는 깨어 있었고, 무섭지 않소, 불면 속에서는 이 장례처럼 알 수 없고 환상적인 것이 찾아오거든. 당신은 시대의 신문을 읽고 있소. 우리에게는 호프만식의, 페스트 속 향연의 밤이 있을 거요, 아침에 내가 말한 그 깃발 너머에서. 나는 완전히, 완전히 병들었소. 나는 헛소리를 하오. 나는 오늘 노동자들과 이야기했는데, 그들이 바보 다루듯 내 어깨를 툭툭 쳤소 —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현실을 독으로 물들인 호프만이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급사가 들어왔다.
— 전보입니다.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방금 베라가 죽었음 우리 둘 다 당신에게 말함 저주받아라 비열한 자.”
16
모스크바 블라디미로-돌고루콥스카야 거리,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 폴토라크의 아파트에서는 마호가니와 엄격한 안식과 고요가 위엄을 부리고 있었다. 지보데르카의 아파트는 — “집”이었다. 서재의 책상 위에서는 청동 촛대들과, 역시 청동으로 된 잉크병 받침의 나이아스들이 책상을 짓눌렀다. 그 촛대들에는 양초가 타고 있었다. 서재의 파벨 양식 소파 위에서는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죽어 가고 있었다. 커튼들은 고요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소파 곁 작은 탁자 위, 약병들 사이에도 양초 하나가 타고 있었다. 작은 탁자 위에는 알렉산드르 양식의 은종이 놓여 있었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혼자였다.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다. 평온한 고요가, 움직이지 않는 밤 속에서 서재에 얼어붙어 있었다. 미인인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더없이 평온하게, 꼼짝 않고 누워 있었고, 그녀의 두 손은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그때 그녀가 종을 울렸다. 눈을 뜨지 않은 채, 힘겹게 손을 뻗어, 아주 희미하게 오래도록 울렸다.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잠옷 가운 차림으로, 손에 양초를 들고 들어왔다. 손위 누이는 손아래보다 훨씬 더 지치고 불안해 보였다.
— 네가 불렀니, 베라?
— 그래, 나는 죽어 가고 있어, 소피야. 죽음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져.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소리 없이, 깊은 속삭임으로, 입술만 조금 움직이며 말했다. —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니야. 지금이 인생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져 — 그녀는 그 말에서 잠깐 걸려 넘어지듯 되풀이했다 —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종을 잡았다는 게.
베라 그리고리예브나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한 채였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고, 입술만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누이가 그녀 위로 몸을 숙였고, 누이의 입술은 아픔의 경련으로 비뚤어졌다. 누이는 제 양초를 소파 곁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불을 껐다. 꺼져 가는 양초의 빛이 죽어 가는 여자의 얼굴을 스쳤다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아주 조금 미소 지었다.
— 예브게니를 불러 줘, 그는 여기 있어, 들려, —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속삭였다.
— 그는 없어. 일 때문에 콜롬나로 갔어, —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가 대답하고 방을 돌아보았다.
책상 위에서는 양초들이 타고 있었고, 더는 처방전을 쓰지 않게 된 의사가 두고 간 뒤로 잊힌 채 다 타들어 가고 있었다.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는 양초를 끄려고 몸을 일으켰으나,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 그녀가 다시 속삭이며 웃고 있었다.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는 누이 위로 몸을 숙였다.
— 모든 것은 처음에는 무서운 법이야, 듣고 있지, 예브게니. 네가 그렇게 말했지 — 너는 틀렸어.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예브게니? — 무슨 짓을 한 거야? —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네가 나를 사랑하기나 해? — 나는 소피야 앞에서 부끄러워, 온 세상 앞에서 부끄러워…… 내가 너를 깨웠고, 너는 자고 있었어…… 나는 그렇게 오래 너를 불렀는데……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는 누이 위로 더 낮게 몸을 숙였다. 누이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 너는 말했지, 예브게니, 덕목도, 충실함도, 정의도 — 이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영(零)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 아니야, 너는 살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소피야와 아이들 앞에서 틀렸어. 죽어 가는 내가, 죽은 내가 너에게 몸을 내준 것은 추악한 일이야 — 네가 내게 한 짓은 추악한 일이야, 예브게니,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고 내가 너를 수컷으로 생각한다는 것도 추악한 일이야.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외쳤다.
