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1943

코민테른

세계혁명 기관에서 소련 외교정책의 도구로 바뀌어 간 제3인터내셔널.

조직 변천

  1. 창립과 세계혁명 공세기 1919–1921

    1919년 3월 모스크바 창립 대회로 출발한 제3인터내셔널. 유럽 혁명이 눈앞에 있다는 전망 아래 단일한 세계 공산당을 자임했고, 1920년 제2차 대회가 채택한 21개조 가입 조건은 각국 사회당의 분당을 강제해 프랑스·이탈리아·독일의 공산당들을 만들어 냈다.

  2. 통일전선 전술과 볼셰비키화 1921–1928

    독일 혁명이 좌절되자 제3차 대회부터 대중 획득을 앞세운 통일전선 전술로 물러섰다. 지노비예프 집행위원회 의장 아래 1924년 제5차 대회는 각국 당의 「볼셰비키화」를 결의했고, 소련 당내 투쟁이 그대로 각국 지부의 지도부 교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3. 제3기 노선 1928–1934

    1928년 제6차 대회는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가 왔다는 「제3기」 정세 판단 위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공동 행동을 봉쇄한 이 노선은 독일 노동운동이 나치 집권을 막지 못한 요인의 하나로 꼽힌다.

  4. 인민전선 전환 1934–1939

    나치 집권의 충격 속에 노선을 뒤집었다.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디미트로프의 보고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공식 노선이 되어 프랑스와 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를 낳았다. 같은 시기의 대숙청은 모스크바에 와 있던 각국 공산당 간부들을 대거 삼켰다.

  5. 독소조약 전환기 1939–1941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과 함께 반파시즘 노선이 하루아침에 걷혔다. 전쟁은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되었고, 각국 당은 갑작스러운 전환을 따르느라 심한 혼란과 당원 이탈을 겪었다.

  6. 전쟁과 해산 1941–1943

    독소전 개전으로 반파시즘 투쟁 노선이 복원되었다. 1943년 5월 스탈린은 연합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코민테른을 해산했고, 기구의 일부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로, 기능의 일부는 1947년 창설된 코민포름으로 이어졌다.

지도부 타임라인

  1. 1919–1926 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 집행위원회 의장
  2. 1926–1928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사실상 지도자
  3. 1929–1934 드미트리 자하로비치 마누일스키 사실상 지도자
  4. 1934–1943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서기장

소속 인물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

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77–1950 ○ 자연사

불가리아 공산주의의 공동 창건자, 코민테른에서 국가원수까지

1923년 9월 22일,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를 개시했다. 진압 후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로 탈출, 궐석 사형 선고와 함께 22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공동 창건자이자 코민테른 서기장(1922~24). 1923년 9월 봉기를 직접 지휘했으나 실패로 22년간 소련에 망명했고, 귀국 후 국가원수와 총리를 지내며 불가리아의 스탈린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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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입당
  • 1904–1919플로브디프 테스냐키 조직 책임자
  • 1905–1923중앙위원회 위원
  • 1913–1923국민의회 의원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2–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
  • 19239월 반파시스트 봉기 공동 지도자
  • 1928–1939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
  • 1931–1941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모스크바)
  • 1946–1947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
  • 1947–1949부총리 겸 외무장관
  • 1949–1950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총리

솔로몬 아브라모비치 로조프스키

Соломон Абрамович Лозовский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78–1952 ✕ 처형

프로핀테른을 이끈 볼셰비키,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와 함께 총살되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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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 1909–1917파리 망명, 프랑스 사회당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
  • 1918–1921전러시아 섬유노조·철도노조·모스크바 주 노조평의회 책임자
  • 1921–1937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37–1939국립문학출판사(고슬리티즈다트) 소장
  • 1939–1946소련 외무부인민위원(부장관)
  • 1941–1948소빈포름뷰로 부책임자(1941–1945), 책임자(1945–1948)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재판, 총살

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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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오토 빌레 쿠시넨

Otto Wille Kuusinen
코민테른 소련 핀란드 1881–1964 ○ 자연사

코민테른의 마지막 생존자에서 흐루쇼프의 이론가로

1920년 2월,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부는 쿠시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추도 연설을 올렸다.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고, 헬싱키에 은신 중이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 출신으로, 코민테른 서기로 18년간 국제공산운동을 이끌었다. 흐루쇼프 시기 '전인민국가' 테제를 정식화한 탈스탈린화 이론가로, 코민테른 간부 중 유일하게 CPSU 최고 지도부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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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핀란드 사회민주당 입당
  • 1905알렉산드로프 대학 철학사
  • 1908–1917핀란드 의회 의원 (SDP)
  • 1911–1917핀란드 사회민주당 의장
  • 1918핀란드 혁명정부 교육담당 인민위원
  • 1918핀란드 공산당 창립 참여
  • 1921–1939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39–1940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 겸 외무장관
  • 1940–1956카렐로-핀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40–1958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부의장
  • 1952–1953, 1957–1964CPSU 중앙위 상임간부회 위원
  • 1957–1964CPSU 중앙위 서기
  • 1959《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 편집 책임

