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호프만

Adolph Hoffmann

「십계명 호프만」, 치머발트 참가자이자 혁명기 프로이센 교육부 장관

독일의 사회주의 정치가. 베를린의 조각공·도금공 출신으로 1876년 사회주의노동자당에 들어갔고, 교회를 공격한 소책자 『십계명과 유산계급』으로 「십계명 호프만」이라 불렸다. 1915년 레데부어와 함께 치머발트 회의에 참가했고,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을 함께 세웠다. 1918~1919년 프로이센 교육부 장관으로 교회의 학교 감독을 폐지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좌파를 공산당으로 이끌었으나 레비를 따라 나와 1922년 사회민주당에 돌아갔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치머발트에서 프로이센 교육부로

호프만은 혼외자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잃고 조부모와 보육원, 양부모 손에서 자랐다. 3년 남짓 공립학교를 다닌 뒤 조각공·도금공 교육을 받았고, 베를린 자유종교 공동체를 거쳐 1876년 사회주의노동자당에 들어갔다. 1891년 펴낸 『십계명과 유산계급』으로 「십계명 호프만」이라 불린 그는 부유층의 기독교 관행을 공격하고 교회와 국가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다. 1904년 제국의회에, 1908년에는 3계급 선거제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프로이센 하원에 들어간 여덟 명의 사회민주당 의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날카롭고 재치 있는 연설로 이름났다.

그는 사회민주당 좌파에 속했고, 1915년 9월 치머발트 회의에 레데부어와 함께 독일 참가자를 대표해 프랑스 참가자들과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을 함께 세웠고, 11월 혁명 때 사회민주당의 콘라트 해니슈와 함께 프로이센 학술·예술·국민교육부 장관이 되어 교회의 학교 감독을 폐지했다. 그의 반교회 발언은 가톨릭 유권자들 사이에 새 문화투쟁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1919년 중앙당의 선거 동원에 한몫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둘러싼 갈등으로 1919년 1월 4일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20년 10월 그는 에른스트 다이밍과 함께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의 공동 의장이 되어 이들을 공산당으로 이끌었고, 12월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두 달 뒤 파울 레비에 동조해 물러났고, 레비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따라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사회민주당으로 돌아갔다. 그는 국제노동자구호회에서 일했고, 1926년 제후 재산 몰수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