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차리친에서 보로실로프에 대해 보고했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복무 의무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았으며 부대 지휘의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 며칠 후 그와 전 참모진은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스네사레프는 차르 군대 중장에서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전향한 군사 지식인이자 동양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오르고 1918년 붉은 군대에 합류했으나, 차리친 방어전에서 군사 전문성을 무시하는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하며 해임·체포되었다. 이후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으로 3년제 정규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전쟁철학》 등 독창적 군사이론을 개척했으며,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으로 소비에트 동양학의 토대를 닦았다. 1928년 소련 군 지도자 최초로 노동영웅이 되었으나, 1930년 '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수용소에서 뇌졸중을 겪고 1934년 석방되어 193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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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1899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모스크바 보병학교 수료,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1등 졸업
1900–1913투르케스탄 군관구 참모, 파미르 분견대장, 인도·아프가니스탄 군사지리학 연구, 중앙아시아 첩보 담당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연대장·여단장·사단장·군단장, 중장 진급, 성 조지 훈장 3·4등급
1918붉은 군대 입대, 북카프카스 군관구 군사지도자 —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 체포 후 석방
1919–1921노농적군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 3년제 정규과정 정비, 《전쟁철학》 강의 개설
1921–1930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교수, 군사지리학 주임 지도관, 노동영웅 칭호(1928)
1930–1937「봄」 사건으로 체포, 사형→10년형 감형, 수용소 뇌졸중, 1934년 석방, 1937년 사망, 1958년 복권
1918년 3월, 전직 차르 소장이 예이스크에서 은퇴해 있을 때 레닌의 전보가 도착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모스크바로 가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차르 군대 소장 출신으로 1918년 레닌의 요청으로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 결정적 작전들을 설계했다. 공화국 야전참모장(1919–1921)으로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을 상대한 모든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1919년 10월 오룔-쿠르스크 작전으로 데니킨의 모스크바 진격을 저지했다. 1921년 붉은 군대 초대 참모장이 되어 참모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아카데미 원장을 겸하며 장교 교육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이오나 야키르 휘하 우크라이나 군관구 참모장(1925–1928)을 지냈다. 제정 참모본부와 소비에트 군사 전문성을 이은 핵심 보옌스페츠로, 비당원이었으나 '극히 성실하고 유능한 일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1905년 오데사, 전함 포툠킨의 반란 소식이 도시를 뒤흔들자 구세프는 레닌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자.
1896년 레닌의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제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창립에 참여한 구볼셰비키.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서기로 수도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프룬제와 함께 '군사야당'을 이론적으로 주도하며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섰다. 정치총국장으로 적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완성했으며, 이후 중앙통제위원회와 코민테른에서 스탈린 노선의 핵심적 제도 구축자로 활동했다.
1917년 10월 25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를 규탄하며 회의장을 걸어나가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선언했다. 「당신들은 파산자입니다.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905년 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17년 10월 봉기의 연출가, 내전에서는 장갑열차를 타고 다니며 적군을 벼려 낸 전쟁인민위원. 영구혁명론으로 러시아 혁명이 유럽 노동계급의 승리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맞선 좌익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 기구의 조용한 싸움에서는 번번이 늦었다. 1929년 국외로 추방되어 제4인터내셔널을 세웠고, 1940년 멕시코시티의 서재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얼음도끼에 죽었다.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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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차리친 전투에서 스탈린과 맺은 인연으로 소련 최장수 국방수장(1925~1940)이 된 혁명군인이자 원수. 붉은 군대의 현대화·기계화를 진두지휘하는 한편, 대숙청 국면에서 185개 처형 명단에 서명하며 장교단 말살을 직접 승인했다. 겨울전쟁 참패로 국방인민위원에서 물러났으나, 독소전쟁기에는 빨치산 총사령관과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국에 34년 반 동안 머물며 최고 기록을 세웠고, 흐루쇼프 축출을 시도한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도 살아남아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 재임했다.
한밤중, 흰 셔츠에 멜빵 차림으로 지도를 들여다보던 샤포시니코프는 젊은 장교의 실수에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자네, 그게 뭡니까(голубчик)?" 그 부드러운 한마디에 장교들은 땅속으로 꺼지고 싶어했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제정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의 작전 교리를 체계화한 군사 이론가. 3권의 『군대의 두뇌』(1927–1929)는 현대전에서 참모본부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오늘날까지 러시아 참모 아카데미 교과 과정에 남아 있다. 스탈린은 그를 유일하게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며 깊이 신뢰했지만, 1937년 투하쳅스키 재판의 특별재판부에 참여해야 했고 NKVD는 샤포시니코프에 대한 공작 파일도 작성 중이었다. 1941년 가을 모스크바 반격의 설계자이며, 폐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스탈린의 최측근 군사 고문이었다.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군사 정치위원으로, 내전 내내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를 거쳐 1921년 발트함대 정치국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수병들 사이에 반란 기운이 번지며, 파업을 막지 못하면 '폭발'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때 반군 설득에 나섰다가 체포되었고, 1937년 대숙청에서 끝내 혐의를 부인한 채 이듬해 총살되었다.
「나는 당과 인민, 붉은 군대 앞에 깨끗하다」 — 1938년 3월, 체포 직전 스탈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짜르 군대의 부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여섯 개의 훈장과 금장 검을 받은 직업군인이었다. 내전에서는 남부전선을 지휘하여 데니킨의 백군을 패퇴시켰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을 맡았다. 1931년 붉은 군대 참모총장에 올라 기계화와 탱크전 교리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말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1938년 체포되어, 공개재판도 없이 1939년 붉은 군대의 날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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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중령·대령, 5회 부상, 게오르기 무기 수훈
「이오시프, 반혁명이오! 나를 체포하러 왔소! 나는 살아서 넘어가지 않겠소!」 — 1937년 NKVD가 다차를 급습하자 스탈린에게 전화로 외친 말 (딸 니나는 이 일화를 부인했다)
가난한 소작농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 기병대에서 복무하며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을 받았고, 내전에서는 제1기병군 사령관으로 백군을 분쇄하며 적군의 전설이 되었다.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로 임명되었고, 독소전쟁 초기에는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키예프 포위의 위험을 경고했으나 스탈린에게 경질되었으며 이후 후방의 기병 감찰관으로 전쟁을 마쳤다. 전문 군사교양보다 타고난 직감과 용기에 의존했던 그는 레닌부터 브레즈네프까지 모든 지도자 밑에서 살아남아 세 번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고 90세에 붉은광장 벽에 묻혔다.
1925년 10월, 위궤양 수술을 앞둔 병상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토요일에 새 회진이 있을 예정이다. 수술을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수술이 취소될까 봐 두려워했지만,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운동과 소비에트 군사 건설을 잇는 핵심 인물.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 파업을 이끌고 두 차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콜차크를, 남부전선에서 브란겔을 격파한 붉은 군대의 가장 성공적인 전선 사령관으로 부상했다. 1925년 트로츠키의 후임으로 전쟁인민위원이 되어 정규군 중심의 군사개혁과 통일군사교리 확립을 추진했고, 마르크스주의 군사이론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위궤양 수술 중 사망하여 소비에트 권력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죽음 중 하나를 남겼다.
1918년, 사형제 폐지 직후의 재판에서 피고에게 총살형이 선고되자 방청객이 술렁였다. 크릴렌코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
볼셰비키 변호사이자 군사 지휘관. 1917년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과의 휴전을 지휘했다. 이듬해부터 소비에트 법률 체계의 핵심 설계자로 전환, 혁명적 법의식 이론을 통해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했다. 샤흐띠·산업당·멘셰비키 재판에서 국가검사로 활약하며 비신스키와 법무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1938년 체포, '반혁명 등산·관광 테러 조직' 사건으로 20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 같은 해 7월 꼼무나르까에서 총살. 1955년 복권.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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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코르크는 나의 자랑이다. 각 전선마다 제1바이올린을 켜는 사령관이 있듯, 서부전선에서는 코르크가 그 바이올린이다” —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 1920년 투하쳅스키에게 보낸 직통 회선에서
에스토니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짜르 군대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 1918년 자원입대한 붉은 군대에서 내전기 제15군 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 폴란드 전선에서 공세를 지휘했으며, 제6군 사령관으로 페레콥-촌가르 작전에서 브란겔의 백군을 격멸했다. 내전 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까지 오르며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2급 군사령관)이 되었고,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복무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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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14제98 유리예프스키 보병연대 장교, 이후 니콜라예프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급)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제20군단, 제3시베리아군단, 제10군 참모 장교; 서부전선 항공 담당 장교 (참모 대위)
1935년 덴마크에서 비밀회합이 발각되자 베르진은 사표를 냈다. 4명의 중앙 간부가 한꺼번에 체포된 GRU 역사상 최대의 작전 실패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24년부터 11년간 소련 군사정보국(GRU)을 이끌며 세계적인 첩보망을 구축한 창설자. 리하르트 조르게, 레오폴트 트레퍼, 얀 체르냐크 등 정예 요원들을 발굴·훈련시켰고, 기술정보 수집 체계를 정비해 소련 방위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으로 활약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1918년 1월 브레스트 평화 협상 중, 레닌이 주재한 당 간부회의에서 메호노신은 "우리에겐 실질적 전투력이 없다. 전선은 벌거숭이다. 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콘스탄틴 메호노신은 적군 창설기의 핵심 군사 조직가로,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이어 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포드보이스키·스클랸스키와 함께 신생 적군의 골격을 세웠다. 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으며, 1918년 차리친에서는 트로츠키가 임명한 남부전선 사령관을 지지하며 스탈린·보로실로프의 독자노선에 맞서 이들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전 후에는 브세보부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체육 시스템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 고스플란·오소아비아힘·해양연구소 등으로 옮겨갔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된 후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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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3페름에서 학생혁명조직 참여; RSDLP 입당·볼셰비키; 폭발물 운반·선전물 등사 등 지하 활동
1913–191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두 차례 체포·추방; 카스피해 과학원 해양탐사 참여
1915–1917.2파블롭스크 근위연대 예비대대 사병; 병사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조직 건설
1917.4–10볼셰비키 중앙위 군사조직(보옌카) 지도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7월 봉기 후 크레스티 감옥 수감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참모장;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진압 지휘
1917.11–1918.9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잠나르콤보옌);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적군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위원
1918.9–1919.7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РВСР) 위원; 동부·남부·카스피-카프카스 전선 РВС 위원 —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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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스탈린이 보건장관 스미르노프의 제안에 답하여: '메흘리스에게 창조적인 일을 맡기라고? 무언가를 부수고, 분쇄하고, 파괴하는 일 — 그런 데나 어울리는 사람이지.' 그리고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오데사 출신 유대인 볼셰비키로, 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출발해 그의 가장 광적인 집행자가 되었다. 프라우다 편집장(1930–1937)으로 대숙청의 선전전을 지휘했고,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장교단에 대한 대량 숙청의 주요 조직자였다. 1942년 케르치 전선에서 스타프카 대표로서 지휘부에 파국적으로 간섭해 크림 전선 붕괴를 초래,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종전까지 복권되어 국가통제장관을 지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창조가 아닌 파괴에만 맞는 사람'이라 평했다.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10대에 혁명운동에 뛰어든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 청년으로, 트로츠키와 함께 망명 생활을 거쳐 1917년 메즈라이온치를 통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직접 들어가 협상했고, 그가 약속한 무사 통행으로 방어선이 무너지며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곧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및 중앙라다에 맞서 싸우다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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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대장정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돈바스 탄광 복구를 위해 작전 지역 목재를 무단 벌채한 고르바토프를 조사하러 모스크바에서 위원회가 파견되었다. 스탈린은 보고를 듣고 "고르바토프는 무덤만이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범죄는 명백하지만 사리사욕은 없었다"며 사건을 덮었다.
짜르 군대의 하사관으로 1차대전에서 두 개의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고, 내전에서는 붉은기병여단을 지휘했다. 1938년 대숙청 때 체포되어 고문 끝에 콜리마 수용소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끝내 거짓 자백을 거부했고, 1941년 복권되어 전선으로 돌아갔다. 독소전에서 제3군을 지휘하며 오룔, 바그라티온, 동프로이센, 베를린 공세를 관통했고 1945년 소련군 베를린 사령관을 지냈다. 전후 공수군과 발트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한 뒤, 1964년 《노비 미르》에 회고록 《내 생애의 세월》을 발표하여 스탈린 시대 억압을 상대적으로 솔직히 증언한 초기 증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스클랸스키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클랸스키다."
적군의 실질적 창설자 중 한 명이자 트로츠키의 가장 신뢰받는 대리인. 키예프 의대 출신의 볼셰비키로, 1918년 겨우 26세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인민위원 대리에 임명되어 내전 내내 트로츠키가 전선을 누비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적군의 전 행정·작전 기구를 지휘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 혁명의 군사 조직가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속에서 1924년 해임되어 섬유 트러스트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미국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로 사망했다. 스탈린 시기 이후 그의 이름은 소련 군사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1930년 8월 2일, 바라노프는 보로네시 비행장에서 무장 낙하산병의 첫 전투 투하를 명령했다 — "적 영토에서의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무장 낙하산병 집단 투하를 시연하라" — 이날은 소련 공수군(VDV)의 탄생일이 되었다.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을 맡아 조직적·산업적 기초를 구축했다. 1932년부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으로 항공기·엔진 생산 확대를 주도해 제2차 세계대전을 떠받칠 항공산업 토대를 놓았다. 1930년 8월 2일 보로네시 근교에서 소련 최초의 전투 낙하산병 투하를 지시해 공수군(VDV) 창설의 기원을 만들었고, 비밀 리페츠크 독일 항공학교 설립 협정에도 서명했다. 초기 로켓 연구(GIRD)와 성층권 비행선 개발을 지원했으며 모스크바·하리코프·카잔 항공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1933년 항공 사고로 아내와 함께 사망,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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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1913년 체포·페테르부르크 추방
1915–1917제국군 징집, 혁명 선동으로 체포되어 8년 중노동형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크렘린 승전 축하연. 스탈린이 지휘관들에 대한 건배가 끝난 뒤 술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이제 진정한 사령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위대한 전쟁의 일꾼을 위해. 흐룔료프 동지를 위해.」
가난한 대장장이 가문의 소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금세공 도제를 거쳐 소련군 대장과 소련군 후방의 창설자로 올랐다. 1941년 8월 1일 통합병참체계인 소련군 후방(Тыл Красной армии)을 설립하고 종전까지 이를 이끌며, 동시에 1942~1943년에는 교통인민위원으로서 전시 철도를 관장했다. 전쟁 기간 동안 크렘린궁 스탈린 집무실을 113회 방문하며 최고사령관과 직접 물자와 보급을 조율했고, 승전 기념연에서 스탈린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진정한 사령관이자 위대한 전쟁의 일꾼」이라며 흐룔료프를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 사후 흐루쇼프의 반대를 뚫고 크렘린 성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1941년 8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예료멘코는 스탈린에게 직접 "그 악당 구데리안을 때려부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패했고, 구데리안은 키예프를 포위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병사에서 소련 원수까지 오른 군인.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내전을 치렀고, 기병 장교로 숙청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하며 흐루쇼프와 함께 도시 방어 계획을 세웠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전쟁 동안 무려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5년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어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전후 1955년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군사적 성과와 달리 정치적 비중은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종전 일기를 전쟁 내내 몰래 써내려간 기록자이기도 했다.
1942년 여름, 독일 산악병들이 엘브루스 산에 나치 깃발을 꽂았다. 튤레네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미리 구축해 둔 테레크-그로즈니 방어선은 버텼고, 독일군은 석유에 닿지 못했다.
