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라파일로비치 고츠

Абрам Рафаилович Гоц

사회혁명당 전투조직 출신으로 1917년 제1차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낸 지도자

1907년 체포되어 8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시베리아 치머발트파와 함께 반전 국제주의 활동을 했다.

모스크바의 유대계 차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형 미하일 고츠를 따라 사회혁명당에 들어갔고, 1906년 당의 전투조직에 가담했다. 1907년 체포되어 8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1915년 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로 유배되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1922년 SR 재판에서 주피고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24년 감형되고 1925년 울리야놉스크로 유배되었다. 1937년 다시 체포되어 1939년 25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크라스노야르스크 라게리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22년 에스에르 재판: 사형에서 감형으로

1922년 에스에르 재판: 사형에서 감형으로

1920년 5월 19일 고츠는 모스크바에서 체포되어 부티르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1922년 2월 24일 국가정치국 간부회의는 그를 반소비에트 활동 혐의로 기소할 에스에르 명단에 올렸고, 같은 해 7~8월의 에스에르 재판에서 그는 제1군 주피고인이 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 재판을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쇼트라이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고 적으며, 서방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대의적 사건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형 테오도르 리프크네히트가 변호인으로 나섰고,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레닌에게 피고인들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직접 호소했으며, 카를 카우츠키는 팸플릿을 썼고 미국의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석방을 요구했다. 볼셰비키는 사형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와 법정 소란으로 맞섰다.

고츠와 열한 명의 동료 피고인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이 정지되었고, 공개 자료는 이들을 '인질'로 붙들어 두었다고 본다. 사형 판결은 1922년 8월 8일 집행이 정지되었고 1924년 1월 11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의 결정으로 5년 징역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그가 1924년에 풀려났다는 뜻이 아니라 형이 바뀌었다는 뜻이며, 얼마 뒤인 1925년 5월에는 3년간 울리야놉스크 유배가 뒤따랐다.

석방과 사면은 끝내 오지 않았다. 정황 증언은 1937년 체포와 1939년 6월 20일의 25년형, 1940년 라게리에서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기록상 사법적 명예 회복은 확인되지 않는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사망지를 크라스노야르스크 변경주 니즈니 잉가시의 크라슬라그로 적으면서 그 정보 자체가 검증을 요한다고 밝히고, 일부 자료는 사망지를 단순히 '수감 중'으로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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