— 베라, 너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그만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베라 그리고리예브나가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은 또렷하고 주의 깊었으며, 결코 잠든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 아니, 나는 헛소리하지 않아, 소피야, — 그녀가 크고 단단하고 모질게 말했다. — 나는 죽어 가고 있어, 소피야. 그리고 기차에서 예브게니 예브게니예비치가 나를 범했다는 것은 헛소리가 아니야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야, 나는 영(零)이니까 — 네 삶이, 네 명예가 무서워, 소피야. 그는 겁쟁이고 도둑이야. 그에게 전해, 그는 비열한 자라고. 네 앞에서 부끄러워, 소피야 — 네가 무서워.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숨이 막혀 눈을 감았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한밤중이었다.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 땅은 이미 한낮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책상 위와 소파 곁의 양초들은 다 타 버렸고, 그을음마저 사라져 있었다. 베라 그리고리예브나는 죽어 있었다. 살아 있는 누이는 죽은 누이의 가슴에 머리를 떨구었다.
그리고 소피야 그리고리예브나가 정신을 차리고 맨 먼저 한 일은 — 전보를 써서 그것을 들고 전신국으로 간 것이었다. 지보데르카에는 비가 쏟아졌고, 보도의 아스팔트는 집들을 비추었으며, 아스팔트에 비친 집들은 플라톤의 그림자 같았다. 거기서는 실제 거리의 실제 집들이 — 이데아였다. 비는 젖은 묵 같은 구름으로 모스크바를 에워쌌다. 라디오 확성기들은 러시아 고팍을 미친 듯이 외쳐댔다.
죽음!…… — 사람이 있었다, 소녀 베로치카가 있었다, 여학생-소녀 베라가 있었다, 모스크바 필하모니 학교의 학생 베라 살리셰바가 있었다, 지방 극장의 보통 여배우 베라 폴레바야가 있었다 — 유년이 있었고, 처녀의 젊음이 있었고, 여인의 스물일곱 해가 있었다 — 십계명을 순서 없이 묻던 신앙 과목 시험이 있었고 — 금메달이 있었고 — 필하모니 입학시험에서 읽은 크릴로프의 우화 「두루미와 왜가리」가 있었고 — 첫 무대, 군청 소재지 아마추어 연극의 소피야 파무소바가 있었고 —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 첫 박수갈채, 첫 입맞춤, 첫 내어 줌 — 모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으로, 바간코보로(모욕적인 말이다 — 바간코보!) 실려 가 땅에 묻히고, 인간의 시신은 벌레들의 느림에 넘겨진다 — 아니면 돈스코이 수도원으로 옮겨져 그곳 화장장에서 불태워진다. 그리고 화장장에서 인간에게는 마지막 인간적 경련을 겪는 일이 주어진다. 화장장의 방, 레오뮈르 이천 도의 열기 속에서, 관과 사람의 옷은 이분 만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타 버리고, 벌거벗은 시신만 남는다 — 그러면 벌거벗은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죽은 자의 다리가 접히고, 두 손이 목 쪽으로 기어가며, 머리가 어깨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그 이천 도의 레오뮈르가 사람을 없애는 것을 볼 수 있는 작은 창가에, 신경이 부서진 살아 있는 사람이 서 있다면 — 그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은 세어 버리고, 마지막 인간적 경련은 그에게 죽음을 어기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자는 수치스러운 자세를 취한다 — 그리고 십오 분 뒤 사람에게서 남는 것은 한 줌의 재뿐이다. 땅속에서는 — 인간이 카타콤 속을 파고들듯, 벌레들이 인간 속을 파고든다. 사람이 있었다, 소녀가, 처녀가, 여자 — 여배우 베라 폴레바야가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모욕도, 긍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