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 문제의 옛 볼셰비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티플리스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2 정치·당 지도 · 소련
경력 연표
- 1922년(10월설·11월설)오르조니키제와 충돌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음
- 1922년 12월레닌의 민족문제 비판과 연결된 인물
- 1904당 입당, 구볼셰비키협회 회원
- 192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
- 1936–1937체포(1936)되어 사형 선고 후 처형(1937)
- 1957복권됨
관련 역사 사건
그루지야 문제와 억압, 1922–1957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한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그루지야인(грузин), 거주지 티빌리시(당시 명칭 티플리스)로 적으며,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다고 기록한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와 충돌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 1937년 6월 24일 사형 선고, 이튿날 처형, 1957년 4월 2일 복권으로 이어진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루지야 문제(1922)
그루지야 문제는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사회·정치적 변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둘러싼 소비에트 지도부 내부의 정치적 충돌이었다. 한쪽에는 마하라제와 므디바니가 이끄는 현지 그루지야 볼셰비키 지도부가, 다른 쪽에는 그들의 사실상 상급자였던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가 있었다. 쟁점의 핵심은 모스크바가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을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통합하려 한 결정이었고, 그루지야 지도부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루지야 측은 카프카스국과 오르조니키제 개인을 대러시아 쇼비니즘과, 현지 간부와의 사전 협의 없는 위로부터의 통합을 강요한 주체로 비판했다. 논쟁은 1922년 말에 정점에 이르렀고 스탈린·오르조니키제 노선의 승리로 끝났다.
논쟁의 정점에서 오르조니키제는 물리적 폭력에 나섰다. 그가 그루지야 공산주의자들을 사회민족주의자와 쇼비니즘적 부패라 부르며 공격했고, 이에 맞서 코바히제가 그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르자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사건의 시점은 출처마다 갈린다. 메가북과 딜레탕트는 1922년 10월 20일로 적고, 로고빈의 기록도 이 발언과 구타를 10월 중앙위 전원회의 직후, 10월 19일 언급 바로 앞에 놓는다. 다만 로고빈은 피격자를 밝히지 않고 ‘오르조니키제의 반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만 적는다. 반면 영문 서술은 충돌이 1922년 11월에 정점에 이르렀다며 므디바니 그룹 구성원 한 사람이 구타당했다고만 적고 그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사하로프는 정확한 시점이 문서고에서 확정되지 않고 대략 1922년 11월 셋째 주로만 추정된다고 밝힌다. 어느 날짜도 확정된 것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레닌은 10월 병중이라 개입하지 못했으나 12월에 이 충돌에 개입해 스탈린을 대러시아 쇼비니즘으로 비판하고 오르조니키제를 당에서 제명할 것을 제안했으며, 병세로 그의 제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중앙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서기 미하일 오쿠자바가 해임되었고, 이에 반발해 그루지야 중앙위 전체가 오르조니키제가 만든 ‘데르지모르다 체제’ 아래에서는 일할 수 없다며 사퇴를 결정했다. 로고빈은 솔츠가 포티예바에게 코바히제의 중앙통제위원회 진정이 사라졌다고 알렸다고 기록한다. 같은 자리에 있던 리코프의 ‘객관적 진술’은 오르조니키제가 코바히제의 책망을 중대한 인신 공격으로 해석한 것이 옳았다고 강조했다. 사하로프는 오르조니키제가 ‘옛(혁명 전 경력의) 당원 아카키 카바히제’에게 한 뺨을 사건과 동시대의 소련 결성 투쟁에 직결시켜 설명하며, 이 폭력을 정치적 보복으로 규정하는 전통적 서술은 사건을 지나치게 정치화한다고 본다. 이 반대 독해는 전통적 독해를 대체하지 않고 나란히 제시되어야 한다. 르트블라제는 이 뺨을 파벌 투쟁과 무관한 사적 문제로 보며 코바히제가 통제위원회에 문서 진정을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그루지야 옛 볼셰비키들의 경력에 부담이 되었다. 므디바니와 그 동료들은 말직으로 밀려났으나 1920년대 후반까지 적극적으로 공격받지는 않았고, 대부분은 1930년대 대숙청 시기에 처형되었다.
억압과 복권
이 절의 기록은 코바히제라는 이름의 인물이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국가보안 격리 시설에 수감되었다고 적는다. 다만 이 기록과 1922년 사건의 인물을 잇는 문서적 연쇄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아래 서술은 두 인물을 동일시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으며 그 식별 자체는 출처에 근거한 추정임을 밝혀 둔다. 그는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우익 테러·파괴·방해 조직의 중심부에 속했다는 혐의(형법 58-7, 58-8, 58-11조)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 선고는 1937년 6월 25일 집행되었다. 이 기록은 출생 연도 1889년, 민족 그루지야인(грузин), 출생지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농민 출신,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티빌리시 레닌가 54호 거주를 적으며, 카드의 출생·출신·시민권 자료의 문서적 근거가 된다. 그는 1904년부터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당원이었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으나 체포와 함께 당에서 제명되었으며, 체포 당시 직업은 이미 전직이 된 상태로 그루지야 인민지방산업위원회 소속 ‘므케라비-가사헤비’ 제화조합의 전 관리인이었다. 1957년 4월 2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결정(제4н-02540호)으로 사건 5/56이 범죄 구성의 부재로 종결되어 복권되었다.