오시프 아로노비치 퍄트니츠키

Осип Аронович Пятницкий
코민테른 소련 리투아니아 1882–1938 ✕ 처형

코민테른 지하 배달부에서 기구의 등뼈로, 그리고 기구에 먹혔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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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이스크라』 비밀 배송망 구축, '프레이다크'로 활동
  • 1903–1908볼셰비키 합류, 오데사·모스크바 위원회 활동, 1905년 혁명 참여
  • 1914–1917체포되어 예니세이스크주 유형,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복귀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전투당센터 구성원, 철도노선 적위대 지휘
  • 1921–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위원
  • 1923–1935코민테른 서기 — 연락·재정·간부 배치 총괄
  • 1935–1937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행정정치부장
  • 1937.06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 비상권한 반대, 축출·체포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상을 변호한다. 내 전 생애의 의미가 이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반정부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라이프치히 방화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라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전후 불가리아 최초의 공산정부 수반이 되었다.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연방 구상을 추진했으나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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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3서기장

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

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83–1936 ✕ 처형

10월에 반대했고, 스탈린을 변호했고, 스탈린에게 죽었다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에 낭독된 직후.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 동지가 그 우려를 불식시켰다」 유언은 묻혔고, 스탈린은 남았다.

레닌의 가장 오랜 망명 동지 중 한 명으로, 코민테른 초대 의장을 지내며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으나, 1917년 10월 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하며 레닌과 충돌했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를 막기 위해 스탈린·카메네프와 트로이카를 구성, 「스탈린 동지는 우려를 불식했다」며 유언 공개를 저지했다. 그러나 곧 스탈린에게 배제되어 1926년 평생의 적 트로츠키와 통합반대파를 결성했고, 패배와 굴복을 거듭하다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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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7망명기 레닌의 최측근
  • 1917.10카메네프와 봉기 반대, 계획 누설 파동
  • 1919–26코민테른 초대 의장
  • 1923–25트로이카, 트로츠키 견제
  • 1926–27통합반대파, 출당과 굴복 반복
  • 1936제1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83–1936 ✕ 처형

당의 공인된 신중파: 경고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중앙위원회의 무장봉기 결정을 신문 《노바야 지즌》에 공개하며 "지금 봉기는 혁명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레닌은 '파업파괴자'라며 제명을 요구했다. 열흘 뒤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고, 카메네프는 초대 소비에트 국가원수가 되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으로 8년간 수도를 이끌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직접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트로이카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쇼재판에서 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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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두마 볼셰비키 의원단 재판, 시베리아 유형
  • 1917프라우다 편집, 4월 테제와 10월 봉기에 반대
  • 1918–26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2–24레닌 병중 정치국 주재, 트로이카
  • 1936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재판, 처형

드미트리 자하로비치 마누일스키

Дмитрий Захарович Мануильский
코민테른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59 ○ 자연사

스탈린 시대 코민테른의 실무 관리자

1939년 스탈린이 디미트로프에게 한 말: "마누일스키는 아첨꾼이야! 트로츠키주의자였지!" - 트로츠키와의 과거 인연에도 불구하고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중 한 사람이었다.

볼린 지방 성직자 가문 출신 볼셰비키로, 1905년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를 조직했다. 1928년부터 1943년까지 코민테른 서기로서 각국 공산당의 노선 전환과 숙청을 집행하며 스탈린의 세계 공산주의 운동 통제를 실무 관장했다. 1944년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으로 전환되어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유엔 헌장 전문과 '목적과 원칙' 장의 초안 작성을 주재하는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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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재학 중 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5–06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선동원,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 조직
  • 1906체포, 야쿠티야 5년 유형 — 탈출, 파리 망명
  • 1907–12파리 망명, 간헐적 러시아 밀입국 활동
  • 1912–13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지하활동 후 재망명
  • 1914–171차대전 반대, 트로츠키와 《골로스》·《나셰 슬로보》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21–22우크라이나 CP 제1서기, 농업인민위원 — 기근 대응
  • 1924–28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
  • 1928–44코민테른 서기 — 각국 공산당 노선 통제, 숙청 집행
  • 1944–50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부의장·외무장관, 유엔 창설 대표단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88–1938 ✕ 처형

「당 전체의 총아」, 당의 이름으로 죽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이 부하린에게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 우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전부 작은 얼룩일 뿐이야." 10년 뒤, 같은 입이 그를 총살하라 명령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는 스탈린의 책상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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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7뉴욕에서 망명 신문 편집
  • 1917《제국주의와 세계경제》 출간(1915년 집필)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 반대
  • 1918–29프라우다 주필, 코민테른 지도부
  • 1920프레오브라젠스키와 《공산주의 ABC》 공저·출간
  • 1921《사적 유물론: 사회학 체계》 출간
  • 1925–28네프 이론가, 「부유해지십시오」
  • 1929「우편향」으로 실각
  • 1934–36이즈베스티야 주필, 1936년 헌법 기초 참여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빌헬름 게오르기예비치 크노린

Вильгельм Георгиевич Кнорин
코민테른 소련 라트비아 1890–1938 ✕ 처형

코민테른 선전기구의 설계자이자 당사(黨史) 편찬자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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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민스크 소비에트 서기, 『즈뱌즈다』 편집자
  • 1920–1922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국 서기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7–1928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보선전부장
  • 1932–1935역사-당 연구소(적색교수양성소) 소장
  • 193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당 선전선동부 부장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코민테른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1–1938 ✕ 처형 · 복권 1956

28인의 볼셰비키를 키워낸 코민테른의 중국 전문가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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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내전 참전, 정치위원
  • 1925–1927중산대학 부총장
  • 1927–1929중국 노동자 공산대학 총장
  • 1928–1935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
  • 1930–1931코민테른 극동부 비서
  • 1935–1937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
  • 1937국제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