심비르스크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에서 4개 등급의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모두 받은 완전 기사가 되었다. 내전에서는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정보과장과 기병여단장으로 싸웠고, 1940년 주코프·메레츠코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세 육군대장 중 한 명으로 진급했다. 1941년 남부전선을 지휘했으나 참패 속에 중상을 입었고, 1942년 2월 자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에 부임하여 테레크 강과 그로즈니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2~43년 비터를 위한 캅카스 전투에서 독일군의 바쿠 유전 돌파를 저지한 것이 그의 가장 결정적인 군사적 공헌이었다. 전후에는 군관구 사령관과 기병 감찰감을 지냈고, 회고록 『세 전쟁을 넘어』를 남겼으며 1978년 사망 직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와 자신감뿐이다. 나는 서른에 장군이 되거나,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 1914년, 21세의 소위 시절.
27세에 바르샤바까지 진격한 내전의 신동이자, 크론시타트와 탐보프 농민 반란의 진압자. 종심작전 교리로 붉은 군대를 현대화한 원수였으나, 1937년 「독일 간첩」으로 몰려 비밀 재판 하루 만에 총살되었다. 그와 함께 시작된 장교단 숙청의 청구서는 1941년 6월에 도착했다.
홀로 무장해제한 채 러스키섬 사관생도들 앞에 선 라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러시아 땅을 위해 우리는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몰도바 보야르 가문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1917년 혁명에 합류하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이끈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자바이칼 전선 사령관으로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백군과 싸웠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과 유격전을 거쳐 1920년 1월 봉기를 조직해 콜차크의 극동 통치를 무너뜨렸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불태워졌으며, 소련에서 가장 널리 기념된 내전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군사 문제에서 그에게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언제나 활기와 에너지,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평생의 일』 (1975)
카르스주 출신의 폰토스계 그리스인으로, 차르군 대위에서 붉은 군대 부참모총장까지 오른 군사 이론가이다. 『현대군의 작전 규모』(1926)와 『현대군 작전의 성격』(1929)을 저술하여 전략과 전술을 잇는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종심작전 교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구상은 붉은 군대의 전간기 교리 개혁을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승리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다. 1931년 근무 중 항공 사고로 37세에 사망, 유해는 크렘린 성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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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7차르군 입대, 모스크바 준사관학교 졸업 후 제6핀란드소총연대 중대장·대대장, 참모대위
1917–18혁명 후 병사들에 의해 연대장·제7군 사령관 선출, 케렌스키·페틀류라 정부로부터 법외 선언
매년 키예프에서 아버지가 낡은 가죽 장화를 청하러 왔지만, 가마르니크는 끝내 거절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장화를 보면, 아들이 군대에서 도둑질한다고 생각할 게 아닙니까."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이끌고 극동 지역의 산업화를 진두지휘한 혁명가. 1929년부터 8년간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소련군 정치장교 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었으며, 투하쳅스키의 기계화·항공 중심 군 현대화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다. 1929년 중앙위원회에서 부하린 '우익 반대파' 숙청을 공개 지지했으나, 1937년 5월 자신이 '군사-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해임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55년 복권.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는 가운데 푸르카예프는 쿠이비셰프에서 열린 혁명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의 사령관을 맡았다. 외교단 앞에서 펼쳐진 이 퍼레이드는 소련이 아직 건재함을 연합국과 잠재적 적국 모두에 과시하는 무력 시위였다.
모르드바인 출신으로, 차르군 소위에서 붉은 군대의 대장까지 오른 소련의 군사 지휘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르제프 공방전을 지휘했으며, 1943년 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2극동전선군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소련이 참가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주요 전역이었다. 전후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지냈으나, 칼리닌 전선군 시절 보급 실패로 병사들이 아사한 책임을 물어 해임된 이력도 있다.
「소비에트 국가의 적들과 싸운 전선에서 내 아들과 세 형제, 누이가 죽었다」 — 1956년 강제 퇴역을 앞두고 올린 사직 청원에서
소련 기갑군 최고의 실전 지휘관 중 한 명.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쳐 붉은 군대에 몸담았고, 1938년 체포·수감되었다가 1939년 복권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제2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루블린-브레스트, 비스와-오데르, 동포메라니아, 베를린 공세 등 결정적 전역을 지휘했으며, 그의 부대는 1945년 4월 베를린 시내에 가장 먼저 돌입한 소련군이었다. 전후 기갑·기계화군 총사령관(1948~1953)으로 소련 전차 병과 전체를 이끌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좌천되어 1956년 건강 악화로 퇴역했다.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와 기갑군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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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8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 소위까지 진급
1918–1930붉은 군대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탐보프 반란 진압 참전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부대는 강변을 따라 걸었네, 먼 데서 걸었네, 붉은 기치 아래 걸었네, 연대장이여. 머리는 붕대 감고, 소매엔 피 묻었네… — 미하일 골로드니, 〈쇼르스의 노래〉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젊은 지휘관으로, 1918년 보훈 연대를 조직해 키예프 탈환을 이끌고 44소총병사단장으로 코로스텐 철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19년 8월 전선에서 24세로 전사한 후 10여 년간 잊혀졌으나, 1935년 스탈린이 도브젠코에게 '우크라이나의 차파예프'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소비에트 최대의 문화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블란테르의 〈쇼르스의 노래〉, 도브젠코의 영화 〈쇼르스〉(1939), 도시·거리·기념비로 그의 신화는 전 소련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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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 의무병 복무 후 빌나 군사학교 속성과정 수료, 소위로 남서전선 전투. 결핵으로 후송.
1918.3–8고향 스놉스크에서 빨치산 부대 조직, 독일 점령군과 교전. 가을 볼셰비키 입당.
1918.9–11보훈 연대 창설. 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 제2여단장으로 체르니히우·키예프·파스티우 탈환.
1919.2키예프 사령관 임명 (2월 5일–13일). 명예 금무기 수여.
1919.3–8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장. 지토미르·빈니차·즈메린카 탈환, 폴란드군 및 페틀류라군 방어전.
실신과 피를 토하는 몸으로도 수사관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소비에트 권력의 자비를 받을 자격을 얻고 싶습니다."
세묜 페트로비치 우리츠키는 소련의 군사정보 지휘관으로, 1935년 4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노농적군 정보총국(GRU)을 이끌었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모이세이 우리츠키의 조카이자 외교관 바츨라프 보롭스키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19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내전기 기병 여단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대 독일·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합법 정보활동을 수행했고, GRU 수장 재임 중에는 스페인 내전 초기 소련의 정보작전과 해외 첩보망 확장을 감독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나, 복잡한 정세 속에서 결단력을 발휘하고 확고한 손으로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사령관이었다." — 이반 코네프 원수
제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하고 내전에서는 여단·사단 참모장을 지낸 니콜라이 푸호프는, 전간기 대부분을 군사학교 교관으로 보내 현장 지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독소전을 맞았다. 1942년 1월 13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쿠르스크 북측면에서 모델의 9군을 6일간 저지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에서 세 개 전선군 중 가장 먼저 강을 건너 체르니고프를 해방하여 영웅칭호를 받았다. 이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까지 13군을 이끌며 중부 유럽을 관통했고, 13군은 최고사령관 명령에 26회 거명되었다. 전후에는 오데사·북캅카스·서시베리아·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을 지냈다.
1940년 1월 7일,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라고 묻자 긴 침묵이 흘렀다. 티모셴코가 일어나 말했다. "논의된 모든 것을 주신다면 제가 지휘를 맡겠습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부됸니 기병군에서 성장한 원수로, 겨울전쟁에서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며 명성을 얻었다. 1940년 보로실로프를 대신해 국방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기계화·재편성을 추진했으나, 1941년 독일 침공까지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개전 직후엔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로스토프 반격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하리코프 참패로 전선 지휘에서 물러났다. 전후에는 소련군 원로로 남았다.
1951년 7월 해군 주력군사평의회에서 스탈린은 유마셰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깨끗하고 용감하며 훌륭한 선원이지만, 장관이 아니다. 모든 일을 보좌관에게 맡기고 권력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짜르 해군의 수병으로 출발하여 소련 해군 최고위에 오른 제독. 1939년부터 태평양함대를 지휘하며 극동의 해군 기지를 정비했고, 1945년 8월 대일전에서 함대를 이끌어 남사할린·쿠릴 열도 상륙과 조선 북부 해안의 청진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7년 쿠즈네초프의 뒤를 이어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1950년 해군장관에 올랐으나, 스탈린은 그가 실무를 보좌관에게 넘기고 음주에 빠져 있다며 '사람은 좋지만 장관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1951년 경질했다. 이후 해군아카데미 교장으로 물러나 함대보다 교실을 지켰다.
1943년 1월 31일, 베케톱카 64군 사령부. 슈밀로프 장군 앞에 파울루스 원수가 들어섰다. 독일군 원수가 적군에 항복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그를 생포한 것은 슈밀로프의 병사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친 베테랑 보병 장교. 1942년 8월 6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를 6개월간 책임졌다. 추이코프의 62군이 북부 시가전을 치르는 동안 64군은 헤르만 호트의 4기갑군을 저지하며 남부 방어선을 사수했고, 1943년 1월 부하들이 생포한 파울루스 원수를 직접 심문했다. 이후 제7근위군으로 개편된 부대를 이끌고 쿠르스크, 드네프르 도하, 부다페스트, 프라하 공세까지 진군했으며, 드네프르 도하의 공로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백해군관구와 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을 지냈고, 사후 마마예프 쿠르간에 안장되었다.
주코프 원수의 평가: "그는 작전술을 완벽히 체득한 진정한 소련 군사령관이었다. 완전한 의미에서 군인이었다."
리투아니아 농민 가정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23세에 14군 사령관이 되어 남북전쟁에서 데니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오데사를 점령했으며,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했다. 독일 연수에서 기계화전 교리를 흡수하여 투하쳅스키·야키르와 함께 붉은 군대의 기술 현대화를 주도했고,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1936년 대규모 기동훈련을 지휘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하루 만에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체포 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과 당신에 대한 사랑의 말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썼다. 스탈린은 여백에 '악당이자 매춘부'라고 적었고, 보로실로프는 '완벽히 정확한 정의'라고 덧붙였다.
키시뇨프 유대인 약사 가정에서 태어나, 차르 시대 입학 제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 중 오데사에서 지토미르까지 적진 400km를 돌파한 전설적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기계화·공수 실험과 종심작전 교리 발전을 주도한 군사 개혁의 핵심 인물로, 1935년 콤안다름 1계급이 되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총살, 1957년 복권.
보급로가 끊긴 뒤에도 철수 허가를 받지 못한 그는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키안타야르비호를 건넜다.
안드레이 젤렌초프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으로 붉은 군대에 합류해 내전과 군 조직 개편을 거친 직업군인이었다. 겨울전쟁에서 제163소총사단을 이끌고 수오무살미를 점령했지만, 보급로가 끊기며 사단이 소련군 최초의 포위망에 갇혔다. 그는 철수를 요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했고, 결국 사단 일부를 이끌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국경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제88소총사단을 지휘했으며 1941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전사했다.
1917년 10월 오데사에서, 페도렌코가 이끄는 수병 부대가 오데사 군관구 사령부를 점령하고 도시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웠다.
야코프 페도렌코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붉은 군대의 주자동차장갑전차총국(GABTU)을 이끌며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소련 기갑·기계화 부대의 건설과 전투 운용을 총괄했다. 1941년 7월 국방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전차 생산과 보급을 직접 조율했으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 전투에서 최고사령부 스타프카 대표로 파견되었다. 전쟁 중 149차례 스탈린의 집무실로 불려간 최고 지휘부의 핵심 군사 고문으로, 1944년 2월 로트미스트로프와 함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가 되었다. 흑해 함대 수병으로 10월 혁명에 참가했고 내전 시기 장갑열차를 지휘했으며, 1947년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도시의 수비병들을 구하지 못한 절망에 페트로프는 권총을 들어 자결하려 했다. 장교들이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았다. 그는 잠수함으로 철수한 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다.
이반 페트로프는 대조국전쟁 최대의 방어전 두 곳인 오데사(1941)와 세바스토폴(1941~1942)을 지휘한 소련군 대장이다.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로 군 경력을 쌓았고,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으로 흑해 방어전을 이끌었다.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으로 타만 반도와 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으며, 제2벨로루시·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해 카르파티아를 넘었다.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으로 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수행해 소련영웅이 되었다. 메흘리스와 스탈린에 의해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매번 재기용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작전 능력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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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알렉세옙스크 사관학교 졸업, 제156예비보병연대 반중대장(준위), 건강 악화로 제대
1918–1922적군 입대·RKP(b) 가입, 내전에서 사마라·우랄·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참전,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
1922–1940중앙아시아 군관구에서 바스마치 토벌, 제1투르키스탄 산악소총사단장, 타슈켄트 보병학교장, 소장 진급
1941.7–10제25차파예프 소총사단장 →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 오데사 방어전과 철수 지휘
1941.10–1942.7세바스토폴 방어구역 부사령관 겸 프리모르스크 군 사령관, 만슈타인의 3차 공세까지 250일 방어
1942.8–1943.11제44군 사령관 → 흑해집단군 사령관 → 북캅카스 전선군 사령관 — 캅카스 방어·타만 해방·케르치-엘티겐 상륙작전
1944.3–1945.3제33군 사령관 →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 →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 대장 진급 후 강등, 재진급
1945.4–5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 베를린·프라하 작전, 소련영웅 수훈
1945–1958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소련군 총감찰부 제1차장, 지상군 제1부총사령관, 국방부 총감찰관
그는 상황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스타브카 보고 때마다 2~3시간씩 준비했다 — 부하 장군 시테멘코의 회고
소련군 총참모장(1945~1946)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초대 참모장(1955~1962). 1942년 12월 작전국장으로 기용된 이후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 이르기까지 소련군의 모든 주요 전략작전 입안을 실무적으로 지휘했다. 야전사령관이 아닌 참모장교로서 전쟁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탈린의 크렘린 집무실을 그 누구보다 자주 드나들며 직접 작전을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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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제국 러시아군 소위; 남서전선에서 참전해 부상, 성 안나 훈장 수여
1919–1922붉은 군대 남북전쟁 참전: 사단 부참모장에서 여단 참모장; 시바시 도하·크림 작전
1928–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작전학부 → 참모아카데미 수료; 모스크바 군관구 참모장
1939년, NKVD는 로코솝스키를 감옥 뜰로 끌어내 총성을 울렸다. 빈 총성이었다. 그는 끝내 허위 자백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복권 후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시 나를 잡으러 온다면, 나는 살아서는 가지 않겠다." 이후로 그는 항상 권총을 지녔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차대전에 자원입대해 용기로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내전에서 붉은기병대를 지휘하며 두 번 적기훈장을 받았고, 1937년 대숙청 때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투옥·고문당했으나 거짓 자백을 거부하고 1940년 복권되었다. 독소전에서는 모스크바 방어, 스탈린그라드 포위, 쿠르스크 방어전, 바그라티온 작전을 지휘해 '기동의 대가'로 불렸다. 전후 폴란드 국방장관으로서 소련-폴란드 양국 원수라는 유일무이한 지위에 올랐다.
1945년 5월 9일 0시 43분,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 독일군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이 끝나자 주코프는 일어서서 말했다: 「독일 대표단은 퇴장해도 좋소.」 카이텔 원수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쓰러뜨린 군인에게 어울리는 대사였다.
칼루가 농가 출신으로 차르 군대 하사관에서 붉은군대 원수까지 올랐다. 1939년 할힌골에서 관동군을 격파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베를린: 전쟁의 결정적 고비마다 파견되어 승리를 이끈 유일무이한 사령관이었다. 1945년 베를린에서 독일의 항복 문서를 받은 '승리의 원수'. 그러나 그 명성은 정치적 위협이 되었고, 두 번의 실각(1946, 1957)을 겪었다. 그래도 베리야 체포로 잠시 복귀했고, 회고록을 남기며 침대에서 죽은, 살아남은 승리자였다.
스타프카는 1942년 6월 8일 그를 해임하며 "서류 중심의 관료적 부대 관리와 부대와의 단절로 제2충격군의 통신선이 차단되어 예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미하일 호진은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적군에 들어가 내전을 치렀다. 1938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9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을 거쳐, 독소전 발발 후 주코프를 따라 레닌그라드 전선으로 가 참모장과 제54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1941년 10월 주코프가 떠난 뒤 레닌그라드 전선 사령관이 되어 첫 봉쇄 겨울의 방어와 티흐빈 공세를 지휘했으나, 1942년 6월 제2충격군을 포위에서 구출하지 못한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제33군, 제20군 사령관 등 현장 지휘를 거쳐 전후에는 군사교육 기관을 이끌었다.
1929년, 프리마코프는 튀르크 장교 '라기브 베이'로 위장하고 아프간 군복을 입은 2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방은 그를 '붉은 로렌스'라 불렀다.
비탈리 프리마코프는 적군(赤軍)의 군사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붉은 카자크(Червонное казачество) 부대를 창설해 남북전쟁에서 14차례의 후방 급습과 60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에는 '라기브 베이'라는 가명으로 아프간 군복을 입고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지휘하여 서방에서 '붉은 로렌스'라 불렸으며,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일본에서 무관으로 복무했다.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과 함께 '트로츠키주의 반소비에트 군사조직' 사건으로 사형당했고, 1957년 복권되었다. 마야콥스키의 연인으로 유명한 릴리야 브릭의 세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그는 비행 장교들을 직접 점검했다… 오늘날 소비에트 공군이 강력한 무기로 존재하는 것은 주로 그 덕분이다」 ― 망명자 알렉산드르 바르민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붉은 군대 공군을 세계 최대의 폭격기 전력으로 키운 인물. 1931년 공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직접 비행사 자격을 취득해 거의 매일 비행했으며, 죄수들을 동원한 샤라슈카 설계국에서 폴리카르포프 I-5 전투기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 여덟 장군에게 사형을 구형한 특별재판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형을 주장했다. 그해 11월 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1938년 7월 콤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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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발미에라 사범학교에서 볼셰비키당 입당
1919–21제55소총사단 정치위원; 돈 지역 군사위원
1924–2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붉은 군대 참모부 조직 편성 근무
1926–31공군 부사령관; 1929년 카차 비행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1931–37붉은 군대 공군 사령관 겸 국방인민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 구축
적군 최고 사령부가 서로를 비방하던 시절, 쿠탸코프는 디벤코의 만취와 무능을 고발했다. 답장은 NKVD였다.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디벤코의 도움으로 체포되었다.
사마라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7세부터 머슴살이로 일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차파예프 여단에 합류, 두 달 만에 정찰 소대장에서 연대장까지 올랐다. 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을 이끌어 우랄 백코사크군을 격멸했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바스마치 토벌에서 적기훈장을 세 차례 수훈했다. 콤코르 계급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까지 올랐으나, 1937년 상관 디벤코와의 상호 비방전 끝에 디벤코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어 1938년 7월 28일 처형되었다. 사후 소설 『차파예프』에서 그의 이름은 '옐란'으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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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하급 부사관으로 복무.
1917.5볼셰비키 입당. 제2차 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1918붉은 군대 입대, 차파예프 여단 합류. 73여단장으로 승진.
1919차파예프 전사 후 25소총병사단장 취임. 우랄 코사크군 격멸. 명예혁명무기 수훈.
1920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25사단 지휘. 두 번째 적기훈장.
1923–1924군사아카데미 졸업. 호레즘 집단군 사령관으로 바스마치 토벌. 세 번째 적기훈장.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가장 용맹한 적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북카프카스, 크림, 탐보프, 크론슈타트 등 모든 주요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적기훈장을 네 차례 수훈했다. 전후 군단·군관구 지휘관을 거쳐 1937년 키예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38년 1등군사령관 계급과 함께 국방제1부인민위원에 올랐다. 대숙청기에는 키예프군관구에서 자신도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으나,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군사 파시스트 음모'를 자백했다. 1939년 2월 사형 판결을 받고 당일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40년 12월 고위지휘관 회의에서 파블로프는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인민의 적이 너무 많아서, 그 모두가 정말 적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스탈린 시대에 장군의 입에서 나온 보기 드문 직언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전차여단을 지휘하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고, 1937년부터 붉은군대 자동차장갑전차국장으로서 T-34 개발과 기갑 교리를 주도한 소련 기갑군의 설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될 때까지 싸웠고, 붉은군대에 합류해 시베리아에서 바스마치 반란까지 진압했다. 1941년 6월 서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독일군 중앙집단군의 주공을 정면에서 맞았으나 전선은 참사로 무너졌다. 민스크 함락 후 체포되어 직무 태만으로 기소되었고, 전쟁 발발 정확히 한 달째 되던 날 총살되었다. 1957년 복권되었으며, 그가 설계를 주도한 T-34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차로 남았다.
『나는 군인들과 함께 왔고, 군인들과 함께 떠날 것이다』: 탈출용 비행기에 부상병과 군기를 싣고 자신은 포위된 채 남았다.
1차대전의 사관후보생에서 붉은 군대의 중장이 된 예프레모프는 내전 시기 장갑열차 부대를 이끌고 바쿠를 점령해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앞당겼다. 1941년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33군을 지휘해 나로-포민스크 돌파를 분쇄했고, 이어진 반격에서 나로-포민스크·보롭스크·베레야를 해방했다. 1942년 1월 주코프가 뱌지마로 무리한 진격을 명령하자 33군은 독일군 후방 깊숙이 포위되었고, 스탈린이 퇴각을 허락한 것은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예프레모프는 스타프카가 보낸 탈출용 비행기를 거부하고 부상병과 군기를 먼저 보낸 뒤, 1942년 4월 19일 포로를 피해 권총으로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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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7제국군 포병 사관후보생, 브루실로프 공세 참전
1917–1920붉은 근위대 합류, 내전에서 중대·대대·연대·여단 지휘, 장갑열차로 바쿠 점령
1921–193333소총사단장, 군사고문으로 중국 파견,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소총군단장
1937–1940볼가·자바이칼·오룔·북캅카스·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1941.01–07보병총감 제1부감, 21군 사령관, 중부전선 사령관
1941.10–1942.0433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나로-포민스크 돌파 분쇄, 뱌지마 포위에서 전사
11월 17일, 공세 이틀 전, 볼스키는 직속 상관을 건너뛰어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우라누스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고.
차르 군대 이등병으로 출발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한 볼스키는 1930년대 초 소련 최초의 기계화여단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4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공세 이틀 전 '정직한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우라누스 작전의 실패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스탈린과의 통화 후 편지를 철회하고 공세에 참가해 포위망 최초 봉쇄 부대가 되었다. 이후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발트 해방과 동프로이센 작전을 지휘했으며, 결핵 악화로 전선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4년 1월 27일 봉쇄 완전 해제. 스탈린은 관례를 깨고 승전 축포 명령을 고보로프에게 맡겼다. 대조국전쟁에서 어떤 전선군 사령관도 받지 못한 유일한 특권이었다.
뱌트카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동원되어 제국군 포병 소위가 되었다. 내전에서 콜차크 백군에 복무하다 1919년 탈주, 블류헤르 51사단에 들어가 적군으로 전향했다. 대숙청 시기 백군 경력으로 의심받았으나 살아남았다. 독소전에서 5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를 맡아 주코프의 신임을 얻었고,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포위된 도시 방어를 체계화했다.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봉쇄를 돌파하고 1944년 1월 완전 해방을 이뤘다. 전후 소련 방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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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7콘스탄틴 포병학교 졸업, 제국군 소위
1918–19콜차크 백군 8카마 사단 포대 장교, 중위 진급 후 탈주
1920–21블류헤르 51사단 포대장, 페레콥·카홉카 전투서 부상, 적기훈장
1933–38프룬제 사관학교·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원수 반', 포병 교관
1941.10–42.045군 사령관 — 모스크바 방어·반격
1942.04–45.05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 이스크라 봉쇄 돌파, 완전 해방, 비보르크·발트 공세
예료멘코 원수는 이렇게 평했다: '자하로프는 머리는 나쁘지 않고 의지가 강하지만 끔찍한 무례자다.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사람에게 소리지르고 때로는 구타하기까지 한다.'
사라토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1세부터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1916년 징집되었다. 1917년 10월 병사들에게 연대장으로 선출된 후 적군에 합류, 동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아카데미를 마친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선군 부사령관으로 좌익 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제2근위군을 이끌며 미우스 강 방어선 돌파와 세바스토폴 해방에 기여했다. 1944년 제2벨로루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가했으나 공세 지연으로 신임을 잃고 제4근위군 사령관으로 강등되었다. 전후 남우랄·동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과 비스트렐 과정장을 지냈다. 날카로운 작전 감각과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1948년 9월 모스크바. 소련영웅 금성훈장을 단 크류코프 중장이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압수품에는 다이아몬드 208개, 레핀과 세로프의 그림 132점, 고급 승용차 3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3년 후 형량은 징역 25년.
농민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소위까지 지낸 후 적군에 합류한 소련의 기병 지휘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2근위기병군단장으로 비스와-오데르 작전과 동포메라니아 작전을 이끌어 194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종전 후 유명 민요 가수 리디야 루슬라노바와 결혼했으나, 1948년 '전리품 사건'으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받고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다.
절단 수술 후 라포포르트가 문병하자 보브시가 말했다. '지금 내 상태를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나? 이제 나는 다리만 잃었을 뿐 사람으로 남았지만, 거기서 나는 사람이기를 그만뒀네.'
소련군 주임 내과의사(1941~1950)로서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군대 전역의 치료 체계를 조직하고 전시 내과학의 기초를 세웠다. 1948년 살해된 솔로몬 미호엘스의 사촌으로, 1953년 1월 '의사들 음모' 사건의 수괴로 타스 통신에 지목되어 체포·고문당했다. 스탈린 사후 석방되어 보트킨 병원에서 임상과 연구를 재개했으며, 말기 육종으로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병원에 머물며 죽을 때까지 일했다.
빈농의 아들로 12세에 모스크바 공장 노동자가 되었고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겨울전쟁에서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으며, 참모총장 재임 중 독소전 이틀 만에 체포·고문당했으나 스탈린의 지시로 석방되었다. 이후 볼호프 전선과 카렐리야 전선을 지휘하며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레닌그라드 봉쇄를 깼고, 1945년 만주에서 관동군 격파의 주역이 되었다. 1944년 원수로 진급, 전후에도 현역으로 남아 1968년 사망했다.
스탈린-흐루쇼프 이행기 정보총국(GRU)을 지휘한 참모, 판문점 정전 전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1근위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샬린은 비정상적으로 일벌레였고, 정확하고 페달틱할 만큼 꼼꼼한 참모였다. 언제 사령부에 들여다봐도 그는 항상 책상 앞이었다.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렌부르크 농민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나온 뒤 제정군 소위, 내전기 적군 중대·대대장을 거쳐 소련군 정보총국장까지 오른 상장. 1근위전차군 참모장으로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종전 후 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51–1952년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복무했다. 1952–1956년과 1957–1958년 두 차례 GRU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소련 군사정보를 총괄했고, 1954년에는 주코프 원수가 서방과 접촉해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보고를 올려 군부 내 긴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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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제정군 105보병예비연대, 빌나 군사학교 졸업 후 소위 임관, 17시베리아소총예비연대 중대장
1918–1921적군 자원입대, 공산당 입당, 내전 종군 — 오르스크 연대 중대·대대장, 여단장 대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크론시타트 진압 참가
1922–1931오르스크 현·튜멘 군관구 병무위원, '비스트렐' 과정 수료, 바시키르 자치공화국 영토관구 국장
베를린 공세 첫날 밤, 주코프의 탐조등이 연기 속에서 아군을 비추자 코네프는 참모에게 말했다. "이웃들은 빛을 원해 탐조등을 쓴다네. 우리에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더 많은 어둠이 필요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며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비스와-오데르 작전, 베를린과 프라하 진격을 주도한 원수. 1944년 3월 붉은 군대 최초로 전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에 진입했다. 전후에는 지상군 총사령관과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으며, 1957년 주코프 실각을 지지했다. 미군 훈장과 영국 바스 훈장까지 받은, 소련이 가장 신뢰한 전선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되었을 때, 갈리츠키는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고 동료 한 명도 연루시키지 않았다.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918년 붉은군대에 입대한 갈리츠키는, 1938년 NKVD에 체포되었으나 자백을 거부하고 이듬해 복권된 몇 안 되는 고위 장교 중 한 명이다. 제11근위군 사령관으로서 동프로이센 작전과 쾨니히스베르크 공략을 지휘해 소련영웅이 되었고, 종전 직후 전몰 장병을 기리는 소련 최초의 전쟁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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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8제국군 하사관; 붉은군대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1918–21내전: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중상, 철도방어 정치지도원
1922–37비스트렐 과정·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연대장·사단장, 하리코프군관구 참모장
1938–39NKVD 체포·수감, 자백 거부; 1939년 5월 복권·복직
1939–41제24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만네르헤임선 돌파, 서부특별군관구
1941–43제24소총사단·제67소총군단·제3충격군 지휘, 두 번 중상, 벨리키예루키·네벨
1943–45제11근위군 사령관 — 고로도크, 바그라티온,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필라우 함락; 소련영웅
1945–62특별·카르파티아·오데사·자캅카스군관구, 모스크바 방공권, 북부군집단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1962년 퇴역
1942년 초, 판필로프는 스탈린에게 「독일 파시스트군의 화학 공격 준비 지속에 관하여」라는 특별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처칠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를린에 가스전의 대가를 공개 경고하게 만든 외교적 연쇄 반응을 촉발시켰다.
1918년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여 동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기갑부대로 전환해 1937년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38년 하산 호에서 제2기계화여단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까지 GRU 국장으로서 전쟁 최대 위기 속 소비에트 군사정보를 지휘했고, 1942년 초 독일 화학전 준비 보고로 처칠의 공개 경고를 이끌어냈다. 안데르스군 이탈 후 전선으로 복귀해 제3근위전차군단을 이끌고 동포메라니아와 베를린 공세에서 독일 제2군을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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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22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5군에서 내전 참전 (동부전선, 콜차크군 상대)
1922–26기병연대 정치위원 → 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 근무 → 프룬제 사관학교 고위지휘관 과정 졸업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모스크바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만슈타인의 구원군을 요격했다. 이 결단이 코텔니코보 전투의 승리와 파울루스 6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오데사 빈민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열다섯 살에 1차대전에 뛰어들었고, 프랑스 전선과 스페인 내전을 거친 보기 드문 국제 이력의 군인이었다.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크라이나 해방, 발칸 진격, 만주 작전까지 2차대전의 결정적 전역을 지휘하며 소련 최정상의 야전사령관으로 우뚝 섰다. 프랑스어·스페인어에 능통했던 유일한 소련 원수로, 10년간 국방장관으로서 핵·미사일 시대의 전략적 재편을 관리했고 당 지도부와의 긴장 속에서도 군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지켜낸 전후 소련 군부의 중심축이었다.
1941년 6월 22일 아침, GAU 청사에서 사무실 열쇠를 받는 순간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포병총국(GAU)장으로서 적군의 포병 보급·개발·편제를 총괄하고 스탈린에게 140회 호출된 포병원수. 종전 후 독일 V-2 시설을 조사하고 GAU 내 로켓국을 창설했으며, 1948년 R-1 탄도미사일 첫 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소련 로켓 개발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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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20제국군 징집 → 붉은군대 입대; 제1차 세계대전·내전 참전, 페트로그라드 포병과정 졸업
1920–193728산악사단 포대장·포병연대장 등 포병 지휘관 역임, 고등포병학교 졸업(1924)
1937–1941벨로루시아·북카프카스·키예프 특별군관구 포병사령관; 폴란드 원정·겨울전쟁 참전
1941–1948포병총국(GAU)장; 포병원수 진급(1944); 전시 내내 포병 보급·개발 총괄
1948–1952군무차관; S-60 대공포 결함으로 1952년 2월 체포·계급 박탈
1953–1960복권(1953.4); 방공군 제1부사령관 겸 제1부총사령관; S-25 위원장; ABM 서한 공동서명
1960–1972국방부 감찰장단 감찰고문; 회고록 『Об артиллерии и немного о себе』
1941년 6월 21일 밤, 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자하로프는 흑해함대로부터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상부 승인 없이, 그는 관구 전 부대에 전투경계태세 돌입과 항공기의 야전비행장 분산을 명령했다. 새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오데사 군관구는 붕괴를 면한 유일한 국경 군관구였다.
트베리 농민 출신으로 1917년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에서 소련군 총참모장까지 오른 원수. 코네프·말리놉스키 휘하 참모장으로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과 야시-키시네프 공세 등 주요 작전을 기획했다. 1960년대 총참모장으로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의 전략 현대화를 지휘했으며, 흐루쇼프와의 충돌로 1963년 경질되었다가 그가 실각하자 복귀했다. 군사이론 교수이자 다수의 전략 저작을 남긴 학자-군인으로, 1917년 혁명에 참가한 마지막 현역 원수였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이미 전개된 군대로 그냥 시작된다. 동원과 집중은 1914년처럼 전쟁 상태 발발 이후의 시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은밀히 진행된다」 — 『새로운 투쟁 형태』(1940)
소련의 군사 이론가이자 군 장교로, 트리안다필로프와 투하쳅스키와 함께 종심작전(глубокая операция) 교리의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작전술의 진화』(1932, 1937)는 전략과 전술 사이의 작전술을 체계화한 기념비적 저작이며, 참모 아카데미 작전술 학과장으로서 붉은 군대 지휘관 세대를 양성했다. 1940년 저서 『새로운 투쟁 형태』는 독일군의 전격전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동원 없는 전쟁 개시를 예언했으나 스탈린 지도부는 외면했고, 이 책은 오늘날 게라시모프 doctrine에서 인용되며 재평가되고 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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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8준사관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년 여름 붉은 군대 자원입대
1918–21제6군 정치부, 제159소총연대 군 정치위원, 제154소총연대 부지휘관
1921–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졸업; 서부전선 참모부 정보부장 겸임 (1923–24)
1925–30레닌그라드 군관구 작전부장 → 제10소총군단 참모장
1930–3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작전학부장 (1932)
1933–36제4소총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1935년 콤브리그 계급 부여
1936–39참모본부 제1부 부부장 → 참모 아카데미 군 작전학과장 → 작전술 학과장, 교수
1939.12겨울전쟁 당시 제7군 참모장 (12월 17–30일), 콤디브 계급 (12.9)
1940–41국방인민위원회 배속; 『새로운 투쟁 형태』 출간 (1940); 1941년 6월 7일 체포
1942–55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카라간다 교정노동수용소 복역; 만기 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
1955–761955년 6월 복권, 대령 계급 회복 후 퇴역; 『군사사상』 편집부 근무, 저술 재개
재판은 50분 만에 끝났고, 1940년 1월 11일 비노그라도프는 참모장·정치부장과 함께 생존한 사단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트베리 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콜차크·마흐노·브란겔과 싸웠다. 1939년 초 급격한 승진으로 제44소총병사단장이 되어 폴란드 침공을 거쳐 겨울전쟁에 투입되었고, 포위된 제163사단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라테 도로로 진격했다.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에 사단이 궤멸되자 지휘를 포기하고 탈출했으며, 50분간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0년 1월 11일 생존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1941년 여름, 폭탄 파편이 말리닌의 뒷머리와 목에 박혔다. 중상이었지만 그는 병원 후송을 거부하고 야전 사령부에 남았다. 로코솝스키는 후일 '전쟁 내내 나의 오른팔이었다'고 회고했다.
농민 출신 목수에서 붉은군대 최고의 참모 장교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말리닌은, 스몰렌스크 포위망의 절망적인 순간부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작전의 승리까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로코솝스키가 지휘하고 말리닌이 치밀하게 계획한 이 긴밀한 동반 관계는 제16군, 돈·중앙·제1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를 소련 작전술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전후에는 소련군 독일주둔군 참모장, 지상군 주참모장을 거쳐 19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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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붉은군대 입대, 내전 참전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갑부대 근무
1939–40제9군 작전처장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1941–44로코솝스키 휘하 제16군·전선군 참모장;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1945년 8월,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3주도 안 되어 800킬로미터를 돌파하며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련의 전차군 지휘관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 고리를 닫은 제4전차군단을 지휘했고 쿠르스크와 드네프르에서 제5근위전차군단을 이끌었다. 1944년 제6전차군(이후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공세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그의 군대는 고비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초고속으로 돌파하며 관동군을 분쇄하는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공로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전차병 대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기갑지휘관 중 한 명이다.
1943년 2월 1일 새벽, 스탈린그라드 돈 전선군 사령부. 포병 원수 보로노프 앞에 독일 6군 사령관 파울루스가 들어왔다. 소련 포병의 설계자가 직접 적장을 신문했다. 보로노프가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독일의 승리를 믿습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 가난한 서기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입대, 내전·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포병 장교로 싸웠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포병 고문(암호명 '볼테르')으로 활동하며 대규모 화력 집중의 효용을 체험했고, 1937년 귀국 직후 적군 포병 총책임자가 되어 중앙집중식 포병 운용 체계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스타프카 대표로서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쿠르스크의 결정적 순간마다 현장에 파견되었고, 천왕성 작전의 포병 준비를 직접 설계·감독하며 독일 6군을 포위 섬멸하는 결정적 화력 기반을 마련했다. 1944년 최초의 포병 총사령관 계급을 받았고, 전후에는 포병과학아카데미와 지휘아카데미를 이끌며 소련 포병의 과학화를 추진했다.
1941년 6월 22일, 적기 접근 보고에 옥탸브리스키는 "지시대로 행동하라"며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 참모장이 독자적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그 짧은 지연 동안 항만에 기뢰가 투하되었다.
소련 흑해함대의 전시 사령관. 1939년부터 흑해함대를 지휘하며 바르바로사 작전 발발 직후 오데사와 세바스토폴 방어전을 진두지휘했고, 케르치-페오도시야 상륙작전을 조직했다. 1943년 남오제레이카 상륙작전 실패로 경질되었다가 1944년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복귀해 크림·오데사·야시-키시뇨프 작전에 기여했다. 1944년 제독으로 진급했고 전후 해군 제1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58년 영웅도시 세바스토폴의 방어를 이끈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세바스토폴 함락 직전 자신과 지휘부만 빠져나오고 수만 명의 수비대를 남겼다는 비판은 오늘날까지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독일군이 철수하고 소련군이 도시를 접수하는 자리에서, 크리보셰인은 구데리안과 나란히 서서 나치 독일군과 붉은 군대의 합동 열병식을 주관했다.
소련 기갑군 중장. 보로네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1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북전쟁을 치렀다.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후 기갑 부대로 옮겨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군 최초의 전차 지휘관으로 마드리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39년 9월 22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구데리안과 만나 독일군 철수와 합동 열병식을 함께 주관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 소속 제3기계화군단을 지휘하며 오보얀 축선을 방어, 호트의 주력 기갑 공세를 저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근위군단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베를린 공세에서 제1기계화군단을 이끌며 4월 25일 가장 먼저 시내로 돌입,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37년 7월 14일, ANT-25기가 캘리포니아 샌재신토 목장에 착륙하자 현지 목장 주인이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소?" 그로모프는 대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시험비행사이자 공군 지휘관. 1930년대 ANT-25로 세계 거리 기록을 두 차례 경신하며 소련 항공 기술의 정점을 입증했고, 1937년 모스크바-북극-캘리포니아 무착륙 비행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3항공군과 제1항공군을 지휘하며 칼리닌·서부·제3벨로루시 전선에서 르제프-뱌지마, 스몰렌스크, 오르샤-비텝스크 작전에 참가했다. 전후에는 장거리항공 부사령관과 항공산업성 비행근무국장을 지냈고, 수용소에 갇혔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이감을 주선하여 소련 우주 개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내가 책을 쓸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무슨 실수처럼 느껴진다」 — 『살아남은 자』(1945)
소련 군사정보국(GRU)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 주재 GRU 레지던트와 그리스 주재 대리대사를 역임했다.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7년, 동료들이 차례로 사라지고 아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처형 소식을 접한 뒤 아테네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OSS에서 복무하고 16년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러시아어 방송 책임자를 지냈다. 1945년 회고록 『살아남은 자』에서 '내가 집필할 때면 마치 묘지를 걷는 듯하다. 내 친구와 평생의 동지들은 모두 총살되었다'라고 썼다.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무엇을 할 작정인가?”라는 쿨리크의 질문에 시테른은 주코프에게 국경수비대 출동을 지시하고 보로노프에게 전 포병의 사격 준비를 요청한 뒤, 마지막 말은 쿨리크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고 목격자는 회고했다.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1930년대 후반 극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두 차례의 결정적 전투를 지휘했다. 유대인 의사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기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양학부 졸업 후 보로실로프의 참모로 성장했다. 1937~38년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으로 과달라하라 작전을 지도했고, 1938년 하산 호에서 제39소총군단을 지휘해 일본군을 격퇴했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는 전선집단 사령관으로 극동 전 병력을 총괄하며 주코프와 함께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겨울전쟁에서 제8군을 지휘하고 극동전선 사령관, 방공총국장을 역임했으나 1941년 6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폭풍 속에서 소련 공군을 지휘하고, 해빙기에는 다시 공군을 재건한 두 번의 공군 총사령관
공장 전보들이 증명한 진실: 701대의 완성 항공기가 조종사 부족으로 공장 비행장에 묶여 있었다. 스탈린 앞에서 지가레프의 '전투 불가' 이야기는 산산조각 났고, 스탈린은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열한 놈! 꺼져!"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기병에서 항공으로 전환한 소련 공군 지도자였다. 1941년 6월 독일 침공 직후 공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나, 전쟁 첫해의 참담한 손실과 항공기 생산을 둘러싼 스탈린과의 대면에서 거짓말이 발각되어 1942년 4월 경질되었다. 이후 극동전선 공군을 지휘하며 1945년 소일전쟁에서 제10항공군을 이끌었고, 전후 장거리 항공대를 지휘하다 1949년 다시 공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하여 1957년까지 재임하며 제트기 전환을 주도했다. 1955년 항공 총원수로 진급했고, 말년에는 민간항공총국장과 방공군사령학교장을 지냈다.
쿠반 공중전에서 베르시닌은 항공자산을 분산 배속하던 기존 교리를 깨고,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켰다. 에이스 포크리시킨은 베르시닌이 주재한 전투기 조종사 전군 회의를 '전쟁 2년 동안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두 차례(1946~1949, 1957~1969) 역임하며 항공전력을 제트기와 핵무장 체제로 재편한 군사 지도자다. 빈농 출신으로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보병 장교로 내전을 겪었고, 1930년 항공대로 강제 전속된 후 급속히 성장했다. 독소전쟁에서는 제4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반 공중전에서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키는 혁신적 운용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벨라루스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제트기 전환과 핵폭격기 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했으나, 1949년 돌연 강등되어 바쿠 방공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57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귀해 1969년까지 재임하며 전략항공 역량을 완성했다.
구데리안은 므첸스크에서 카투코프의 T-34에 막힌 후 이렇게 썼다. "그들(러시아군)은 이미 무언가 배웠다."
미하일 카투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제1근위전차군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까지 싸운 붉은 군대 최고의 기갑 지휘관이다.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그의 제4전차여단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저지하며 붉은 군대 최초로 근위 칭호를 획득했다. 쿠르스크에서는 전차 매복과 역습으로 독일 남부 돌파를 소모시켰고, 이후 르보프-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제1벨라루스 전선군의 기갑 선봉으로 활약했다. 전후 독일 주둔 소련군 기갑부대 사령관과 국방부 감찰총감을 지냈으며, 1959년 기갑군 원수와 두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스탈린그라드 반격을 앞두고 노비코프는 공군의 준비 부족을 이유로 작전 연기를 주장했다. 주코프와 스탈린은 이례적으로 그의 판단을 수용했고, 충분히 정비된 항공차단 작전으로 독일군 수송기를 1,200대 이상 격파하며 포위망을 봉쇄했다.
시골 교사 출신으로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 보병에서 복무하다 1933년 공군으로 전환하여 겨울전쟁과 레닌그라드 방어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2년 4월 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자 전선 단위 공군을 항공군으로 재편하고 동종 항공군단·사단을 창설하여 공중전력을 획기적으로 집중·운용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했다.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쾨니히스베르크·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했고, 세계 최초로 항공원수(1943)와 항공 총원수(1944) 계급을 받았다. 전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주코프 연루 자백을 강요당하고 스탈린 사망까지 수감되었으나, 1953년 복권된 뒤 장거리항공대 사령관을 거쳐 레닌그라드 고등민간항공학교장으로 10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1941년 8월 28일 밤, 탈린을 탈출한 발트 함대가 기뢰밭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트리부츠는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라 명했다. 그는 밤새 함교를 떠나지 않았다.
소련 해군에서 가장 오래 발트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1939–1947). 핀란드 겨울전쟁, 탈린 철수,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4–45년 발트 공세까지 전쟁의 모든 단계에서 함대를 지휘한 유일한 함대 사령관이었다. 독소전 직전 전 함대에 전투태세를 발령해 기습 피해를 최소화했고,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는 함포와 해군 항공대로 육상 작전을 지원했다. 1941년 탈린 전환에서 지휘 과실로 상당한 손실을 냈다는 비판도 있지만, 1943년 제독으로 진급해 전후까지 함대를 이끌었다. 퇴역 후 200여 편의 해군사 저술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늘날 태평양 함대 구축함 '트리부츠 제독'에 그 이름이 살아 있다.
주코프 회고: “스탈린이 나를 기계로 불러 레닌그라드 근처 군대를 지휘할 좋은 사령관을 물었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 페듀닌스키 장군의 이름을 댔다 … 의심할 여지 없이 재능 있는 군사 지도자이며, 뛰어난 조직가이고, 부대 지휘의 명수다.”
우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내전을 치렀다.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제24차량화연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후방을 돌파해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 공적으로 주코프의 눈에 띄었다. 1941년 레닌그라드 전선 부사령관으로서 도시 방어의 결정적 시기를 지휘했고, 이후 제2충격군 사령관으로 오라니옌바움 교두보에서 주공을 위장 전환하는 작전으로 1944년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에는 트란스코카서스 및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며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사망 시까지 소련 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복무했다.
1941년 3월 20일, 골리코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올봄 소련에 대한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소문과 문서들은 영국, 어쩌면 독일 정보기관까지 가담한 허위정보로 간주해야 한다." 94일 뒤 바르바로사가 시작되었다.
농민 출신 정치지도원으로 내전에 참전한 후 11년간 군 정치기관에서 복무하다 프룬제 사관학교를 마치고 지휘관으로 전환했다. 1940년 7월 GRU 정보총국장에 올랐으나, 1941년 봄 독일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영미의 도발적 허위정보'라고 보고해 바르바로사의 전략적 기습을 막지 못했다. 독소전에서 모스크바 반격의 10군과 브랸스크·보로네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두 차례 대공세로 적 25개 사단을 격멸했으나 그해 3월 하리코프 상실로 전선에서 물러났다. 전후 인사총국장을 거쳐 1958년 글라프PUR 총정치국장으로 흐루쇼프 시기 당의 군대 통제를 담당했고 1961년 소련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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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21적군 자원입대, '붉은 독수리' 연대에서 내전 참전, 정치지도원
1921–31군 정치기관에서 선전·선동 부서장 역임, KUVNAS 졸업(1929)
1931–3895연대장 → 61사단장 → 8기계화여단장 → 45기계화군단장
1938–39벨로루시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빈니차 군집단·6군 사령관
1939–406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과 겨울전쟁 참전
1940–41부참모총장 겸 GRU 정보총국장 — 바르바로사 직전의 첩보 평가
1941–42소련 군사사절단장(영·미) → 10군 사령관(모스크바 반격) →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1942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1근위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부사령관
1942–43재임명된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 —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보로네시-카스토르나야, 하리코프 공세, 이후 해임
1942년 9월 12일, 전임자가 도시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 본 자리. "임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에 추이코프는 답했다. "맹세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죽거나, 지켜내겠습니다."
스탈린그라드 폐허의 제62군 사령관. 독일군과 수류탄 투척 거리에 지휘소를 두는 「포옹 전술」로 도시를 버텼고, 자신의 군대가 계획의 미끼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부대는 근위 제8군이 되어 베를린까지 걸어갔다. 유언대로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예프 언덕, 자기 병사들 곁에 묻혔다.
1917년 7월 4일, 16세의 쿠로치킨은 크셰신스카야 궁전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레닌을 경비하며 서 있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 연설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스몰렌스크 농촌 출신으로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적위대에 가담해 볼셰비키 혁명에 뛰어들었고, 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탐보프 봉기 진압을 거친 기병 장교였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는 북서전선군을 지휘하고,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부사령관으로 코르순 포위전을 기획했으며, 제60군 사령관으로서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해방한 부대를 이끌었다. 종전 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1954–1968)으로 소련 장교 교육을 이끌었고, 바르샤바 조약군 최고사령부 동독 대표를 지냈다. 1989년 사망 시점까지 위대한 조국전쟁 전선군 사령관 중 마지막 생존자였으며, 다큐멘터리 〈위대한 조국전쟁〉 작업으로 레닌상을 받았다.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 무선조종 지뢰와 철도 사보타주로 파르티잔전을 설계한 사보타주 기술자
1941년 11월 14일 새벽 3시 30분, 스타리노프는 보로네시에서 암호화된 무선 신호를 보냈다. 300km 떨어진 하리코프에서 독일군 사령부 건물이 R-10 지뢰와 함께 폭발해 게오르크 폰 브라운 장군이 매몰됐다.
일찍이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을 거친 뒤 철도부대 공병장교로 복무하며 기폭 기술을 독학했고, 1930년대 초부터 우크라이나 군관구에서 파르티잔·사보타주 교관으로 활동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제14파르티잔군단의 사보타주 작전을 조직했고, 대조국전쟁 시기에는 무선조종 지뢰 R-10으로 하리코프 독일군 사령부를 원격 폭파했으며 중앙유격대본부의 사보타주 담당으로서 '레일 전쟁'과 '콘체르트' 작전의 기술적 토대를 설계했다. 전후에도 KGB 교육기관에서 1987년까지 사보타주 전술을 가르친 '소련 특수부대의 할아버지'로, 그의 반열차 지뢰(PMS)와 훈련 체계는 베트남에서 라틴아메리카까지 20세기 비정규전의 유산이 되었다.
1942년 7월 보로네시가 위태롭던 작전회의에서 바투틴이 일어났다. "스탈린 동지! 저를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스탈린이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훗날 바투틴은 그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그 행동은 아마도 주변에 더 적임자가 보이지 않을 때 즉시 중대 지휘를 맡겠다고 결심한 병장의 결정을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소련의 육군대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우라누스' 작전을 입안하고 쿠르스크 남측면 방어를 지휘했으며, 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해방했다. 1944년 2월 UPA 매복으로 중상, 4월 사망.
니콜라이 펙렌코는 러시아 내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소련의 기갑 지휘관이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초기에 제57특별소총군단을 지휘했으나, 5월 전투의 실패 뒤 6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를 교체했다. 이후에도 기계화군단과 전차군단, 전차병과 기계화부대의 편성·훈련을 맡으며 전쟁 수행 체계의 한 축으로 활동했다.
1942년 11월 로콥소프스키가 전했다: "당신의 성 '지도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꾸길 바란다." 유대인 비하 표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철자 하나를 바꾸자 스탈린은 "아주 좋다"고 결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세력과 싸웠다.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6군 사령관으로 북쪽 방어를 지휘하며 독일군 측면 공격을 좌절시켰고, 이 공로로 부대는 제5근위군으로 개칭되었다. 쿠르스크의 프로호롭카 전차전, 우크라이나 해방, 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제5근위군을 지휘하며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역을 관통했고, 1945년 4월 엘베 강에서 미 제1군과 조우했다. 전후 지상군 제1부사령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중앙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1955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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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2붉은군대 입대, 제46소총사단·제1기병군에서 내전 참전 —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토벌, 중상
1943년 2월 스탈린 앞에서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그에게 첫 개편 전차군을 맡기며 "당신이 직접 증명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농촌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이자 기갑군 총원수로 올라선 전차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구원을 막은 코텔니코보 전투와 역사상 최대 전차전인 프로호롭카에서 제5근위전차군을 지휘했다. 프로호롭카의 막대한 손실은 평생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반격은 쿠르크 남부 방면 독일군 진격을 결정적으로 멈춰 세웠다. 1943년 초 스탈린에게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전환하자고 직접 설득해 전선의 주 타격 수단으로 재편시켰고, 자신이 첫 편제의 사령관이 되었다. 코르순-셰우첸콥스키 포위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민스크 해방을 이끌었고, 전후에는 기갑군사학교장과 국방차관보로 소련 전차 교리와 장교 교육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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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부상, 적기훈장 수훈
1924–28제11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1936–37극동 특별붉은기군 사령부 제1부장, 제63연대장
1937–39스탈린 기갑·차량화군사학교 전술교관, 당에서 잠시 제명 후 복권
1940소련-핀란드 전쟁 전차대대장, 제35경전차여단 참모장
1941.5–9제3기계화군단 참모장, 개전 직후 포위망 탈출
1941.9–1942.4제8전차여단(후 제3근위전차여단)장, 모스크바 공세
1942.4–12제7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1942.12–1943.2제3근위전차군단장, 코텔니코보에서 만슈타인 구원 차단
1943.2–1944.8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프로호롭카, 드네프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바그라티온, 민스크·빌뉴스 해방
참모부에 거의 머물지 않고 밤낮으로 최전선에서 보냈다. — 시테멘코 육군대장이 '전진 장군!'이라 부르며 회고한 렐류셴코의 지휘 방식
2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육군대장으로,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의 기갑 집단을 저지하며 모스크바 남쪽 접근로를 봉쇄한 것이 그의 군사적 유산의 정점이다. 모스크바 반격에서 제30군을 지휘하여 클린을 탈환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제3근위군으로 포위망 외곽을 형성했으며, 이후 제4전차군(후에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서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을 연속으로 수행했다. 전후에는 자바이칼 및 우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군사과학 후보논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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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1붉은 파르티잔으로 참전, 이후 제1기병군 소속 제21기병연대에서 복무, 남북전쟁 전역 참전
1925–1933기병연대 정치지도원·군정위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1933)
1933–1939전차중대장, 기계화여단 작전과장, 훈련전차대대장을 거쳐 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1939–1940제39독립전차여단장으로 겨울전쟁에 참전, 만네르헤임선 돌파 공훈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1차 수훈
1918년, 16세 겐딘은 이렇게 썼다: "나는 주변의 모든 일을 탐욕스럽게 지켜보았고, 물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내 자리는 혁명 대열 속에 있다고 굳게 확신했다."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겐딘은 체카·OGPU·NKVD 방첩 장교로 경력을 쌓다 1937년 9월 노농적군 정보총국(GRU) 국장 대리가 된 소련 군사정보 지휘관이다. 1918년 16세에 붉은군대와 볼셰비키당에 합류했고, 내전 후 모스크바 체카 수사관으로 전환해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작전 '신디카트-2'에 참여했으며, 이후 OGPU 방첩부와 NKVD 특별부·비밀정치부에서 요직을 거쳤다. GRU 국장 대리로서 대숙청이 정보기관을 초토화하는 와중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비합법 거점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막아냈으며, 이는 훗날 소련이 독소전 직전 일본의 전략 방향을 확인하는 결정적 정보선을 보존한 조치였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이듬해 2월 처형되었고 1957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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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붉은군대 입대·RKP(b) 입당
1918–1921남북전쟁: 페트로그라드·카프카스 전선에서 소대장·포대장·노보로시스크 요새지구 포병부사령관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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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폭발이 가라앉은 뒤 녹아내린 금성훈장, 어깨 견장 한 짝, 그리고 폭발 순간에 멈춰버린 손목시계만이 남았다.
소련 전략로켓군(RVSN) 초대 총사령관으로 R-7 ICBM 개발을 군사적으로 주도하여 스푸트니크 발사와 초기 우주 경쟁을 가능케 한 군사 지휘관이다. 포병 장교로 스페인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을 거쳐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1959년 포병총사령관으로 진급한 뒤 신설된 전략로켓군을 처음부터 조직했다. 1960년 10월 바이코누르에서 R-16 시험발사 중 2단 엔진 오점화로 폭발이 일어나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참사는 소련 붕괴까지 공식 부인되었다.
1941년 8월 29일,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타전했다. 「누군가 이 구역에서 일부러 독일군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아닌가? 포포프라는 자는 도대체 어떤 놈인가?」 황제의 의심은 3년 뒤 강등으로 이어졌다.
돈 강 유역 출신으로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했다. 독소전 초기 북부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해 독일군 진격을 저지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부사령관으로 포위 작전을 입안했다. 1943년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오룔과 브랸스크를 해방해 육군대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발트에서의 부진과 정치위원 불가닌과의 충돌로 상장으로 강등되었다. 1956년부터 지상군 주참모장을 지냈고 1965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바실렙스키와 골로바노프가 최고의 재능이라 평가했지만 끝내 원수가 되지 못한 대표적 장군이다.
1956년 6월 28일 오후 2시 포즈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보안국 청사 앞 상황을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포돌리아의 폴란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글을 몰랐던 그는 붉은군대에 징집된 뒤 소비에트 장군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폴란드 제1군을 지휘해 베를린 공방전을 치르고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도 폴란드군 최고 지휘부에 남아 소련의 감독 역할을 맡았으며, 1956년 6월 국방차관으로서 포즈난 봉기 진압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1953년 6월 26일, 크렘린. 모스칼렌코는 주코프 등 장군들과 함께 권총을 품고 각료회의장에 들어섰다. 흐루쇼프의 신호에 베리야에게 다가가 "당신은 체포되었소"라고 선언했다. 스탈린 이후 최대 권력자를 한마디로 끝장낸 순간이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 포병 장교로, 스탈린그라드에서 제1전차군, 쿠르스크에서 제40군을 지휘했고 드네프르 도하로 첫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3년 6월 흐루쇼프의 지시로 크렘린에 권총을 밀반입해 라브렌티 베리야를 직접 체포함으로써 탈스탈린 권력 투쟁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었다. 이후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으로 소련 핵전력을 지휘했으나, 부하에게 '인민의 적'이라 폭언하는 불같은 성격으로 두려움을 샀다.
1966년, 드골의 노보시비르스크 미사일 사단 시찰 중 브레즈네프의 신호에 지하 사일로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불쑥 솟아올랐다. "파리도 겨냥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브레즈네프는 연기나는 발사대를 가리켰다. "걱정 마십시오. 이건 아닙니다."
16세에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한 크릴로프는 내전부터 만주 작전까지 소련의 모든 주요 분쟁을 관통한 군인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추이코프의 제62군 참모장으로서 시가전을 지휘했고, 바그라티온 작전과 만주 공세에서 제5군을 이끌어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원수로 진급한 뒤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에 올라, 쿠바 위기 이후 열세였던 소련 핵전력을 지하 사일로 기반의 전투태세를 갖춘 군종으로 탈바꿈시켰다. 9년간의 재임기는 전략로켓군의 창설기이자 가장 집중적인 성장기로서, 소련 핵 3축의 한 기둥을 완성한 시기였다.
1968년 8월 18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최종 결정한 정치국 회의에서 그레치코는 '이 침공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더라도 감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병대 사병으로 남북전쟁에 뛰어든 후 정규 군사교육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카프카스 방어·키예프 해방·프라하 진격을 지휘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1967년 소련 국방장관에 올라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사상 최대 규모의 재래식 증강을 주도했으며, 1968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직접 기획하고 집행한 핵심 책임자였다. 1973년에는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도화했다.
1942년 11월 23일,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 교두보. 플리예프의 기병군단 병사들이 돈 전선군의 전차부대와 마주쳤다. 독일 6군 33만 명을 가둔 포위환이 처음으로 닫힌 순간이었다.
북오세티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붉은군대에 입대한 후 소련 최고의 기병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독소전에서 도바토르 휘하 모스크바 방어전을 시작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그의 부대가 독일 6군 포위를 최초로 완성했고, 이후 기계화기병집단을 이끌며 우크라이나·벨라루스·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종심 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만주에서는 소련-몽골 기계화기병집단을 지휘해 관동군을 격파함으로써, 붉은군대에서 유일하게 기병 장군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아나디리 작전의 소련군 사령관으로서 핵전쟁 직전의 긴장을 직접 관리했고, 같은 해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 봉기 진압을 지휘하기도 했다.
1937년 6월 20일, ANT-25기가 밴쿠버의 피어슨 비행장에 착륙하자 미군 장교가 물었다. "어디서 왔소?" 치칼로프가 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시험비행사이자 1930년대 소비에트 항공력의 상징.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에서 I-15, I-16 전투기를 시험하며 상승 스핀과 슬로 배럴 롤이라는 새 곡예비행 기동을 창안했다. 1936년 모스크바-우드 섬 9,374km 무착륙 비행으로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같은 ANT-25기로 모스크바-북극-밴쿠버(미국) 8,811km를 63시간 만에 횡단하며 북극 항로를 개척했다. 스탈린이 직접 공항에 마중 나올 만큼 대중적 영웅이 되었으나, 1938년 12월 서둘러 추진된 I-180 전투기 초도비행에서 엔진 정지로 추락해 34세로 사망했다.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 갑판 위에서 "소련 대표가 서명할 차례입니다"라는 맥아더의 말에 데레뱐코 중장이 걸어나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23분간의 의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소련의 군사정보 장교이자 중장으로,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 항복문서에 소련 대표로 서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 종결에 참여했다. 독소전 기간에는 제53군, 제57군, 제4근위군의 참모장으로 쿠르스크 전투, 코르순-셰브첸코 작전, 이아시-키시뇨프 공세, 부다페스트와 빈 함락 작전에 참여했다. 종전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시찰한 최초의 소련 관료로서 원자폭탄 피해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소련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합국 대일이사회 소련 대표와 GRU 정보국장을 역임했으며, 일본 시찰 당시의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으로 195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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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붉은 군대 입대
1924제2키예프 붉은감제관학교 졸업, 제297보병연대 배속
1933–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방학부에서 영어·일본어 전공
1936–1938적군 정보총국(GRU) 근무, 스페인 내전 파견, 중국군 비밀 무기지원 작전 수행
1964년 10월 19일, 비류조프 원수는 20년 전 자신이 해방 작전을 기획했던 베오그라드로 향하던 중, 짙은 안개 속에서 탑승기 Il-18이 아발라 산에 충돌했다. 탑승자 전원 사망. 그는 자신이 해방시킨 도시의 하늘에서 최후를 맞았다.
랴잔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922년 적군에 자원입대, 독소전쟁 첫해에만 다섯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사단장으로 싸웠다. 이후 톨부힌 휘하에서 돈바스·크림·야시-키시네프·베오그라드 공세의 작전기획을 주도해 우크라이나·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해방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전후 방공군 총사령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을 거쳐 1963년 총참모장에 올랐으며, 1964년 베오그라드 해방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티토는 그를 유고 인민영웅으로 추서했다.
전쟁 전야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내린 소련 해군의 설계자, 두 번 강등되고 사후 복권된 제독
1941년 6월 21일 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사전 승인 없이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했다. 몇 시간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소련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소련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는 해군 지휘관. 34세에 해군인민위원이 되어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이자 최초의 전문 해군 장교 출신 수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밤, 독일 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하여 육군과 달리 해군은 기습 첫날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전쟁 내내 해군을 지휘하며 스타프카와 국방위원회 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4년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계급과 더불어 영웅칭호를 받았다. 전후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1988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붉은 군대 역사상 최연소 원수이자 항공 총원수였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스탈린 직속의 장거리항공대(ADD)를 지휘하며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플로이에슈티에 대한 전략폭격을 주도했고, 항공대를 350대에서 2,000기 이상으로 확장해 스타프카의 독자적 타격군으로 키웠다. 전쟁 전에는 OGPU 요원으로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에 가담했으며, 이후 민간항공 조종사로서 백만 킬로미터 무사고 비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전후 1948년 실각하여 불가사의한 강등을 겪었으나, 죽는 날까지 스탈린주의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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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0붉은 군대 정찰병, 제59소총연대 (동부·남부전선)
1924–1931OGPU 특별부서 요원,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가담; 알마아타 근무
1932–1941아에로플로트 조종사·기장·특수비행대 지휘관, 백만 km 무사고 비행
1939할힌골 전투 참전, 고위 지휘부 수송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약 400시간 전투비행
1941.02제212장거리폭격연대장 (중령)
1941.08제81장거리항공사단장,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폭격 지휘
1942.02–1944.12장거리항공대(ADD) 사령관, 스타프카 직속; 350→2,000기 이상으로 확장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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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1941년 7월 22일 밤, 스탈린은 가피치 장군을 면전에서 해임한 뒤 페레시프킨에게 말했다: 「당신을 통신총국장으로 임명합니다. 체신인민위원직은 그대로 유지하시오.」 묻지도 않은 채 그는 국방부인민위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수은 광부의 아들로 도네츠크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키예프 군사정치학교와 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를 거쳐 통신병과 장교로 성장했고, 1939년 불과 35세에 소련 체신인민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전쟁 한 달째인 1941년 7월 22일, 스탈린은 그를 국방부인민위원과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에 추가 임명해 전시 민간·군사 통신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는 24차례 전선을 직접 방문하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에서 스타프카와 야전군 사이의 안정적 통신을 보장했고, 1944년 39세의 나이로 사상 첫 통신병과 원수 계급을 받았다.
1944년 8월, 스탈린은 아바쿠모프, 메르쿨로프, 쿠즈네초프, 수도플라토프를 불러 모아 놓고 새로운 전략적 기만 작전을 명령했다 —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소련 후방에 대규모 독일군 잔류 부대가 있다고 믿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표도르 쿠즈네초프는 소련 군사정보기관과 군 정치기관을 두루 거친 몇 안 되는 고위 장성이다. 1943년부터 종전까지 총참모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대독 승전의 정보적 토대를 관리했고, 1950년부터 스탈린 사망까지 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으로서 전군의 사상통제를 총괄했다. 메흘리스의 측근으로 대숙청기 군 정치장교 숙청에 관여했으나, 정보 분야로 전환한 뒤에는 전략적 기만 작전 수립에 직접 참여했다. 스탈린 사후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국방부 인사국장,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북부군집단 정치국장을 거쳐 1969년 퇴역했다.
1961년 10월 30일, 수데츠가 지휘하는 장거리항공대의 Tu-95V 폭격기가 노바야제믈랴 상공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50메가톤 수소폭탄 차르봄바를 투하했다. 충격파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았다.
소비에트 공군원수로, 독소전쟁에서 제17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르스크·드네프르-카르파티아·야시-키시뇨프·프라하 공세에 항공지원을 제공했고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전후 공군 주참모장 겸 부총사령관(1946~1949)으로 제트기 전환을 추진했고, 장거리항공대 사령관(1955~1962)으로 Tu-95K 전략폭격기와 Tu-22 초음속폭격기 배치를 주도하며 1961년 차르봄바 투하를 관할했다.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1962~1966)으로 저고도 방공능력을 확충하고 쿠바 위기 시 아나디리 작전의 방공을 지원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과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은 드문 소련 군사지도자다.
1945년 5월 2일 밤, 베를린. 부관이 루덴코를 깨웠다. "창밖을 보십시오, 저 불빛을! 전쟁이 끝난 게 틀림없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대공포와 소총이 허공에 꽂히고 있었다 — 패배한 제국의 수도 위로 번쩍이는, 즉흥적인 승리의 축포였다.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종전까지 제16공군 사령관으로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대전 최고의 소련 공군 지휘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944년 벨로루시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5년 공군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공수부대 사령관, 공군 주참모장,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공군 제1부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68년부터 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을 맡아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복무하며 회고록 『승리의 날개』를 남겼다.
한때 주코프의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던 젤토프는 1957년 10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주코프를 가장 맹렬히 비난한 정치장교가 되었다.
알렉세이 젤토프 상장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소비에트 육해군 총정치국(GlavPUR)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사후 전환기 소비에트 군대의 최고 정치위원이었다. 위대한 조국전쟁 동안 카렐리야·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우크라이나·발칸 해방 작전에서 당정치사업을 지휘했다. 1957년에는 흐루쇼프를 도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를 국방장관직에서 축출하는 반주코프 운동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로 나섰다. 이후 군·KGB·내무성·검찰·사법 기관을 총괄하는 CPSU 중앙위 행정부장을 거쳐, 12년간 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으로 정치장교 교육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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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927붉은 군대 입대, 제2모스크바 보병학교 졸업 후 소대장
1937–1939제24소총병사단 군사위원 → 프리볼시스크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1–1944극동·카렐리야 전선군, 제63군, 돈·남서·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파블리토는 망설임 없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선두 전차 장갑 위로 올라타 해치를 두드리며 방향을 바꾸라고 외쳤다. 그가 지휘소로 돌아왔을 때, 외투에는 총알과 파편 구멍이 열 개도 넘었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 수선공 도제로 일하던 로딤체프는 1927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자원하여 스페인 내전에 '파블리토 대위'라는 가명으로 참전, 공화파 편에서 마드리드 방어전과 하라마·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보여 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2년 9월 13근위소총사단을 이끌고 맹렬한 포화 속에서 볼가 강을 도하, 스탈린그라드 중심부 마마예프 쿠르간을 탈환하여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이후 32근위소총군단장으로 쿠르스크·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지휘하며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여러 군관구에서 지휘관을 역임하고 회고록 여러 권을 남겼다.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보고한 전시 GRU 수장, 전략정보로 소련의 승리를 뒷받침한 정찰총국장
한밤 3시, 스탈린의 직통 전화가 울렸다. 손자들이 책상 위 연필을 모두 가져가 버린 탓에, 그는 몇 분 동안 이어진 스탈린의 긴급 지시를 오로지 기억력에만 의존해 받아 적어야 했다.
소련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1942년 8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공세에 이르는 모든 주요 작전의 정보 지원을 총괄했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과 군사정치학교를 거쳐 1938년 정보기관에 투입되었고,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된 이력을 지닌 채 33세에 스탈린의 직접 면접을 받았다. GRU 수장으로서 베리야를 거치지 않고 스탈린에게 직통 보고했으며, 해독반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 가능성 발견(1942)과 클라우스 푹스를 통한 원자폭탄 정보 입수 등 전략정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오스트리아·주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가 북방함대 기지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자 골롭코는 상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2호로 격상시켰다. 나흘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북방함대는 이미 전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내내 소련 북방함대를 지휘한 해군 제독. 테레크 코사크 출신으로 1925년 콤소몰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으로 참전했다. 1940년 34세로 북방함대 사령관에 취임해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 출현 증가를 포착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상향 조치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무르만스크 방어와 북극 호송대 호위를 지휘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사수했다. 종전 후 해군 주력참모부장과 해군 제1부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원양 작전역량을 구축했고, 1955년 전후 최초로 소련 함대의 영국 공식 방문을 이끌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라도가 호수 얼음길 '생명의 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그는 직접 호송대를 검열하며 빙판 위를 오갔다.
즈다노프의 측근 정치일꾼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를 책임졌으며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을 맡아 전후 소련군 정치·이념 체계의 수장이었다. 셰르바코프 사후 그 자리를 이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실각했고, 체포는 면했지만 군 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당 중앙기관에서 복무했으며, 1960년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했으나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1년 만에 소환되어 당-국가 통제 기구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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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391927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가입, 크룹스카야 공산대학 졸업(1931), 고리키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 이후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 서기
1939–1941붉은 군대 정치일꾼으로 전환, 군 전기기술 아카데미 정치부장(1939), 레닌그라드 군관구 정치선전국 부국장(1940~1941)
1941–1942북부전선 군사회의 위원, 레닌그라드 및 볼호프 전선 정치국장 —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 책임
1942–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선전선동국장 겸 부국장, 셰르바코프 아래에서 전시 군 정치사업 지휘
1945–1949붉은 군대·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 1945년 9월 대장군 진급, 극동 소련군 최고사령부 군사회의 위원 겸임
1940년 4월 소련-핀란드 전쟁 참패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프로스쿠로프는 패배의 원인을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해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폭격비행대를 지휘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폭격기 조종사 출신 군사정보 수장. 1939년 4월부터 1940년 7월까지 GRU(소련 군사정보국) 국장 겸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를 지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직후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련-핀란드 전쟁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0월 28일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아르소 요바노비치는 왕립 유고슬라비아군 출신의 교육받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의 참모총장을 맡아 작전 지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결별에서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치적 고립에 놓였다. 루마니아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와 후대 증언이 엇갈려 죽음의 경위는 논쟁적이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 시테멘코는 스탈린을 수행해 매일 아침 전황을 브리핑했다. 스탈린이 연합국 수뇌들 앞에 펼쳐 보인 작전지도는 시테멘코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르게이 시테멘코는 스탈린 시기 소련군 작전기획의 핵심이자 최연소 참모총장을 지낸 군사 엘리트였다. 돈 카자크 출신으로 1926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포병·기갑 장교를 거쳐 참모로 성장했다. 독소전쟁 중 작전총국장으로서 스탈린그라드·캅카스·벨라루스·만주 작전의 구체적 기획을 주도했고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을 수행했다. 1948년 41세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52년 경질되고 베리야 연루로 강등되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 연합군 참모장으로 복귀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고, 회고록 『전쟁 시기 참모본부』는 소련 군사사의 고전이다.
"지하에서는 쥐밖에 만날 수 없다" — 반체제 활동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담아 회고록 제목이 된 말.
소련군 소장(1959) 출신의 반체제 인사로, 크림 타타르인의 귀환 권리 투쟁을 이끌고 모스크바·우크라이나 헬싱키 그룹 창립에 모두 참여한 인권운동가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공개 규탄하고 두 차례 정치적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1964–65, 1969–74)되면서 소련의 정신의학 정치적 남용을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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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29콤소몰 간부 ·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원
1934–1939군사공학 아카데미 및 참모 아카데미 우등 졸업
1939–1943할힌골 전투 · 극동전선 참모 · 여단장
1943–1945독소전: 제10근위군 부참모장 · 제8소총사단 참모장 (부상)
1945–196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군사사이버네틱스 학과장 (1959 소장 진급)
1937년 6월 20일, 북극 상공에서 치칼로프가 저산소증으로 코피를 흘리자 바이두코프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마지막 13시간을 홀로 비행해 ANT-25기를 밴쿠버 피어슨 비행장에 내려놓았다.
소련의 시험비행사, 군사 지휘관, 그리고 소비에트 훈장 최다 수훈자(21개). 1936년과 1937년 발레리 치칼로프의 ANT-25기 부조종사로서 모스크바–우드 섬 및 모스크바–북극–밴쿠버 무착륙 비행에 참여해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는 항공사단과 항공군단을 지휘했고, 전후 민간항공단 총국장(1947–1949)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국방부 제4총국장으로서 방공군(PVO)의 무기 조달을 총괄하며 소련 방공무기 체계 건설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작가동맹 회원으로 치칼로프 전기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1988년까지 PVO 최고사령관 과학고문으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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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8레닌그라드 군사항공이론학교·카차 군사비행학교 수료, 전투기 조종사
1931–1934NII VVS 시험비행사, 계기비행 방식 개발 참여
1935–1937ANT-25기 부조종사 — 모스크바–우드 섬(1936)·모스크바–북극–밴쿠버(1937)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 연방영웅
1941–1945제4근위돌격항공사단장, 제4돌격항공군단장 — 모스크바·르제프·베를린 작전 참가
스탈린 앞에서 빈 공장 사진을 들이민 조사위원회에 맞서, 우스티노프는 이틀 뒤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 모든 장비가 가동 중이었다. 33세에 병기인민위원이 된 그를 스탈린은 '빨간 머리'라 불렀다.
33세에 병기인민위원이 되어 독소전쟁 중 군수공장의 우랄 대피를 지휘한 공병 출신 국방장관. 전후에는 소련 로켓·핵·우주 산업의 기반을 닦았고, 1976년 민간인으로는 처음 국방장관에 올라 소련 원수까지 진급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규모 정치국'의 핵심 원로로서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며 냉전 말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이끌었다. 1984년 그의 사망으로 원로 그룹의 균형이 무너지며 고르바초프 등장의 길이 열렸다.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 — 스탈린 시기 실패와 탄압에 대한 모든 언급을 봉쇄하며.
소련군·해군 총정치국(GlavPUR)을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이끈 최장수 국장으로, 군대에 대한 당의 사상적 통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흐루쇼프가 군부에 대한 당 우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파격 승진시켜 기용했으며, 이후 글라브푸르를 CPSU 중앙위원회 부서처럼 운용하며 국방장관조차 통제할 수 없는 정치장교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 고위 관료 중 처음으로 군사개입 가능성을 공개 시사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에는 군사대표단을 이끌고 카불을 방문했다. "누가 당신들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그게 우리 삶에 방해된다면?"이라는 그의 말은 체제 정통성을 위해 역사적 사실마저 억압한 독단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1973년 세계 최초의 BMD-1 승무원 탑승 낙하산 강하 시험에서 아들 알렉산드르를 지켜보며, 마르겔로프는 실패 시 자결할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실리 마르겔로프는 소련 공수군(VDV)을 23년간 지휘하며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군사 지도자다. 1944년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정예 장교로, 1954년 VDV 사령관 취임 후 경보병이던 공수군을 중무장 기동타격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주도로 BMD-1 공수장갑차, 중량물 투하 플랫폼, 켄타브르·레악타브르 승무원 탑승 강하 시스템이 개발되고 An-22·Il-76 대형 수송기가 도입되었다. 65세까지 60회 이상 직접 낙하산 강하를 수행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시 VDV 작전을 지휘했다. 퇴역 무렵 VDV는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바샤 삼촌의 군대'라 불렸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파블롭스키는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후 지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농촌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나와 붉은 군대에 입대, 독소전쟁에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한 소총사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3년간 소련 지상군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바르샤바조약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다뉴브 작전)을 현장 지휘했다.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후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 파병을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뒤 해임됐다. 소련 최대의 지상군을 13년간 이끈 육군대장으로서 군사개입을 공개 반대한 이력은 브레즈네프 말기 군사 엘리트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1963년 3월 18일, KGB 대장 이바슈틴은 비류조프 원수로부터 GRU 간부들에게 새 국장으로 소개되었다. 펜콥스키 사건 수습을 위해 온 KGB 요원 — 모두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24년을 더 있었다.
항공 조종사로 출발해 NKVD 방첩대로 옮긴 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남서부전선과 제3우크라이나전선 SMERSH 방첩국장을 맡았다. 1956년 KGB 제1부의장이 되었고 1961년 11월 KGB 의장 대행을 지냈다. 1963년 펜콥스키 배신 사건 이후 GRU 국장으로 전격 기용되어 24년간 재임하며 실시간 위협경보 지휘소, 쿠바 루르데스 기술첩보 기지, 우주정찰 부서를 구축했다. 냉전기 소련 군사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닦은 인물로 1985년 영웅소비에트연방 칭호를 받았다.
14세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기병·참모 장교로 성장했고, 독소전쟁에서는 254소총사단과 73·128소총군단을 지휘하며 드네프르 도하, 벨라루스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를 치렀다. 1953년 라브렌티 베리야의 사형 집행을 자청해 직접 방아쇠를 당겼고, 모스크바 방공군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 방어 체계의 기초를 닦았다. 1966년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978년까지 12년간 방공군을 전략적 우주방어 체계로 확대하고 바르샤바조약 통합방공을 총괄했으며, 임기 말 방공군 분할 결정에 반대해 스스로 사임했다.
1963년 9월 29일, 카사토노프가 승선한 원자력잠수함 K-181이 북극점 빙원을 뚫고 부상했다. 소련 해군 사상 최초로 지구 최북단에 잠수함을 띄운 순간이었다.
잠수함 장교로 출발하여 소련 4대 함대 중 3개를 차례로 지휘한 해군 원수. 북방함대 사령관 시절 소련 원자력잠수함의 첫 북극점 부상(1963년)을 직접 지휘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북방함대의 전력을 확장했다. 이후 10년간 해군 제1부총사령관으로서 고르시코프의 대양함대 건설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으며, 아들 이고르와 손자 블라디미르로 이어지는 3대 해군 제독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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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M.V. 프룬제 해군학교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 '볼셰비크' 당직사관·항해사
1932–1939태평양함대 잠수함 부장 → Shch-112 함장 → L-12 함장 → 제12잠수함사단장
1941해군참모대학 졸업, 발트함대 잠수함교육대대 참모장으로 전쟁 발발, 탈린·한코·레닌그라드 방어전 참가
1941–1945해군 주참모부 작전국 근무, 태평양함대 전투훈련 지도, 얄타회담 해군 실무단 참가
1949–1954제5함대(태평양) 참모장 → 태평양함대 제1부사령관
1954–1955제8함대(북발트) 사령관
1955–1962흑해함대 사령관, 1961년 알바니아 주둔 소련 해군 철수 작전 지휘
1962–1964북방함대 사령관, 원자력잠수함 북극점 부상 작전(1963) 및 대잠항공미사일 '시크발' 훈련 지휘
1964–1974소련 해군 제1부총사령관 겸 군사평의회 위원, 대양 원자력미사일함대 건설 주도
「내 오랜 군 복무 중 가장 위험하고 긴장된 시기는 대조국전쟁 시기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몇 달이었다」
니콜라이 벨로보로도프는 1941년 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항공부대에서 기술장교로 복무했으며, 대조국전쟁에 참전했다. 1958년부터 12총국 산하 중앙 핵무기 저장기지의 책임자로 근무했고, 1962년 「아나디리」 작전 당시 핵기술지원 작전반을 지휘하며 핵탄두를 선박 「인디기르카」호에 싣고 쿠바 마리엘 항까지 직접 운반했다. 쿠바 주둔 59일 동안 모든 핵탄두의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철수를 감독했으며, 퇴역 후 1990년대에 당시 문서에 기초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위기의 실체적 규모를 처음으로 밝혔다. 1966년부터 1983년까지 12총국 제1부국장으로서 소련 핵무기 관리체계의 중추를 맡았고, 국가상을 수상했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 스탈린이 물었다: "왜 이렇게 사고가 많은가?" 리차고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6기 개인 격추·14기 집단 격추를 기록하고 1936년 25세의 나이에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전투기 조종사. 중국 항일전과 할힌골에서 공군 고문으로, 겨울전쟁에서는 제9군 공군 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1940년 8월 29세에 소련 공군 총국장(ВВС РККА)에 올랐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이 높은 사고율을 추궁하자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라고 직언했다가 해임되었고, 독소전 발발 사흘 뒤인 6월 24일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28일 바르비시에서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가 경비행기로 소련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했다. 이틀 뒤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가 소콜로프의 해임을 제안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55년 복무한 원수는 한 소년의 비행 한 방에 물러났다.
하산 호 전투와 독소전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며 성장한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로, 1967년부터 17년간 국방부 제1차관으로 군부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1978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작전조 책임자로서 소련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84년 국방장관에 올랐으나,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01세까지 생존한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소련군의 전성기와 종말을 모두 목도한 인물이다.
1938년 '로디나' 호 비행 중 연료 부족으로 타이가에 불시착해야 했을 때, 기수 조종석에 탄 라스코바는 충돌 시 가장 위험한 위치였다. 그리조두보바가 낙하산 탈출을 명령하자 그녀는 초콜릿 두 조각만 지닌 채 시베리아 타이가로 뛰어내렸고, 열흘 동안 홀로 생존 끝에 구조되었다.
소련 최초의 여성 항법사이자 193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 3인 중 한 명. 1938년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으로 여성 세계 거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스탈린에게 직접 여성 전투부대 편성을 설득해 586전투연대·587폭격연대·588야간폭격연대 등 3개 여성 항공연대를 창설했으며, 588연대는 '밤의 마녀들'로 불리며 전설이 되었다. 587폭격연대를 직접 지휘하던 중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향하던 비행에서 악천후로 추락사했다.
1941년 모길료프 포위망 안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대대는 시가로 진입하는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32년 적군에 입대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종전 직전까지 최전선에 서서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소련원수에 올랐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동유럽 군사동맹의 실무적 최고 지휘관으로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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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참모 아카데미에서 한 동기가 1941년 아군 Su-2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 이야기를 하자 포크리시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였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 득점 에이스이자 최초의 세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항공 정비사로 입대해 39통의 전입 신청 끝에 조종사가 된 집요함으로, 1941년 구식 전술에 무너지는 공군을 보며 공중전 데이터를 기록·분석해 '고도-속도-기동-사격' 공식과 3층 '쿠반 계단' 편대, 진자 순찰 등 수직 전투 교리를 정립했다. 1943년 쿠반 공중전에서 입증된 이 전술은 소련 전투기 교리의 전환점이 되었다(공식 전과 650회 출격 53기 격추). 솔직하고 완고해 상관과 평생 마찰을 겪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장성 진급. 방공군 부총사령관·DOSAAF 의장을 지냈으며 브레즈네프의 전쟁 역할 과장을 끝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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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3제3페름 항공기술학교 졸업, 항공 정비사
1934–1938제74소총병사단 항공통신대 선임 항공기술사
1939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제55전투항공연대 전입
1941–1944제55(→제16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대장·부연대장
1944–1945제9근위전투항공사단장, 베를린·프라하 작전 참가
1948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1949–1955제33(→제88)전투항공군단 부사령관·사령관 (르제프)
1955–1956북캅카스 방공군 전투항공 사령관
1957참모 아카데미 졸업
1958–1968제52전투항공군 사령관 →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겸 키예프 군관구 방공부사령관
겨울전쟁 중 쿠타호프의 I-15bis 전투기가 아군기에게 핀란드기로 오인되어 피격됐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소련 영토까지 끌고 와 불시착했고, 기체는 수리 불능이었지만 곧 다시 비행에 복귀했다.
파벨 쿠타호프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84년까지 15년간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최장기 재임자다. 독소전쟁에서 367회 출격, 79회 공중전을 치르며 13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로 1943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북극 호송선단 호위 공로로 영국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총사령관으로서 MiG-23, MiG-25, Su-24, Tu-22M3, Tu-160 등 신형기를 도입하고 장거리 레이더 체계를 구축해 소련 공군을 전투기 13,000여 대 규모로 키웠다. 60세까지 직접 비행했고 1984년 70세 생일에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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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제7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겨울전쟁 131회 출격
1941–1944제19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중대장 → 연대 부지휘관 — 367회 출격, HSU 1943
1983년 3월 25일, 톨룹코는 중간 계급인 포병원수를 건너뛰고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직접 진급했다. 소련 역사상 유일한 사례다.
독소전에서 전차장교로 단련되고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전략로켓군(RVSN)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MIRV 탑재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미사일 «피오네르»의 실전 배치를 주도하여 소련의 대미 전략적 균형을 완성한 군인이다. 1983년 대장에서 포병주력원수로 바로 진급한 유일한 사례로,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작전 「아나디리」 조직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게오르기 로보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사단 지휘관으로 성장한 소련 공군 장성이었다. 조선전쟁에서는 64 전투기항공군단을 지휘하며 소련의 비밀 공중 개입을 조직했고, 직접 미그-15를 몰아 전투 경험을 전수했다. 그의 전후 증언은 미그 앨리에서의 전과를 내세우던 공식 서술과 미국 공군을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는 현장 판단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준다. 이후 그는 군사교육과 전쟁사 연구에 힘쓰며 자신의 조선전쟁 경험을 글로 남겼다.
1944년, 14근위전차여단장이 전사하자 부하였던 쿠르콧킨이 지휘를 인수했다. 군단장 폴루보야로프는 이렇게 적었다: "쿠르콧킨이 여단을 맡아 복잡한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자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잃지 않았다."
농민 출신으로 정치장교에서 출발해 독소전에서 전차여단장으로 두각을 나타낸 탱크 지휘관이었다. 1972년부터 1988년까지 16년간 국방차관 겸 소련군 후방(Тыл) 책임자로 재임하며, 1970년대 말 후방 구조를 기동성 있고 효율적인 현대 물류체계로 전환하는 대대적 개혁을 주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 파견군의 모든 물자 보급을 직접 지휘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스피타크 지진 등 재난 대응에서도 후방 조직을 총괄했다. 1983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 1981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브레즈네프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당 중앙위원으로 군 물류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참모총장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의에서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정면으로 맞섰다. "폭탄과 포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질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정치적 방법으로만 해결해야 합니다."
1977~84년 소련군 참모총장을 지낸 원수. 농민 출신으로 독소전에 공병장교로 참전했고, SALT 협상에서 군사전문가로 활약했다. 정밀유도무기·자동화지휘체계를 중심으로 '군사문제의 혁명' 이론을 정립해 소련 군사교리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현실주의적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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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군입대, 군사공학아카데미 졸업 후 요새화 공사에 배치
1941–1945독소전 참전: 카렐리야·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공병장교로 복무, 부다페스트 공세에서 부상
1947–1968극동·벨로루시 군관구 참모, 사단장, 군관구 사령관으로 승진
1968–1974참모총장 제1차장,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에 군사전문가로 참여
1974–1977국방차관 겸 국가기술위원회 의장, 군사기술 현대화 추진
1977–1984참모총장·국방제1차관, '군사혁명' 이론 정립, 대규모 작전훈련 '서방-81' 주관
1978년 3월, 지지가 탈환 작전: 페트로프는 정면 공격으로 속이고 주력은 헬기강습으로 북쪽에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4일 지지가가 해방되었고, 2주 안에 소말리아군은 에티오피아 영토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2차대전을 최전선에서 싸운 소련 원수.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에서 시작해 우크라이나 해방, 루마니아·헝가리 전역까지 종군했으며 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전후 프룬제 아카데미를 거쳐 극동에서 참모·지휘관으로 성장, 1972년 극동군관구 사령관에 올랐다. 1977–78년 오가덴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주재 소련 작전그룹을 지휘하며 지지가 탈환 작전을 입안해 전황을 결정지었다. 1980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85년 국방제1차관을 지냈으며 1983년 소련원수로 진급했다. 브레즈네프 후기 소련 지상군의 중추를 이끈 전략가로, 냉전 말기 지상전력 현대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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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붉은 군대 입대
1941–1945소위에서 소령까지 진급, 오데사·세바스토폴·캅카스 방어전 및 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 전역 참전
헬기에서 쿠바 중서부를 내려다본 스타첸코 소장은 깨달았다: 이 정도 야자수로는 90마일 북쪽 초강대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소련 전략로켓군 소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제51로켓사단을 지휘, 36기 R-12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고 10월 20일 전투 태세를 완료했다. 사후 보고서에서 정찰 부족과 현지 조건 무시 같은 참모본부의 '아나디리' 계획 결함을 솔직히 기술했다. 이후 페름 고등군사공병학교장과 우주추적센터장을 지냈다.
1941년 12월 4일, 독일 전차 부대가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하기 직전 — 대위 이바놉스키가 지휘하는 27전차대대가 돌파구를 막아 사령부를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령으로 시작해 26세에 대령으로 종전한 전차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전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종군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을 역임하며(역대 최장인 8년간) 바르샤바 조약기구 최정예 전력을 지휘해 냉전기 나토와의 군사적 대치 최전선을 책임졌다. 이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85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말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대조국전쟁과 전후 군사력 건설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회고록은 페트로프의 오경보 판단을 군 내부의 비밀에서 공개된 냉전사의 사건으로 바꾸었다.
유리 보틴체프는 소련 포병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지휘를 거쳐 방공과 미사일·우주방어 체계의 조직자로 성장했다. 그는 1967년 창설된 미사일·우주방어군의 초대 사령관으로 기술 체계와 군 지휘를 결합했다. 1983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의 오경보 보고를 처음 받은 직속 상관이었고, 훗날 회고록에서 사건을 공개해 페트로프의 판단을 세계에 알렸다. 그의 기록은 페트로프를 치하하면서도 군사 일지 문제로 질책한 체제의 모순을 보여 준다.
아나디리 작전 초기 계획 단계에서 참모총국은 단 5명의 장교만 기밀로 삼았다. 서기 한 명에게도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계획 문서를 손으로 직접 작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 냉전 시대를 관통한 군인이다. 1962년 작전명 '아나디리'의 초안을 작성한 참모 장교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물리적 토대를 설계했으며, 이후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76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조약기구 연합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퇴역 후에는 미·소 양측 장성이 함께 저술한 공동 회고록 『작전명 아나디리』(1994)를 통해 냉전 최대 위기의 내막을 공개하며 역사적 화해에 기여했다.
64대를 격추한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로, 330회 출격·120회 공중전을 치르며 단 한 번도 격추되지 않았다. 200~300미터까지 접근해 명중시키는 저격술이 트레이드마크였고, 1945년 2월에는 소련 조종사 최초로 Me-262 제트전투기를 격추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제324전투항공사단장으로 직접 출격이 금지되었으나, 휘하 조종사들이 216대를 격추하고 27대를 손실하는 탁월한 교환비를 기록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부사령관(1964~1971)을 거쳐 1985년 항공원수로 진급했으며, 1990년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군대 비방을 규탄하는 '영웅들의 호소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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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붉은군대 입대, 추후예프 군사항공학교 졸업 후 교관
1943–1945제240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중대장 → 제176근위전투항공연대 부연대장. 64기 격추, 세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1941년 6월 중순, 폴란드 접경 블라디미르볼린스크의 하숙집 주인이 갓 임관한 쿨리코프 중위에게 말했다. "중위님, 저쪽에서 그러는데 22일에 전쟁이 시작된답니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전차장교로 대조국전쟁의 첫날부터 베를린까지 싸웠다. 1971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에 올라 소련군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냉전 후기 동구권 군사 교리를 총괄했다. 1981년 폴란드 계엄령 위기 당시 소련 군사 개입을 반대해 역사의 분수령에 섰다. 소련 원수, 영웅 칭호와 레닌상을 받았으며, 퇴역 후 러시아 하원의원으로 베테랑 복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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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붉은 군대 입대, 그로즈니 보병학교에서 훈련
1941–1945전차부대 소대장·중대장에서 제143전차여단 참모장까지, 모스크바~베를린 전역 참전
로버트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볼샤코프가 전한 흐루쇼프의 '방어용 무기' 보증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의 직물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모스크바 출신의 GRU 장교. 1951년 TASS 특파원으로 첫 미국 파견을 시작해, 1959년부터는 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1961년 5월 프랭크 홀먼의 주선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만난 이후 약 1년 반 동안 50여 차례 독대하며 흐루쇼프-케네디 간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했고,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소련의 의도를 백악관에 전달하는 핵심 창구였다. 쿠바 위기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소련의 쿠바 군사 지원이 순수 방어용이라고 거듭 보증했으나, 미사일 발사대가 적발되며 신뢰가 붕괴되었고 1962년 12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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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3군사 통역 장교, 연대 통역 및 사단 정보과 보좌관으로 카렐리야·북서 전선에서 복무
1943–1950고등정보학교 및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수학
1951–1955TASS 특파원 신분으로 뉴욕·워싱턴 주재 (첫 미국 파견)
1955–1957주코프 국방장관 특별임무 장교
1957–1959GRU 중앙기관 선임 장교
1959–1962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 주재, 로버트 케네디와 약 50회 비밀 접촉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조야는 외쳤다: 「작별이에요, 동지들! 싸우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스탈린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스탈린이 올 것입니다!」
소련의 가장 상징적인 전쟁 영웅 중 한 명. 1941년 10월 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해 서부전선 사령부 직속 정찰·방화 공작부대 9903에 배속되었고, 독일군 후방에서 도로 매설과 통신선 절단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27일 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세 채에 방화한 뒤 이튿날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단 한마디도 불지 않았고, 11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프라우다』 기자 표트르 리도프의 취재로 전모가 알려지자 스탈린은 "인민의 영웅"이라 칭했고, 1942년 2월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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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콤소몰 가입
1941.10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 서부전선 정찰·방화 부대 9903 배속
1941.11.4–17볼로콜람스크 방면에서 도로 매설·통신선 절단 임무 수행
1941.11.27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3채 방화
1941.11.28–29체포·고문 후 교수형 — 가명 「타냐」만 대고 끝까지 신원을 밝히지 않음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미소도 잃지 않고 답했다.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
독소전에 해군보병 장교로 참전해 레닌그라드에서 부상한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을 입안하고 소련군 참모총장(1984~88)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고 군사고문을 맡아 INF 조약 등 냉전 종식 협상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군사개혁과 일방적 군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내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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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945해군특별학교 졸업, 해군보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부상. 전쟁 말 SU-76 자주포대대 부지휘관
1945–1967기갑부대 지휘관·참모. 스탈린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1952), 참모아카데미 졸업(1967), 전차사단장
1967–1974제8전차군 참모장, 제7전차군 사령관, 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74–1979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참모차장.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 입안
1979–1984참모총장 제1차장. 소련원수 진급(1983).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1984–1988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INF 조약 등 군축 협상 주도. 고르바초프 군사개혁에 반발해 사임
1988–1991대통령 군사고문. 1991년 8월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자살
독소전 최고의 Yak 에이스에서 방공군 총사령관으로, 루스트 사건 한 방에 퇴장한 항공 총원수
1944년 11월 니시 상공. 미군 P-38 편대의 오인 공격에 콜두노프 대위가 Yak-9로 미군 선도기 옆에 붙어 날개를 흔들며 적색 별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유일의 미소 직접 교전은 그렇게 15분 만에 끝났다.
독소전쟁에서 412회 출격, 96회 공중전을 치르며 46기를 격추한 Yak 전투기 최고의 에이스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4년 니시 상공에서 소련 부대를 오인 공격한 미군 P-38 편대와의 교전을 직접 종결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후 방공군으로 전환해 1978년 방공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84년 항공 총원수 계급을 받았다.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경비행기가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하자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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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1945866전투항공연대 조종사 → 비행대장 — 412회 출격, 46기 격추,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역사의 흐름 속에서 루셰프 육군대장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55년 창설된 이 직책은 36년 만에 그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아르한겔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부터 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참전, 시냐비노 공세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다. 전후 기갑부대로 전환해 동독 주둔 소련군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고, 1985년 고르바초프 체제 아래 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86년 국방부 제1차관을 거쳐 1989년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91년 조약 해체와 함께 이 직책의 마지막 보유자가 되었다. 소련 영웅(1983)과 육군대장(1981) 칭호를 받았고, CPSU 중앙위원(1981–1990)과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전차군 사령관 리발코가 부상당한 자이체프 대위의 병실을 찾았다. "자네, 아직 한참 더 싸워야 하네." 그리고 자신의 권한으로 붉은기 훈장을 수여했다. 소련영웅 칭호는 40년 뒤에야 따라왔다.
위대한 조국전쟁에 자원입대해 쿠르스크에서 프라하까지 싸운 전차부대 장교로, 전후 기갑군 사령관과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쳤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전선인 주동독 소련군(GSFG) 총사령관을 맡아 하급 장교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훈련 개혁을 단행했고, 1983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5년 남부전략방향 총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군 작전을 지휘했으며, 산악전에 부적합한 BMP-1을 대체할 BMP-2의 대량생산을 중앙에 직접 요구해 관철시켰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에 막강한 체력으로 '훈련장 장군'이라 불린 그는, 냉전 말기 소련 지상군의 작전 교리와 장비 현대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45년 6월, 근위대장이었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다.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싸운 소련 육군 원수급 장성.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사령관으로서 철군 협상을 진두지휘했고, 작전 마기스트랄의 성공적 지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가담했다. 쿠데타 실패 후 기소된 공모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했으며, 1994년 대법원에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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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붉은 군대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1942–1945스탈린그라드·드네프르·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참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2012년 8월 31일, 평생의 친구 세르게이 소콜로프 원수의 부고를 듣고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두 노장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Il-2 공격기 조종사로 222회 출격하여 적기 85대를 지상에서 격파한 위대한 조국전쟁 최고의 공격기 에이스로, 스물한 살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금성훈장을 두 번 받았다. 1969년부터 15년간 공군 제1부사령관으로 Su-25 공격기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고, 1984년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Su-25 실전 운용을 지휘하며 소련 공군을 사상 최대 규모로 이끌었다. 퇴역 후에도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으로 군 원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마흐무트 가레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참모 업무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작전·교육 체계를 다듬은 군사이론가이자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총참모부 과학·작전 부문에서 군사과학과 훈련을 담당하며 전쟁을 분석하는 실천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남아, 소련의 원조가 이어지는 동안 정부군 작전과 군사 자문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회고록과 연구서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전쟁 경험을 군사적·정치적 교훈으로 해석했다.
1943년 7월 17일, 첫 전투에서 기관총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 끝에 고지를 탈취한 뒤 7차례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자 가족에게는 전사 통지서가 발송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기관총 중대를 지휘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고도 카르파티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종전을 함께한 보병 장교로, 전후 두 개의 참모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제40군의 작전을 관할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소련 핵전력 최전성기인 1,400기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체제를 지휘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전략억지군 사령관으로서 CIS 통합 지휘 체계의 이행을 맡았다. 말년까지 한 번도 당과 군을 떠나지 않고 국가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에 대한 민간 통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지킨 군인이다.
1938년, 14세 소년 블라디미르 고보로프는 학교 친구와 함께 스페인 공화군에 입대하러 모스크바를 떠나 투압세 항구에서 스페인행 화물선에 몰래 올라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발각되어 송환된 두 소년은 ‘국제여단’에 닿지도 못했다.
소련 원수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아들로, 14세 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가출했다가 배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싸웠고, 전후 프룬제 사관학교와 참모대학을 금메달로 졸업하며 승진을 거듭해 1972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1977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6년 소련 민방위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대응을 지휘했으며, 민방위를 전시 중심 조직에서 평시 비상사태 대응 체제로 재편해 훗날 러시아 비상사태부의 토대를 닦았다.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를 묻자: "거부했더라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제2차 세계대전에 17세로 자원입대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 주둔 소련군을 지휘했다. 1987년 국방장관에 기용된 후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군축과 개혁에 저항하며 군부 불만의 상징이 되었고, 1990년 최후의 소비에트 연방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지휘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했으나 옐친의 백악관 진압을 거부해 쿠데타 실패를 결정지었다. 체포·수감 후 사면되었고, 리투아니아에서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유죄판결을 받았다.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소련 해군 중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잠수함 B-59에서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장교로, 두 명의 지휘관이 발사에 동의했으나 아르히포프만이 거부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1년 K-19 원자력 잠수함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서도 승무원으로 복무하며 피폭을 입었다. 이후 69여단장, 37사단장을 거쳐 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레닌이 1918년 펜자에 보낸 '쿨라크 100명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전문을 발견했을 때, 볼코고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내 마음속에서 무너진 마지막 성채였다."
소련군 심리전 총국장과 군사정치총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상장군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당 중앙위원회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하며 스탈린 평전 《승리와 비극》을 1978년부터 집필했다. 1983년 완성된 원고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아래 1989년 공개되어 소련 역사학에 충격을 주었다. 군사사연구소 소장으로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적 전기를 출간했고, 《지도자들》 3부작으로 러시아 연방 국가상을 사후 수상했다. 만년에는 옐친의 국방 고문과 국가두마 의원으로 공산당·KGB 문서의 대대적 비밀해제를 주도했으며, 평생의 볼셰비키 신앙을 '유토피아적 포로 상태'라고 술회하고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충각 작전을 지시하며 주저하던 흑해함대 사령관에게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지낸 원자력잠수함 장교. 1962년 11월급 공격원잠 K-21 함장으로서 소련 원자력잠수함 최초의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를 성공시켜 북극 작전교범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후 델타급 전략원잠 사단장, 북방함대 사령관, 해군 총참모장을 거쳐 1985년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랐다. 재임 중 소련 해군은 전성기를 맞아 상시 200척 이상의 함정을 세계 해양에 배치했으며,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대한 충각 작전 '나발'을 승인하고 직접 책임을 졌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해군의 유일한 사령관을 지냈고, 퇴역 후 잠수함장 연합을 창설해 2014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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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북방함대 잠수함 부대 배치
1956–1959S-347 함장 (위스키급), 북대서양 30일 자율항해 성공
1959–1962K-21 함장 (11월급 공격원잠), 소련 최초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 수행 및 빙하작전교범 작성
1969–1972제19잠수함사단장 (델타급 전략원잠), 북방함대
1973–1974제3잠수함전단 사령관, 북방함대
1977–1981북방함대 사령관, 전략원잠의 남대서양·인도양 상시 배치 주관
1981–1985소련 해군 총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1983년 해군원수 진급
1985–1992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92년 2월–8월 독립국가연합(CIS) 해군 사령관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나토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단 한 명의 시위자도 삽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소브차크 씨가 그루지야 파시스트들과 함께 지어낸 것입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독립 요구 집회를 해산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려 21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로디오노프를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은 야조프 국방장관과 공화국 당 지도부로 이어져 있었고 그는 그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공개 책임을 진 인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제40군 사령관을 거쳐 1996년 러시아 국방장관에 임명됐으나 예산과 군 개혁 방향을 놓고 옐친 진영과 충돌해 10개월 만에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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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70오룔 기갑학교 졸업, 주독 소련군 복무, 말리놉스키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1970–1980제24 '철의' 차량화소총사단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 역임. 참모아카데미 우등 졸업
1980–1986제28군단장(체코슬로바키아), 제5군 사령관(극동),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
1986–1989모스크바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집회 해산 지휘
1989–1997참모아카데미 원장(1989~96). 러시아 국방장관(1996~97), 군 예산을 정부 개혁안에 종속시키길 거부해 해임
소련 통신병대 총책임자이자 참모총장 차장으로 체르노빌 사고 수습에도 참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맞서 보리스 옐친 편에 선 최고위 현역 장성으로, 모스크바 백악관 방어본부를 조직하고 8월 20일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에 임명되었으며 2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10월 헌정위기 때는 자신이 방어했던 같은 건물을 공격하는 쪽에 섰으며, 1997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경보 사이렌이 울부짖었지만, 나는 '발사'라고 적힌 커다란 붉은 화면을 몇 초 동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련 방공군 중령. 1983년 9월 26일 세르푸호프-15 조기경보사령부에서 오코 위성이 미 본토에서 발사된 ICBM 5기를 탐지했다고 경보했으나, 1차 타격치고는 규모가 너무 작고 지상레이더가 이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근거로 오경보로 판단했다.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시스템 오류로 처리하여 소련의 핵 보복 발사를 막았으며, 훗날 '세계를 구한 사람'으로 불렸다. 사건 후 불명예도 표창도 받지 못했고 1984년 조기 퇴역했으며, 2017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 교외에서 은둔했다.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나는 영원히 확신한다」 KAL 007 격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입장.
우크라이나 광부의 아들로 자란 아나톨리 코르누코프는 1983년 9월 사할린 방공 지휘소에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명령을 내린 방공 장성이다. 상부가 책임을 거부하자 그는 오시포비치 소령에게 '목표 파괴'를 직접 지시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국제법과 소련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명령이라 주장했다. 격추 사건으로 상도 벌도 받지 않았고 승진을 계속해 1998년 러시아 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공군과 방공군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 결정은 민간인 269명의 죽음과 맞물렸고, 그는 훗날 '옳은 명령을 내렸다고 영원히 확신한다'고 말했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와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두비닌은 이미 말기 암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군인. 1986~87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헬리콥터 강습과 컴퓨터 지휘체계를 도입하는 전술 개혁으로 전년 대비 전사자를 절반으로 줄였고, 실전손실의 은폐 관행에 처음으로 맞섰다. 1989~92년 북부군집단 사령관으로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조직적 철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92년 6월 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옐친 대통령의 성급한 핵전력 개혁 구상을 저지하고 토폴-M, 보레이급 잠수함, 이스칸데르 등 장기무기 프로그램을 승인받아내 탈소비에트 러시아 방위의 기술적 토대를 남겼다. 임종 직전 병상에서 육군대장 계급장을 받았으며, 사후 러시아연방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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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64극동전차학교(블라고베셴스크) 졸업, 소련군 입대
1964–1978전차소대장·중대장·대대장, 연대 참모장 겸 부연대장, 전차연대장. 비스트렐 과정(1973), 기갑아카데미(1978) 졸업
1979–1984제8근위전차사단장(벨라루스). 참모아카데미 졸업(1984) 후 제32군 제1부사령관(중앙아시아)
1984–1986제40군(아프가니스탄) 제1부사령관
1986–1987제40군 사령관. 전술 개혁으로 전사자 절반 감소. 소련군 부분철수 개시
1987–1989제7전차군 사령관(벨라루스), 키예프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89–1992북부군집단(폴란드) 사령관. 소련군 철수 완수
1992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육군대장 진급(10.5), 11.22 병사
소련 방공군의 수호이 Su-15 요격 조종사로, 1983년 9월 1일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편 보잉 747을 격추한 인물이다. 경고 사격은 했지만 기체에 예광탄이 아닌 철갑탄이 장전되어 기장이 이를 보지 못했고, 두 줄의 창문을 보고 민간기임을 알았으면서도 목표를 확인하지 못한 채 미사일을 발사해 탑승자 269명 전원의 죽음을 초래했다. 1991년 이즈베스티아 인터뷰에서 예광탄을 쐈다는 당국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인정했고, 이후 비행에서 물러나 마이코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1년 8월 19일, 아찰로프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쿠데타의 일환으로 오스탄키노 TV 센터를 장악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직접 지휘했다.
타타르족 출신의 소련 군사 지휘관으로, 34세에 소장으로 진급한 소련 최연소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전차부대와 공수부대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공수군 사령관(1989~1990)을 거쳐 소련 국방차관(1990~1991)까지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로의 병력 진입을 조율하고 오스탄키노 TV 센터 장악을 위한 공수부대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1993년 헌정 위기에서 최고회의 측에 서서 루츠코이의 대안정부에서 국방장관직을 수락했으며, 이로 인해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사면되었다.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1991년 8월 20일 밤, 그라초프의 동의를 얻은 레베디는 백악관 수비대를 찾아가 '새벽 2시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은밀히 알렸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노보체르카스크 시위대 학살을 목격한 소련 공수군 장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1991년 2월 공수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일 파벨 그라초프의 명령으로 툴라 공수대대를 이끌고 백악관을 포위했으나, 다음 날 옐친 진영으로 넘어가 수비대에 새벽 공격 계획을 은밀히 전달하며 쿠데타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역 후 1996년 대선에서 3위에 오르고 안전보장회의 서기로서 제1차 체첸 전쟁 종식을 협상했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로 재직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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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